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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사나이 - 그리폰 북스 006 ㅣ 그리폰 북스 6
알프레드 베스터 지음, 강수백 옮김 / 시공사 / 199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기 2301년, 지구.
벤 라이히는 '얼굴 없는 사나이'가 나타나 은행을 터는 꿈을 꾼다. 매번 악몽에 등장하는 그 사나이의 비밀을 알고 싶어 벤 라이히는 M.D.(의학박사 학위)를 가진 2급 Esper(Extra Sensory Perception)를 찾아간다.
의사는 전의식(前意識) 단계를 살펴보기 위해 연상 단어를 읊어보라고 하는데, 벤 라이히는 dort, air 등의 단어와 '천상의 나라로 여러분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따위의 모토를 무심결에 내뱉는다. 의사는 벤 라이히가 97번의 악몽을 꾸는 동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와 단어를 종합할 때, 벤 라이히가 운영하는 모나크사(社)의 경쟁사 드 코트니(D' courtney)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진단을 내린다. 벤 라이히는 의사의 진단이 맞다고 생각했다. 단지 사내의 정체가 궁금했을 뿐이라면 자신의 내면을 한 층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1급 Esper를 고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벤 라이히는 태양계 경제 전체를 독점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모나크사와 드 코트니사 합병을 제안한다. 드 코트니사는 합병제안에 대해 수락(WWHG) 한다는 암호를 회신하나, 라이히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 때문에 거부의사로 오인한다. 이에 벤 라이히는 드 코트니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문제는 과거 79년 간 단 한 건의 모살(謨殺)도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었다. 에스퍼들의 존재가 살인 이전에 그 의도를 미리 감지해 냈고, 설령 살인에 성공했다 해도 에스퍼들이 범인을 찾아냈다. 에스퍼의 사전 감시, 사후 조사, <파괴> 형벌. 이 세 가지 단계에 의해 살인은 이제 없어진 범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에 벤 라이히는 에스퍼 의학박사 1급인 어거스터스 테이트를 찾아간다. 그는 에스퍼 길드에 대항해 <에스퍼 애국 연맹>을 이끄는 자였고, 그 조직의 유지를 위해 쉽게 유혹당할 수 있는 처지였다.
1급 에스퍼가 살인 계획을 돕고, 다른 에스퍼로부터 전의식 읽히는 것을 방어하는 정신 차폐법을 시행해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드 코트니가 보몬트 저택의 파티에 참석할 것이라는 여행 정보를 입수한 라이히는 골동품 상점에 가서 <파티를 즐깁시다>라는 책을 한 권 산다. 그 책에는 고대인들이 즐길 여러가지 게임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라이히는 어둠 속에서 하는 <정어리>라는 이름의 술래 잡기 게임 부분만 제외하고 책을 낡아 보이도록 꾸몄다. 그런 다음 책을 잘 포장해서 마리아 보몬트의 저택으로 보냈다. 그녀는 보몬트 저택으로 라이히를 초대한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다음으로 극장가에 있는 '멜로디 레인'으로 가서 '심리 음악 주식회사'를 방문했다. 그리고 더피라는 이름의 사장을 만나 '한 번 들으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노래'를 주문한다. 더피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계속되는 노래(징글) 하나를 제시한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았다.
Eight, sir, seven, sir.
Six, sir, five sir,
Four, sir, three, sir,
Two, sir, one!
Tenser, said the Tensor.
Tenser, said the Tensor.
Tension, apprehension,
And dissension have begun.
그 노래는 의미 없어 보이는 단어들의 나열과 반복적인 선율로 인해 한 번 들으면 머리에 들러붙어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라이히는 에스퍼들이 자신의 생각을 읽으려 할 때 이 노래를 떠올리면 훌륭한 자기방어 수단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라이히는 살인 도구를 구하기 위해 추방된 에스퍼 제리 처치를 찾아 전당포로 갔다. 제리 처치로부터 20세기제의 나이프 피스톨을 구한 라이히는 마리아 보몬트의 저택으로 간다. 경호원들은 망막에 작용하는 로돕신 이온화제를 사용해 무력화 시킨 후, 나이프 피스톨에 젤라틴 캡슐을 장착한 뒤 물을 발사하면 증거는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
문제는 보몬트의 저택에 갤렌 처빌이라는 젊은 2급 에스퍼가 파티에 잠입하는 내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테이트는 자신이 3급 에스퍼 다수와 2급 에스퍼까지 모두 차폐해 주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살인을 멈춰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라이히는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려 마음을 숨기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불을 끄고 사람을 찾아내는 <정어리> 게임이 시작되자 즉시 드 코트니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간다.
드 코트니는 무척 쇠약한 상태였다. 그는 라이히의 힐난에 대해 라이히가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 자신은 합병에 찬성했다는 것 등을 다소 무기력하게 항변했다. 그는 자신이 벤 라이히의 적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했지만 라이히는 그의 입 속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그 과정에서 드 코트니의 딸이 뛰어 들어와 약간의 드잡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드 코트니는 사망했다. 현장에서 도망친 드 코트니의 딸 바바라가
새로운 변수가 되었지만 어쨌든 라이히의 1차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살인 사건의 해결을 위해 1급 에스퍼 링컨 파웰 총경이 투입된다. 링컨 파웰은 여러가지 사정을 종합해 볼 때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라이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히의 재력과 그를 방어하는 변호사 쿼터 메인, 1급 에스퍼 테이트, 그리고 물증과 증인이 없다는 점, 그의 뇌 속을 떠다니는 정체불명의 반복적인 노래 때문에 애를 먹었다. 동기, 방법, 기회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모자익 멀티플렉스 기소 담당 컴퓨터가 불기소할 것이 뻔했다.
파웰은 <무능 & 민완> 팀을 구성하기로 했다. 100명의 무능한 경찰이 엉뚱한 조사를 해서 라이히의 경계를 무너뜨린 뒤 민완 형사들을 투입해 그를 무너뜨린다는 계획이었다. 아울러 바바라를 찾는 경찰에게 5계급 특진을 시켜주겠다는 공고도 내걸었다. 한편, 라이히 역시 바바라를 찾기 위해 키노 퀴자드에게 소브린 금화 10만을 뿌렸다.
라이히는 에스퍼들을 동원해 경찰들의 동태를 살폈는데 '무능팀'의 헛발질이 고스란히 라이히에게 감지되었다. 라이히는 차츰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무능팀'은 엉뚱하게도 마리아 보몬트가 범인은 아닌지 의심했고, 라이히의 알리바이 등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이상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편, 라이히도 부지런히 자신을 방어했는데 경비원들의 시각과 기억을 상실시킨 로돕신 이온화제를 제공한 생리학자 윌슨 조던을 빼돌리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테이트의 조언을 받아 모나크에 잠입한 경찰 끄나풀을 솎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파웰은 실점을 만회하기 위해 바바라를 먼저 확보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대신 테이트를 대동하고 제리 처치의 전당포에 찾아가 살인에 사용된 흉기를 사간 사람이 테이트가 아니냐는 방식으로 압박해 테이트로부터 제한적인 자백을 받는다. 하지만 그 때 키노 퀴자드가 보낸 킬러에 의한 하모닉건의 공격을 받게되고 전당포는 완파된다.
또 다시 실점한 파웰이었지만 라이히의 암호 통신 책임자 하솝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모나크와 드 코트니 사이에 오간 통신문 내용을 통해 동기를 입증할 수 있을 터였다. 아울러 시체에서 발견한 젤라틴 조각에서 추리를 재구성해 라이히가 발사한 것이 탄환이 아니라 물이었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서 살해 방법도 알아낸다.
파웰은 드디어 모즈 옹(모자익 멀티플렉스 기소 담당 컴퓨터)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솝 심문 과정에서 드 코트니가 WWHG(합병에 승낙)로 회신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파웰의 가정은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드 코트니가 합병에 승낙했다면 라이히는 경제적인 이유로 그를 죽일 이유, 즉 살해 동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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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베스터는 1913년 뉴욕 맨해튼 태생으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심리학과 화학을, 컬럼비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1939년 SF 전문지에 <부서진 공리 The Broken Axiom>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한다.
본작 <파괴된 사나이 The Demolished Man>은 1952년 <갤럭시 Galaxy>지에 게제된 뒤 1953년에 출간, 제 1회 휴고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구성,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다루는 기법, 스타일리시한 등장인물 등 SF 소설을 신화의 영역까지 끌어올린 작가의 솜씨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파웰은 라이히를 정상적인 방법, 즉 동기, 방법, 기회를 입증하여 기소하는 방법으로는 그를 단죄할 수 없게 되자 에스퍼의 평의회를 설득해 집중된 에너지의 집단 카텍시스(프로이드의 용어로 어떤 표상에 충당된 심적 에너지가 다른 표상으로 이동하는 현상)를 실시한다.
이 과정을 통해 라이히의 악몽에 반복적으로 등장한 '얼굴없는 자'가 라이히 자신이자 드 코트니임이 밝혀진다. 드 코트니는 라이히의 생부였고 바바라는 이복동생이었다. 라이히는 <파괴 Demolition> 형벌을 받게 된다.
칼 세이건, 윌리엄 깁슨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진 알프레드 베스터는 올드 웨이브(40년대)와 뉴 웨이브(60년대)를 잇는 문학적 가교 역할을 한 작가이며, 80년대 사이버펑크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371p)고 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574197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