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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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 >

아르헨티나로 출장을 떠난 화자에게 불륜남성의 아내가 전화를 걸어오면서 시작된다. 전화기 반대편에서 여자는 "오늘 아침에, 미야모토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라고 말한다. 바쁜 도시 생활 탓에 불륜은 '풍랑이 일지 않'고 진행 되었다. '나 또는 부인이 임신'을 하지도 않았고, '부인의 부모가 죽거나 내가 다니는 회사가 망하거나, 그런 외적인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서 평온하게 흘러갔다. 멍한 상태에서 하루를 보낸 화자에게 죽었다던 남자가 전화를 걸어온다. 죽었다는 말은 아내의 악의에 찬 장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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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날 >

1998년 4월 27일에 '내'가 죽을 거라고 외할머니는 예언했다. 난산 끝에 '나'를 낳은 순간 손녀의 죽음을 예언한 외할머니 때문에 엄마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외할머니는 자신이 죽을 날을 맞추지 못했고, 엄마는 그제서야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이제 예언의 그 날, '나'는 아르헨티나로 여행 와서 남편과 만나기 전에 일으켰던 불륜 사건과, 남편을 만난 일을 회상한다. 그리고 오늘 이 밤, 어렸을 적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일로 가슴이 멜 수 있는, 이런 순간이 인생에 찾아왔다는 점을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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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그만 어둠 >

엄마는 삼 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빠와 함께 '나'는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왔다. 아빠의 여행 목적은 클래식 기타를 사는 것이다. '나'는 아빠와 따로 떨어져 에비타의 무덤을 보러 간다. 무덤들을 구경하자니 과거에 엄마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엄마는 상자에 들어가는 것을 무서워했다. 어느 날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니 할머니가 집 안에 종이 상자로 조그만 집을 만들어 놓고 '너를 위해서 이 집을 만들었으니 여기서 살라'고 울면서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주일 동안 엄마는 그 집에서 살았고, 학교에 통 나오지 않는 엄마를 찾아온 선생님 덕분에 거기서 사는 것을 그만둘 수 있었다. 할머니는 정신 병원으로 옮겨진 뒤 자살했다.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나뭇잎 아래서, 나는 한없이 '밖에서 보면 태평하고 평화로웠던 우리 가족에게 조그맣고 깊은 어둠이 있었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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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타너스 >

멘도사란 도시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나'와 남편이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 생각한다. 춥고, 독특한 바람이 불고, 오가는 사람들의 생기 없는 모습에 뼈를 저미는 듯한 허망함이 있어 천국이 이런 분위기일까 생각하게 되는 도시다.

남편에게서는 할아버지 집의 장롱 속 그리운 냄새가 났다. 결혼을 반대하던 남편의 누나는 '내'가 변호사를 통해 상속할 재산의 범위를 한정하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허락해주었다. 후에 남편이 아파 둘이 축제를 보러 갔을 때 둘 사이가 조금 가까워졌다.

남편과 함께 떠돌이 개에게 먹을 것을 주고, 우유에 초콜릿 덩어리를 녹여 마시는 서브마리노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노라니, 이런 시간이 영원해 계속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나'와 남편이 죽고, 지금의 이 바람이 플라타너스 잎을 떨어뜨릴 것이란 생각을 하자 죽는 것이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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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치 하니 >

'나'는 이 도시에 친구를 찾아 왔다. 친구는 탱고를 배우다 선생인 아르헨티나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오늘은 친구에게 다른 일정이 있어 '나'는 대통령 관저 앞 5월 광장에 갔다. 2시가 가까와지자 머리에 하얀 스카프를 두른 엄마들 아니 할머니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군사 정권으로 바뀌면서 좌익 운동에 조금이라도 가담한 학생이나 페론 파 사람들이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내면은 그 기간에 무언가 아주 소중한 감각 하나가 영원히 상실되었을 것이다. 죽어간 아이들이 삶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내면에서 무언가가 사라졌으리라. 슬픔이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단지 엷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어 그것으로 위로 삼을 뿐이다. '나'는 저들의 슬픔에 비하면 나의 슬픔,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로 인한 슬픔, 은 얼마나 치졸한 것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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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시계 >

브라질에 사는 친구 요시미가 유산을 했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소리가 너무 가깝게 들려,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갈까?' 라고 물었다.

얼마 전 일 때문에 브라질에 갔을 때 막 아이를 가진 친구와 기독교 유적을 보러 갔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무슨 설계도 같아 보였다. 그리고 중학교 다닐 때 공책에 살고 싶은 집의 설계도를 그리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유적지에서 '나'와 요시미는 정말 행복했다. 별 의미도 없는 얘기를 나누머 깔깔거리고 웃었고, 하늘은 영원이 해가 지지 않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파랬다.

그때 그녀의 배 속에 있었던 또 하나의 생명, 함께 그때를 나누었던 아이가 혼자 어두운 길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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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밖 >

그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나이가 '나'보다 다섯 살 위, 얼마 전 유럽에서 아주 돌아왔다는 것, 스페인을 취급하는 여행사를 그럭저럭 운영한다는 것 따위... 그런데 '나'는 지금 그와 여행하고 있다.

그와 얘기하다 남미의 문학을 생각했다. 분위기는 당돌하고, 야만적인 생명력이 스며 있으며, 아름다움과 생명에 관해서는 살인적인 힘마저 인정하고 있는 듯한 문학. 광기에 가까운 정신의 고양과 일상에 굳건하게 발 디딘 생활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관. 여행을 와보니 그런 느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 겪었던 기묘한 일이 생각났다. 일곱 살 때 할머니가 위독해 혼자 집에서 자게 된 날이었다. '나'는 마치 냉장고 안에서 차가워지는 과일이 된 기분이었다. 잠이 들었다 깨 보니 곰 인형이 '내'게 등을 돌리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서워하면 더욱 무서워질 것 같아, 창가로 가서 곰과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그날 밤중에 돌아가셨다. 살다가 느끼는 쓸쓸함이란 그 곰 인형의 뒷모습 같은 것이어서 남이 보면 가슴이 메는 듯해도, 곰 인형은 설레는 기분으로 창밖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았을 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과수 폭포를 바라보다 그가 '돌아가면 같이 살까' 하고 물었다. '나'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상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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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1998년 아르헨티나를 여행하고 돌아와 문예지 <세세쿄(星星崍)>에 발표한 일곱 편을 엮은 작품집이다. 작품에 삽입된 사진은 야마구치 마사히로가 찍었고, 삽화는 하라 마스미가 그렸다. 과거 협업했던 나라 요시토모도 여행에 함께 갔던 것 같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불륜. 그래서 제목도 <불륜과 남미>다. 제 10회 두마고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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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하치 하니>. 작품의 소재가 된 것은 '5월 광장 어머니회'다. 1976년,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후에 '더러운 전쟁' 기간으로 불리우는 1983년 까지 3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사라졌다. 이 기간 실종된 사람들의 어머니들이 머리에 흰색 스카프를 두르고 광장을 돌며 반인륜적인 범죄에 항의했다. 마음에 드는 대목은 마지막에 티셔츠를 파는 한 어머니가 '요즘은 작은 사이즈의 티셔츠가 유행하니까 s사이즈가 좋지 않겠냐'고 말하는 대목이다. 슬픈 마음과 생활력이라는, 얼핏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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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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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멀쩡한 집을 놔두고 트렁크에서 자는 사람을 트렁커라고 한다. 온두는 낮에는 유모차를 팔고(꽤 잘판다), 밤에는 공터에 차를 주차한 뒤 트렁크에서 잠을 잔다.

어느 날, 온두가 정해 놓고 주차하는 공터에 다른 트렁커가 나타났다. 온두는 즉시 '뭐죠?' 라는 말을 필두로 남자를 공박했지만, 남자는 뜻밖에도 그곳이 '자기 땅'이라고 응수했다. 그렇게 두 트렁커의 기묘한 '밤 만남'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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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이름' 이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었다는 그 이름은 사실 '이룸' 이었지만, 실수가 있었다. 그는 온두에게 '치킨차차차' 게임을 하자고 했다. 여러가지 색깔이 뒤섞인 카드를 뒤집어 짝을 맞추고 치킨을 한 칸씩 전진시키는 일종의 기억력 게임이었다. 패자의 벌칙은 색깔에 따라 학창시절 기억이나, 첫사랑 따위를 고백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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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온두는 옆집 만화가의 작품에 '괴팍한 물귀신'으로 등장하고, 유모차 매장에서 쫓겨나는 등 소소한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게임의 진행에 따라 드러나는 각자의 과거는 현재 사건들이 무색할 수준의 것들이었다.

트렁크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둘의 만남이 훨씬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온두와 름은 차츰 서로에게 기울이진다. 름이 아버지와 '화해 아닌 이해'를 하는 선에서 작별을 마치고 온 뒤, 둘은 트렁크가 아닌 거실에서 잠을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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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으로 공동 수상작은 오수완의 <책사냥꾼을 위한 책 안내서>이다. 제1회 수상작이 바로 임영태 작가의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이라 큰 기대를 안고 산 책인데 같은 층위에서 비교하기가 곤란한 작품이다. 장르와 '기성/신인'을 불문하고 공모하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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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온두는 가족 동반자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트렁크에서 생존한 채 발견된 뒤 비인가 보육시설 등을 전전하다 트렁커가 된 경우이다. 한편, 름은 한평생을 '남자다움'에 경도되어 살아간 아버지에게 학대받다 급기야 손가락까지 잘린 뒤 트렁크에서 피난처를 찾은 경우다. 둘은 한 트렁크를 공유한 적이 있었고, 그 첫만남 때 름은 온두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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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다소 거칠고, 도식적이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아픔과 치유 과정을 담아내 보고자 한 작가의 의도는 순정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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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 출구
표명희 지음 / 창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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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소호족 N >

영화 번역일을 하는 여자는 10년 모은 전세금을 사기 당한 뒤 옥탑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불법 증축한 옥탑방은 옆집 화장실 환풍기가 내 집 부엌으로 연결된 기묘한 곳이다. 처음 이사 왔을 땐 옆집에 멀끔한 외양의, 나중에 알고보니 번화가 삐끼를 하던, 남자가 살았었다. 지금은 해소병 걸린 여인과 무능력한 가장, 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딸 가족이 살고 있다.

여자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이웃은 쌀집 여자와 그녀의 절름발이 아들 현철이다. 쌀집 여자는 소포를 맡아줬고, 현철은 번역 결과물을 퀵배송 해주고 용돈을 받아썼다.

여자는 송실장에게 번역일을 더 하겠다고 전화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일거리를 배달하는 현철에게도 도움이 될꺼라 생각하지만, 그런 감정이 사실은 지배욕의 외피는 아닌지 의심한다. 그러면서도 여자는 콘크리트 벽이 엄청 두꺼워 옆집과 이웃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그런 집으로 옮기기 위해선 돈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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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이 >

진이의 동생 온이는 다운증후군이다. 진이는 엄마가 온이만 챙긴다고 불만이 많다. 어느 날 마을버스에서 온이가 몸을 버팅기고, 옆에 앉은 여자애의 치마를 잡아당기면서 괴성을 질러대던 날, 진이는 온이의 머리를 정신없이 내려쳤다. 온이가 바닥으로 나뒹굴었고 엄마는 온이를 왈칵 껴안은 뒤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뒤늦게 진이가 겁이 나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따라 내렸지만, 엄마는 진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이는 폐렴에 걸려 일주일을 앓으면서 온이만 없으면 자기도 세상에서 둘 도 없는 착한 아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들이 몇 차례 반복된 뒤 가족은 캐나다로 가기로 했지만 캐나다에서 장애인 온이의 입국을 거절해 이마저 무산된다. 결국 온이는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그 뒤부터 엄마는 '반듯한 세상'이 싫다며 때때로 술을 마셨다. 진이는 이상하게 학교에서 글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게 되면 온이 생각이 났다. 상장 걸 곳이 없어 온이의 사진까지 떼어낸 진이는 할머니가 그 사실을 알았을지 걱정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행복한 온이'가 보육원에 사는 것과, 곁에 사는 것 중 어느 편이 좋을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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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번 출구 >

엄마는 '내'가 의대 진학하기를 꿈꿨지만 '나'는 재수학원을 중도 작파하고 디자인 전문대학에 들어갔다. 그럴싸한 철학을 풀어 놓던 멀끔한 학원강사 영향이 컸다. 어쨌거나 디자인 회사에서 '나'는 능력을 인정 받아 승승장구한다. 명문대 졸업자들과 함께 승진했고, 나중엔 그들을 앞서기까지 한다. 박실장이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는 '나'와 함께 공모전에 출품해 수상의 영예를 나눠 가졌고, 개인적인 관계로도 발전한다.

얼마 후 박실장이 '나'에게 집적댄 이유가 공모전 실적 때문이라는 걸 바비인형 닮은 거래처 여직원 덕에 알게된다. '나'는 박실장 머리에 외장하드를 내려친 뒤 퇴사한다. 과거 학원강사가 친한 친구와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는 사건도 이런 식이었다. 그 날, 화장실에서 본 문구. '당신의 삶을 바꾸어드립니다. 이젠 삶도 디자인 시대. 당신의 삶을 디자인하세요. 최첨단 의료장비... 3호선 압구정역 3번 출구'

'나'는 10년 모은 퇴직금을 성형수술에 퇴직금을 털어 넣는다. 하지만 좌우 대칭이 맞지 않았다. 나는 성형외과에 AS를 요청했지만 의사와 간호사는 한 패가 되어 아무 문제 없다며 정신과를 소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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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경 >

얼굴이 예쁘고 허영기 넘치던 엄마가 암에 걸린 뒤 욕창에 걸려 집에 누워만 있다. Y는 엄마를 간병하다 밤이 되면 수영장에 간다. 수영장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다 말다 하며 다른 사람 뒷담화를 하는 카운터 직원과, 다리를 절며 수영장에 와서 시간을 보내는 장애인 남자가 전부다.

수영을 하는 동안 잠시 해방감을 맛보지만 25미터 풀에 가로 막히는 순간 제한된 공간임을 상기한다. 수영장을 나설 때 카운터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카운터 여자의 탈출을 내심 축하하며 수영장을 나설 때, 바람처럼 나타난 여자의 목소리가 '내일 봐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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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씰리카겔 >

여자의 집안은 별 볼일 없었다. 아이를 가졌을 때 '배웠다는' 시어머니는 며느리인 여자에게 살갑게 대했다. 하지만 여자가 아이를 유산하고 노산으로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온갖 타박을 해대기 시작했다. 음식 타박이 가장 심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음식을 거부하고 외식을 하다 질리자 사람을 들였다. 여자는 일하는 여자보다 부지런히 움직여 할 일이 없도록 만들어 내쫓았다. 그리고 음식을 배우고 부엌을 장악했다. 시어머니가 애정하는 옆집 개들을 씰리카겔로 몰살시킨 뒤 여자는 자신을 구박하는 시어머니와 바깥에서 시앗을 본 남자에게 씰리카겔을 조금씩 먹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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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드 에스컬레이터 >

안내 107은 학력을 속인 뒤 안내 팀장 자리를 차지한다. 피아노 학원 강사를 할 때 대학졸업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급여를 반으로 퉁치던 원장 생각이 났다. 입사 후엔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내 인정을 밨았다. 그리고 사장의 먼 친척뻘이라는 통제실장과도 관계를 맺는다.

어느 날, 퇴사 한 103이 통제실장을 찾으며 소화기를 뿌려대며 난동 피웠다. 107은 모든 상황이 짐작이 갔다. 통제실장은 빌딩 내 비밀 장소에 숨어 있을 것이었다. 107은 그 비밀 장소들이 외부에서도 잠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열쇠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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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 어가행렬 >

'우리들의 작은 일탈' 모임의 '물귀신'은 억척스런 여자다. 그녀가 주최하는 번개 모임은 인기가 많았다. '오렌지전사'는 리플로 참가의사를 밝히지 않았지만 모임 장소에 나타나 자연스레 합류할 생각이었다.

모임 장소인 종묘 일대는 어가행렬이 한창이었다. 일부 참가자는 프로답지 못해 버성겼지만 어느 새 어가 행렬에 참여한 자들이 실제 왕과 신하처럼 굴기 시작했다. 그러다 말이 몇 무더기의 말똥을 기념물 처럼 남기고, 모퉁이 레코드 가게에서 '난 모르겠다, 모르겠다' 노래를 흘려 보내고, 제례악이 울리고, 젯밥과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그때, 오렌지 전사에게 비상출동 명령 메시지가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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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령터널, 지나다 >

재희는 남편의 묘소를 찾은 뒤 J를 만나기 위해 D시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남편은 촉망받는 연구자였다. 둘이 함께 유학을 떠났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남편만 학업을 이어갔다. 남편이 대학에 자리를 잡자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하지만 그 시점에 남편이 심장마비로 덜컥 세상을 떴다.

남편이 들어둔 보험 덕에 아이와 재희는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런 남편에 대해 J는 '죽은 자가 산자들의 삶에 끼어들고 있는 거나 다름 없는', '죽어서 스스로 신화가 되기를 꿈꾸는 거' 따위의 말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J는 유학 시절 남편만 학업을 잇는 것도 좋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남편이 J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안 것은 남편이 죽은 뒤였다. 재희는 J를 만나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버스에 승객이라곤 재희 혼자였고, 기사는 재희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재희가 거절의 의사표시를 명확히 하자 신사적으로 자신의 관심을 거둬갔다. 휴게실에서 버스 기사가 카세트테이프를 사는 것을 보고 재희가 말을 걸었다. 남자는 락음악을 했었고, 음반을 냈으며, 성대 수술로 지금은 운짱을 하고 있다 했다. 그가 산 카세트 테이프는 자신이 낸 음반이었고, 그 음반들을 거둬들여 과거를 지우고 싶다고 했다. 재희는 어느새 자신이 둘러친 방어막을 거두고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남편의 불륜을 확인하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출발일지도 몰랐다.

중도에 고장난 버스와 만나 승객들을 인계받지만 버스 기사는 핑계를 대고 그들을 다시 다른 버스로 인계해준다. 다시 버스엔 기사와 재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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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이 발표된 2005년이 벌써 20년도 전이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중반은 참 팍팍한 시절이었다. IMF를 겨우 넘겼다고는 하나 신자유주의 물결이 넘실대며 무한 경쟁을 강요하던 시기였다. 명퇴당한 산업예비군이 대학졸업자와 경쟁하고, 인턴이라는 이름의 비정규직들은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그야말로 고용주들이 천국인 시기였다.

진보진영으로 분류된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였지만 공무원에 불과한 검사가 대통령에게 '어디 학교 출신이냐'고 물을 수 있을 정도로 권력 구도는 편향적이었다. 90년대에 사회주의권은 몰락했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은 해결된 것이 없는데도 승리자로서 무제한의 전리품을 요구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가 올 때까지 끝간 데 없는 자본의 횡포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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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명희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러한 시기에 '탈출을 꿈꾸는 여성'들이다. 하지만 어디를 향해야 할지, 누구와 연대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개인적 차원의 변화에서 해답을 찾는다. 돈을 더 벌어 콘크리트벽이 두터운 집으로 이사가려 하거나(탑소호족N), 한밤중에 사방이 막힌 곳에서 찰나의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 수영하거나(야경), 자신의 얼굴이 문제라는 잘못 된 인식을 바탕으로 성형수술을 감행한다.(3번 출구)

다른이에게서 원인을 찾더라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자신을 핍박하는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씰리카겔'을 먹이거나(씰리카겔), 동생을 보육원으로 보내길 바라거나(온이), 자신을 배신하고 동료를 농락한 실장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두거나(누드 에스컬레이터)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저 '밑에 깔린 자들' 끼리의 서열 다툼에 불과하다.

그래서 3번 '출구'는 진정한 의미의 출구가 될 수 없고 기껏해야 <탑소호족 N>에서의 '화장실 환풍기가 부엌으로 이어지는' 정도의 '연결통로' 기능밖에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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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약간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작품은 <죽령터널, 지나다> 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과 같이 터널 이쪽을 벗어나면 다른 세상일지도 모른다. 터널 이쪽의 재희는 남편이 바람 피운 것을 따져 물으려는 재희지만, 터널을 지난 재희는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려는 재희이다. 새로운 관계는 '대화'로 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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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컵라면 (스페셜 에디션)
차정은 지음 / 부크크(bookk)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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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빨강, 토마토, 열기, 사랑, 바다... 차정은은 머리속에 떠오르는 단어와 이미지들을 정련되지 못한 언어로 독자에게 속사포처럼 쏘아댄다. 시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한 말들이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저마다 아우성 치고,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지은이는 시를 쉽게 쉽게 써내려간다.

여기 실린 시의 형태를 한 글들은 그래서 밝고 명랑하다. 칭찬만 받고 자라 구김살 없는 아이들에게서 보여지는, 그런 종류의 밝고 명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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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시처럼 보였던 時, 하지만 출판된 시집에 실린 시라고 보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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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멸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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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이 가득한 도시에 달이 툭 하고 떨어졌어

오르막길을 내리고 내리막길을 올라 데굴데굴 굴러다녔어 달이 지나간 자리는 뭉툭이 문대졌고 사람들은 소원을 빌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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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님

달님 세상에서 가장 예쁜 달님

제 소원을 꼭 이루어 주세요

제 사랑을 꼭 이루어 주세요

제 꿈들을 꼭 이루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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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람들의 꿈과 사랑과 소원을 먹고 자란 달님은 지구보다 부풀어 올랐고 세상은 그렇게 샛노란 달로 물들어 멸종하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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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물고기
함정임 지음 / 민음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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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진의 소설을 썩 좋아한 편은 아니었다. 국어사전 한 귀퉁이에서 건져 올린 것 같은 낱말들이 긴장을 자아 내는 점이 조금 걸렸다. 하지만 기자 생활을 접고 소설만 쓰겠다고 선언한 그의 포부가 멋졌고, '전원일기'의 도시판 같은 소설 내용이 맘에 들어 발표하는 작품들을 챙겨보는 편이었다. 하지만 1997년 4월 22일, 김소진은 서른 셋의 아까운 나이에 췌장암으로 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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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은 김소진의 아내다. 함정임의 정체성이 '누구의 아내'라는 말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김소진의 죽음 직후 쓰여진 7편의 단편을 묶은 작품집이기에 말해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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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전반적으로 음울하다. 미망인, 죽음, 이별, 허무, 체념과 한의 이미지가 작품 전반에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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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클럽 파티 - 달리는 여자>는 파리 교외의 한 골프 클럽 파티에서 화자인 미나가 승희와 재회하면서 시작된다. 승희는 대학 때 사뮤엘 베케트의 작품 발표를 하면서 알게 된 사이다. 부조리 작가로 알려진 사뮤엘 베케트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 <몰로이>를 읽어보아야 한다는 대목은, 어쩐지 배우자의 죽음(부조리)을 받아들이기 위해 현실과 대상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산문정신(소설)이 필요하리라는 작가 인식이 녹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봤다.

소설 중 김소진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읽었을 때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대화가 나온다. 파티에서 한 사내가 미나에게 <아가씨>라고 부르자, 미나는 <전 아가씨가 아닌데요?>라고 답하는 부분이다. 아가씨로 보이는 미나, 그러나 미망인인 미나. 그냥 대답해도 되는데 굳이 자신은 아가씨가 아니라고 밝히는 미나. 그 단순한 대답에서 배우자 잃고 남겨진 여자의 양가적 감정이 느껴진다.

이는 <호수 저쪽>에서 이어진다. 화자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결혼한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남자의 구애가 계속되지만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남자가 떠난 뒤 여자는 가정을 버리고 남자를 찾아 파리로 간다. 말로 자신을 설명하는 대신, 몸이 남자의 곁으로 간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자신의 후배와 약혼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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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당신의 물고기>는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탐구한다. 소설에서 '여시오어(汝屎吾魚)' 고사가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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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은) 만년에는 항사사에 가서 있었다. 이때 원효는 여러 불경의 주소(注疏)를 찬술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혜공에게 가서 질의하거나 서로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혜공과 원효가 시내를 따라가며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똥을 누고 있는데 혜공이 그것을 가리키며 장난을 쳤다. 「당신이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거요」 그로 인하여 오어사(吾魚寺)라 했다.

- 『삼국유사』 제4권 제5 의해 편, 이혜동진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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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물고기일 거 같아요?> 게시판에 씌어진 글을 읽고 있는데 선묘가 묻자 '나'는 <음, 물고기 마음이겠지?> 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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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설 내용은 '여시오어(汝屎吾魚)' 화두 해석의 한 갈래로 '당신이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야'로 해석한다. 그러니 '누구 물고기냐' 라는 물음이 가능하다. 그런데 맥락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찾아보니 이 화두는 '너는 똥을 누고, 나는 물고기를 눈다'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법보신문 등에 몇 가지 해석이 더 있어 읽어보았는데 역시나 얼른 이해되지는 않는다. 다만 살아 움직이는 생명(물고기)과 물고기를 먹고 배출되는 죽음(똥)의 대비 속에서 <가난한 마음>에 인용된 월명사의 <제망매가>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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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의 길은

예 있으매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에서 너를 만나볼 나는

도 닦으며 기다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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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사, 「제망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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