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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 전화 >
아르헨티나로 출장을 떠난 화자에게 불륜남성의 아내가 전화를 걸어오면서 시작된다. 전화기 반대편에서 여자는 "오늘 아침에, 미야모토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라고 말한다. 바쁜 도시 생활 탓에 불륜은 '풍랑이 일지 않'고 진행 되었다. '나 또는 부인이 임신'을 하지도 않았고, '부인의 부모가 죽거나 내가 다니는 회사가 망하거나, 그런 외적인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서 평온하게 흘러갔다. 멍한 상태에서 하루를 보낸 화자에게 죽었다던 남자가 전화를 걸어온다. 죽었다는 말은 아내의 악의에 찬 장난이었다.
< 마지막 날 >
1998년 4월 27일에 '내'가 죽을 거라고 외할머니는 예언했다. 난산 끝에 '나'를 낳은 순간 손녀의 죽음을 예언한 외할머니 때문에 엄마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외할머니는 자신이 죽을 날을 맞추지 못했고, 엄마는 그제서야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이제 예언의 그 날, '나'는 아르헨티나로 여행 와서 남편과 만나기 전에 일으켰던 불륜 사건과, 남편을 만난 일을 회상한다. 그리고 오늘 이 밤, 어렸을 적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일로 가슴이 멜 수 있는, 이런 순간이 인생에 찾아왔다는 점을 기뻐한다.
< 조그만 어둠 >
엄마는 삼 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빠와 함께 '나'는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왔다. 아빠의 여행 목적은 클래식 기타를 사는 것이다. '나'는 아빠와 따로 떨어져 에비타의 무덤을 보러 간다. 무덤들을 구경하자니 과거에 엄마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엄마는 상자에 들어가는 것을 무서워했다. 어느 날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니 할머니가 집 안에 종이 상자로 조그만 집을 만들어 놓고 '너를 위해서 이 집을 만들었으니 여기서 살라'고 울면서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주일 동안 엄마는 그 집에서 살았고, 학교에 통 나오지 않는 엄마를 찾아온 선생님 덕분에 거기서 사는 것을 그만둘 수 있었다. 할머니는 정신 병원으로 옮겨진 뒤 자살했다.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나뭇잎 아래서, 나는 한없이 '밖에서 보면 태평하고 평화로웠던 우리 가족에게 조그맣고 깊은 어둠이 있었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 플라타너스 >
멘도사란 도시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나'와 남편이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 생각한다. 춥고, 독특한 바람이 불고, 오가는 사람들의 생기 없는 모습에 뼈를 저미는 듯한 허망함이 있어 천국이 이런 분위기일까 생각하게 되는 도시다.
남편에게서는 할아버지 집의 장롱 속 그리운 냄새가 났다. 결혼을 반대하던 남편의 누나는 '내'가 변호사를 통해 상속할 재산의 범위를 한정하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허락해주었다. 후에 남편이 아파 둘이 축제를 보러 갔을 때 둘 사이가 조금 가까워졌다.
남편과 함께 떠돌이 개에게 먹을 것을 주고, 우유에 초콜릿 덩어리를 녹여 마시는 서브마리노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노라니, 이런 시간이 영원해 계속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나'와 남편이 죽고, 지금의 이 바람이 플라타너스 잎을 떨어뜨릴 것이란 생각을 하자 죽는 것이 두려워졌다.
< 하치 하니 >
'나'는 이 도시에 친구를 찾아 왔다. 친구는 탱고를 배우다 선생인 아르헨티나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오늘은 친구에게 다른 일정이 있어 '나'는 대통령 관저 앞 5월 광장에 갔다. 2시가 가까와지자 머리에 하얀 스카프를 두른 엄마들 아니 할머니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군사 정권으로 바뀌면서 좌익 운동에 조금이라도 가담한 학생이나 페론 파 사람들이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내면은 그 기간에 무언가 아주 소중한 감각 하나가 영원히 상실되었을 것이다. 죽어간 아이들이 삶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내면에서 무언가가 사라졌으리라. 슬픔이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단지 엷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어 그것으로 위로 삼을 뿐이다. '나'는 저들의 슬픔에 비하면 나의 슬픔,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로 인한 슬픔, 은 얼마나 치졸한 것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
< 해시계 >
브라질에 사는 친구 요시미가 유산을 했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소리가 너무 가깝게 들려,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갈까?' 라고 물었다.
얼마 전 일 때문에 브라질에 갔을 때 막 아이를 가진 친구와 기독교 유적을 보러 갔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무슨 설계도 같아 보였다. 그리고 중학교 다닐 때 공책에 살고 싶은 집의 설계도를 그리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유적지에서 '나'와 요시미는 정말 행복했다. 별 의미도 없는 얘기를 나누머 깔깔거리고 웃었고, 하늘은 영원이 해가 지지 않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파랬다.
그때 그녀의 배 속에 있었던 또 하나의 생명, 함께 그때를 나누었던 아이가 혼자 어두운 길을 내려갔다.
< 창밖 >
그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나이가 '나'보다 다섯 살 위, 얼마 전 유럽에서 아주 돌아왔다는 것, 스페인을 취급하는 여행사를 그럭저럭 운영한다는 것 따위... 그런데 '나'는 지금 그와 여행하고 있다.
그와 얘기하다 남미의 문학을 생각했다. 분위기는 당돌하고, 야만적인 생명력이 스며 있으며, 아름다움과 생명에 관해서는 살인적인 힘마저 인정하고 있는 듯한 문학. 광기에 가까운 정신의 고양과 일상에 굳건하게 발 디딘 생활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관. 여행을 와보니 그런 느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 겪었던 기묘한 일이 생각났다. 일곱 살 때 할머니가 위독해 혼자 집에서 자게 된 날이었다. '나'는 마치 냉장고 안에서 차가워지는 과일이 된 기분이었다. 잠이 들었다 깨 보니 곰 인형이 '내'게 등을 돌리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서워하면 더욱 무서워질 것 같아, 창가로 가서 곰과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그날 밤중에 돌아가셨다. 살다가 느끼는 쓸쓸함이란 그 곰 인형의 뒷모습 같은 것이어서 남이 보면 가슴이 메는 듯해도, 곰 인형은 설레는 기분으로 창밖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았을 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과수 폭포를 바라보다 그가 '돌아가면 같이 살까' 하고 물었다. '나'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상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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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1998년 아르헨티나를 여행하고 돌아와 문예지 <세세쿄(星星崍)>에 발표한 일곱 편을 엮은 작품집이다. 작품에 삽입된 사진은 야마구치 마사히로가 찍었고, 삽화는 하라 마스미가 그렸다. 과거 협업했던 나라 요시토모도 여행에 함께 갔던 것 같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불륜. 그래서 제목도 <불륜과 남미>다. 제 10회 두마고 문학상을 수상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하치 하니>. 작품의 소재가 된 것은 '5월 광장 어머니회'다. 1976년,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후에 '더러운 전쟁' 기간으로 불리우는 1983년 까지 3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사라졌다. 이 기간 실종된 사람들의 어머니들이 머리에 흰색 스카프를 두르고 광장을 돌며 반인륜적인 범죄에 항의했다. 마음에 드는 대목은 마지막에 티셔츠를 파는 한 어머니가 '요즘은 작은 사이즈의 티셔츠가 유행하니까 s사이즈가 좋지 않겠냐'고 말하는 대목이다. 슬픈 마음과 생활력이라는, 얼핏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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