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 출구
표명희 지음 / 창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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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소호족 N >

영화 번역일을 하는 여자는 10년 모은 전세금을 사기 당한 뒤 옥탑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불법 증축한 옥탑방은 옆집 화장실 환풍기가 내 집 부엌으로 연결된 기묘한 곳이다. 처음 이사 왔을 땐 옆집에 멀끔한 외양의, 나중에 알고보니 번화가 삐끼를 하던, 남자가 살았었다. 지금은 해소병 걸린 여인과 무능력한 가장, 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딸 가족이 살고 있다.

여자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이웃은 쌀집 여자와 그녀의 절름발이 아들 현철이다. 쌀집 여자는 소포를 맡아줬고, 현철은 번역 결과물을 퀵배송 해주고 용돈을 받아썼다.

여자는 송실장에게 번역일을 더 하겠다고 전화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일거리를 배달하는 현철에게도 도움이 될꺼라 생각하지만, 그런 감정이 사실은 지배욕의 외피는 아닌지 의심한다. 그러면서도 여자는 콘크리트 벽이 엄청 두꺼워 옆집과 이웃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그런 집으로 옮기기 위해선 돈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온이 >

진이의 동생 온이는 다운증후군이다. 진이는 엄마가 온이만 챙긴다고 불만이 많다. 어느 날 마을버스에서 온이가 몸을 버팅기고, 옆에 앉은 여자애의 치마를 잡아당기면서 괴성을 질러대던 날, 진이는 온이의 머리를 정신없이 내려쳤다. 온이가 바닥으로 나뒹굴었고 엄마는 온이를 왈칵 껴안은 뒤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뒤늦게 진이가 겁이 나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따라 내렸지만, 엄마는 진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이는 폐렴에 걸려 일주일을 앓으면서 온이만 없으면 자기도 세상에서 둘 도 없는 착한 아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들이 몇 차례 반복된 뒤 가족은 캐나다로 가기로 했지만 캐나다에서 장애인 온이의 입국을 거절해 이마저 무산된다. 결국 온이는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그 뒤부터 엄마는 '반듯한 세상'이 싫다며 때때로 술을 마셨다. 진이는 이상하게 학교에서 글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게 되면 온이 생각이 났다. 상장 걸 곳이 없어 온이의 사진까지 떼어낸 진이는 할머니가 그 사실을 알았을지 걱정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행복한 온이'가 보육원에 사는 것과, 곁에 사는 것 중 어느 편이 좋을지 생각해본다.

< 3번 출구 >

엄마는 '내'가 의대 진학하기를 꿈꿨지만 '나'는 재수학원을 중도 작파하고 디자인 전문대학에 들어갔다. 그럴싸한 철학을 풀어 놓던 멀끔한 학원강사 영향이 컸다. 어쨌거나 디자인 회사에서 '나'는 능력을 인정 받아 승승장구한다. 명문대 졸업자들과 함께 승진했고, 나중엔 그들을 앞서기까지 한다. 박실장이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는 '나'와 함께 공모전에 출품해 수상의 영예를 나눠 가졌고, 개인적인 관계로도 발전한다.

얼마 후 박실장이 '나'에게 집적댄 이유가 공모전 실적 때문이라는 걸 바비인형 닮은 거래처 여직원 덕에 알게된다. '나'는 박실장 머리에 외장하드를 내려친 뒤 퇴사한다. 과거 학원강사가 친한 친구와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는 사건도 이런 식이었다. 그 날, 화장실에서 본 문구. '당신의 삶을 바꾸어드립니다. 이젠 삶도 디자인 시대. 당신의 삶을 디자인하세요. 최첨단 의료장비... 3호선 압구정역 3번 출구'

'나'는 10년 모은 퇴직금을 성형수술에 퇴직금을 털어 넣는다. 하지만 좌우 대칭이 맞지 않았다. 나는 성형외과에 AS를 요청했지만 의사와 간호사는 한 패가 되어 아무 문제 없다며 정신과를 소개해준다.

< 야경 >

얼굴이 예쁘고 허영기 넘치던 엄마가 암에 걸린 뒤 욕창에 걸려 집에 누워만 있다. Y는 엄마를 간병하다 밤이 되면 수영장에 간다. 수영장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다 말다 하며 다른 사람 뒷담화를 하는 카운터 직원과, 다리를 절며 수영장에 와서 시간을 보내는 장애인 남자가 전부다.

수영을 하는 동안 잠시 해방감을 맛보지만 25미터 풀에 가로 막히는 순간 제한된 공간임을 상기한다. 수영장을 나설 때 카운터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카운터 여자의 탈출을 내심 축하하며 수영장을 나설 때, 바람처럼 나타난 여자의 목소리가 '내일 봐요'라고 말한다.

< 씰리카겔 >

여자의 집안은 별 볼일 없었다. 아이를 가졌을 때 '배웠다는' 시어머니는 며느리인 여자에게 살갑게 대했다. 하지만 여자가 아이를 유산하고 노산으로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온갖 타박을 해대기 시작했다. 음식 타박이 가장 심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음식을 거부하고 외식을 하다 질리자 사람을 들였다. 여자는 일하는 여자보다 부지런히 움직여 할 일이 없도록 만들어 내쫓았다. 그리고 음식을 배우고 부엌을 장악했다. 시어머니가 애정하는 옆집 개들을 씰리카겔로 몰살시킨 뒤 여자는 자신을 구박하는 시어머니와 바깥에서 시앗을 본 남자에게 씰리카겔을 조금씩 먹이기 시작한다.

< 누드 에스컬레이터 >

안내 107은 학력을 속인 뒤 안내 팀장 자리를 차지한다. 피아노 학원 강사를 할 때 대학졸업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급여를 반으로 퉁치던 원장 생각이 났다. 입사 후엔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내 인정을 밨았다. 그리고 사장의 먼 친척뻘이라는 통제실장과도 관계를 맺는다.

어느 날, 퇴사 한 103이 통제실장을 찾으며 소화기를 뿌려대며 난동 피웠다. 107은 모든 상황이 짐작이 갔다. 통제실장은 빌딩 내 비밀 장소에 숨어 있을 것이었다. 107은 그 비밀 장소들이 외부에서도 잠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열쇠도 갖고 있었다.

< 新 어가행렬 >

'우리들의 작은 일탈' 모임의 '물귀신'은 억척스런 여자다. 그녀가 주최하는 번개 모임은 인기가 많았다. '오렌지전사'는 리플로 참가의사를 밝히지 않았지만 모임 장소에 나타나 자연스레 합류할 생각이었다.

모임 장소인 종묘 일대는 어가행렬이 한창이었다. 일부 참가자는 프로답지 못해 버성겼지만 어느 새 어가 행렬에 참여한 자들이 실제 왕과 신하처럼 굴기 시작했다. 그러다 말이 몇 무더기의 말똥을 기념물 처럼 남기고, 모퉁이 레코드 가게에서 '난 모르겠다, 모르겠다' 노래를 흘려 보내고, 제례악이 울리고, 젯밥과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그때, 오렌지 전사에게 비상출동 명령 메시지가 도착한다.

< 죽령터널, 지나다 >

재희는 남편의 묘소를 찾은 뒤 J를 만나기 위해 D시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남편은 촉망받는 연구자였다. 둘이 함께 유학을 떠났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남편만 학업을 이어갔다. 남편이 대학에 자리를 잡자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하지만 그 시점에 남편이 심장마비로 덜컥 세상을 떴다.

남편이 들어둔 보험 덕에 아이와 재희는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런 남편에 대해 J는 '죽은 자가 산자들의 삶에 끼어들고 있는 거나 다름 없는', '죽어서 스스로 신화가 되기를 꿈꾸는 거' 따위의 말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J는 유학 시절 남편만 학업을 잇는 것도 좋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남편이 J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안 것은 남편이 죽은 뒤였다. 재희는 J를 만나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버스에 승객이라곤 재희 혼자였고, 기사는 재희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재희가 거절의 의사표시를 명확히 하자 신사적으로 자신의 관심을 거둬갔다. 휴게실에서 버스 기사가 카세트테이프를 사는 것을 보고 재희가 말을 걸었다. 남자는 락음악을 했었고, 음반을 냈으며, 성대 수술로 지금은 운짱을 하고 있다 했다. 그가 산 카세트 테이프는 자신이 낸 음반이었고, 그 음반들을 거둬들여 과거를 지우고 싶다고 했다. 재희는 어느새 자신이 둘러친 방어막을 거두고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남편의 불륜을 확인하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출발일지도 몰랐다.

중도에 고장난 버스와 만나 승객들을 인계받지만 버스 기사는 핑계를 대고 그들을 다시 다른 버스로 인계해준다. 다시 버스엔 기사와 재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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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이 발표된 2005년이 벌써 20년도 전이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중반은 참 팍팍한 시절이었다. IMF를 겨우 넘겼다고는 하나 신자유주의 물결이 넘실대며 무한 경쟁을 강요하던 시기였다. 명퇴당한 산업예비군이 대학졸업자와 경쟁하고, 인턴이라는 이름의 비정규직들은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그야말로 고용주들이 천국인 시기였다.

진보진영으로 분류된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였지만 공무원에 불과한 검사가 대통령에게 '어디 학교 출신이냐'고 물을 수 있을 정도로 권력 구도는 편향적이었다. 90년대에 사회주의권은 몰락했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은 해결된 것이 없는데도 승리자로서 무제한의 전리품을 요구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가 올 때까지 끝간 데 없는 자본의 횡포는 계속되었다.

표명희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러한 시기에 '탈출을 꿈꾸는 여성'들이다. 하지만 어디를 향해야 할지, 누구와 연대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개인적 차원의 변화에서 해답을 찾는다. 돈을 더 벌어 콘크리트벽이 두터운 집으로 이사가려 하거나(탑소호족N), 한밤중에 사방이 막힌 곳에서 찰나의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 수영하거나(야경), 자신의 얼굴이 문제라는 잘못 된 인식을 바탕으로 성형수술을 감행한다.(3번 출구)

다른이에게서 원인을 찾더라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자신을 핍박하는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씰리카겔'을 먹이거나(씰리카겔), 동생을 보육원으로 보내길 바라거나(온이), 자신을 배신하고 동료를 농락한 실장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두거나(누드 에스컬레이터)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저 '밑에 깔린 자들' 끼리의 서열 다툼에 불과하다.

그래서 3번 '출구'는 진정한 의미의 출구가 될 수 없고 기껏해야 <탑소호족 N>에서의 '화장실 환풍기가 부엌으로 이어지는' 정도의 '연결통로' 기능밖에 못한다.

소설에서 약간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작품은 <죽령터널, 지나다> 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과 같이 터널 이쪽을 벗어나면 다른 세상일지도 모른다. 터널 이쪽의 재희는 남편이 바람 피운 것을 따져 물으려는 재희지만, 터널을 지난 재희는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려는 재희이다. 새로운 관계는 '대화'로 부터 시작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272343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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