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에 관한 역설 문지 스펙트럼
드니 디드로 지음, 주미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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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드니 디드로는 1713년 프랑스에서 출생했다. 예수회 계통 학교를 마친 뒤 1745년 출판인 앙드레 르브레통의 외뢰를 계기로 <백과전서> 작업에 착수한다.

디드로는 생애 대부분을 이 작업에 몰두하는데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 등 당대 계몽 사상가들을 총동원하여 1751년 1권을 시작으로 21년이 지난 1772년에야 전서를 완성시킨다.

철학 저서로 <달랑베르의 꿈>(1749), <부갱빌 여행기 부록>(1772), 소설로 <수녀>(1760), <라모의 조카>(1761~63), <운명론자 자크>(1771~74), 희곡 및 연극론, 전람회 비평으로 <살롱>(1759~81), <회화론>(1776), 그리고 본서 <배우에 관한 역설>(1773)이 있다.

배우에 관한 역설

디드로는 사람에게 천부적 자질과 용모, 목소리, 판단력, 섬세함 등을 주는 것이 자연이라면, 자연이 준 재능을 완성시키는 것은 위대한 전범(典範)들에 대한 연구, 인간의 마음과 사회 관례에 대한 지식, 꾸준한 노력, 경험, 연극에의 익숙함 등이라고 말한다.

훌륭한 배우라면 판단력이 좋아야 하며 냉정하고 침착한 관찰자여야 한다. 통찰력은 필요하지만 감성은 전혀 요구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모방할 수 있는 기술, 모든 종류의 성격과 역할들에 대한 똑같은 적응 능력이 요구된다.

배우가 감성적이면 같은 역할을 매번 똑같이 열정적이고 성공적으로 연기할 수 있을까? 배우가 주의 깊은 모방자이고 사려 깊은 자연의 사도일 때, 그 자신이나 자기 연구의 엄격한 모사가일 때 감각의 지속적인 관찰자가 된다.

마음으로 연기하는 배우는 고르지 못한 연기를 펼친다. 반면 인간 본성에 대한 사색과 연구, 그 어떤 이상적 모델에 따른 지속적인 모방, 상상력과 기억력으로 연기하는 배우는 모든 공연에서 한결같으며, 늘 고르게 완벽할 것이다.

순전히 연습과 기억에 의존하여 열심히 공부할 때, 배우는 자신을 싸고 있는 거대한 마네킹의 영혼이 된다. 노력은 그 마네킹을 배우에게 고정시킨다. 천재적인 사람들은 관찰하고 공부하고 다듬는다.

훌륭한 배우의 모든 재능은 느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면밀하게 감정의 외부적 기호들을 토해낸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순전히 모방이며, 반복 학습되는 교훈이자 엄숙한 위장이고, 기억의 탁월한 모방이다. 배우가 펼쳐 보이는 극적 환영이란 오로지 관객을 위할 뿐이며, 배우는 자신이 그 환영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대에서의 진실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시인이 상상해내고 배우가 종종 과장하는 어떤 이상적 모델과 행동, 말, 표정, 목소리, 움직임, 동작들과의 일치다. 바로 그곳에 기적적인 것이 있다.

숭고한 순간들을 전유하는 것은 순수한 자연이 아니다. 숭고함을 확실히 포착하고 유지하는 어떤 사람, 상상력이나 천재적 능력으로 그것들을 예감하고, 냉정하게 극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그 순간을 전유하는 것이다.

거리 무대와 연극 무대의 차이는 마치 원시인들의 군집 상태와 문명인들의 의회가 갖는 차이와도 같다. 여러 번 연습을 반복하는 이유는 하나로 통일되는 보편적 행동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 배우들이 가진 다양한 재능들 사이의 어떤 균형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배우란 위대한 야바위꾼이다.

우리는 친구나 정부가 죽자마자 그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쓸 수 있을 때는 커다란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고 극단적인 감정이 가라앉고 재난의 순간에서 멀리 떨어져 영혼이 잔잔해진 다음, 지나가버린 행복을 기억해내고 잃어버린 것을 감상할 수 있게 될 때, 기억이 추억과 만나, 하나는 그것을 반추하고 하나는 지나간 시간의 달콤함을 과장하게 될 때, 바로 사람들이 자신을 제어하고 말을 잘할 수 있게 될 때이다. 사랑은 그것을 품은 사람에게선 재기를 빼앗아가고, 사랑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겐 재기를 준다. 감정적인 인간은 자연의 충동에 복종하고 정확히 심장의 외침 소리만을 낼 수 있을 뿐이다. 그가 이 마음의 외침을 완화시키거나 강화시키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라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된다.

가면을 벗었다 다시 쓸 수 있는 사람, 스스로를 제어하는 사람이 드물게 뛰어난 배우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지만 탁월하게 감정을 나타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자연 속에 결코 있은 적이 없었던 어떤 형상, 일종의 전범에 도달하는 사람이다.

자연은 그 자신의 얼굴말고는 준 것이 없으며 그는 예술로써 다른 얼굴들을 지니게 된 것이다. 모든 자연들을 알고 모방하는 데 있어서의 수월함, 그것이 배우의 자질이다. 위대한 환영을 상상해내고 천재를 본뜰 줄 아는 재능, 움직임과 행동과 동작과 한마디 말로 배우 자신보다 한참 더 위에 있는 존재의 그 모든 표상들을 모방해내는 사람이 훌륭한 배우다. 아무 특성도 없지만 모든 것들을 연기하는 데 뛰어난 것이다. 훌륭한 배우는 자연이 부여한 성격을 잃기 때문에 모든 성격을 연기하기에 적절해진다.

사람들이 진실을 좋아하는 때는 특히 모든 것이 가짜일 때이고, 연극이 가장 순수해지는 때는 특히 모든 것이 타락했을 때이다.

연극에서 열정의 이미지들은 그 진정한 이미지들이 아니라 과장된 초상화의 그것들일 뿐이고, 인습적 규칙들에 예속되어 큼직큼직 그려진 캐리커처들일 뿐이다.

배우의 진정한 재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빌려온 영혼의 외적 증상들을 잘 인지하고,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를 보는 사람들의 느낌에 호소할 줄 알고, 그런 모든 증상들의 모방, 머릿속에서 모든 것을 키우면서 자신들의 판단의 규칙이 되는 모방에 의해 그것들을 속일 줄 아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배우란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인식된 이상적 모델에 따라 가장 완벽하게 외적 기호들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원래 갖고 있지도 않은 과장되고 거대한 영혼의 외적 신호들을 연결하는 일을 한다. 반면 감정적인 사람은 너무나도 횡격막의 움직임대로 나가기 때문에 자연의 숭고한 모방자가 될 수 없다.

무대에서는 모든 것이 변한다. 거기서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커졌기 때문(과장)이다. 그것은 다른 세계다. 거기서 배우는 완벽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숱한 반복 연습을 하고, 지쳐 빠져 소위 마비 상태가 될 때 놀랍게 진전되어 자신의 인물에 일치하게 된다.

감성적인 것과 지각한다는 것은 같지 않다. 하나는 영혼에 속하는 일이고, 다른 것은 판단에 속하는 일이다. 강하게 느낀다고 해서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것도 아니다. 훌륭한 배우가 되는 것은 차가운 머리와 깊은 판단력과 섬세한 취향과 각고의 연구와 오랜 경험과 보기 드문 기억력의 작업이다. 배우는 감성이 없을 경우 오히려 자신과 분리될 필요가 없을 것이고, 한번 도약하는 걸로 단번에 이상적 모델의 높이로 상승할 것이다. 열정 그 자체가 만들 수 없었던 것을, 잘 모방된 열정이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다.

디드로의 주장을 따라 가노라니 어렸을 적에 읽은 <대중선동론>이란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선동을 할 때에는 절대로 청중보다 먼저 흥분해서는 안된다'는 구절이었다.

옮긴이 주미사가 언급한 바와 같이 배우들은 인터뷰에서 '배역에 푹 빠져 그와 함께 살았다' 따위의 말들을 많이 한다. 디드로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다.

디드로는 배우가 감정에서 멀어져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기술과 기교를 습득하고, 자신의 본성과 전혀 다른 가면을 쓸 때 비로소 위대한 배우가 된다고 주장한다. 감정이 풍부한 배우는 그 감정을 나타내는 배역을 어느 정도 잘 소화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자기가 가진 감정의 총량 내에서이다. 그의 감정에 걸맞는 배역일지라도 그 감정의 '전범'이 될만한 연기는 펼칠 수 없다. 반면 자신의 감정을 꺼버리고 백지 상태에서 기술과 기교에 집중하여 배역을 소화해낸 배우는 일종의 '전범'을 나타내주고, 연기의 수준을 매 공연마다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디드로가 말하는 배우의 역설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292857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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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듣는 소설 1
김금희 지음 / 무제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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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보령 '창세기 비디오' 집 막내 딸이었던 손열매는 <마크스>의 주인공 스탠리 입키스의 대사를 할아버지에게 읽어주며 기예를 갈고 닦은 결과 성우가 되었다.

그런 손열매가 지금 정신과 의사를 찾아와 발성 문제를 상담하고 있다. 의사는 우울증의 신체화 결과로, 단기기억력 손상도 심각하다며 약물을 복용하는 한편 외출을 하고 고립을 피하라 했다.

그럼 손열매가 왜 우울증에 빠져들게 되었나? 그것은 함께 살던 선배 고수미가 피같은 돈 천삼백만원을 들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돈도 돈이지만 연락이 없는 고수미가 손열매는 미우면서도 걱정 됐다.

손열매는 성우 일도 못하고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게 생긴 판이므로 고수미의 명품 가방을 팔아 얼마간 돈이라도 마련해보려 했다. 하지만 죄다 짝퉁 판정을 받은 탓에 재미를 보지 못한다. 결국 손열매는 고수미의 본가를 찾아가 보기로 하고 완평으로 방향을 잡는다.

완평에서 내려 완주 가는 1600번 버스를 타니 기사가 어디 가냐고 묻는다. 좁은 동네라 죄다 누가 누군지 아는 눈치였고, 손열매가 목적지를 대니 대뜸 유자씨네 가게 가는구나 한다.

우울증약의 부작용은 잠이 쉽게 들고, 잠이 들면 잠꼬대를 한다는 것인데 손열매는 주로 욕을 해댔다. 버스에서 잠꼬대로 욕을 해대니 뒤에 앉은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흠칫하며 손열매를 깨운다. 손열매는 창피했다. 버스를 내리니 비가 내렸고, 남자는 우산을 건내주고 사라진다. 훤칠한 키 탓에 '어저귀'라고 불리는 남자와의 첫만남이었다.

고수미네 집에 가니 고수미 엄마가 심드렁하게 '얼마 물렸냐'고 묻는다. 천삼백이라고 하니 갚아줄 돈은 없다며, 갈 데 없으면 보증금 없이 60만원씩 빚에서 제하며 지내라 한다. 손열매는 시늉뿐인 저항을 하다 냉혹한 현실에 무릎 꿇고 고수미네 쓰던 방에 주저 앉고 만다.

손열매는 완주에 머물게 된 것이 돈을 받기 위해선지, 고수미가 걱정 되어선지, 갈데가 없어선지, 그도저도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확실히 알지 못했지다. 확실한 건 우물쭈물 하다 눌러 앉은 김에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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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는 서울가는 기차도 있고, 두물머리에 가깝다고 하니 양평쯤이 아닐까 상상하며 읽었다. '바쁘면 다른 교통편을 이용하라'는 안내가 수시로 나오는 경의중앙선 전철역에서 내려 면단위로 버스를 갈아 타면 그 어딘가 완주같은 마을이 나타나지 않을까 상상하면서.

거기 가면 물난리로 자식 잃은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주민들이 있고, 외로움을 타면서도 반항하는 것 외 달리 표현 못하는 양미가 있고, 그런 양미를 학폭으로 찌른다면서도 매일 학교 가자며 데리러 오는 파드마(간디)와 율리아(푸틴)가 있다.

마을 사람들의 아픔을 뭐든지 알기에 뭐든지 발설할 수 있는 이장과, 골프장 건립으로 한몫 보려하는데도 어딘지 미워할 수만은 없는 구회장이 있으며, 투수가 입스에 걸린 것처럼 영화 관련 일을 할 수 없게된 배우 정애라가 있다.

그리고 400년이 넘는 세월을 살며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계속 존재하는 것 같은 '어저귀'가 있다. 어저귀는 어쩌면 우리 인생의 기준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문구의 <우리 동네>와 박영한의 <우묵배미의 사랑>과 같은 동네 이야기가 나는 좋다. 동네는 우리 삶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치유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동네에 관한 기억이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김금희가 인하대 국문과를 나온 것을 알았다. 그리고 여러가지 옛날 생각이 났다.

나는 꽤 오래 학교를 다녔는데, 입학 후 졸업 까지 10년이 걸렸다. 다카노 히데유키의 <와세다 1.5평 청춘기> 주인공처럼 자취방에서 창을 열고 학교 시계탑을 일별한 뒤(그러면 꼭 수업 갔다 온 느낌이 든다) 동아리방에 가서 이런 저런 일을 했다.

90년대 후반, 동아리에 문예특기생인가로 입학한 새내기가 문을 두드렸다. 그 다음 해에 또 문예특기생이 동아리 가입을 희망했다. 이 둘이 처음 만나서 한 말이 '어? 언니?' 였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 했다.

그때 나는 '아... 문예특기생이라는 것도 있구나' 했고, 그런데 '왜 인하문학회나 샘동인회에 가지 않고 사회과학 동아리에 왔지?' 했다. 둘 다 특기는 그쪽인가 본데 글을 쓰는 것을 본 적은 없고 데모만 하러 다녔다. 둘 중 먼저 들어온 축이 김금희와 같은 과 같은 학번이었다. 그리고 나도 5호관에 상시 기거했으니 어쩌면 한 두번쯤 마주친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인하대 출신 소설가는 (전업은 아니지만) 조혁신 선배 밖에 몰랐는데, 목록에 한 명 늘었다. 챙겨볼 작가도 한 명 늘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28584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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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의 새
김성동 지음 / 책세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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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말미에 <간추려본 발자취> 가 실려 있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인생 기록이다. 김성동 소설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소설에 반복적으로 녹여내는데, 그 변주의 범위가 넓지 않다.

김성동은 1947년 음력 11월 8일 충남 보령군 청라면 장현리 구렛굴에서 태어났다. 1950년 6.25가 터지면서 48년 가을 예비검속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아버지와 인민공화국 시절 조선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을 하였던 큰삼촌이 우익한테 학살 당했다. 한편, 면장을 하던 외삼촌은 좌익한테 학살 당했다. 김성동의 아버지는 아마 경성콤그룹 계열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아버지 탓에 얼떨결에 민주여성동맹 위원장 감투를 잠깐 썼는데, 이 일로 성폭행을 포함한 모진 고문을 당한 것으로 보인며 임종 시까지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할아버지로부터 진서(眞書)를 배운 김성동은 1958년 대전으로 이사를 간다. 어느 날, 사내들이 찾아와 할아버지에게 종주먹을 들이대며 '경찰에 신고는 했는지 묻는' 사건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만화에 빠져들었고, 재미 삼아 이야기를 지어보기도 한다.

입학금, 육성회비, 사친회비, 월사금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김성동은 1960년 삼육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간다. 그곳은 검정고시를 봐야 중학교 졸업자격이 주어지는 학교였다.

1960년 3월 8일과 10일 자유당 일당독재를 규탄하는 데모에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가니 김성동의 할아버지는 不是水면 便是石이니, 夜不踏白이라는 말만 읇조린다. "물이 아니면 돌멩이니 밤에는 희게 보이는 것을 밟지 말라"는 말로, 아들들을 좌익과 우익에게 희생당한 할아버지가 이데올로기 싸움의 미친바람 앞에 위태로운 손자의 처지를 걱정한 말이었다.

1961년 5.16이 일어나자 할아버지가 대공과 형사들에게 예비 검속되었다 풀려난다. 삼육공민학교는 끝내 졸업하지 못하는데 월사금과 졸업비, 졸업앨범값을 못 냈기 때문이었다.

1964년 어머니와 누나 세 식구가 서울로 이사간다. 서라벌고등학교에 거금 8천원을 주고 '야미'로 들어갔는데, 1965년 3학년 1학기에 산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평북 정주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나오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노사(老師)를 만난다. 김성동은 <내가 학교를 그만두는 까닭>이라는 장문의 자퇴서를 내고 노사를 따라 도봉산 천축사로 간다. 공무원이 될 수 없고, 장교가 될 수 없으며, '고등고시 패스'를 해도 임관이 안되는 '삼불(三不)의 덫'에 치인 출신성분으로 해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으로, 김성동은 이를 '위장입산' 이었다고 자조섞어 이야기한다.

1966년 수계를 한지 한 해 만에 산을 내려간 뒤 여러 절을 객승으로 떠돌기 시작한다. 1974년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에서 대보살 딸들인 여대생 두 명을 만나고 이 중 한 여대생에게 설렘을 느낀다. 그녀가 노래 하나 불러보라는 말에 김성동은 염불밖에 못한다고 하자 여대생이 "노래와 염불이 어떻게 다른가요? 세상이 슬프고 세상이 괴로와서 울부짖는 중생들한테 이 소리를 듣고 잠시라도 그 슬픔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염불이라면, 똑같은 것 아닌가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 순간 벼락을 맞는 느낌이었다고 김성동은 술회한다. 그녀로부터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에게> 번역본을 선물 받은 김성동은 얼마 뒤 <주간종교>지의 <종교소설 현상모집> 사고를 보고 백이십 장짜리 소설 <목탁조(木鐸鳥)>를 써 공모하여 당선된다.

하지만 불교계의 어두운 면을 조망한 소설이라는 이유로 조계종 감찰원에서 출두 명령서가 날라온다. 무술승려인 감철원 간부들은 김성동을 을러대며 4대 일간지에 사과 광고를 내라고 핍박했다. 조계종은 김성동에게서 '쯩'을 빼앗아버린다. 이로써 김성동은 역사상 최초 무승적제적자가 되고 만다. 조계종은 모든 절에 '김아무개를 승적에서 제적했으니 숙식 제공을 하지 말것이며, 숙식을 제공할 경우 해종행위자로 간주하여 징계하겠다'는 공문을 보냈다.

1976년 하산한 김성동은 대한기원 기관지 <기도(棋道)> 기자 시험에 합격한다. 이듬해 <바둑>지로 기관지가 통폐합 되는데, 이때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에 대해 듣게 된다. 누군가 '송기원은 작품 집필에 전념하기 위하여 직장을 그만둔다'고 한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김성동은 <바둑>을 그만두고 한 동안 집필에 골몰한다. 하지만 밥벌이에 쫓겨 다시 <공간>, <물가정보>, <여원> 등의 잡지사를 전전하다 <어느 호스테스의 수기> 따위 황색 기사를 써야하는 상황에 몰리자 다시 직장을 때려 치우고 산사와 바다를 떠돌다 자살기도를 하는 등 방황한다.

그러다 <한국문학>사에서 뽑는 <백만원고료 신인상>에 응모한 것이 중편 <만다라>다.

수록된 소설은 <간추려본 발자취>의 어느 대목들이 조금씩 녹아들어 있다.

<엄마와 개구리>는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처형되고, 어머니가 서북청년단과 경찰들에게 성폭행과 고문을 당해 후유증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어린 영복이의 불안과 공포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별>에서도 반복되는데 예의 배앓이로 죽을 것처럼 울부짖는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를 찾아나선 영복은 홍등가에서 돌팔이 침쟁이를 찾아 데려온다. 돌팔이 침쟁이는 '어머니가 예쁘냐'고 묻고, 영복은 어머니를 고쳐주면 아버지라 불러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니 평소 어머니를 노리던 덕금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갔다고 했다.

<먼 산>과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는 1974년 칠장사에서 만난 여대생을 소재로 쓴 소설이다. <먼 산>에서 '나'는 어설픈 중노릇을 하고 있는데 우연히 열여섯의 길인례라는 불구 처녀아이를 만난다. 그녀는 '나'에게 자고 싶다, 아이를 낳고 싶다,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진 내 아이를, 따위의 말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욕정이 일었지만 끝내 견뎌내고 새벽을 맞는다. '나'는 당시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패배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는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는 직장을 때려 치우고 은박지에 시를 끼적이다 한 여성을 만나는 이야기다. 아마도 1974년의 기억이 꽤나 강렬했었나보다.

<假淑의 땅>은 나이만 다를 뿐 또 다른 영복의 이야기다. 팔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할머니만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큰 일 할' 손자를 기다리다 먼저 떠났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또 다시 예비 검속에 걸려 8년간 지내던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가 된다.

<山蘭> 역시 '절에 가 있는 영복' 버전이다. <異人을 기다리며>는 老師를 만나는 이야기이고, <燈>은 부처를 만나러 온 범죄자를 내쫓는 중들 이야기이다. 개심의 마음을 먹고 절을 찾아 왔으나 도둑으로 몰린 전과자를 보며 '나'는 그를 위해 발명을 하지 못한다. 그가 설혹 돈을 훔치러 왔더라도 '날카롭게 수입을 챙긴 사람은 일찍이 초저녁에 산을 내려가 저자의 안가로 숨어'버렸기에 허탕쳤을 것이었다.

표제작 <彼岸의 새>는 <목탁조>를 발표하여 '쯩'을 빼앗기고 보살전인 극락사와 같은 곳을 전전하며 목탁노동자로 밥을 빌어 먹고, 점술과 부적판매로 돈을 챙기는 사제불교계의 실태에 넌덜머리를 내는 저간의 사정이 적혀 있다. '보리(菩提)'라고 부르고 싶은 과거의 여대생에게 편지를 보내며 삶의 근원적 외로움과 고통을 고백하는 자전적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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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둠의 근원
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원열 옮김 / 시작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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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6월 22일 오전 10시 10분, 엘 몬테의 킹스 로와 타일러 가 교차지점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피해자는 백인 여성으로 흰 피부에 빨강머리, 나이는 40세 정도 되어 보였다. 오른팔을 위로 하고 주먹을 쥔 왼팔은 팔꿈치를 구부린 채 배 위에 얹혀 있었다. 다리는 활짝 벌린 채였다.

앞이 파인 간소한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하체에는 드레스와 어울리는 안감을 댄 오버코트가 덮여 있었다. 발과 발목은 코트 밖으로 나와 있었다. 오른발은 맨발이었고 왼쪽 발목 주위에는 나일론 스타킹이 둘둘 말려 내려와 있었다.

얼굴에는 타박상이 있었고 혀가 삐죽 나와 있었다. 브래지어 끈이 풀린 채 가슴 위로 밀려 올라간 상태였고, 목에는 나일론 스타킹과 면 재질의 끈이 묶여 있었다. 피해자의 팬티, 구두, 핸드백은 찾을 수 없었고, 오른쪽 유두가 없었다. 피해자는 살해 당할 당시 생리중인 것으로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해자의 이름이 진 엘로이로 밝혀졌다. 전 남편 아만드 엘로이와 아들 제임스 엘로이가 불려 왔다. 남편 아만다 엘로이는 이제 주중에도 아들과 지낼 수 있다는 점에 기뻐했을 뿐, 전처의 사망에 대해 별다른 슬픔을 나타내지 않았다. 10살 난 아들 제임스 엘로이 쪽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아버지와 지내는 편이 더 좋았으므로 불만이 없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죽음에 다소 냉담하게 반응했다.

초동 수사 결과 피해자는 드라이브인 식당에 두 차례 들렀으며, 라틴계 남자와 함께였다는 증언이 확보된다. 차량 모델과 라틴계 남자라는 결정적 단서와 목격자가 있었으므로 범인을 찾는 작업은 단순해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이 이상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한편, 10살에 어머니를 잃은 제임스 엘로이는 아버지와 함께 살며 이모가 맡아둔 보험금을 거짓말로 우려내며 자유롭게 살았다. 정크 푸드를 먹고 도둑질을 했다. 유일한 취미라면 범죄소설과 범죄드라마에 탐닉하는 것이었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나는 어머니가 싫었다. 엘 몬테도 싫었다. 이름 모를 살인자가 나에게 근사한 새 인생을 선물해준 것이었다.(108p)

그전까지 내가 어머니를 싫어한 것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기 위해 어머니를 싫어했던 것이다.(118p)

어느 날 밤 나는 샤워하고 몸을 닦는 어머니를 보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반쯤 벗은 모습, 알몸, 슬립만 걸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슴이 출렁이는 모습도. 왼쪽 유두가 추위에 빳빳해진 모습도 보았다. 어머니 다리 사이의 붉은 부분도 보고, 수증기에 피부가 상기되는 모습도 보았다. 나는 어머니를 증오했고, 어머니를 욕망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죽어버렸다.(119p)

제임스 엘로이는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강간 살해라는 끔찍한 사건을 관통하며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건강하게 해소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욕망하면서 증오하는(자신을? 아니면 어머니를?) 기묘한 정신상태로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후 아버지가 사망하고 군대에서 쫓겨난 그는 마약과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지내다 노숙자가 되고 만다. 어머니 '빨간 머리'에 대한 성적 욕망과 죄책감은 무기력증과 자기혐오를 낳았고 마침내 그는 죽음 직전까지 추락한다.

때때로 제임스 엘로이는 이 모든 정신적 불구상태가 어머니에 대한 비뚤어진 사랑의 형태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도둑질과 관음증, 스토킹, 그리고 마약과 알콜 의존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러다 블랙 달리아 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는 블랙 달리아를 어머니 '빨강머리'와 동일시 한다. 블랙 달리아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어머니 사건을 해결하는 것을 혼동했고, 불균형한 몸매와 특이한 모양의 가슴에 강하게 끌리며 엄청난 양의 책을 훔쳐 읽었다.

그러다 골프 캐디 일을 우연히 하게 된다. 약간의 전기가 마련되자 범죄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첫 소설 <브라운 진혼곡>을 1981년에 발표하고 이듬해에 <클랜데스틴>을 연달아 발표하며 인기를 끈다. 1987년 <블랙 달리아>를 발표한 제임스 엘로이는 문단과 독자를 사로잡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내 어둠의 기록>은 그가 범죄소설 작가로 확고한 자리를 잡은 이후 자신을 평생에 걸쳐 괴롭히던 어머니의 사망사건을 재조사하며 자신의 심리상태를 기록한 르포르타주이다.

제임스 엘로이는 전직 형사와 팀을 이뤄 30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어머니 '빨강 머리'사건을 재조사한다. 어머니의 나신이 찍힌 사진을 다시 열람하고, 당시 인터뷰와 용의자를 재검토하며, 유사한 사건을 발굴하여 수사 영역을 확장한다. 그 모든 '대면'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극복이라는 이연된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이었다.

진 엘로이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제임스 엘로이는 자신의 성벽과 과거를 낱낱이 글로 적는다. 필요 이상 자세한 이 기록 <내 어둠의 근원>은 과연 '씻김굿' 역할을 해냈을까?

그로테스크한 욕망과 죄책감의 양 극단에서 정신이 붕괴되어 노숙자의 삶을 살다 겨우 현실로 돌아와 발표한 제임스 엘로이의 소설들은 무척 기괴한 모습을 띤다. 그 '어둠의 근원'이 이 책에 담겨 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282198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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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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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무 살 생일 날, 그녀는 롯폰기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원래는 친구가 대신해 주기로 했지만, 감기가 도져 몸져 눕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레스토랑에는 사십 대 중반의 플로어 매니저가 있었는데 그는 저녁 여덟 시가 되면 어김없이 6층의 사장실로 식사를 가지고 갔다. 사장의 식사는 언제나 '치킨일 것, 그 외에는 어떻든간에 상관이 없는' 메뉴였다.

그런데 그날은 매니저가 갑작스런 복통으로 병원에 가는 바람에 별 수 없이 그녀가 저녁을 가지고 6층으로 올라갔다.

사장은 작달막한 사람이었는데 말쑥하게 차려입은 채였다. 그는 그녀에게 약간의 호기심을 품고 몇 가지 질문을 하다가 그녀가 오늘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장은 그녀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얼마간 장난스런 기분으로 사장에게 맞춰주었다. 사장은 소원을 듣더니 다른 소원, 즉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미인이 되고 싶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어도 괜찮은지 다시 묻는다.

그녀는 '하지만 그런 것은 만일 실제로 이루어져버리면 그 결과 나 자신이 어떤 식으로 변해갈지, 상상도 안되고 감당을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미 말한 소원을 고수하기로 한다.

사장은 힘차게 손바닥을 따악 하고 맞댄 뒤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 뒤로 그녀는 사장을 볼 수 없었고, 다음 해에는 그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어 인연이 끊어진다.

'나'는 그녀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질문은 그 소원은 이루어졌는가 였다. 그녀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 소원은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두 번째 질문은 그 소원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딸, 개와 함께 살며 아우디를 타고 일 주일에 두 번 친구들과 테니스 치는 인생이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간이란 어떤 것을 원하든, 어디까지 가든, 자신 이외의 존재는 될 수 없는 것' 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내 입장이었다면 어떤 소원을 빌었을 것 같으냐고 되물었다. '나'는 스무 살에서 너무 멀리 와서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당신은 틀림없이 벌써 소원을 빌었을 걸' 이라고 말했다.

그림은 독일 출신 일러스트레이터 카트 멘시크가 그렸는데 팝 아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소설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녀가 빌었던 소원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소설에서는 두 가지 힌트가 나온다. 첫 번째는 소원에서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아직 단정할 수 없다는 것, 두 번째는 보통의 사람들이 바라는 부자라든가, 권력이라든가, 외모라든가 하는 것과 관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의문이 샘 솟는다. 지금 그녀가 대화하고 있는 '나'는 그녀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그녀는 중산층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데 '나'와 과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상대편의 과거에 대해, 특히나 '스무 살 생일이라는 특별한 날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라면 이성, 특히나 호감을 품고 있는 상대가 아닐까?

다시 힌트로 돌아가 그녀는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지만 소원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 않았다. 즉, 자상한 남편과 귀여운 아이들, 그리고 윤택한 삶이 그녀의 소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쩐지 로맨틱하면서도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드는 단편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281659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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