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38
렉스 스타우트 지음, 황해선 옮김 / 해문출판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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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 소개란에는 다음과 같은 거창한 말이 씌여 있다. "렉스 스타우트는...4살때 성경을 읽고, 10살때 고전 1천권을 독파했으며, 15살 때 시를 발표... 문학의 천재..." 그런 "문학의 천재" 께서 1934년 48세 되던 해에 추리소설을 발표했으니, 그저 문학의 천재로로만 남아줬으면 좋았을 걸 굳이 손수 책을 쓰시어 죽도 밥도 아닌 이따위 것을 읽고 내가 정말 분통이 터져서...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날 마리아 머페이란 여인이 자신의 오빠가 실종되었다며 네로 울프란 탐정을 찾아온다. 오빠의 이름은 카를로 머페이, 금속세공사로 일하고 있다. 경기가 좋지 않아 책력 봐가며 밥먹는 처지에 빠진 오빠가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가 귀농이라도 하겠다는 말을 한 게 엊그제인데, 동생에게 돈문제가 잘 해결될 것도 같고 어쩌고 하다가 사라진 것이다.

이에 140kg에 달하는 몸무게의 둔해 빠진 탐정 울프는 자신의 수족 역할을 하는 아치에게 머페이의 하숙집 가정부 안나 피오레를 데려오라고 하여 족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머페이가 신문 기사를 오려내었으며, 그 신문기사에는 저명한 대학총장인 피터 올리버 바스토란 인물이 골프를 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내용이 실려있음을 알게 된다.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통해 카를로가 골프채에 '약간의' 장치를 하여 골프공을 치면 독침이 발사되도록 설계를 해주었고, 일의 전모를 알아차린 카를로가 모종의 인물에게 살해당했음을 알게 된다.

독에 의한 살인임을 알면서도 심장마비라고 진단한 의사가 용의선상에 올라 조사해보니, 의사는 범인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총장 부인일거라 생각하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고, 골프채 가방이 없어진 것도 마찬가지의 우려로 딸이 저지른 짓이란 것을 알아낸다. 함께 골프를 친 아들도 딱히 아버지가 죽어서 이득 보는 것이 없다. 하여, 우연히 그날 함께 골프를 친 옆집 사는 E.D.킴벌과 아들인 매누엘 킴벌도 내친김에 조사해보았지만 얘네들도 별다른 혐의가 없어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만다.

그럼, 추리소설이니까 탐정이 추리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탐정은 당일 캐디를 했던 소년들을 모아다가 먹을 걸 주면서 그날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빠짐없이 얘기를 시켜 듣다 보니, 아니! 그날 우연히 E.D.킴벌의 골프채를 총장이 빌려서 친 일이 있다지 않는가! 그럼 실제 죽어줬어야 하는 사람은 E.D.킴벌이다. 그런데 탐정의 손발 노릇을 하는 아치는 어쩐지 첨부터 그 아들놈이 맘에 들지 않았었고, 게다가 이름도 마누엘이라는 남미계통과 킴벌이라는 영미계 이름의 혼합이라 왠지 범죄자 냄새가 난다. 이제는 마음껏 표적수사를 시작한다. 

E.D.킴벌을 데려다가 얘기를 자꾸 시키다 보니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편 가정부는 범인으로부터 돈을 받고 입을 꾹 다물고 청맹과니 행세를 하고 있다. 탐정이니까 이쯤해서 추리를 하려나 했더니 자신의 수하를 시켜 한바탕 강도짓을 벌여 안나가 받은 돈을 죄다 뺏어버려 안나로부터 입을 열게 만들려고 획책한다. 그런데, 얼씨구나, 입만 여는게 아니고 알고봤더니 안나라는 요 깜찍한 것이 초반에 나자빠진 카를로로부터 증거 일체를 봉투에 담긴채로 받아 보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증거 일체를 건네 받은 탐정이라는 이름의 조사관 네로 울프는, 140kg의 몸을 이끌고 법정에 증인으로 나가는 것이 싫은 나머지 계략을 꾸며 E.D.킴벌과 범인 매누엘 킴벌이 동반 자살을 하도록 유도하고, 울프와 아치는 한없이 유쾌해진다...그리고 책을 다 읽은 나는 기분이 나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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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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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대학교 2학년 때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뒷맛이 좋지 않았었다. 당시의 나는 인간의 자유란 '투쟁'을 통해서 '쟁취' 될 수 있는 것으로만 여겼던 때였다. 딱딱한 사고의 틀에 책들을 꿰어 맞추던 때였고, <그리스인 조르바>는 라쌀레의 조합이론쯤에 경도된 작가가 현실을 도피하는 내용으로 매도하였었다. 

며칠 전 이웃에 사는 친구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싶다고 지나가는 말로 얘기하기에 나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책을 꺼내보니 누렇게 변색이 되어 종이가 나달나달 하다. 새로 살까 하다가 역자가 이윤기임을 확인하고 조심조심 한장씩 넘겨가며 읽었다. 회사 끝나고 집에 돌아와 자기 전까지 행복한 일주일을 보냈다.

화자인 나는 그리스 독립투쟁을 위해 떠나는 친구와 헤어진 직후 크레타 섬에 갈탄광을 하나 세내어 들어온다. 나는 갈탄광에서 자신도 노동에 참여하고 수익은 노동자들과 공평하게 나누는 일종의 노동자조합 공동체를 이루어 '책벌레 족속들과는 거리가 먼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 먹었으며, '내 삶의 양식(樣式)을 바꾸려고' 결심한다. 이런 그에게 수프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든다며 조르바란 사람이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초인(超人)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을 가르..'며 살아온 화자에게 조르바의 삶의 태도는 모든 면에서 신선하다. 그는 녹로를 돌리는데 방해가 된다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내었으며 '침대에서 자신을 부르는 여자의 청을 거절할 남자는 신이 용서치 않는다며' 여관 주인인 과부 오르땅스에게 집적댄다. 케이블을 사러 갔던 도시에서는 창녀에게 7천 드라크마를 쏟아부어 노닥거리는가 하면 수도승에게 수도원을 방화하도록 조장하기도 한다. 독신(瀆神)을 주저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에만 집중하는 그에게는 하나님이나 악마나 동일할 뿐이다.

말라르메를 읽던 어느날 나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시편들이...지적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임을 깨닫고, '충분히 먹고 마시고 사랑한 것도,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에서 모든 것을 비운 공(空)의 상태인 부처에 너무 일찍 경도된 자신을 반성한다.

모든 것에 감탄하고 처음 본것처럼 신선함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는 조르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되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살아가는 조르바의 삶이지만 나에게 있어 조국과 애국심은 여전히 깨어지기 힘든 영역이었다. 어느날 조르바에게 전쟁에 참가한 적이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셔츠를 벗어던지고 총알과 칼로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상반신을 보여주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준다. 비정규군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던 어느 날, 그리스인을 살해하는 불가리아 신부를 죽이게 된다. 얼마 후 다섯명의 아이들이 구걸하고 있는 것을 보고 누구냐고 묻는 조르바의 질문에 바로 얼마전 자신이 살해한 신부의 아이들임을 알게 된 조르바는 아이들에게 보급투쟁을 위한 돈을 모조리 털어준다. 그는 그 일 이후로 '조국으로부터 구제받고, 신부들로부터 구제받고, 돈으로부터 구제받아... 해탈의 길을 찾고 인간이 되었다' 고 말한다. 그는 '터키 놈, 불가리아 놈, 그리스 놈...하며 사람의 목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질, 강간을 하며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가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 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 짓는다. "내 조국이라고 했소? 당신은 책에 씌어져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고 있소? ...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는 그 후 마을의 과부에게 느끼는 자신의 욕망을 어느날 실현함으로서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내려온다. 하지만 상사병에 걸려 죽은 청년의 아버지에 의해 과부는 다음날 처참히 살해당하고, 오르땅스 부인 역시 감기가 심해져 죽어버린다. 갈탄광이 수지를 맞추지 못해 벌채한 나무를 케이블로 실어 바다로 내려보내 수출하려는 계획도 실패하고 빈털털이가 된 나는 조르바로부터 해변에서 춤을 배운 후 다음날 헤어진다.

화자가 서른 다섯쯤의 일이며 작가 자신의 자전적 기록임으로 보아 이 책의 배경은 1919년부터 1922년까지의 그리스-터키 전쟁과 1929년 세계 대공황 사이로 보인다. 조르바가 읽었던 책은 '뱃사람 신밧드' 한 권 뿐이었다고 하지만 그는 전쟁이 누구 때문에 일어나는지, 제국주의자들의 이성없는 욕심에 희생되었던 것이 누구인지 스스로 체득한 것이다.

조르바의 경험을 읽으면서 김남주의 시 <예술지상주의>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부르조아 새끼들의 위선이 거만이 구역질나서 보들레르는/자본의 시궁창 파리 한복판에 악의 꽃을 키웠다/랭보는 꼬뮌 전사의 패배에 절망하여/문명의 절정 빠리를 떠났다/...대한민국의 순수파들 절망도 없이/광기도 자학도 없이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체험을 통해 남이 주입한 사상이 아닌 스스로의 머리와 가슴으로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 그런 조르바를 보면서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내려와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화자의 이야기 덕분에 일주일 내내 행복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고, 나도 조금은 더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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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리의 집
야베 타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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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방학이면 나와 우리 가족은 고모집에 방문한다. 올 여름에는 누나가 입시 때문에 엄마와 함께 집에 남아서 아빠와 나만 가게 되었다. 고모집에는 고모부와 할아버지, 할머니, 사오리 누나가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몇달 전에 감기가 심해져 돌아가셨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고모집에 도착했는데 고모가 온통 몸에 피갑칠을 한채 문을 열어준다. 사오리 누나는 어딨냐는 질문에 가출했다는 석연찮은 대답이 뒤따른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세탁기 밑에서 손가락 하나를 발견한다. 할머니가 감기로 돌아가신게 아닌것 같은 의심에 집안 구석구석을 나는 뒤지기 시작하고 여기 저기서 신체의 일부를 발견한다. 할머니와 사오리가 살해당한 것 같은 느낌으로 계속 집을 뒤지는 나는 고모에게 들켜 귀를 잘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뒷자석에서 죽은 줄 알았던 사오리 누나가 살해당할까봐 차에 숨어 있었음을 알게 되고 두사람 분의 시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였으며, 내가 본 할아버지는 아마도 귀신이었을거라고 사오리 누나는 말한다.

 

이 책은 <제13회 일본호러소설대상> 장편상 수상작이다. 응모작이 이 한 편 뿐이었고, 수상작을 안 낼 수는 없는 절대적인 규정이 있다. 그럼 이해가 간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할머니가 왜 죽었는지, 왜 집안 곳곳에 시체 토막을 숨겨야 했는지, 고모는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는지, 아버지는 왜 이런 것들에 대해 모른 척 하는지, 아무런, 정말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이대로 끝내기는 너무했다 싶었는지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가 '난 다른 사람이 어찌 되든 아무 상관 없다'고 바락 바락 악을 쓰긴 하는데, 정말 못봐줄 지경이었다. 하이텔 시절 피씨통신 동호회에 재미삼아 올라오는 그런 공포괴담 수준도 안될 지경이다. 게다가 역자 역시 번역을 제대로 한건지 의심이 갔다. 군데 군데 뜻이 이어지지 않는 대사들이 있고, 일본식 도치법을 그대로 번역해놔서 읽기 굉장히 거슬린다.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있다면 권해줄 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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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천국 - 1997 제2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호경 지음 / 민음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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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회사원인 김, 군복무중인 하사 박, 그리고 대학생 이가 마약에 중독되어 가는 이야기이다. 

회사원 김은 어느날 구로에서 인천으로 가는 총알택시를 탔다가 교통사고의 증인이 된다. 경찰서에서 택시기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고, 택시기사로부터 드링크제를 얻어마신 후 세상 모든 것이 시시하고 호연지기가 솟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코 수술을 한 후로 두통에 시달려 왔는데 그 드링크제를 다시 먹으면 두통이 없어질 것만 같고, 어렴풋이 마약성분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택시기사들이 잔돈을 바꾸는 노점 좌판이 마약 공급처임을 알게 된 김은 계속해서 마약을 복용하고 결국 돌출행동으로 회사에서 쫓겨난다.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김은 퇴직금으로 경마를 시작하여 돈을 다 날리게 되고 비슷한 이유로 노숙자가 된 대학생 이와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하는 처지에 떨어진다. 경찰에 잡힌 김은 경찰로부터 갖은 폭행과 구타에 시달리며 한때 자신이 사랑했었던, 그러나 마약에 중독된 후 현실감각을 잃어버리고 강간을 했던 최와 경찰서에서 대면한다.

대학생 이는 서점에서 책 도둑 잡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어느날 전철을 타고 가다가 청량리역에서 철로에 여자 지갑이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주우러 갔다가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끌려가 주사를 맞는다. 주사를 맞은 이후부터 불쾌한 냄새에 시달리게 되면서 주사를 맞기만 하면 이런 증상이 없어지리라 생각한다. 스스로 청량리 역사의 지하로 가서 주사를 맞기 시작하는 이 역시 돌출행동으로 서점에서 쫓겨나고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지만 거기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심각한 중독상태에서 교수를 폭행하여 학교에서 쫓겨난 이는 노숙자가 되어 김과 같이 소매치기를 시작하고 김이 잡혀간 후에는 여장을 하고 돌아다닌다.

군복무중인 하사 박은 휴가중에 서울역에서 어떤 여자로부터 사탕을 받아먹고 급작스런 성욕구에 창녀촌을 찾는다. 사탕에 뭔가 들어있었을거란 짐작을 하고 사탕을 건내준 여자를 찾아 혼쭐을 내줘야 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다시 사탕을 받아먹은 박은 귀대하는 기차에서 애딸린 촌 아낙과 기차 화장실에서 성행위를 하다가 사람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귀대 후에도 신병을 성희롱하여 결국 제대 당한다. 여자를 찾아가 분풀이를 하려던 박은 의지와 무관하게 여자와 한패가 되어 서울역에서 사탕을 나눠주는 일을 반강제로 하게 된다. 스스로 서울역 파출소에 걸어갈 수 있음에도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다가, 어느날 벌거벗은 채 서울역 광장을 미친사람처럼 뛰어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평범한 성인 남성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과정은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에 다녀와서 회사에 취직하는 수순일 것이다. 김, 박, 이는 그야말로 평범하기만 한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마약에 접하게 되는 과정도 이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난다. 딱히 의지가 약하거나 비정상적인 사고의 인물이 아니었지만 일단 마약을 접한 후의 그들은 스스로 마약을 찾게된다. 김은 마약을 통해 두통이 사라지고 앞날을 예측할 힘이 생기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고, 이는 온갖 더러운 것이 보석으로 보이고 참을 수 없는 냄새들이 사라지며, 박은 자신이 힘이 세지고 성욕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현실로 돌아온 그들은 벗어나야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계속해서 마약에 의지하게 되고, 사고의 틀이 붕괴되고,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 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김이 경찰에 잡혀간 후 김이 마약중독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오고, 마약공급책으로 지목한 좌판에서도 마약이 아닌 미숫가루만 나온다는 점이다. 위약효과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엔 김의 상태가 너무나 심각하고, 마약공급책이 경찰의 급습 사실을 알고 마약을 감추었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또 이가 주사를 맞고 박이 사탕을 먹는 과정도 실제 마약에 중독된 과정이란 걸 의심케 할 대목이 없다. 작가의 의도가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마약에 중독되건, 혹은 중독되지 않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어려운 현재를 그리기 위한 트릭이었다면 약간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오늘의 작가상>은 너무 편차가 심하다. <사람의 아들>, <살아남은 자의 슬픔>,<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와 같은 작품이 있는 반면, 도무지 수상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흰 뱀을 찾아서>, <길 위의 집> 같은 작품도 있다. <낯선 천국>은 김, 이, 박 각자의 얘기로 구성되었으며 때로 인물들이 교차되기도 한다. 김과 이는 접점이 있는데, 박은 따로 논다.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아니면 박을 교차시킬 만한 접점을 만들지 못했는지는 모르겠다. 환각상태에서 인물의 심리는 억지스럽지 않지만, 결말로 갈 수록 소설의 구심점이랄까 하는 것이 흐트러지는 느낌이다. 이는 세 인물 모두 마약에 중독되어버렸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대로만 갈 수 없었던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책 말미에 이문열은 '작가는 분발과 정진으로 내 부족한 안목에 복수하라' 라는 심사평이 있다. 아마 이문열은 이 작품에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지만 오늘의 작가상에는 다른 심사위원의 선정으로 당선이 된 모양이다. 그 후로 작가는 분발과 정진을 했을지 어땠을지 잘 모르겠다. 호기심이 일어 작가가 그 이후에 쓴 책이 무언지 찾아봤지만 몇 권 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광화문 일대와 서울역 풍경이 많이 나온다. 명동에서 근무하던 때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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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길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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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독서였다. 작중 인물들의 행동에는 아무런 개연성이 없었고, 순간순간의 대사는 발작적이기만 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겠지만, 소설적 형상화에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림 : 친구들에게서 곡을 받아 '먼길' 이란 노래를 부르던 가수 한림은 어느날 모처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곡을 주었던 친구가 반정부인사였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에게 그런 노래를 준 친구를 원망하는 한편, 창녀촌 방 호수까지 대고서야 풀려났던 기억을 넌더리내며 그는 미국으로 이민오고, 정착한 후에는 역마살이 끼인사람처럼 행동하다가 아내의 부정을 기회삼아 이혼하고 삶을 '즐기'고 있다.

 

한영 : 대체적으로 안정적이던 직장을 다니던 그는 어느날 길거리에 줄지어 가는 사람들을 보고 답답함을 느낀다. 우연히 미국 여행을 한 후 막연히 '새로운 시작'을 바라게 된다. 정신박약아를 동생으로 둔 서연과의 결혼에서 장애인 아이가 태어날 것을 두려워하던 그는 마침내 미국 이민을 결심하고 서연과 헤어진다. 떠나기 전 서연을 만나 서연과 함께 가자고 하지만 서연은 한영에게 떠나서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며 거절한다. 8년이 지난 후 미국에서의 삶도 새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된 한영은 서연에게 편지를 보낸다.

 

명우 : 대학 2학년 때에 시위로 1년 반동안 옥살이를 한 후에 자폐증 등을 앓는다. 미국으로 여행을 왔다가 비자 기간이 만료되자 형이 영주권 신청을 하든가 당장 돌아가든가 하라는 말을 듣고 돌아갈 곳이 없음을 안 명우는 난민비자를 신청하여 영주권을 획득한다.

 

도무지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 한림의 이혼, 한영의 이민, 명우의 괴로움 모두 수긍이 가지 않는다. 

고래를 잡는다는 둥 옛 꿈을 쫓는 듯한 한림은 왜 이혼을 했을까. 역마살이나, 지긋지긋함 때문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어느날 트집잡아 하듯 이혼을 해버린다.

한영이 이민길에 오르는 것이 '새로운 삶' 에 대한 동경이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어떤 질곡속에서 좌절하고 방황했는지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국 여행을 온 후 홀딱 반했고, 때마침 사귀던 서연의 남동생이 정신박약아라서 태어날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걸까. 그런 상황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청년이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결정을 하기는 쉬운가. 단지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줄지어 가는 사람'들에게서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낀 것이 당시 남한사회의 답답함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너무나 쉽게쉽게 소설을 써나가는 것 아닌가. 게다가 잘 나가는 직장을 때려치우는 이유도 그런 비슷한 느낌 때문이라면 도대체 이 소설에서 '생활'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명우에 와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대학 2학년 때에 1년 반동안 옥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모처를 점거한 농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좋게 봐주려 해도 대학 2학년생이 1년 반 옥살이 후에 미국으로 와서 난민비자를 받는다? 작가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중언부언 늘어놓지만 구차할 뿐이다. 게다가 고등학교때부터 운동권이었을리도 없으니 명우의 활동 기간은 1년 남짓일 뿐이다. 그런 그가 미국으로 난민비자를 신청하는 등의 상황이 신념의 포기, 배신 등의 감정을 느끼며 '말 못하는' 마네킹과의 밤시간 동안을 편안해 할 만큼 설득력 있는지는 아무리 개인차를 감안해도 의문이다.

특히나 한림이 조셉에게 '밤길'을 영어로 가르쳐주어 노래를 부를 때에 "개자식! 영혼까지 팔아먹었어!"라고 외치는 장면에서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어떤 면이 영혼을 팔았다는 말일까. '밤길'이란 노래가 남한의 질곡을 표현한 노래인데 외국인에게 유행가 가르치듯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도한 측면이 있고, 영어로 가르쳤기 때문이라면 이건 조악한 민족주의적 시각에 불과하지 않은가. 라 마르세예즈를 한국어로 부르면 프랑스인이 수치심이라도 느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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