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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길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1995년 9월
평점 :
품절
불편한 독서였다. 작중 인물들의 행동에는 아무런 개연성이 없었고, 순간순간의 대사는 발작적이기만 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겠지만, 소설적 형상화에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림 : 친구들에게서 곡을 받아 '먼길' 이란 노래를 부르던 가수 한림은 어느날 모처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곡을 주었던 친구가 반정부인사였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에게 그런 노래를 준 친구를 원망하는 한편, 창녀촌 방 호수까지 대고서야 풀려났던 기억을 넌더리내며 그는 미국으로 이민오고, 정착한 후에는 역마살이 끼인사람처럼 행동하다가 아내의 부정을 기회삼아 이혼하고 삶을 '즐기'고 있다.
한영 : 대체적으로 안정적이던 직장을 다니던 그는 어느날 길거리에 줄지어 가는 사람들을 보고 답답함을 느낀다. 우연히 미국 여행을 한 후 막연히 '새로운 시작'을 바라게 된다. 정신박약아를 동생으로 둔 서연과의 결혼에서 장애인 아이가 태어날 것을 두려워하던 그는 마침내 미국 이민을 결심하고 서연과 헤어진다. 떠나기 전 서연을 만나 서연과 함께 가자고 하지만 서연은 한영에게 떠나서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며 거절한다. 8년이 지난 후 미국에서의 삶도 새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된 한영은 서연에게 편지를 보낸다.
명우 : 대학 2학년 때에 시위로 1년 반동안 옥살이를 한 후에 자폐증 등을 앓는다. 미국으로 여행을 왔다가 비자 기간이 만료되자 형이 영주권 신청을 하든가 당장 돌아가든가 하라는 말을 듣고 돌아갈 곳이 없음을 안 명우는 난민비자를 신청하여 영주권을 획득한다.
도무지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 한림의 이혼, 한영의 이민, 명우의 괴로움 모두 수긍이 가지 않는다.
고래를 잡는다는 둥 옛 꿈을 쫓는 듯한 한림은 왜 이혼을 했을까. 역마살이나, 지긋지긋함 때문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어느날 트집잡아 하듯 이혼을 해버린다.
한영이 이민길에 오르는 것이 '새로운 삶' 에 대한 동경이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어떤 질곡속에서 좌절하고 방황했는지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국 여행을 온 후 홀딱 반했고, 때마침 사귀던 서연의 남동생이 정신박약아라서 태어날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걸까. 그런 상황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청년이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결정을 하기는 쉬운가. 단지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줄지어 가는 사람'들에게서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낀 것이 당시 남한사회의 답답함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너무나 쉽게쉽게 소설을 써나가는 것 아닌가. 게다가 잘 나가는 직장을 때려치우는 이유도 그런 비슷한 느낌 때문이라면 도대체 이 소설에서 '생활'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명우에 와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대학 2학년 때에 1년 반동안 옥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모처를 점거한 농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좋게 봐주려 해도 대학 2학년생이 1년 반 옥살이 후에 미국으로 와서 난민비자를 받는다? 작가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중언부언 늘어놓지만 구차할 뿐이다. 게다가 고등학교때부터 운동권이었을리도 없으니 명우의 활동 기간은 1년 남짓일 뿐이다. 그런 그가 미국으로 난민비자를 신청하는 등의 상황이 신념의 포기, 배신 등의 감정을 느끼며 '말 못하는' 마네킹과의 밤시간 동안을 편안해 할 만큼 설득력 있는지는 아무리 개인차를 감안해도 의문이다.
특히나 한림이 조셉에게 '밤길'을 영어로 가르쳐주어 노래를 부를 때에 "개자식! 영혼까지 팔아먹었어!"라고 외치는 장면에서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어떤 면이 영혼을 팔았다는 말일까. '밤길'이란 노래가 남한의 질곡을 표현한 노래인데 외국인에게 유행가 가르치듯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도한 측면이 있고, 영어로 가르쳤기 때문이라면 이건 조악한 민족주의적 시각에 불과하지 않은가. 라 마르세예즈를 한국어로 부르면 프랑스인이 수치심이라도 느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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