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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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필요한 사람은 사실 '스티븐 호킹'인지 모르겠다. 루게릭 병이라 부르는 '근 위축성 측색 경화증'을 앓고 있는 호킹은 어느 누구보다도 신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런데 반대로 뒤집어보면 이미 신의 손길이 호킹의 어깨위로 드리웠기에 굳은 상태의 몸과는 다르게 그의 뇌는 여전히 활발한 지적 활동을 벌이는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호킹은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자신의 육체적 제약을 뛰어 넘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목소리는 비록 몸 밖에서 울리기는 하지만 기계의 도움을 받아 강연도 하곤 한다. 이번 신간을 통해 신이 필요없다고 주장한 그는 좀 더 냉정하게 자신과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이 스친다.

  호킹은 책 첫머리에서 '철학은 이제 죽었다'라 고 못박는다. 엥? 철학이 죽었다고? 앞으론 생각할 필요 따위는 없는 건가? 글쎄. 얼핏 보면 호킹이 무리수를 두는 발언으로 오해할 수 있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선을 그어버리는 것 이상으로 벽돌을 올리고 그 사이를 시멘트로 발라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게 여길 수 있다. 오해의 여지가 있음에도 왜 호킹은 철학은 죽었다고 언급했을까? 그것도 '이제'라는 부사를 집어넣은 이유는 뭘까?

모형 의존적 실제론

  철학은 사람들 머릿속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생각, 사고, 느낌들을 거두어 언어라는 도구로 질서를 부여하는 학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각 비슷한 생각들끼리 묶어두고 못을 박는다. 못이 박힌 생각의 틀은 다른 생각의 틀과 대치하기도 하고 반대로 흡수하기도 한다. 결국, 이런 틀은 사고의 정형화 내지는 구체화이며 생각의 흐름에 대한 모델링 작업이다. 그런데 이 책「위대한 설계」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우주에 대한 모델링, 실재에 대한 모델링, 존재에 대한 모델링이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똑같은 모델링(구체화, 모형화)을 위한 학문인데 왜 유독 철학만 지워져야 할까?


  호킹은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장(
)에서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라는 입장을 견지(堅持)한다. 그렇다면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란 도대체 뭘까? 책을 읽어나가며 생각했던 것을 차근차근 풀어보고자 한다. 

  호킹은 우리 세계(우주)를 실재의 세계로 보고 있다. '호킹이 이 세계를 실재라고 생각한다고?' 당연한 것을 호킹은 왜 언급했을까? 당신도 나도 당연히 실재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세상이 실재인 것을 또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뜬금없다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대답할 만한 성질의 질문도 아니다. 보통 우리가 관습적으로 하는 행동 중에 꿈 같은 일(사건)이 벌어지면 자기 볼을 꼬집는다. 사건이 일어난 곳이 현실이라고 강한 확신이 든다면 남의 볼을 꼬집기도 하지만 어쨌든 아픔을 느끼는 순간 꿈 같은 일은 꿈속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인지한다. 바로 그거다. 통증을 느끼는 것. 그것이 현실이라는 가장 큰 이유이다. 통증은 하나의 논리 과정이다. 볼을 꼬집음으로써 생리학적 도미노를 넘어뜨리며 우리는 통증을 느낀다. 또 옆 사람도 자신의 볼을 꼬집으면 똑같이 통증을 느껴야 한다. 호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거다. 실재라는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볼을 꼬집어봐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다. 

  볼을 꼬집는 것. 이것은 앞서 말한 논리와 일관성을 의미한다. 볼을 꼬집었는데 볼이 아픈 것이 아니라 배가 아프다거나 어떠한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정말로 꿈이거나 아니면 현실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다. 현실의 문제는 질병에 걸렸다는 의미이다. 어쨌든 논리가 앞뒤 모순을 해결한다. 또 옆 사람의 볼을 꼬집으면 당연하게도 옆 사람도 볼이 아파야 한다. 즉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논리와 일관성은 '모형'을 존재케 하는 두 가지 축이다. 우리는 그렇게 모형을 세우고 그런 모형에 의지하며 세상을 살고 있다.

  고대인들은 과연 논리와 일관성이 없었을까? 그들도 논리와 일관성이 있었다. 하늘이 움직이니 천동설을 생각했고 어느 곳에서 하늘을 살펴보아도 시시각각 변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므로 천동설을 유지하려는 일관성도 갖추었다. 결국 그들은 '천동설'이라는 모형을 완성 지었다. 물론 지금 관점으로는 천동설이라는 모형은 논리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그것이 바로 논리였다. 

  다른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책에는 주전원을 가지고 예를 들었지만 나는 다른 예를 든다.  고대인들은 지구의 대륙 대부분이 북반구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분명 남반구에도 지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거대한 대륙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였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라틴어로 Terra Australis(혹은 Terra Australis incognita)라 불렀는데  "the unknown land of the South", 즉 "알려지지 않은 남쪽의 땅"을 의미한다. 결국 시간이 흘러 남반구에서 대륙을 발견한 후에 "남쪽의 땅"이라는 의미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부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톨레마이오스는 Terra Australis에 걸맞는 대륙에 대한 조건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했던 것보다 더 확장했고, 나중에 해양을 통한 상업과 탐험이 활기를 띠면서 사람들은 Terra Australis에 대한 생각이 잘못된 이론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호주 대륙을 발견하고 이름을 버리기 아까워 단순히 남쪽 땅이라는 의미의 오스트레일리아로 부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나중에 남극 대륙을 발견하고 붙일 이름이 없자 '북쪽 반대 땅'이라는 의미의 'antarctica'로 부르기 시작한다.) 자, 가보지는 않았지만 왠지 지구 남반구에도 대륙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보니 거대한 땅이 있었다. 그들은 정말 예측을 잘 하고 건실한 모형을 세운 것일까?

  고대인들이 나름의 논리와 일관성을 갖추었다 해도 뭔가가 모자란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념 혹은 믿음은 갖추었을지망정 여러 근거를 가리키는 데이터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그들은 한 두가지 측면만 보고 모형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데이터 없는 모형, 이것이 고대인들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어쩔수 없이 채택해야만 했던 모형이다. 그래서 호킹은 어느 정도 과학과 기술이 꽃피우는 지금부터라도 데이터에 대한 믿음을 갖자는 의미로 '철학은 이제 죽었다'라는 말을 남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라는 입장을 채택할 것이다. 이 입장에 서면, 물리학적 이론 혹은 세계상 (대개 수학의 성격을 띤) 모형과 그 모형의 요소들을 관찰 자료와 연결하는 규칙들이다. 이 입장은 현대 과학의 해석에서 기본 골격의 구실을 한다.
p. 54 <실재란 무엇인가?> 중에서...

즉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형은 추론이나 관찰을 통해서 그려낼 수는 있지만, 세세한 데이터 없이는 엄밀한 모형을 구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 모형도 데이터 부족으로 말미암아 잘못 그려낸 모형일 뿐이다. 주전원 모형은 관찰과 들어맞지 못했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만일 틀렸을 경우에 모형을 반증할(모형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는, 미래 관찰에 관한 상세한 예측들을 내놓을 것>이라는 항목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현대 과학 또한 관찰할 수 없는 것까지도 이론(모형)으로 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관찰과 부합해야 한다는 항목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호킹은 그래서 한가지 더 언급을 한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부족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모형을 예측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말이다. 즉, 모형에 오류가 발견되면 모형을 버리기 이전에 수정을 가해야 하며 이는 '우아한 틀 안에서 보장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아한 틀 안에서의 예측은 이론이나 물질이 존재할 확률이 커진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은 복잡성으로 인하여 우아함이 상쇄되었다. 모형의 우아함을 따지지 않는다면 지금도 우리의 궤도에 계속 원들을 추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본원리

 
자연에 대해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다. 뭐, 환경 오염에 대한 걱정부터 천연자원의 부족에 대한 논의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다. 철학에서 파생된 다양한 학문을 통해 '자연'에 대해 인문학적 견해를 부여할 수도 있고, 과학을 통해 이룩한 기술로 '자연'과는 좀 다른 '인공 자연'이라는 것도 구현할 수 있다. 여기서 '깨끗한'이라는 형용사를 넣어 자연의 속성을 제한해보자. '깨끗한 자연'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 자연이다. 즉, 이 단어는 의식하고 있는 인간을 함축한다. 이런 단어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 일부러 의도(선동)한 정치적인 단어이다. 물론 '깨끗한 자연'이 정치적이라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중립적 위치의 단어(자연이라는 단어)를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왔다. 이런 식으로 의미 부여(load)를 하는 단어들을 일컫는 말은 우리에게는 없는 것 같다. 영어로는 'loaded word' 혹은 'loaded language','loaded term'이라 부른다. 어떤 존재(물질 혹은 물체, 더 나아가 시스템까지 확장해서...)를 구현할 때 인간성(혹은 본성)을 지워버리면 철학은 더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성을 지우게 되면 철학의 언어가 사라져 버리게 된다.

  만물을 인간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의 요지이고 인문학 바닥에 깔린 초석이다. 인본원리로 돌아가 보자. 인본이라 해서 인간을 위한 그런 개념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 개념은 인과적 관계로 연결된다. 인과적이라는 개념은 인본원리가 아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고, 그래서 인간에게 적합한 세상에 인간이 나온 것 뿐이다. 그것을 인간 스스로가 해석 할 뿐이다. 호킹이 말하는 인본원리, 특히 강한 인본원리는 상관관계로 맺어진 자발적으로 창조된 세계이다. 태양이 있고, 지구가 있고, 달이 있고, 목성이 있는 이 태양계는 각 행성들이 여전히 중력이라는 상관관계로 맺어져 있다. 너무 멀리 떨어진 행성은 상관관계의 끈이 너무 약해 제외 시킬 수 있다. 중력은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어쨌든 호킹은 책에서 이러한 상관관계를 단순히 '행운'이라고도 했지만, 중립적 위치에서 보면 '행운'이라기 보다는 그냥 그런 것이다. '행운' 또한 앞서 언급했던 'loaded language와 다를 바 없다. 과학은 오로지 데이터, 통계 그리고 근본 법칙만 보고 그 속에서 예측 해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멀쩡히 존재하고 있기에 유리하게 해석할 수 밖에 없다. 호킹은 이것을 '행운'이라는 단어로 에둘러 말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이 우주 모든 것들을 자발적 선택의 문제로 본다. 그래서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 인본원리(Anthropic principle) 보다는 선택원리(Selection Principle)가 더 나을 수 있다고도 언급한다. 법칙과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절대자의 설계가 아니라 법칙과 공간과 시간에 속박당하는 인간 스스로가 단지 의미 부여한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선택원리가 더 낫다는 입장이다. 

  버스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그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나와 인과적 관계에 있는 사람일까? 아니다. 단순히 상관 관계에 있는 사람일 뿐이다. 어느 시각 어단가에 볼 일이 있어 일정한 궤도를 따라 가는 버스를 타러 정류장에 나왔는데 마침 그 버스가 온다. 버스안 승객은 다 그렇게 탄 사람일 뿐이다. 인본원리에 따르면 버스 승객들 사이의 인연, 심지어 전생이나 후생의 관계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냥 공기중에 떠다니는 먼지마냥 (확률 분포의) 덩어리로 봐야 한다. 이 덩어리는 내일 버스를 타도 겪게 되어 있다. 

M이론

  호킹은 M이론을 꺼내들기 위해 앞서 언급했던 모형 의존적 실재론과 인본원리를 소개했다. M이론은 실상 관찰된 것도 아니고 더욱이 확정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지적 영역안에서 만들어낸 가장 큰 돋보기이다. 호킹이 M이론에 대한 지지를 아낌없이 주고 있지만 책에서는 M이론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다.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M이론을 자세히 설명해봤자 이해하는 사람도 몇 없을 뿐더러 다른 책에서 다룬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M이론 이전에 끈이론, 초끈이론에 대한 설명도 해야 하며,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M이론은 궁극의 이론이며 만물의 이론, 모든 것의 이론,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뭔가 발견하고 싶어했던 통일장 이론이다.

  하지만 언제든 M이론은 수정 될 수 있으며, 아직은 부족한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초국가적인 프로젝트도 이루어지고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CERN(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이 그것이다. 호킹이 말했던 죽은 철학은 과학적 방법론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면 오해할 수도 있다. 철학과 과학은 현대에 와서 그 사이의 각도가 너무나도 벌어져 있기는 하다. 호킹은 오히려 그렇게 벌어진 과학과 철학이 분명함에도 철학이나 인류문화사의 지식을 가지고 과학을 반증하려 하고 부정하려 하는지에 대해 정말 저 멀리 돌아가며 이 책을 썼다고 본다.

  공간이 11차원이라는 것을 철학에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과학적 발견이 이뤄진 뒤에야(또는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추론의 과정에 있더라도) 철학이든 사상이든 인간의 해석으로 우주를 꿰어볼 수 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데이터를 해석하는 것, 그것은 상관관계의 영역이다. 데이터가 쌓아있다 해도 거기에서 우리에게 정보를 줄 만한 데이터를 가려내는 작업도 쉽지많은 않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시멘틱 데이터와 정크 데이터를 분리해 내는 그 과정에서도 과학은 공격을 받는다. 미리 결정을 해 놓고 말이다. 이러한 공격은 우리의 지적 능력을 상당 부분 봉쇄시킨다.

  M이론이 우리에게 주는 철학적 교훈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는 것이 실은 우리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행성사이의 관계에서나 쓰일 법한 중력이 핵들을 상호 연결시켜 주는 힘과 원초적으로 같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사과가 땅에 떨어진 것이 바람에 의해서도 아니고  새나 다른 동물이 먹으려다 잘못해서 떨어졌다는 인과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통계적 수치에 따른 상관관계라면 머리 아플 것이다. 청바지의 주머니처럼 숨어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끝으로 호킹은 지적설계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이 책을 썼다기 보다는 과학이 추구하는 "왜"라는 질문에 대해 인간이 관념적으로 어떻게 대해 왔는지, 또 현대에는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대해 짧지만 비중있게 그럼에도 쉽게 읽어내려 갈 수 있도록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PS.
1. 호킹의 이 책은 예전에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와 같이 냈던 책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2. <내 마음의 풍경> 이라는 블로그에서 '풍경'님이 "
바로 철학은 과학의 방법론을 배워야 하거나 그것과 연속성을 갖는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는데 어쩌면 호킹이 「위대한 설계」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의미가 같다는 생각에서 링크를 해 봅니다. 예전부터 구독하고는 있지만 좋은 블로그. 추천 블로그...
링크 : <내 마음의 풍경> 중... wandering 46 포스트..

3.
「위대한 설계」와 관련된 나의 페이퍼 읽기....[튜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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