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1. 주인공은 '나', 계급은 대위. 다른 이들은 '이 대위'로 부른다. 가진급 상태. 소속은 육군본부 정치졍보국. 상관은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국장을 맡고 있는 '장 대령'.

6.25.전쟁이 터지고 같은 해 9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 그 기세를 타고 내륙으로 뚫고 들어가 즉시 서울 점령, 그리고 10월 둘째 주, 평양을 탈환한 상황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장 대령이 정보를 가져왔다. 북한군이 평양을 빠져 나가면서 목사 열네 명 중 열두 명을 총살하고 단 두 명만을 살려 보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국제 뉴스에 올릴 좋은 선전 자료가 된다는 이유로 주인공인 '나'에게 뒷조사를 시킨다. 주인공인 '나', 이 대위는 주변을 탐문하면서 조사를 시작한다. 신을 믿으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살아나온 두 목사는 어떤 사람들일까?

굉장한 정보를 얻었다. 믿을 수 없는 정보. 순교자로 이름을 올린 12명의 목사가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상황에서 목사들은 영혼의 지도자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섰다는 정보. 이 대위는 사건의 바닥에 접근할수록 사건의 정황을 뒤집을 수도 있음을 알아챈다.

2.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려움에 처하면 상황 반전을 모색한다. 그런데 어떤 방법도 찾을 수 없을 때 기적을 갈구한다. 소설 「순교자」는 6.25 전쟁이라는 정치적, 군사적 대립속에서 방황하는 개인과 군중을 그린다. 가장 큰 뼈대는 기적적으로 공산당원에게서 살아난 목사가 어지러운 사회속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아니 어떻게 해석 되어야만 하는지를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전광석화처럼 그려나간다. 소설의 배경은 6.25전쟁 당시이지만 실은 누가 점령하든 점령군에게 환영 일색 박수 갈채를 보내야하는 일률적인 해석만을 강요하는 편향적인 사회이다.

3. 대부분의 목사들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신의 개입'을 바랬다. '신의 개입'은 기적에 대한 직접 진술이다. 신의 손길이 처형장에 미치기를 원했다. 하지만 신이 강림했다는 어떤 낌새도 없었다. 그 순간 목사들은 자신의 알량한 목숨이 신의 것이라고 주일마다 내뱉었던 그 맹세에 허망함을 느꼈을 터. 신이 배반했는지 신을 배신했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죽어가는 그 순간에 신을 더 이상 부르짖지 않았다는 그 사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신을 향한 기도는 공산당들을 향한 애걸로 바뀐다. 더불어 신에 대한 항명으로 침묵하는 목사마저 생긴다.

공산당원에게 애걸하는 그 순간 목사들이 믿고 섬기는 마음속 신의 자리에서 신은 사라지고 총 든 공산당원이 대신 들어선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목사만이 총 든 자를 짐승의 위치에 놓고 호통을 친다. 총구가 어딜 향해 있건 상관치 않았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들에게 애원하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신의 자리는 신만이 있을 수 있다. 목사에게 호통을 받은 총을 든 공산당원은 목숨을 애걸한 다른 목사들과는 달리 이 목사의 저항에 흥미를 느끼고 목숨을 살려 준다. 미쳐버린 목사도 살려준다. 정말 신의 개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끝까지 신을 믿은 자는 흔히들 말하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4. 목숨을 잃은 자와 목숨을 구한 자 사이에서 신의 논리를 읽을 순 없다. 아니 신이 애초에 논리를 가질 필요나 있을까. 반대로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논리가 있다. 이제 그 논리 싸움이 후속 이야기로 펼쳐진다. 인간의 논리, 그럴 듯 하지만 결국엔 이득을 많이 가져가는 계산법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는 것, 인간사에서 보편적이고 최상인 논리이다.

5. 평양 신도들은 당연하게도 죽은 열두 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높여 부르기 시작한다. 다만 죽은 목사들이 마지막 자리에서 행했던 믿음에 대한 부정 행위는 숨겨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 돌아온 목사는 걸리적거린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말의 의구심은 없다. 어떻게 선과 악으로 뚜렷이 나눠진 세상에서 복잡다단한 진실이 덩굴처럼 얽혀있단 말인가. 공산당에게 죽은 목사와 그들 손에 살아 돌아온 목사, 이 둘 중 누가 더 신을 진정으로 섬겼다고 보이는가. 누가 더 좋은 목사인가. 답은 뻔하다.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믿지 않겠는가.

6. 군중과 종교, 거기에 이들의 심리를 전쟁에 이용하고자 했던 군대. 각자의 위치에서 최상의 답만을 본다. 인간의 역사를 발전시켜온 동인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이 가진 의심이다. 의심속에는 선과 악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선한 의심이나 악한 의심 그 자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의심 그 자체로는 중립이다. 의심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다. 따라서 의심을 어떻게 일소시키는지도 중요하다. (소설속에서 얘기하는) 관찰만 하는 신의 논리에서 보면 최상의 의심 해소는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혹은 시간속에 묻혀두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난다.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동일시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논리에서는 어떻게 의심을 해소하는가. 그것은 바로 정치적 공격과 방어 사이에서 맺은 암묵적인 동의이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7. 이 소설의 특징은 결말이라는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전쟁은 진행중이고 또 급격하게 변해가는 중이다. 다시말해 잠시 전쟁의 포연이 살짝 걷히고 난 뒤, 평양에서 목사들을 총살시키는 이런 사건이 있었고, 다시금 북한군과 중공군이 합세하여 남하하자 목사들의 죽음은 수많은 죽음 속에 묻힌 것이다. 수많은 죽음. 그렇다. 당시 서부전선 또한 여전히 이상 없을 뿐.

8. 앞서 결말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 내가 읽은 이 소설의 결말은 다시금 앞을 가리킨다. 그것은 장대령의 죽음이다. 평양을 탈출한 주인공 '나'는 장대령의 부음을 장대령 친구인, 예전에 '군목(군대목사)'이었던 '고 목사'에게 듣는다. 장 대령의 죽음을 알리는 군대에서 보낸 편지 한 통. 그 속엔 장 대령이 첩보 활동을 하다 장렬히 산화하였다고 쓰여있다. 이렇게 또 인간사에서 또 한 명의 영웅(혹은 순교자)을 알린다.

9. 연극 같은 소설.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에 힘들이 실려있다. 마치 서로 자신의 논리가 맞다는 식으로, 무대 밖 관객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관객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들의 논리는 탄력을 얻는다. 물론 끄덕이는 관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논리를 선택한 관객의 숫자만 늘어갈 뿐 진실 규명과는 관계 없다.

이 소설이 왜 연극 같을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힘이 들어간 소설이기도 하거니와, 소설 속 배경이 평양임에도 북한 사투리, 더 엄밀히 말한다면 평양 사투리가 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흡사 외국 작품의 연극을 국내의 연기자들이 우리말로써 공연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의 마지막 몇 장이 할당된 해설을 읽어보면 된다.
『「순교자」가 'The Martyred'라는 제목으로 뉴욕에서 출판되어 나온 것은 1964년이다.』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출간이, 그것도(물론 당연하게도) 영문으로 먼저 나왔단다. 6.25. 전쟁이 끝난지 10년 조금 지나서 영문으로 책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영문으로 이 책을 냈고, 다시 역자(도정일)가 한글로 번역을 하여 이렇게 번역서를 낸 것이다. 다시금 번역 재판을 냈음에도 북한 사투리를 살리지 못한 것이 좀 아쉬운 부분이다. 북한(평양) 사투리를 어느 정도 살려냈다면 한국 독자들에게 사실적이고 좀 더 실감나는 독서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소설 외적인 부분 또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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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00: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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