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 The Man from Nowher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환상적인 소설 한 편 잘 보았다. 소설이라구? 사실 영화이다. 그럼에도 난 이 영화 「아저씨」를 소설로 읽은 듯한 느낌이다.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중 하나는 페이지를 넘기는 주체이다. 영화는 영상을 감독의 속도로 넘겨주지만 소설은 내가 직접 나의 속도로 책장을 넘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난 내 의지로 영상을 넘긴듯하다. 속도감이 있고 지루할 틈이 없다. 쉴새없이 넘겨지는 말없이 행해지는 액션들과 주인공인 차태식의 캐릭터에 매료되는 바쁜 와중에도 면면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예상해보기도하고, 악당들을 처치할 정의의 매질을 나름 설정해보기도 하는 등 하나의 거룩한 이야기를 얼음장처럼 굳은 자세로 읽어댔다. 이런 느낌은 도대체 뭔가.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장면마다 혹 옆 사람이 나의 과도한 감정 분출을 느끼지 않았을까 눈치가 보일 정도로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물론 나도 옆 사람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받기도 하였다.  

                   

판타지라는 염료통에 담가놨다 이제 막 건져낸 듯한 느낌. 간만에 말초신경들이 왁자지껄 소통을 해대는 이 느낌. 감독은 어떤 관객 계층을 표적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영화 제목 그대로 '아저씨'계층? 아니면 앞에서 팔랑대는 원빈이라는 조각미남에 빠져 환각으로 초대된 '아가씨'계층? 또 아님 보통의 '아저씨'와 살고 있는 '아줌마'계층? 마지막으로 쇼핑 목록에 '옆집 아저씨'를 올리고 부모에게 졸라댈 '꼬맹이 숙녀' 계층? 물론, 마지막 꼬맹이 숙녀들은 관객의 표적과는 거리가 멀테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이기에.

이 영화는 아저씨든 아줌마든 아가씨든 할 것 없이 나름 각기 속해있는 계층에 맞게 적절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아저씨는 꼬꼬마 시절 꿈속에서나 꾸었을 법한 악당을 완전무결하니 제압해대는 액션과 세상을 이미 관조하고 있는 무표정한 표정에서, 아줌마와 아가씨는 이유 불문, 의미 불명 무조건적인 기사도 정신에 매몰된 한 남자(연하든 연상이든)가 구원하러 와 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에서 판타지를 읽는다. 그러기에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 누구든 현실이 아닌 영상속에서 자신만의 판타지 세계를 구축하느라 정신없을 거라는 생각이다. 다만 피튀기는 영상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건지는 개인차가 분명 있을 것이다.

어렸을 적, 비슷한 전율을 느낀 영화가 있었다. 그것은 '스티븐 시걸' 형님의 「복수무정2」. 지금 보면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겠지만 어린 마음에 주인공인 '스티븐 시걸'이 거대하게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누구도 제압할 수 있는, 한 능력하는 능력자. 거기에 액션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고 유유자적 그럼에도 절도있는 강세로 탁탁 쳐내고 꺾어치고 날려버리고 주위에 널려있는 사물을 모두 무기화할 수 있는 무심한 한 남자. 전반적 내용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 액션만은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아저씨」에서 원빈의 액션도 그렇다. 세상을 지배하는 시스템과는 동떨어져 있으나, 그 시스템을 경멸하며 약자를 괴롭히는 조폭들에겐 일말의 동정심도 소비하지 않는 무심한 표정의 한 남자. 내일이라고는 없고 오직 오늘만을 살고 있는 한 남자. 그리고 세상의 한 쪽 구석에 차려진 전당포를 운영하는 이 남자. 그를 세상안으로, 시스템안으로 불러들인 조폭들은 처절함만이 남게된다.

이 영화는 나에겐 정말 대단한 두 시간여를 보내게 했지만 조금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형사들. 영화속 형사들은 80년대. 자신이 곧 법이라는 관념에 파묻혀 자신들도 엑스트라이지만 역시나 엑스트라들을 깔보는 듯하는 촌스런 형사들이다. 나름 간간히 웃음 포인트를 친절하게 알려주지만 영화속 잔당들이나 처리해야할 촌스런 운명을 거룩한 국가적 사명으로 인식한다. 대표적 예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맡은 박두만 형사. 형사에겐 시민은 없고 (국가)기관만 담고있는 전형적 80년대스런 기풍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영화의 흐름을 자신들이 끌어가려고 부던히 노력한다. 물론 이 노력은 시나리오상에서 이미 약속된 노력이지만.

악당은 90년대. 어떻게 보면 거대 조폭 집단같지만 다른쪽에서 보면 삼류 양아치들 모임. 그래서 원빈이 맡은  누구나의 아저씨 '차태식'의 세련됨과는 균형이 맞질 않는다. 잔혹성으로 '차태식'과 보조를 맞추려하지만 그래도 영화가 진행할수록 그들 또한 촌스러움이 물씬 풍긴다. 따라서 감독이 '차태식'과 위상은 전혀 다르지만 무게감은 유사한 태국 배우 '타나용 윙트라쿨'을 섭외하여 '람로완'역을 맡긴 것에는 영화의 균형미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시나리오에서도 차태식(원빈)과 람로완(타나용)의 근접 격투는 영화의 질을 한 층 높였다. 

                   

람로완과 차태식의 결투. 가장 눈길을 끄는 장면이다. 감독 또한 공을 많이 들였으리라. 영화 전체적으로 차태식은 감정에 이끌려 세상속으로 나오고 감정에 이끌려 사건 해결사 역할을 하지만, 장면 장면마다 그는 감정을 절제하고 있다. 감정의 절제는 단순하게도 임무로 환원한다. 스스로 꼬마 아가씨 '정소미'를 구하기 위한 임무를 설정한 뒤 몇년만에 가장 의무적인 오늘을 보내려 한다. 그리고 그의 두뇌 회전은 빨라진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 보면 차태식은 여전히 감정에 젖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람로완과 대결할때 차태식이 이빨로 람로완의 손등을 물고 아마도 뼈를 끊어놨다든지 신경을 끊어놨다든지 한 그 행위에선 가장 격정적 감정이 차태식을 지배하고 있을 때이다. 그리고 이미 싸울 수 없는 지경에 놓인 람로완을 파파파팍... 가슴팍을 칼로 찔렀다 뺐다를 순식간에 여러번 하는 그런 행위야 말로 하나의 감정 주파수만이 최절정을 치는 순간이다. 관객과 배우는 그 주파수로 완벽하니 동조를 이룬다. 오직 이 장면에서만이 장르가 바뀐다. 가장 액션스러운 장면으로 가득하지만 액션에서 드라마로 전환된다. 현란하지만 의미없이 그냥 지나치는 동작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그려지는 여운을 불러온다. 따라서 잠시나마 '정소미'를 구하기 위한 임무의 경로에서 벗어나 자신과 람로완의 격투의 완성을 매듭짓는 드라마틱한 미학적 장면으로 잔상을 남긴다. 잔인한 듯 보이지만 잔인하지 않는, 차태식이 발동한 것이 아니라 람로완이 영화 처음부터 기다려온 복선의 완성이다.

영화 장면들속에서 시종일관 지배했던 람로완의 강렬한 눈빛이 차태식에 의해 죽어가면서 자신의 재능이 차태식의 재능에 미치지 못함을 억울하다는 듯 이럴리 없다는 듯이, 눈동자가 미묘하게 풀려나가는 그 순간 차태식은 보너스 스테이지를 끝내고 다시 영화로 복귀한다. 아마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까지도 매료됐으리라. 난 이 장면에서 판타지의 최절정, 마지막 전율을 느꼈다.

영화속에서 나에게 특이하게 인식된 장면이 있다. 원빈이 머리깎는 장면인데, 원빈은 세상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대화도 없고 소통도 없는 부류이다. 남의 이목을 끌려고도 하지 않고 가급적이 아니라 정말 조용조용하게 산다. 하지만 전당포를 통해 여전히 세상과 경제적 셈을 하며 먹거리를 해결한다. 영화속 등장 인물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 인물이지만 유독 관객에게는 잘 보이려 애쓴다. 뭐, 감독의 의도이겠지만, 그리고 여성 관객을 향한 배려이겠지만, 그래도 영화속 인물이 유독 신경쓰는 것은 영화 밖 관객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굉장히 스타일리쉬하는데 80년대, 9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속 배우들이 창조한 트렌치 코트 스타일과는 달리 영화속 공간이 21세기 공간임을 관객들에게 계속 어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솔직히 영화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대적 상징들이 절묘하게 섞여져 왠지 이것저것을 가져다 쓴 잡스런 영상을 풍기기에 그렇다.

꼬마에게도 아저씨, 양아치에게도 아저씨, 누구에게나 아저씨로 불리지만 아저씨는 정체성의 의도적 봉인이다. 세상속 드럽고 걸죽한 사건을 위한 잠복이다. 영화속에서 왜 정체성이 봉인이 되어야하는지 과거 경로만 훑어볼 뿐이다. 특수부대 요원에서 지저분한 도시 뒷골목의 전당포 주인으로의 변신은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의적 몸부림이지만 온갖 세상 물품을 만져야만 하는 그의 직업 특성상, 특히 뒷골목의 전당포는 더더욱, 어쩔수 없이 사건을 불러들이는 의도된 위치선점이다. 따라서 기다렸다 치고 다시 빠지는 순환적인 흐름을 가지는 하나의 시리즈로 진화할 수 있다고도 생각된다. 이 부분이 내가 가장 소설스럽게 읽혀졌던 부분이다. 그럼에도 감독이 차태식을 경찰의 손에 넘기는 것으로 시나리오를 끌고 갔다는 것은 조금 아쉽다. 왜냐하면 형사는 사건의 마무리를 짓는 요소가 아니라 사건 속 잔당 처리이며 불합리한 영화의 논리를 애매모하게라도 마무리 지으며 다음 스테이지로 인도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차태식에겐 전직 요원이었던 동료도 있지 않은가. 이 또한 활용할 수 있는 장치이다. 따라서 일회적인 요소로 끝맺음도 가능하지만 다른 이야기로의 전환도 가능하다. 차태식은 전당포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누군가 맡긴 어떤 물건에 지저분한 사연이 담겨있기를 기대하며...

그래서 차태식이 내년에 8.15 특사로 풀려나 여전히 그의 판타지 이야기를 진행시켰으면 좋겠다.

PS>
- 정말 오랜만에 두 번 보고 싶은 한국 영화를 만났다.
- 이 포스팅의 제목 'image turner'는 이야기가 재밌어 계속 다음 장으로 넘겨대는 그런 소설을 뜻하는 'page turner'에 변형을 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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