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전3권 세트 - 한국만화대표선
박흥용 지음 / 바다그림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1. 동그란 원과 같은 만화.

희망도 절망도 없는 만화. 그렇게 열려있는 만화이다.

우리라는 보통내기들은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계속 앞을 보면 나아가려 한다. 세상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발짝이라도 떼려 노력한다. 하지만 때론 넘어지고 자의든 타의든 뒷걸음질도 쳐보다가 또 운좋게 쓰리 세븐이 나와 순식간에 휙 앞으로 점프도 한다. 그럼에도 한 발 한 발 떼기가 쉽지많은 않다. 같은 평지라도 우리는 사실 등반하는 기분을 느끼며 인생이라는 끝없는 오르막을 넘으려 한다. 중력을 이겨보려 하지만 중력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근력을 키운다. 그렇게 나이만 먹어간다.

어느 누구는 이 세상이 원이라는 것을 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평지가 아니라 뭔가 새롭게 바꿀 수 있고, 다시 부활 할 수 있는 동그란 세상이란 것을 안다. 그렇기에 뭔가를 시도해본다. 삶의 근력을 쓰는 순간 그 누군가는 동그란 세상에서 한 바퀴, 두 바퀴 이렇게 셈을 한다. 비록 쳇바퀴 인생이지만 매번 같은 원이 아님을 안다. 그렇게 깨우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항상 긴장한다. 세상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반응하려 노력한다. 힘이 있으면 바꾸려고도 시도한다.

소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원 밖에 있다. 세상을 관조한다. 자신이 원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의 눈은 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원 안에 뛰어들기도 하고 원 밖으로 뛰쳐 나가기도 한다. 순전 제 맘이다. 그럼에도 이런 소수의 사람은 끝없는 평면의 세상에서, 회전하고 있는 원안의 세상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건져낼 능력이 있다. 건져낼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얼마되지 않은 이 사람들의 숙명이다.


2.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항상 둘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 계산일 뿐이고 세상은 그리 똑부러지지 않는다. 더구나 혼란스럽기까지 하다면 가장 위에 있는 놈 말씀이 곧 법이다. 따라서 혼란스러운 세상일수록 법을 지배하기 위해 아우성을 친다. 세상을 가질 필요도 없다. 법과 제도만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면 된다. 그래서 잘난 세상일 수록 법과 제도를 어느 한 군데에서 독점하지 못하도록 이중, 삼중의 제어장치를 마련해 놓는다.

못난 세상도 이중, 삼중의 제어장치를 마련해 놓을 수 있겠지만, 조금 더 수고스러운 작업을 해야한다. 몰래 개구멍 하나 만들어 놓는 것이 그 수고스러운 작업이다. 이 개구멍은 눈에 잘 안 뜨인다(눈에 뜨이게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경우 사람들 눈을 감게 만든다). 개구멍을 지나려면 온갖 개떡같은 똥폼을 잡아야 하지만 일단 통과하면 허세는 작살이다. 이때 보인 허세를 동경한다면 개떡같은 놈이다. 아니 개똥이다. 그런 개똥들의 질퍽이는 똥폼을 봐야한다.

3. 주인공 견주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그는 반쪽 인간이다. 나머지 절반을 취할 수 있다. 견주는 처음엔 타의로 후엔 스스로 개새끼(견자)가 되어 세상의 똥폼들을 보고 다닌다. 성장하면서 그가 깨닫는 철학은 '개새끼이지만 개구멍으로는 들락거리지 않는다.'쯤?
 
견자도 인간이다. 욕심이 있고 욕정이 있고 욕구가 있다. 욕심과는 싸우고 욕정은 경계하며 욕구는 추구한다. 이것이 만화 속에 드리워진 작가의 철학이다. 견자의 속내에 자리잡은 욕심은 '이몽학'(출세욕)이고 욕정은 '백지'(여자)이며 욕구는 '황정학'(스승)이다. 견자가 절반짜리 인간이기에 그는 나머지 비어있는 반쪽을 채워야 한다. 그가 선택한 반쪼가리는 이몽학도 백지도 아니다. 눈먼 장님이자 침술과 칼잡이에 능숙한 역시나 반쪼가리 인생을 걷고있는 스승 황정학이다.

황정학이 양의 인간이면 견자는 음의 인간이다. 황정학은 양반이지만 장님으로 태어나 역시나 3류 인생을 맛보지만 후에는 즐기는 인물(그래서 양의 인간)이고 견자는 멀쩡한 신체를 가진 댕기동자이지만 서출이기에 3류 인생을 예약한 인물(그래서 음의 인간)이다. 하지만 개떡같은 세상엔 단순한 논리마저 먹히지 않는다. 쩜오 더하기 쩜오는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쩜오이다. 정확히는 쩜오들이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쩜오는 0.5를 가리킴. 쩜오를 자칭하는 대표적 인물로 박명수. 요즘엔 쩜이던가?)

4. 개새끼로 불렸을 당시 견자는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스승 황정학을 만나기 전까지는. 황정학을 만나면서 가슴속 언저리에서 뜨거움을 느꼈고 백지를 만나면서 차가워야함을 배웠다. 그는 황정학을 통해 무한 평면일 것 같은 세상이 둥그런 원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결국엔 원 밖에도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결국 개새끼가 금강산 호랑이로 탈바꿈을 한다. 물론 자칭 개쌔기는 여전하지만. 견자의 라이벌 이몽학은 원이라는 세상에서 점프만 하면 새로운 위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인물이다. 견자는 스승을 통해 원 밖에서 세상을 볼 줄 아는 식견을 늘렸다. 따라서 이몽학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건낸 동맹을 무시한다. 견자가 보기엔 이몽학이 만들려는 세상 역시 여전히 똑같은 원 안의 쳇바퀴 세상에 불과했을 수 있다.

5. 결말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열린 결말이다. 견자는 세상을 관조한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뛰어들지 어떨지 모른다. 따라서 닮고 싶어하는 황정학을 통해 견자의 삶을 유추해 볼 수 밖에 없다. 또 사실적으로 유추하려면 역사를 끌어오면 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후 세상의 주인이 바뀌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아무튼 이몽학은 그렇게 사라졌을 것이다.


6. 이 책을 읽고난 후에 내린 결론. 그것은 우연성에 녹아있는 필연성이다. 이 만화를 읽다가 떠오른 만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히카루의 바둑(or 고스트 바둑왕)」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히카루의 바둑」은 많이 닮아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표현한 작품으로 말이다. 전지적 작가의 시점, 혹은 현실계에서 신의 관점으로 바라봐지게 된다. 스승 황정학과  제자 견주의 만남은 우연이지만, 그 둘의 인연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만화속에서 작가가 보인다. '신의 한 수'는 시대적 공간과 시간, 그리고 두 인물이 처한 상황의 오묘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히카루의 바둑」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히카루라는 소년이 용돈벌이를 위해 할아버지댁을 찾는다. 그 용돈벌이는 다락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오래된 물건을 파는 일. 히카루는 우연히 오래된 바둑판을 보게 되고, 바둑판 위에 쌓여있는 한 줌의 먼지를 털자마자 헤이안 시대때 군주의 바둑 스승이었던 '사이'의 혼령을 끌어낸다. 혼령은 히카루의 정신속으로 녹아들고, 바둑의 'ㅂ'자도 모르는 히카루는 '사이'의 도움으로 신예 바둑 기사로 이름을 날리며 성장한다. '사이'의 바둑과 히카루 자신의 바둑 사이에서 점차 성장하게 된 히카루는 이름있는 바둑 기사들의 관심을 얻게 되고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정점에 와서 바둑 혼령인 '사이'는 자신이 왜 현생에 나와 히카루를 성장시키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는 현생에 왜 불려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이'는 자신이 히카루를 깨닫게 하기 위한 신의 장치임을 알게 되고 히카루가 성장하면 할 수록 '사이'는 점점 희미해짐을 느껴간다. '사이'가 말없이 갑자기 사라진 뒤 '히카루'는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였던 '사이'가 보고 싶어 미친듯이 '사이'를 찾으며 울부짖는데...

'사이'는 사라지면서 그 자신도 깨닫게 된다. 자신은 히카루를 위한 '신의 한 수'이며 또한 옜적 누군가는 '사이'를 위한 '신의 한 수'였으리라는 것을. 우연성안에 포개져있는 필연성. 후에 히카루도 이 이치를 깨닫고 '사이'가 사라진 후 내던졌던 바둑알을 다시 잡게된다는 슬프지만 해피한 내용...

「히카루의 바둑」에서는 히카루가 구름이며, 히카루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에도 시대의 혼령인 '사이'는 바로 달을 가리킨다. 결국 이 만화 또한 히카루라는 구름이 달을 벗어나는 그 시점이 만화의 최고 정점이 된다. 물론 두 만화가 조금 다르다면 '사이'도 점차 철학적으로 완성되어져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보다는 좀 더 상호적이다. '사이'는 이를 깨닫기 위해 천년을 기다리긴 했지만.

7.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조금 불편했던 것은 바로 만화속 이야기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작가의 손바닥위에서 머리 굴리고 있는, 그리고 교훈 한 조각 얻으려고 하는 내가 비쳤기 때문이다. 이 완벽한 인연, 만남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 만화속 세상은 개새끼(견주) 중심으로 돈다는 점. 모든 설정이 견주를 키우기 위한 비합리적 장치들이라는 것이 약간은 오글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무리 만화라지만 만화를 그리고 있는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신의 한 수'는 '작가의 한 수'로 대치된다. 아무튼 짧은 이야기임에도 매우 정밀하며 압축적으로 표현해낸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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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sseau 2010-08-19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읽고 계시는 책 목록중 '국화와 칼'은 일본질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답니다.

쿼크 2010-08-20 14:41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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