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해프닝』을 안보신 분은 이 글을 피해주세요. 이 글속엔 영화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해석한 저의 생각이 들어있어서 향후 영화를 보실 때 재미를 깎을 수도 있습니다.

'엠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인 『해프닝』에 대한 포스팅이다.

심각하게 보다가 심심하게 끝나버린 영화.

영 화를 보며 무슨 의미를 찾거나 할 필요는 없겠지만, 기대한 영화를 재미없게 본 사람 중 일부는 분명 '기대심리'의 반발로 여전한 '기대심리'를 가질 것이다. 가령, '(재미는 없었을지 몰라도) 매우 어려운 영화였어. 의외로 어딘가에 중요한 메세지가 있을거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해프닝에 대한 풀이를 해봤다. 순전 내맘이다.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떤 학생이 복도를 뛰어간다. 한 교수가 뛰어가는 학생을 붙들고 이야기를 건낸다.

교수 : "자네 뭐가 바쁘다고 뛰어가는가?"
학생 : "수업에 늦을 것 같아 뛰어갑니다."
교수 : "수업이 끝나면 뭐하려 하는가?"
학생 : "밥 먹어야죠.?"
교수 : "그리고는."
학생 : "나머지 수업 듣고 집에 가야죠."
교수 : "내일은?"
학생 : "똑같이 수업듣기위해 학교에 나와야죠."
교수 : "수업은 왜 듣나?"
학생 : "취직해서 좋은 직장에 가려구요?"
교수 : "그 후에는?"
학생 : "결혼해서 애 낳고 돈 벌면서 잘 살아야죠."
교수 : "그 후에는?"
학생 : "뭐..그렇게 살다가 죽겠죠."
교수 : "음...그러니까 자네는 죽으러 가기 위해 뛰어가고 있는 중이었구만."

이 영화에서 내가 살펴본 감독의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했다. 말 그대로 '해프닝'이다. 그냥 벌어지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벌어진 일들간에 어떠한 순차성을 부여하고 영화적 소재로 써먹기 위해 일종의 (그리 중요하지 않는) 논리를 집어넣은 것이다.

예를들어 작년에 사고로 안타깝게 죽었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 많은 죽음들은 1년이라는 시간동안 불규칙한 시간 간격에 놓여져 있을 것이다. 이젠 죽음이 차지하는 시간과 공간을 압축시켜보자. 그러니까 지난 1년동안에 있었던 죽음을 하루로 몰아서 발생시킨다고 생각해보자. (불경스럽지만...) 정말 대단하지 않겠는가.

영화속에선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 모두 동일한 메시지를 받은 듯이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며 죽는다. 이게 포인트다. 냉정한 관찰자 입장에서 본다면 죽는 사람은 어이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죽는 것이다. 높은 곳에 있으면 떨어져 죽고, 가까이에 총과 같은 무기나 무기 될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여 죽고, 자동차를 타고 있다면 장애물과 충돌하여 죽고 등등...

이 죽음들은 영화속에서 보여준 죽음이다. 사람들은 의외로 단순하게 죽는다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나고 다음은 죽음이 찾아온다. 죽음은 해프닝의 결과이다.

:: 일상의 죽음

영화속에서 공사장이 등장한다. 그 공사장은 신축 빌딩인데, 건물 위에서 작업하고 있는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무슨 메시지를 들은 것 처럼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의미없는 다수의 죽음이다. 하지만 관객에겐 무의미한 다수의 죽음은 공포로 보여진다. 어이없이 그리고 의미없이 죽는 것. 그것은 정말 공포인 것이다.

이때 시간간격을 벌려보자. 영화속에서처럼 하룻동안 일어나는 순간적인 동시 다발적인 죽음을 1년으로 늘인다면, 영화속에서 보여주는 공사장 건물 위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그리고 똑같은 방식의 죽음이 1년 내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미디어에서 주변에서 발견할 것이다. 매년 산업재해로 얼마의 사람이 죽는다든지 하며 떠들지 않는가. 1년 중 어떤 사람은 재수없게도 주위 물건에 의해 죽고, 또 어떤 사람은 동물원에서 사자에게 물려 죽는다.

일상의 죽음. 이것이야 말로 내 나름대로 해석한 샤말란 감독의 메시지다. 영화에서는 불규칙한 시간대의 수많은 죽음을 특정 시간대로 몰아버린다. 한마디로 죽음의 빅뱅(폭발)이다.

그렇다면 일상의 죽음을 짧은 시간안에 보여주려면 어떤 원인 혹은 자연법칙을 등장시켜야 하는가. 수많은 영화들은 재난을 등장시키기도 하며, 전쟁, 전염병과 같은 질병, 혹은 외계로부터의 공격등으로 수많은 죽음을 그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런거 없다. 다 자연스럽게 죽는 것이다(그러니까 일상에서 보는 흔한 죽음). 사고나서 죽는것,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것, 빌딩에서 떨어져 죽는 것,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 이 모든 죽음들은 그냥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영화의 장치는 시간을 빨리 돌린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그런 죽음이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게끔 영화적 논리만 보여줄 뿐이다.

위에 교수와 학생간의 대화는 예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것과 유사하게 기억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이 대화에서 교수가 하고자 하는 말은 싱겁다. 누군가는 언젠가 죽는다. 언젠가도 블로그 다른 포스팅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엔트로피의 작용의 결과다. 생물체에게 엔트로피가 높아지면 죽음이 찾아온다.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은 우리에게 죽음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대화에서 학생은 순진하게도 늙어서 죽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맞는 얘기다. 어이없는 해프닝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밝히지만, 나의 해석은 이렇다. 식물의 알수 없는 공격들. 그것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우주가 내포하고 있는 엔트로피가 증가한 결과물이다. 영화 해프닝은 수많은 죽음들을 짧은 시간안에 다룬다. 그만큼 그 시간대의 엔트로피는 상당히 높아져야한다. 엔트로피는 한마디로 무질서도를 나타낸다. 많이 모일수록 무질서해지며 이는 엔트로피가 상당히 높다는 의미이다. 이 엔트로피는 에너지의 효율(efficiency)과도 관계깊다. 엔트로피는 물리적으로 열량을 온도로 나눈 값이다. 이는 열역학 2법칙에 해당된다. 한마디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나는 이 영화를 환경이나 가족을 테마로 한 영화로 볼 마음은 없지만, 어쨌든 이 영화에는 이것들이 포함되어진다. 다만 이것들은 주제가 아니라 소재이다.

영화에 너무 과학 이야기를 하는듯 싶겠지만, 이 영화가 과학자체를 이야기한다. 주인공인 마크 윌버그는 바로 과학 선생님이다. 그래서 조금 더 이야기해보겠다.

사건이 일어나는 미국 북동부 일부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바로 고립계를 의미한다. 열린계였다면 엔트로피의 증가의 의미가 희석이 된다. 이 고립계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계의 무질서도가 증가하며, 에너지의 과도한 사용(영화에서는 핵발전소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으 로 엔트로피는 더욱 크게 증가한다. 에너지가 변화될때 엔트로피는 발생하며 계속 증가해간다는 의미이다. 환경 오염은 엔트로피의 증가의 한 예이다. 물론 환경 오염이 되지 않더라도 전체적으로 엔트로피는 증가해간다. 하지만 자연적인 증가는 자연의 균형을 이룬다. 이 역시 초반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이 수업중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코는 계속 자라지만 얼굴의 평형을 이루며 자란다고. 왜 벌이 사라졌을까? 여기에서 질문은 원인을 물어보는 듯 하지만 결과를 물어보는 것이다. 답은 자연의 평형(밸런스)가 깨져서이다. 한마디로 이 질문으로 대처할 수 있다. 왜 지구는 혹은 자연은 밸런스가 깨져가고 있는가?

따라서 영화와 굳이 끼어맞춘자면, 소그룹일수록 살 확률이 크다. 이는 역시 엔트로피가 비교적 낮다는 의미이며, 아직 죽을때가 안되었다는 의미이다. 영화속에서 엔트로피의 흐름은 바람으로 표현된다. 바람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마치 건전지가 빠진 로봇처럼 멈추어선다. 무질서한 에너지 그룹은 지나가는 엔트로피 대열에 합류된다.

:: 초점은 죽은자

감독은 어이없는 죽음을 감정을 제거한 자살로 묘사하고 있다. 초점은 죽은자이다. 이 영화에서 쓰인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예를들어 어떤이가 누구에게 살해되었다면 오직 피살된 피해자에게로만 초점을 맞춘다. 가해자인 살인자는 살아있다면 이야기에서 지워진다. 감독은 오직 죽은자만 말한다(그리고 죽은자는 말이 없다. 그 이유를 따질수도 없고 캐묻지도 못한다).

한 학생이 아침에 학교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가정하자.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과거의 수렴점은 사고 당일 이 아침에 모여진다. 이 학생은 인생을 오직 이날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이날 그 시간 '해프닝'이 일어난다.

요즘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다. 금강산 관광객이 북한 병사에게 피격되어 사망하였다. 가해자를 지우고 오직 피해자만 생각해보자. 이 관광객은 이 날 말 그대로 '해프닝'이 발생하였다.

얼마나 무서운 관점인가. 인생의 덧없음을 무채색으로 표현한 관점이.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화의 초점을 어디에 두는가이다. 주인공인 '마크 윌버그'를 위시한 부인과 친구 딸은 오히려 소품이다. 이 영화의 본질적인 주인공은 무수히 자살한 이름없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어야 말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것이다. 영화속의 자살은 사실 자살보다는 가해자가 지워진 죽은자들이다. 현실에 대입한다면 실제로 자살자도 있을 것이고, 살해당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고로 죽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감독은 매우 안타깝지만 냉정한 시각을 보여준다. 가해자를 지운 죽음들, 이들은 결국 자살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속에서 나에겐 주인공의 행복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주인공은 곧 조연들이고, 수많은 죽음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사연없는 무의미한 죽음이 현실에서도 사연이 없지는 않다. 영화를 보며 죽음속에 숨겨진 수많은 사연들 때문에 의외로 숙연해졌다. 어떻게 해서 떨어져 죽게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자동차 사고로 죽게 되었는가. 뭐..이런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정작 영화에서는 죽음이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몇몇 자극적인 죽음만 보여주고, 다수는 죽기전에 해프닝만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 처럼 좀비처럼 멍하니 서있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죽기 위해 행동하기 전의 그 고요함이 주는 적막이 인상에 깊었다.

<덧붙임>

1.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라 진짜 샤말란 감독이 의중한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시각을 통해 본 죽음은 사실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라 엄청난 슬픔과 안타까움을 동반한 죽음이다.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 이러한 잣대를 논리와 과학으로 풀어낼 수는 없다. 다만 어떠한 해프닝은 정말 말도 안되게 일어나고 죽음은 상당히 무거워진다. 사실 죽음은 무겁지만, 전쟁영화나 재난영화와 같은 곳에서 보여주는 죽음들은 얼마나 가벼운 것들인가. 이 영화는 가벼운 죽음을 다룬 영화와는 달리 수많은 죽음들을 짧은 시간안에 압축시켜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엄청난 죽음의 무게에 공포감을 들게 한다는데 그 의미가 있지 않는가 싶다.

2. 사실 이 영화의 포인트는 정확히 뭐라 말할 수 없을 듯 하다. 수많은 죽음을 이야기 하기 위해 엔트로피 개념을 활용하였는지 아니면 과도한 엔트로피 증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수많은 죽음을 소재로 썼는지 이게 좀 헷갈린다.

3. 영화 끝부분은 의외로 해석이 잘 안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니면 반대로 해석이 너무 쉽든지. 장소만을 옮겨 영화 초반부의 상황과 똑같은 시작을 반복함으로써 자연의 원리가 변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인간은 죽음의 운명에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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