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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달리기 ㅣ 푸른숲 역사 동화 7
김해원 지음, 홍정선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5월
평점 :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는 아픔들이 있다. 벌써 30년이 지났는데도 광주의 상처는 아직도 다 아물지 않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은 남겨진 자들에게는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상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함께 했던 사람이 주검이 되어 돌아왔을 때의 충격과 부재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며, 그 고통을 누가 대신한단 말인가. 게다가 죽은이들은 한때 폭도라고 불렸다. 명예 회복이 된다 한들 죽은자가 다시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남은 자들은 그 잔인한 세월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그들의 운명을 가른 5월은 처음부터 암울했을까?
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동화작가 김해원이 책을 썼다. 그 깊은 상처를 어떻게 동화로 다루려는지 놀랍기도 하고 조금 우려도 된다. 5.18은 아직도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소재니 말이다. 게다가 누군가의 고통이 담긴 글은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힘이 든다. 나는 쓸데 없을지도 모르는 걱정을 하느라 책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책 표지에 있는 요 녀석들은 장난기 있는 얼굴로 행복하게 달린다. 앞의 녀석이 진지한 건 아마 일등을 뺏기고 싶지 않아서일테다. 제목 그대로 오월을 달리는 아이들이다. 푸른 하늘을 뒤로 신나게 달리는 아이들에게선 어떤 걱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은 더 푸르고 발걸음은 더 가벼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들 뒤에 떠있는 그림들은 이 행복한 시간이 결코 길 수 없음을 비춘다. 아이야, 친구를 이기겠다고 경쟁하는 마음조차도 일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는 걸 넌 그 땐 몰랐겠지? 5월을 달리는 아이들에게 1980년의 봄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명수는 사평국민학교 육상부의 단 하나뿐인 선수다. 지금 명수는, 내년에 있을 전국소년체전 선발대회에 나와 있다.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지만 명수는 첫 출전에 전남 대표 선수로 뽑혔다. 졸지에 다크호스가 된 명수는 하늘을 날 것 같다. 명수가 전남 대표가 됐다는 소식에 할머니는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신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 때문에 늘 가슴앓이를 하셨던 할머니의 한이 풀리는 순간이다. 명수의 아버지는 시장통에서 시계수리를 하고 있다.
요즘 명수는 정태만 보면 속이 상한다. 명수가 이 분 오십 초에 들어오면 정태는 이 분 사십구 초에 들어오고, 명수가 이 분 사십팔 초에 들어오면 정태는 이 분 사십칠 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명수는 정태에게 항상 일 초를 뒤진다. 그 일 초의 거리를 좁히지 못해 명수의 마음은 줄곧 편치 않다. 숙소엔 명수외에 열 명에 가까운 선수들이 합숙하고 있다. 좀전 아버지가 친구들과 같이 먹으라며 딸기를 사오셨다. 아버지는 요새 학생들의 데모로 거리가 시끄럽다며 절대 시내로 나가지 말라고 하신다. 그때만 해도 명수는 몰랐다. 이것이 아버지와 마지막 만남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아침부터 대문을 기웃거리던 진규가 오늘 시내구경을 시켜준단다. 박코치의 매서운 눈을 무슨 수로 피할 수 있다는 말인지 명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진규는 자신만만하고, 진규의 꼼수 덕에 명수와 정태, 성일이는 숙소인 사동여인숙을 벗어난다. 만화방에서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은 햇빛을 찾아 광주공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공원엔 장사치는 찾아볼 수 없고 긴장한 얼굴을 한 사람들만 줄지어 서있다. 대학생들의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최루탄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언제 와 있었을까, 군인들이 곤봉으로 대학생들을 때리기 시작한다.

박코치는 때국물과 눈물로 꾀죄죄해진 아이들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분간 훈련은 숙소에서 하기로 했다. 며칠 뒤 양동시장 신발 가게 아저씨가 명수를 찾아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명수는 아버지가 모셔져 있다는 적십자병원으로 향한다. 그곳은 사람들의 통곡으로 가득하고 명수는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버지의 장례를 어서 치뤄야한다. 그런데 나주 집에 연락할 길이 없다. 명수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길을 나선다. 집으로 가는 길에 명수는 정태에게 '자신이 한번도 명수를 미워해 본적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정태는 명수에게 함께 달리자는 말을 한다.
그 후 명수가 다시 합숙소로 돌아갔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단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두 남자가 하는 말을 통해 유추해 볼 뿐이다. 하루 아침에 아버지를 잃고 소년 가장이 되어야 했을 어린 명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넉넉하지는 못했을 망정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살았던 명수네 식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 집에서 살고 있을까? 불편한 다리로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려 애썼던 명수 아버지의 어처구니 없고 기막힌 죽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분노외에는 마땅한 말이 없음에도 나는 감히 희망이란 말을 꺼내본다. 그 두렵고 무시무시한 현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명수를 배웅해준 정태와 진규, 또 박코치와 미스터 박, 그리고 시장통의 신발가게 아저씨에게서 더불어 함께 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만일 명수가 희망을 놓아버린다면 이유없이 죽어야했던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 되고 말터이다. 그 어느 때보다 생명으로 충만했던 5월에 일어난 참혹한 죽음은 이제 수 많은 명수의 삶으로 다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명수가 다시 달리기를 하는 날 5월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