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중심의 교회 - 그 교회에 가고 싶다!
매트 챈들러 외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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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하는 사역이라 할지라도 본질에서 멀어졌을 때 드러나는 결과는 부실함과 참담함이다. 교회가 본질에서 벗어났을 때 벌어지는 현상들을 우리는 한국 교회를 통해 이미 보고 있다. 영적인 부실함을 대체하기 위해 시스템을 가동하지만 결코 대안이 될 순 없다. 하나님의 일로 시작했다가 인간의 일로 마치지 않으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만이 크리스천이 붙잡아야 할 최선의 답이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는데 어려움이 있다. 정말 쉬웠다면 교회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이와 같이 곤혹스럽고 난감한 상황에 대해 이 책은 구체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안내서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다. 공저자인 매트 챈들러는 능력을 잃어버린 현대 교회와 교인들에게 교회의 출발점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되새겨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교회를 만든다' 는마르틴 루터의 말을 인용해, 이 시대의 교회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리킨다. 더하여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막상 짚으면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복음과 교회에 대한 신앙적 오류를 교정하며 쉽고도 이해 가능하게 이끈다.

 

'강이 지류를 형성하듯 복음은 교회를 형성한다. 지류가 강을 형성하는 게 아니듯, 교회가 복음을 형성하는 게 아니다. 교회가 이 질서를 오해하면 침 빠진 벌처럼 무기력해진다...중략...복음.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화해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위해 개인적인 측면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아울러 우주적인 측면에서 문화와 피조세계를 구속하신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pp. 20~21

 

본질에 대한 숙고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본질을 놓친다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다시금 교회가 강력해지기 위해서는 예수 중심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다진 후, 매트 챈들러는 3부에 걸쳐 예수 중심의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들려준다. 이 책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거나 한번도 듣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깊이 있게 다가오는 것은 이야기에 담긴 진심과 각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세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촘촘히 연결된 세상인 동시에 가장 외로운 세상이다. 함께 어울리기는 하되 관계는 없고 모두가 혼자 놀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중요한 문제를 결정한다. 따라서 공동체 형성의 열쇠인 복음이 빠진 곳에는 언제까지고 연결성과 외로움이 공존할 수 밖에 없다. 오직 복음만이 진정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어낼 수 있다.' p. 71

 

함께 있지만 함께 하지 않으며 각기 따로 노는 사람들에게 복음 중심의 교회는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다. 교회의 근본 성격이 공동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시적인 기초나 이기적 목적에 의해서가 아닌 예수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에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할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잘나고 못난 사람이 없으며, 의로운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그런 공동체를 마음 깊이 기대한다. 그곳에서만이 진실한 사랑과 교제, 섬김이 나올 수 있으니 말이다.

 

사진 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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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보림 창작 그림책
이혜리 글.그림 / 보림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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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지 못합니다. 장소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시간이 없어서지요. 아이들끼리는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은데, 요즘 아이들은 같이 있기조차 힘이 듭니다. 일정이 꽉 짜여있기 때문이지요. 빡빡한 스케쥴은 아이들이 마음 편히 쉴 시간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를 엄마의 극성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은, 이 시대가 배워야 할 것과 익혀야 할 것을 많이 요구하고 있어서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이들에 마음 속엔 늘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놀이터가 없어도, 거창한 놀이기구가 없어도, 아이들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웃음꽃을 피우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간절한 바람을 이혜리가 그림책에 담았습니다.

 

아파트 촌의 달 밝은 어느 밤, 한 아이가 휘영청 둥근 달을 보다 북청사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사자는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이를 태우고는 친구들을 찾아갑니다.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은 밖으로 나오고, 있는 힘을 다해 놉니다. 머리를 흔들고, 두 발을 구르며, 펄쩍펄쩍 뛰어 놉니다.

 

 

 

 

아이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다면 진작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줄 걸 그랬습니다. 너희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아이들을 힘들게 한 것은 아닌지 마음이 아려옵니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니 보는 사람도 이렇게 좋은데 말입니다. 아이들은 신명나게 놉니다. 하늘 끝까지 다다를 듯 그렇게 즐겁게 놉니다.

 

 

 

 

하늘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던 아이들이었습니다. 어른들의 잔소리에서 해방되고, 공부의 부담에서도 벗어나 마음껏 놉니다. 언제 이렇게 놀아본 적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정말 희안한 일이 생깁니다. 마음껏 놀았는지 아이들과 북청사자는 보이지 않고, 달을 쳐다보던 아이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온해보입니다.

 

 

 

그림책을 보고 속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은 처음입니다. 저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었나 봅니다. 노는걸 보기만해도 이렇게 기분이 좋고 시원해지는군요. 앞으로는 공부하라는 말보다 같이 놀까라는 말을 자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이해해주고 좀 더 믿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이도 기쁘게 놀고 자신이 해야할 걸 알아서 하지 않을까요? 주제의식이 강한 동화도 좋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동화를 만나는 기쁨도 상당하군요. 무엇보다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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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인문학 - 도시남녀의 괜찮은 삶을 위한 책 처방전
밥장 지음 / 앨리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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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삶의 고단함을 무장해제하는 힘이 있다. 인간이 가진 수많은 감정을 희석하지만, 그러나 밤이 미치는 힘은 단지 거기까지만이다. 핏줄 돋워가며 했던 이야기들도, 수없이 되내던 자책과 비난의 말도 밤을 벗어나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밤의 열기에 비해 아침은 너무나 초라하고, 그 아침의 씁쓸함은 지난 밤의 자신을 쓰리게 기억하도록 할 뿐이다. 그러나 밤에 기대어 자신의 심정을 토해내지 않는다면 이 세상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밤에 맞는 이야기와 인문학을 밥장은 소개하고 있다.

 

 

 

째즈의 선율이 흐르는 더빠(the bar) 에서, 그간 밥장은 사람들을 만나며 인문학과 삶에 대한 자신의 무대를 꾸며왔다. 인생이 무언지 조금 알지만 아직 딱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삼십대를 위해, 밥장은 인문학을 처방전으로 내고 그 과정들을 책으로 담아냈다. 그가 전하려는 16가지의 이야기는 삶에 꼭 필요한 이야기 반, 있으면 더 좋을 이야기 반이다. 그의 처방전은 부담 없고 경쾌하며 함의하는 바는 묵직하기에 읽는 맛은 자못 쏠쏠하다. 게다가 그림과 사진까지, 밥장은 그만이 낼 수 있는 느낌을 귀엽고도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모르겠어? 내가 아는 것이 바로 내 자신이야.

그건 내가 자네에게 들려줄 수 없어.

자네가 직접 찾아야 해. 나는 자네가 읽어야 할 책이야.

책이 스스로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책은 자기 안에 적힌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지.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몰라.

                                                               

                                                 p 80

              

어쩌면 인생의 진짜 답은 모른다일 것이다. 만약 안다면 그토록 간절히 탐독할 이유가 없으며, 누군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댈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내 건조한 삶을 촉촉하게 해줄 대상으로 인문학을 꼽았고, 적어도 인문학은 우리를 벼랑으로 몰지 않을 거라 확신하기에 손을 내미는 것이다. 삶에 드리워진 그늘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밥장이 전하는 인문학은 삶의 애상을 대체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인문학, 삶을 다독이며 생의 의미와 가치를 일상에서 구현하는 힘으로서의 인문학이다.

 

나는 지금까지 수차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음악을 만들었지만

한 번이라도 음악이 좋지 않으면 다음에는 나에게 의뢰를 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항상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일을 하고 있고

매번 진검승부이다.

 

히사이시 조『감동을 만들 수 있습니까』중에서

 

저는 광고회사에 있다가 40대에 데뷔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중요합니다.

개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엇을 그릴까 늘 생각하고 노력도 해야 합니다.

제 그림은 일본에서 40~50대들이 즐겨봅니다.

그러려면 작가인 저도 어느 정도 경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급해하지 말고 그리면 됩니다.

 

『심야식당』의 작가 아베 야로 인터뷰

 

상반된 듯 보이는 두 작가의 말을 통해 밥장은 생의 양 측면을 소개하며, 삶에서 잡아야 될 것과 놓아야 될 것을 구분한다. 그리곤 좀 더 나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하고, 지금의 이 자리를 소중히 여기게 하는 통로로서의 인문학을 청유한다. 일상으로서의 인문학은 몸으로 하는 공부이기에 누가 대신해 줄 수도, 대신해서도 안되지만 그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 균열과 괴리, 허무와 허탈이 있던 자리가 비로소 완상과 위락으로 채워질 것임을 암시한다. 그 인문학이 오리무중의 안개에 갇힌 이 시대의 젊거나 혹은 나이든 청춘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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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바람 - 일상의 순간을 소묘하는 80편의 아포리즘 에세이
노정숙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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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산문시의 경계 어딘가에서, 굳이 표현하자면 산문시보다 더 강한 카리스마로 무장한 압도적인 수필을 만났다. 자신의 남편이었던 모자란 인간을 위해 털을 뽑아 옷을 지었다는 어떤 새에 관한 옛 이야기가 떠오를만큼, 피를 토하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을만큼 강렬하고 고통스런 책이었다. 무거운 것만이 혹은 아픈 것만이 질적 우위를 담보하느냐 묻는다면 문외한인 나로서는 할 말이 없지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상이 심장을 압박하는 느낌이었다.

 

몇 년 전부터 가파를 만큼 비약적인 성장을 보인 장르가 수필이었다. 그간 각양각색의 수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는 너무 단 인스턴트 커피를 마신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이 드는 수필들도 적잖이 껴 있었다. 말랑말랑한 감상을 예쁘게 나열하고, 사진과 편집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책들은 읽고 나면 도리어 허무한 느낌을 주었다. 책 한 권이 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기대 없이 책을 읽지도 않기 때문이다. 설사 버리는 시간일지라도 시간을 내어 책을 읽을 때는 책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 나누기 위해서이지, 애들 장난같은 글을 읽으려고 물질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쓰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이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는지 모르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어쩌면 책에 더 엄격한 기준은 가지는지도 모르겠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꽤 고민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작가인데다 작가에 대한 안내도 그리 친절하지 않았으며, 단순한 에세이이라면 굳이 읽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떨떠름한 마음으로 책을 대했다. 그러나 내 시큰둥한 마음이 바뀌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들지 않았다. 몇 편 넘기며 나도 모를 몰입 속에서 글을 읽어갔으니 말이다. 한 인간이 누군가에게 말을 걸 때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부터 막연하게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벌거벗어야 하는지는 몰랐다. 그깟 글이 무엇이기에, 그깟 책 한 권이 무엇이기에 이런 무모할 정도의 도발을 감행해야 하는가 말이다. 자신도 모르는 가면을 쓰고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만들어놓은 우아한 말투와 행동들을 벗겨버리는 강렬한 힘이 노정숙에게 있었다.

 

 그 침대

 

 아테네의 뒷골목이다.

 아라베스크풍의 철문을 들어서는 순간 뒤통수를 당기는 한기를 느끼긴 했다. 요괴 문양이 쌍으로 새겨진 침대를 보면서 죽음의 낌새을 알아챘어야 했다. 그때 벽마다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나보다. 비릿한 냄새와 음울한 기운을 느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건장한 체격의 프로크루스테스를 어찌 당해내겠는가.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걸 잊었나. 짙은 눈썹에 우뚝한 코, 다정스러워 보이는 입매에 잠시 눈이 멀었나보다. 내 발로 걸어 그의 침대에 누웠으니.

 내 자라지 못한 키 때문에 침대의 아래위가 한참 남았다. 얼른 위로 당겨 눕는다. 나를 침대에 맞게 잡아당길 때는 아랫도리만 늘이면 좋겠다. 허한 목에 찬바람이 지나간다. 괜찮아 괜찮아, 주문을 외지만 쿵쾅거리는 가슴은 터질 것만 같다.

 죽음이 있어 다행이라고 떠들던 헛소리를 황급히 거둔다.

 

감상과 실체가 얼마나 먼 거리인지를 단번에 보여주는 글이다. 실체에 닿지 않은 나른한 감상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알게 하는 그녀의 담력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애들 장난같이 나른하고 애상적 정서에만 호소하는 글을 보다 이 글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래 나도 투정 많이 부리고 물정 모르는 헛소리 많이 했었지. 배부르지 않은데 배부른 체 행세하고, 아직도 끝없는 기갈이 나를 잡고 있음에도 마치 해탈한 것처럼 위장했었다. 그녀는 자신의 글을 아포리즘 에세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소설이 될 만한 생의 내력도 간결하게 뭉치고, 시가 될 절정의 순간도 눙쳤다'고 말했다. 거기에 '틀을 벗었기에 가볍고 즐겁게 소통하리라 믿는다'는 말도 넣었다. 그 말에 값하는 글들이다. 더 좋은 글도 많았지만 나는 밑의 글에 마음이 갔다.

 

 경의를 표함

 

 지갑에 참을 인忍자 석 자를 넣고 다닌다는 보일러공 시인 이면우. 돈을 참고 술을 참고 여자를 참고, 참 잘도 살아냈다. 쉰을 넘은 맑은 얼굴. 그가 참으며 빚어낸 저 정한 자식들 눈물겹게 살아서 내 안으로 잠겨든다.

 아직 한창인 식욕을 참고 사주에 타고난 역마살을 참고 대물림으로 받은 한량기를 참으며 예까지 겨우 왔다. 지나온 길 돌아보니 내가 마련한 것들 허름하여 미안하다. 이 몸도 쉽게 산 시간 없지만, 몸으로 산 그에게 오늘만은 깊이 엎드림.

 

직업으로 한 존재를 평가하는 은밀하고 음험한 기준이 얼마나 세속적이며 부끄러운지를 노정숙은 경의를 통해 폭로한다. 혹 어려울 때 이 사람을 아는 게 도움이 될까 싶어 자신도 모르게 줄서기에 끼어들며, 당장 드러나지 않는 됨됨이는 저 멀리 밀쳐두는 사람들이 바로 나였음을 자각케 하는 것이다. 한껏 폼 잡은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 경우가 별로 없었던 일들을 떠올려본다. 그래서 그녀가 주목한 보일러공 시인은 그녀의 선물이자 무언의 가르침이다. 보일러공 시인을 통해 우리가 진짜 붙들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다.

 

힐링이 난무하는 시대에 그녀의 글은 어쩌면 맞지않을런지도 모른다. 달래주기 보다 더 아프게 하고, 더 고민스럽게 했으며,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 기만을 여지없이 드러냈으니 말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상처도 보이지 않은채 치료하려 하고, 고름도 짜지 않은채 연고를 덧발라 덮어버리려는 얄팍한 수작을 과감하게 폭로했으니 말이다. 가짜는 반짝이지만 진짜는 소박하다는 사실을 거꾸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녀는 진짜의 속살을 보여준다. 진짜를 본 사람만이 진짜를 분별하고 가짜를 본 사람을 결코 알 수 없는 진짜의 세계를 그녀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럴듯한 가짜의 세상에서 보기 드문 횡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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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다 이야기 - 요리 교실 사람들의 인생 일화
나카가와 히데코.선현경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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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 달에 한번 부페식으로 음식을 해가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해외 거주 경험이 많은 삼십대 주부들이 대부분이선지 그날이 오면 색색의 화려한 요리들이 경쟁하듯 선을 보였다. 어찌나 잘 만들어오는지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요리 학원에 등록을 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배우고야 말겠다는 마음에 스스로도 얼마나 기대를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받는 스트레스가 상상 이상이었다.

 

20대부터 50대 후반까지 20여 명이 모여 수업을 들었는데,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스며, 드레싱이며, 음식 얘기가 나왔다. 그래도 이론 수업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실습 시간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메모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머리 속에 저장해둔 내용과 실습 과정이 연계가 안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못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결국 중도에 그만 두고 말았다. 요리학원을 안 나가니 살 것 같았다. 그렇게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후로 소스나 드레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수확이 없었던 건 아니다.

 

재작년 이 책의 저자 나카가와 히데코가 '셰프의 딸'을 냈을 때 제목이 꽤 여운 있어 눈여겨 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읽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선지 이 책을 보자마자 집게 되었다. '맛보다 이야기'란 책 제목처럼 이 책은 요리보다 요리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연희동 집에 차린 ' ' 이라는 요리교실을 이끌며 만난 사람들과 요리, 그리고 삶에 관한 이야기가 잔잔하게 담겨져 있다. 그녀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프랑스 요리 셰프였던 아버지와 플로리스트였던 어머니,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요리반 수강생들과 그녀의 가족, 그리고 연희동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요리를 가운데 두고 이어진다.

 

파에야-사진 출처: ESSEN

 

"파에야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있어요.", "만드는 양이 많을수록 요리가 맛있어져요. 함께 먹는 사람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죠. 요리는 사랑이에요!" 라며 말하는 사람은 이 책에 그림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선현경이다. ' '의 수강생이기도 한 그녀의 얘기는 나카가와 히데코의 음식과 요리에 대한 철학을 반영한다. 타자를 우리로 연결하는 가장 편안하고 직접적인 매개로서의 요리에 대한 그녀의 자부심은 은근하지만 대단하다. 요리교실을 운영하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시간 속에서 건져올린 가치이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파에야와 아펠쿠헨, 지라시스시와 라자냐, 차슈와 카르보나라, 고모쿠오코와와 파운드케이크등을 만들며 각자의 삶을 나누고 아픔을 공유했던 나날은 그녀의 삶에 기꺼이 도화지와 밑그림이 되어주었다. 요리로 인해 그녀의 삶의 스펙트럼은 더욱 넓어졌고 풍성해졌다. 그녀에게 요리는 곧 삶이고 건강이며 세상을 향한 창이었다. 그래서인지 맛과 요리를 대하는 그녀의 자세는 진지하고 사뭇 복잡하다.

 

『 이십 년 전부터 '미각 기르기'를 국가 차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프랑스는, 세 살부터 열두 살까지의 경험이 평생의 입맛을 결정한다는 전제로 전국 초등학생들에게 '미각 수업을 하고 있다. 이 수업의 핵심은 '단맛, 짠맛, 쓴맛, 신맛의 네 가지 맛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한다. '매운맛'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산 뒤로, 나는 인간의 미각은 '매운 맛'을 일단 느끼는 순간 나머지 네 각가지 맛을 모두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올바른 식습관을 기르려면 먼저 맛을 느끼는 힘이 있어야 한다. 맛을 느끼는 힘을 기르면, 당연히 식문화나 영양에 대한 관심도 깊어진다. 어떻게 좀 더 다양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맛을 전할까. 또 이렇게, 나의 고민은 시작된다. 』pp 267~268

 

 

책을 읽는 내내 요리를 좀더 쉽고 즐거운 대상으로 인식했다면 내 삶이 조금, 아주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 엄마들 가운데 더러 좋은 데 시집가서 손에 물 묻히지 말고 살라고 일부러 요리를 안 가르치시는 분들이 있었다 한다. 우리 친정 엄마도 그런 바람이 있으셨는지 부엌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그래서 요리는 내게 먼 거리에 있는, 가까워지기 힘든 부담스런 대상일 뿐이었다. 세상살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 즐거움 중 하나를 놓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책으로 배우는 재미있는 요리 이야기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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