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 달에 한번 부페식으로 음식을 해가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해외 거주 경험이 많은 삼십대 주부들이 대부분이선지 그날이 오면 색색의 화려한 요리들이 경쟁하듯 선을 보였다. 어찌나 잘 만들어오는지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요리 학원에 등록을 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배우고야 말겠다는 마음에 스스로도 얼마나 기대를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받는 스트레스가 상상 이상이었다.
20대부터 50대 후반까지 20여 명이 모여 수업을 들었는데,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스며, 드레싱이며, 음식 얘기가 나왔다. 그래도 이론 수업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실습 시간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메모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머리 속에 저장해둔 내용과 실습 과정이 연계가 안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못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결국 중도에 그만 두고 말았다. 요리학원을 안 나가니 살 것 같았다. 그렇게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후로 소스나 드레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수확이 없었던 건 아니다.
재작년 이 책의 저자 나카가와 히데코가 '셰프의 딸'을 냈을 때 제목이 꽤 여운 있어 눈여겨 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읽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선지 이 책을 보자마자 집게 되었다. '맛보다 이야기'란 책 제목처럼 이 책은 요리보다 요리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연희동 집에 차린 '구르메 레브쿠헨' 이라는 요리교실을 이끌며 만난 사람들과 요리, 그리고 삶에 관한 이야기가 잔잔하게 담겨져 있
다. 그녀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프랑스 요리 셰프였던 아버지와 플로리스트였던 어머니,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요리반 수강생들과 그녀의 가족, 그리고 연희동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요리를 가운데 두고 이어진다.
파에야-사진 출처: ESSEN
"파에야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있어요.", "만드는 양이 많을수록 요리가 맛있어져요. 함께 먹는 사람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죠. 요리는 사랑이에요!" 라며 말하는 사람은 이 책에 그림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선현경이다. '구르메 레브쿠헨'의 수강생이기도 한 그녀의 얘기는 나카가와 히데코의 음식과 요리에 대한 철학을 반영한다. 타자를 우리로 연결하는 가장 편안하고 직접적인 매개로서의 요리에 대한 그녀의 자부심은 은근하지만 대단하다. 요리교실을 운영하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시간 속에서 건져올린 가치이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파에야와 아펠쿠헨, 지라시스시와 라자냐, 차슈와 카르보나라, 고모쿠오코와와 파운드케이크등을 만들며 각자의 삶을 나누고 아픔을 공유했던 나날은 그녀의 삶에 기꺼이 도화지와 밑그림이 되어주었다. 요리로 인해 그녀의 삶의 스펙트럼은 더욱 넓어졌고 풍성해졌다. 그녀에게 요리는 곧 삶이고 건강이며 세상을 향한 창이었다. 그래서인지 맛과 요리를 대하는 그녀의 자세는 진지하고 사뭇 복잡하다.
『 이십 년 전부터 '미각 기르기'를 국가 차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프랑스는, 세 살부터 열두 살까지의 경험이 평생의 입맛을 결정한다는 전제로 전국 초등학생들에게 '미각 수업을 하고 있다. 이 수업의 핵심은 '단맛, 짠맛, 쓴맛, 신맛의 네 가지 맛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한다. '매운맛'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산 뒤로, 나는 인간의 미각은 '매운 맛'을 일단 느끼는 순간 나머지 네 각가지 맛을 모두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올바른 식습관을 기르려면 먼저 맛을 느끼는 힘이 있어야 한다. 맛을 느끼는 힘을 기르면, 당연히 식문화나 영양에 대한 관심도 깊어진다. 어떻게 좀 더 다양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맛을 전할까. 또 이렇게, 나의 고민은 시작된다. 』pp 267~268

책을 읽는 내내 요리를 좀더 쉽고 즐거운 대상으로 인식했다면 내 삶이 조금, 아주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 엄마들 가운데 더러 좋은 데 시집가서 손에 물 묻히지 말고 살라고 일부러 요리를 안 가르치시는 분들이 있었다 한다. 우리 친정 엄마도 그런 바람이 있으셨는지 부엌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그래서 요리는 내게 먼 거리에 있는, 가까워지기 힘든 부담스런 대상일 뿐이었다. 세상살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 즐거움 중 하나를 놓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책으로 배우는 재미있는 요리 이야기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