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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 우리 시대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문 지식 ㅣ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1
주현성 지음 / 더좋은책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언젠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과 결혼할 줄 알았다면, 지난 시간을 쓸데 없는 데 쓰지 않고 나 자신을 좀더 갈고 닦는데 썼을거라고.
내가 보냈던 시간의 총합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모든 시간이 다 의미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앞이 보이지 않기에 생각이 많았고,
마음이 급한 나머지 내실을
기하기보다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에만 신경을 썼다. 그렇다 보니 결과물이 좋아도 불안했고, 좌절감이 찾아올 때는 금새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자신감이 없어서일까 대개는 예민했고 감정의
기복도 심했다.
당시의
내게 천천히 꾸준히 가기만 해도 괜찮다고, 조급해하지 말라고 누군가 말해주었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잘 살았을까? 글쎄,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실수하고 헤메고, 때론 상처를 받더라도 그 시간이 의미있다는 것만큼은 알았을 것 같다. 삶의 어떤 지침도 가지지 못한채
사람들 속의 섬이길 바랐던 내 추웠던 젊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짠하다. 그 때의 내게 큰 흐름 속에서 인생을 보게했다면 불안을 해소하는 데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쓰지는 않았을
것 같으니 말이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미련했던 나는 인문학이 내 삶의 구체적 문제에 답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 했다. 내 현실이 대입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인문학이란 프리즘
통해 상황을 차분히 바라보기만 했어도 스스로에게 좀 더 여유있고 긍정적인 답을 줄 수 있었을텐데,
속단하거나 부정적이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도 적잖은 세월이 흐른 후, 좋은 인문학 책을 소개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니 해석이 달랐고 이해의 진폭도 컸다. 또한
구체적이면서 실질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인문학을 나는, 사람답게 살고픈 인류의 총체적 노력의 집적물이라 생각한다. 예전엔 문학·역사· 철학만을 범주에 넣었다는데
오늘날 인문학의 범위는 매우 넓어졌단다. 그래서 600 페이지 가까운 이 책이 '우리 시대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문 지식'이란 부제를
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여섯 분야로 나뉘어 전하는 이야기들은 책의 분량이 주는 부담은 있을지언정 무겁거나 어렵지 않다. 저자 주현성은 심리학을
필두로 회화와 신화, 역사와 철학, 글로벌 이슈로 나누어 인문 지식을 전한다.
1장은 프로이트와
융으로 시작해 인지심리학과 뇌과학, 경제심리학을 포함, 심리학의 출발부터 최근의 경향까지를
다룬다. 오늘날 연계 학문의 참여로 인해 인지심리학의 연구와 성과는 인지과학혁명으로 불릴만큼
대단하단다. 2장은 프랑스 인상파의 대표 화가인 모네로부터 출발한다. 마네와
세잔, 고갱과 고흐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의 화풍을 소개한 후, 입체주의의 출발점에 있었던 피카소와 야수파의 마티스를 다룬다. 그리곤 빈
분리파의 클림트와 그의 애제자인 애콘 실레를 거쳐 잭슨 폴록과 앤디 워홀의 팝 아트를 이야기한 후, 현대미술의 경향까지를 가볍게 안내한다.
3장은 그리스 신화다.
어릴 적 그리스 신화를 읽으며 수많은 신들의 이름 때문에 진땀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의 분량이 예상 외로 많지 않은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데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신화를 통해 인간사를 비추려는 그리스인들의 기지가 능청스레 전해져 살짝
웃었다. 4장은 그리스 문화에서 발원되어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서양사를 소개한다. 역사를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언급하는 머리말은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우리는 대입 수능에 한국사를 필수 과목이 아닌 선택 과목으로 지정해
놓았다.
'서양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추천받는 교양서는 『그리스 로마신화』다. 그만큼 서양 문화에서 그리스의 영향은 지대하다. 로마가 거대 제국을
이루며 서양 문화의 골격을 제공했다면, 그리스는 서양 문화의 뿌리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씨앗과 같다. 이 씨앗이 거대한 로마의 영토에
뿌려지고, 여기에 기독교가 합쳐지면서 유럽의 정신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 문화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문화가 중세 말부터 다시 그
힘을 발휘하여 중세를 무너뜨리고, 오늘과 같은 근현대를 만들어내는 정신적· 문화적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p
203
5, 6장 철학편은
저자의 욕심과 기대가 마음껏 들어간 장이다. 이는 200 페이지 가량의 분량이 할애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철학 관련 텍스트를 읽으며 재미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몇 번 없는데, 숨겨두고 읽고 싶을만큼 흡인력이 컸다. 어떤 식품첨가물도 넣지 않은, 게다가
딱딱하기까지한 음식을 먹는 느낌이랄까, 그런데도 왠지 모를 감칠맛이 느껴졌다.
5장 전반부는 탈레스에서 시작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을 거쳐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철학까지를
다룬다.
'돌이켜보면 대화법을 시작으로 엄밀한 언어의 정제 과정을
추구했던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 철학은 플라톤에 이르러 보편이라는 실재론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결국 유명론에 의해 송두리째 흔들려버리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당연한 것으로 형성된 신과 이성을 하나로 보는 관점이 그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는 과정으로도 보인다. 그래서일까?
신을, 그리고 신의 교리를 애써 증명해 보이려던 중세의 철학은 어떤 면에서 왠지 부질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 중세철학은 무엇을 남긴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좀 더 촘촘해진 논리와 형식, 다양한 인식론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 신앙과 이성이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들을 알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p 326
후반부는 대륙에서 자리잡은 합리론과 영국에서 자리잡은 경험론을 필두로,
독일관념론의 칸트와 칸트의 이원론을 변증법을 통해 극복하려했던 헤겔, 이를 의지를 통해 극복하려 했던 쇼펜하우어를 다룬다. 이후 한 개인의
실존을 중요시했던 키에르케고르와 생철학과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니체까지 소개된다.
6장이야말로 이 책이
숨겨놓은 비장의 카드로, 현대철학의 관심과 방향을 난삽하지않게 공들여 소개해 놓았다. 저자는 마르크스로부터 시작해 루카치와 그람시를 거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와 분석철학의 비트겐슈타인, 이어 논리실증주의까지를 전반부에 등장시킨다. 그리곤 미국으로 눈을
돌려 프래그머티즘의 제임스와 듀이를 소개한 후 로티를 언급한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현상학의 후설과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소쉬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연잇는다. 바르트와
라캉, 푸코와 데리다, 우리나라에서 핫한 들뢰즈도 각 두세 페이지씩 할애된다. 현대철학의 흐름을 대략적이나마 알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였다.
마지막 7장은 이 시대의 시급한 현안인 글로벌 이슈에 대한 이야기다. 세계화와
양극화 문제, 환경과 종교, 인종 갈등등이 소개된다.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예나
지금이나 젊음은 버겁다. 희망과 절망, 성취와 좌절이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우울하고 불안했던 내 20대를 떠올렸던 건, 그 시절의 나와
만날 수 있다면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이다. 눈 앞에 닥친 고민거리를 인문학이 당장 해결해 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조금 떨어져서 자신과 세상을 볼 수 있는 여유는 줄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세월이 흐른 후 네 기대만큼 괜찮은 자신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거라고. 혹 기대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 때는 네
존재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이 책을 그 때의 내게 권한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의 내게도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