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의 빗장을 따다 - 인상주의 다시 보기
이태호 지음 / 북폴리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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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분께는 죄송하지만 이 책은 근래 읽었던 책중에 유례가 없는 졸작이었다.

교수를 지내신다는 분이 문장의 주술구조가 안맞는 초보적인 실수를...그것도 매우 잦게 말이다. 더군다나 글로써 어떤 그림을 설명을 해놨으면 해당작품을 눈에 보이도록 실어놓는게 상식인데 완전히 지혼자서 따로놀고 있다. 설명은 하는데 그림이 없다는게 말이되나.

더군다나 이사람의 글에는 감성이 없었다. 일반적인 사실나열하는 거라면 인터넷만 뒤져도 지식습득하는건 일도 아니다. 그저 당시대 화가들의 바이오그래피만 모아놓은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미술 외적인 분야에 대한 지식과 통찰력도 상당히 부족해 보였다. 

진중권씨가 너무 유명해져서 단순 비교하기가 좀 죄송하긴 하다만.  씁쓸한 감정은 어쩔수가 없었다. 부족한데가 많은만큼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발전에 게을러지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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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 2008-04-12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무지한 말씀입니다. 제대로 읽지 않거나 미술에 대한 초보적 지식이 없는 분 같습니다.
이 분의 진솔한 태도의 글은 진중권의 자극적인 글과는 대비된답니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이 글에 다른 분들이 속지 않길 바라며...

고사리 2008-04-18 0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아영씨와 동감입니다.

그리고 '바램'이 아니라 '바람'입니다.

 
오노레 도미에 - 만화의 아버지가 그린 근대의 풍경
박홍규 지음 / 소나무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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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프랑스의 한 민중 예술가에 대한 찬사는 대한민국이 한 법대 교수에 의해 서술되었다. 법학자 특유의 건조하고 딱딱한 어체가 예술가의 삶을 조명하는데 있어서 적지않은 핸디캡이었을 것이나, 정작 저자 본인은 그런 편견에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군데군데서 그런 아쉬움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래도 여타 폐급 법학자들의 폐급 저작물들보다는 백번 나았다. 해당 인물에 대한 거의 숭배수준의 찬양이 좀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정도 저작이면 나름대로 대한민국 출판문화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플러스 요인이 되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도미에를 만화가라고 전제한 후 글을 써내려갔다. 그래서 만화의 역사부터 간단하게나마 고증하고 있는데, 미술이나 만화에 대한 기본 상식이 없는 독자들에겐 제법 유용한 지식이 될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야를 위시한 일련의 작가들을 '만화가'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당시의 역사와 버무려 서술한 점이 굉장히 맘에 든다.

사실 이 책은 거의 19세기 프랑스 역사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저자의 역사인식은 투철하다. 물론 도미에의 삶 자체가 워낙 민중지향적이다 보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당시의 사회사건들과 그것이 추동된 미시적, 거시적 요인들도 오목조목 따진점은 역사가로서의 저자의 면모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래서 때때론 딱딱한 인상을 풍기기도 하지만, 이런 시도 자체는 아주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내 기준으론, 예술은 휴머니즘적일때만 진정한 의미가 있으니까 말이다.


도미에의 삶, 19세기 프랑스 혁명사, 그리고 판화로부터 유래된 만화의 역사. 이 세가지로 본 책은 요약될 수 있다. 물론 이 세가지 주제들은 각각이 분명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고, 거기다 저자의 뚜렷한 자기논리도 잘 녹아나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론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다.

본문속에 나타는 저자의 말대로, 이제 더 이상 군사정권 시절에나 볼법했던 무식쟁이 법조인들이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그런 꼬락서니는 보고싶지 않다.
법을 담당하는 이들이 최소한의 문화적 교양이 있다면 지금 우리사회는 이정도로 경직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미술교육을 시켜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역사자체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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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4-16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 지금 바탕화면이 도미에의 돈키호테인데, 요즘 관심가는 작가에요. 책이 있었군요. 것도 제가 좋아하는 박홍규 교수님. 보관함에 담아놓습니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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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문학작품을 접하게 되는 방식은 원본소설의 형태가 아닌, 영화화된 영상물인 경우가 매우 많다. 내게 있어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역시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영화를 보지는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헤밍웨이의 세계를 접하게 된 것은 티비의 한 영화프로그램에서였다. 몇 명의 영화평론가들이 나와서 헤밍웨이의 삶과 시대를 종합적으로 리뷰해주고 있었는데, 사실 그 내용은 우리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소재들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것들이었다.

매체를 보면 그의 작품세계는 로스트 제너레이션, 미국, 마초이즘, 운명.. 이 정도의 키워드로 압축설명된다. 앞서서 언급했던 영화평론가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어쨌든 책을 읽은 후의 내 나름대로의 감상을 간단히 피력하자면,, 말머리에 달린 별 두개로 표현할 수 있겠다.


어떻게 보면 여지껏 읽어왔던 서양고전 중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작품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세속적인 주제들이 주류를 점하는 영미소설 특유의 성향을 감안하더라도 본작에 대한 실망감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는다.
왜 감동이 없는가? 더군다나 명색이 노벨상 수상작 아닌가(물론 노벨상의 공신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의미심장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는 제목특유의 어드밴티지에 힘입은 결과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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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이 가져다주는 최소한의 감동- 이 작품에서는 '운명'이라는 주제인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주인공의 깊이있는 정신적 성찰을 통해 세련되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매우 조잡하고 피상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시적이지 못하고 산문적이었다고 해야할까? 필요없는 문구들이 곳곳에 넘쳐났다.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물량(?)덕택에 나는 열흘동안 작가의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지루함이라는 고문...
2500페이지에 달하는 레미제라블도 별 따분함없이 쉽게쉽게 읽었는데..


소재만 놓고본다면 이 이상 더 좋을 수는 없다. 스페인 내란은 그 사건 자체만으로도 이미 세계사적인 이슈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담고 있는 스케일은 턱없이 협소하기만 했다. 물론 제한된 배경에서 전개되는 형식의 소설들은 무수히 많다. 문제는 그렇게 비추어 볼때 책의 분량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간단히 에리히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예로 들자면, 그 역시 전쟁의 상흔을 주제로 한 작품이나, 여러면에서 본작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비록 주인공은 두 명이지만, 레마르크는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에게도 분명한 개성을 부여함로써 당시 파리의 암울한 현실을 다채로운 모습으로 구체화해내었다. 뚜렷한 톤의 배경묘사 역시 소설에 완성도를 더했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이 작품은...등장인물은 오히려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개성있는 내면을 표현해준 인물은 주인공인 로버트 조던뿐이다. 물론 필라르와 마리아의 과거회상 장면이 적지 않게 묘사되어있지만, 이상하게도 거기엔 독자를 몰입시키는 뭔가가 없는 것이다. 그들만의 내면 캐릭터가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은 것이다.


덧붙여 말해서...마리아라는 인물설정 역시 몹시 짜증나는 대목이었다. 도대체 그런 무미건조한 색깔의 인물을 소설에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비상식적일 정도로 수동적이기만 한 그런 캐릭터를 두고 과연 짜증안낼 독자가 몇이나 있을까? 남자인 내가봐도 이렇게 부정적인데, 하물며 페미니스트들은 오죽할까?
설마 이것이 평론가들이 그렇게 강조해대는 '마초이즘'의 예는 아니겠지.


마지막으로...헤밍웨이를 은유하는 말로써 불굴의 의지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이 있다. 물론 맞다. 허나 내가보기엔 분명히 어딘가 모자라는, 불완전한 '운명'이다. 왜냐면 표현방식이 수박 겉핥기식이기 때문이다. '운명'만큼 엄숙하고 무거운 주제가 없는데,,,헤밍웨이의 '운명'을 보노라면 주인공의 깊은 내면세계가 드러나기는 커녕 필부들의 일상만이 두드러질 뿐이다.


헤밍웨이에 대한 찬양은..음악인으로 치면 거의 베토벤 수준이다. 그러나 베토벤의 음악과 정신세계를 존경하는 나로서는 정말이지 펄쩍 뛸일이다. 베토벤에 비하면 헤밍웨이는 이제 겨우 음대 4학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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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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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딧세이'는 이미 당당히 이 시대의 교양전범이다.
예술철학. 고리타분한 아카데미즘과 땔래야 땔 수 없을 것 같은 저 이름을 진중권은 자신의 펜 하나로 완전한 한국식 클래식으로 탈바꿈 시켰다.
그럼에도 정작 본인은 어딘지 불만스런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자기 기준으로 보면 틀림없이 점잖게 쓴 축에 속하는 저작물일테니..자기만의 아카데미즘이라는 생각에 약간 아쉬웠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였을까...잠시 제도권 생활(?)을 등지더니 제 전공분야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철저히 디오니소스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개인적으로 볼때 진중권은 데카르트식 이성주의자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학 오딧세이라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점잖은' 저작이 존재한다는 건 그자체로 이미 또다른 반대급부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바로, 바로 그 결과물이 본 책이다.


간단하게 별 만점이다. 물론 내 개인적인 성향과 너무도 잘 맞아떨어지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이 책이 훌륭한 이유는 저자가 턱없이 단순한 주제를 강변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의외로 단순한 것일수록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시가 그렇지 않을까.
여튼 그런 사람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진중권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370페이지로 주석화했다. 물론 이 주석들은 하나같이 기똥차게 흥미로운 것들이라 독자는 그저, 별다른 노력없이 즐기기만 하면된다.


중간에 책을 거꾸로 뒤집거나 옆으로 틀어서 보는 엉뚱한 행동을 해야만 되는 부분이 있다. 난 여기가 너무 유쾌했다. 왜냐면 독서의 기존 통념을 완전히 깨버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역시도 정적이기만 하던 기존의 독서무드가 굉장히 짜증이 나던 터였다. 그런데 진중권은...책을 거꾸로 보게도 하고 옆으로 보게도 하고 세워서 보게도 한다.
움직이며 하는 독서라! 이 얼마나 기분좋은 시도인가!
만약 당신이 사람많은 공터에서 이 책을 본다면 좀 거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위시선에 신경쓰는 독서를 한다면 당신은 이미 이 책을 읽을 자격을 결여한 사람이다.
이 책은 동(Dynamic)을 다루지 정(Static)을 다루는게 아니니까...


최근 개인적으로 라이프니츠를 관심있게 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책 후반부는 거의 라이프니츠의 이름으로 도배가 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벌써 내가 진중권의 경지에까지 올랐단 말인가? ㅋㅋㅋ
여튼 본 책은 라이프니츠의 단자론 하나면 끝난다. 저자 본인이 좋아 마지않는 에셔의 판화 한점으로도 충분함은 물론이다.


일말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렇게 방대한 지식 자료들을 토대로하여 저자가 하나의 진테제를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응할만한 수준의 안티테제는 전혀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이 수준에 어울릴만한 학자가 대한민국엔 없으니까!!!
없다면 누군가는 성낼건가? 제발 성좀 내면서 책하나 내라.
우린...구체적으로 안보여주면 모른다. 부처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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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 Me
Sixpence None The Richer 노래 / 워너뮤직(WEA)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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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텔톤의 차분한 감성을 센스있게 풀어내 많은 팬들을 아스한 설레임의 세계로 초대했던 Sixpence None The Richer 는 이제 더 이상 락씬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형의 밴드가 되었다.
여전히 상투적이고 억지춘향으로만 들리는 현재의 이모코어 씬을 지켜보는 나로서는 꿈결같은 느낌 가득했던 90년대 모던 락에 대한 향수가 자연스레 생겨난다.
SNTR...그들의 애수어린 기타선율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지금의 기분을 살려 로맨틱했던 90년대의 감성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고 싶다.


음악은 청각적인 이미지로 소개를 해야하는 것인데 글자라는 활자매체를 통해 소개할수 밖에 없도록 처음부터 한계가 그어져 있으니 다른 청자들에게 본 앨범의 감성을 그대로 전달한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라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음반들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그래서 평론가들은 보다 쉽고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여러가지 상징적인 아이콘을 사용한다. 이를테면 80대의 헤비사운드는 메탈리카, 90년대는 콘 이런 식으로 말이다.
무한대로 뻗어나가려는 욕망의 속성을 지닌 예술품을 하나의 틀로써 제한하는 행위는 분명히 온당치 못한 처사지만 어차피 그것이 일장일단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행위가 썩 지탄받을 일만은 아닐것이라 생각한다.
틀과 아이콘을 쓰는 것은 문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무이한 수단이다.
미학강의를 하는 시사논객 진 모 교수처럼 여러 회화작품을 곁들여가며 '시각이미지'로 전달을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이러 상황에 있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Kiss Me' 와 'There She Goes'로 익히 잘 알려져있는 밴드이지만 감칠맛나는 그들의 사운드를 깊이있게 음미하는데 있어서 이 두 곡만으로는 분명히 무리일 것이기 때문에 나는 컬렉티브 소울이라는 90년대의 거대한 아이콘을 설정하고 싶다.
10대의 중후반, 그리고 20대 초반의 시기를 90년대에 보낸 사람이라면 컬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것이다. 재치넘치고 개성있는 락 넘버들로 많은 팬들의 귀를 즐겁게 했던 컬쏘였지만 팬들이 실제로 더 감동했던 부분은 그들 음악의 저변에 깔린 잔잔한 감수성이었다. 남부지방 특유의 온기넘치는 사운드가 그 핵심이 아니었나 생각되는데, SNTR은 이것을 매우 극적으로 재현해내는 밴드이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98년 말미에 공개된 본작은 그들의 풀렝쓰 데뷔작이다.
기타와 첼로선율이 지배적인 가운데 곱디고운 음색의 보컬이 곡 하나하나를 안정감있게 완성해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흙냄새 가득한, 소박한 기타연주를 들려주는 Matt Slocum 이라는 인물이 사운드의 키를 쥐고 있는데, 힘있고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 스타일 덕분이지 전체적인 곡 구성이 매우 탄탄하게 느껴진다.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We Have Forgotten'은 본작의 베스트 트랙 중 하나로, 차분하고 사색적인 분위기가 잘 그려진 곡이다. 절제된 미드템포에 감각적인 기타연주와 보이시한 음색이 잘 어우러지는 것이 특징인데, 청자의 긴장감을 푸는데 있어서 이만한 곡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애수어린 기타솔로가 스트링 세션으로 더욱 빛을 발하는 'Anything'을 지나 메가톤 히트송 'Kiss Me'에 이르면 의외로 무덤덤한 반응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업템포의 생기넘치는 곡임에는 틀림없지만 앨범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전혀 벗어남이 없는, 절제된 스타일의 곡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곡은 데뷔앨범이 발매되기 이전인 98년에 이미 싱글로 공개가 되었으나, 지금의 인기를 얻은 것은 한 청춘영화에 삽입된 이후이다.
앨범과 곡 자체만으로 순수하게 감상해나가는 태도가 뮤지션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되는 바, 영화삽입이니 뭐니 하는 시끄러운 요소들은 과감히 배제하는 것이 좋겠다.

'Easy To Ignore'도 앨범 전체적인 색깔에서 크게 벗어남 없는 차분한 사운드를 담고 있지만 컨트리풍의 바이올린 연주가 입혀진 덕택에 제법 인상적인 느낌을 주는 곡이다.
다소 격정적인 톤으로 읊조리는 'Puedo Esribir', 절제된 피아노와 트럼펫 연주가 잘 어우러지는 'The Lines Of My Earth'도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게 다가오는 트랙들이다.

단순하지만 몽롱하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잘 드리워지는 'Sister, Mother'도 추천하고픈 트랙인데, 퍼즈톤의 기타음색에 귀를 귀울여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된다.
맥시멈한 스트링 협연이 돋보이는 'Moving On'은 템포체인지를 했으면 굉장히 멋졌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짙게 배이는 곡이다.
둥글둥글한 베이스 인트로로 시작하는 Love는 에코가 잔뜩걸린 기타연주로 얼마간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독특한 트랙이다.

설명이 필요없는 'There She Goes'는 앨범의 피날레에 위치한 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차분한 분위기가 앨범 전체의 특징이긴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긴장감이 떨어지는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축 늘어졌던 어깨를 주무르며 탁한 공기를 환기시키는 듯 청량감 넘치는 사운드...끝이 좋으면 앞부분의 실수가 다 커버된다고 했던가. 본 트랙은 그런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도 남을 정도로 위력이 있는 넘버이다.
위력있는 곡일수록 리메이크 횟수가 많은 것은 그때문일까...

지금의 이들을 있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특정 영화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Sixpence None The Richer는 본작을 통해 한편의 잔잔한 러브스토리를 훨씬 더 감미롭게 그려낸다.
자연스레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이는 이 달콤한 사운드...사운드트랙의 진정한 역할은 이런 '자연스러움'이 아닐까.


수많은 모던 락 밴드들이 명멸한 가운데 이모코어라는...단어자체에서부터 벌써 이율배반적인 느낌이 다가오는 신종 장르가 현재 주류 락씬을 점하고 있다. ...의문스럽다. 감성과 코어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90년대식 귀로 2000년대의 음악을 단편적으로 판단하고 싶지는 않지만, 진한 아쉬움이 드러워지는 건 역시 어쩔 수가 없다.
2000년대의 음악 트렌드는 멜로디보다는 리듬이 강조되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누군가의 언급이 떠오른다. 최근 일련의 경향들을 통해 그 말이 절실히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절망감은 더해진다.

하나의 씬이 다시 부활하는데는 정확히 20년의 주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다시 10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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