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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 1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이규현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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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에는 동시대 문인들에게서는 찾아볼수 없는 멋들어진 호쾌함이 있다. 혹시 당신이 서양 고전을 제법 접해보신 분이라면, 그것들이 대부분 읽는 그때보다는 읽고 난 뒤가 훨씬 더 감동의 폭이 크다는 점을 알고 계실 것이다. 물론 이런 특징이 고전의 한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과연 이러한 특징이 현대인에게까지 두루 어필할 수 있느냐,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좀 부정적이다. 그런데 이 뒤마라는 친구는 그 무리에서 제외되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에 관해 초절정 마이너 취향의 매니아가 아니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술작품의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서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를 겸비한 것을 최우선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느낌으로만 본다면, 뒤마의 본 작품은 작품성보다는 대중성에 좀 더 접근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군데군데서 묻어나는 교훈적인 문구들이 동시대 문인들의 그것과 비교해서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지만, 글을 읽으며 전체적으로 헐리우드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난 뒤마와 삼총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작품성만으로 작가의 우열을 따진다면 문학은 분명히 대중과는 멀어진다. 이는 문학 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에서 다 마찬가지다. 이런 작품이 있기에 대중은 이야기꾼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또 이런 작가들이 있기에 좀 변태적인 이야기꾼들은 좀 더 심오한 얘기를 꾸며낼 수 있는 것이다. 뒤마의 작품이 너무 대중적이다라는 식으로만 얘기가 된 것 같은데 작품성 측면에서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명구절들이 곳곳에 스며있다. 부디 오해없기를 바라며...어린시절 만화로 접했던 그 이름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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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4-11-23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삼총사"는 만화와 영화로 워낙 많이 봐서리, 책 읽을 시도를 안 해 봤어요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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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냉소는 부작용을 낳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박노자의 글은 그런 위험으로부터 어느정도는 거리를 두고 있다. 말 자체는 신사적으로 하면서도 그의 글에는 독기가 가득 차 있고, 또 그러면서도 동시에 누구나가 다 납득할만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이성적인 분석과 판단은 읽는이로 하여금 필자에 대한 신용을 갖게 만든다.

크게는 노르웨이와 한국사회를 두 축으로 하여 보다 이상적인 국가와 사회체제를 모색하고 있다. 그 와중에서도 필자 특유의 해박한 지식이 엄청난 영역에서 빛을 발한다. 중심부와 주변부, 그리고 준주변부, 이른바 '종속이론'에 의거하여 국제사회의 헤게모니를 묘사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 중 '준주변부'에 속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감춤없이 까발려 지식인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비록 박노자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 한국사람보다 더 날카로운 분석을 배웠다는 점을 우리는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방인의 눈이 오히려 객관적이고 종합하기 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박노자의 매스질이 턱없을 정도로 섬뜩하다.

마지막으로 박노자는 자신이 양심적 병역거부의 기수임을 노골적으로 만천하에 드러낸다. 아무리 그의 지식과 사고가 해박하다 하더라도 여기에 대해서는 비판의 소지가 많을 것 같다. 물론 이처럼 미묘한 문제에 대해서 용기있게,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자세자체는 훌륭하다. 그가 말하던 '인텔리겐차'의 면모를 잘 보여줬으니 말이다.(Rage Against The Machine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인텔리겐차'는 몸을 굴리며 배운바를 직접 행하는 적극적인 자세의 지식인이고, 말 그대로 지식만 가진자를 우리는 다른말, Intellectual 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예비역들, 솔직히 그들은 그동안 나라를 지켰던 시간보다 별달고 있는 몇몇 장성들의 들러리 역할을 해준 시간이 더 많았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피땀흘린 세금은 율곡사업등의 거대 '세탁사업자금'으로 사용되었고, 우리의 서울대 친구들은 그들 자식들의 과외선생으로 2년 2개월 군생활을 '성실히' 마감했으며, 겨울철 배고픈 그들을 위해 지급되었던 부식과 여러 보급품은 각종 단계를 거치며 관계자들의 수중으로 빨려들어갔다.

이것이 그간 우리들이 해 왔던 군생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군대를 폭력의 화신으로만 모는데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군대는 필요악이다. 반드시 필요하다. 유시민의 말대로 민족을 무시한 이른바 '보편적 역사해석'은 현재로선 배부른 짓이다. 아직도 많고많은 대한민국 국군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나라를 지키고 있다. 비폭력이라는 전 인류적인 사명감을 실행해야한다고? 그건 일단 우리 민족이 다 잘살게 되고 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국가라는 집단에 의해 구속되는 2년간의 기간. 이것이 개인의 인권유린이라면 뜬금없이 나라를 뜨면 된다. 허락 안해준다고? 그러면 불명예 제대라는 방법이 있다. 그렇게 양심을 외치는 병역거부자들. 그렇다면 양심을 불명예 제대라는 것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용기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박노자의 글. 문제점을 파헤치기만 하는데 너무 열을 올린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진정한 인텔리겐차라면 마무리의 견본만이라도 제시해주는, 마지막까지 책임감 있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보기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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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속 여행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1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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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굉장히 동경하다가도 어른이 되면서부터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 단어가 하나 있다면 그건 아마도 '모험'일 것이다. 현대 영화산업에 있어서 공상과학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더구나 그 영화들은 백이면 백 블록버스터의 모양새를 띠는 경우가 많아 영화 장르에 있어서 SF가 없다는 발상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실재로, 어른과 어린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들에 감동해 왔다. 이런 공상과학 영화는 주로 영미권에서 인기를 얻는 공상과학 소설을 영화화한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SF소설이 현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끼치는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다. 그리고 이 분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꼭대기에는 줄 베른이라는 작가가 걸터앉아있다.

현대의 SF문학과 제법 거리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줄 베른의 역량이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 없다. 비록 공상과학 소설이지만 그는 소재에 신빙성, 개연성을 분명히 입혀 픽션의 리얼리티를 더했다. 거기에다 소설의 전통기법인 기승전결식 구도를 이용해 박진감을 더하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아마 이러한 점들이 이 분야의 선구자로서 그가 남긴 위해한 족적일 것이다. 줄 베른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땅 속의 경이로운 세계뿐만이 아니다. 갓 소년티를 벗어난, 아직은 풋풋한 한 청년이 모험을 통해 진정한 성인남자로 거듭나는, 인간성숙의 한 과정을 흐뭇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그만큼 작가는 지구 속 모습외에 인간의 내부세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불가능해 보이던 모든것들을, 인간들은 조금씩 조금씩 성취해 왔다.
꿈은 어린이들만의 소유가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꿈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힘을 하늘이 제공하는 것이다. 그대,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받은 힘을 다른곳에 쏟아붓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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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2만리 1 - 쥘 베른 컬렉션 02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2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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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일본만화 '나디아'를 끌어들이는 것으로 시작하는게 이 소설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디아'를 본 사람들은 다 아시겠지만 '노틸러스 호'라든지 '네모선장'따위의 이름들은 결코 낮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나디아라는 만화는 원래의 소설에 SF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새 옷을 입힌것이라 보면 된다. 해저의 신비와 외계인 등의 초 자연적이고 묵시록적인 내용으로 작품 전반을 채우고 있는데 역시 일본인들 특유의 상상력이 잘 나타나 있다. 이만하면 충분히 인기를 끌 소지는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굉장히 인기를 끌었고...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별로 SF의 느낌은 오지 않는다. 다만 간간이 그 그림자의 흔적만이 있는듯 없는 듯 미묘하게 왔다갔다 할 뿐이다. 하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노틸러스호의 메카니즘에서 우리는 SF적 사고의 출발을 보게 된다. SF문학의 역사를 논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 소설 자체를 감상하는 본래의 자세로 돌아가볼까 한다.

'노틸러스'는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전투용 군함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노틸러스보다 '네모'의 의미이다. 'Nemo'는 라틴어로 'Nobody'라는 뜻이다. 이러한 선장의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이 인물은 소설 전반에 걸쳐 기묘하고 알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다만 중간중간에서 조금씩, 인간세상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염세주의적 사고를 가진 이라는 점이 나타날 뿐이다.

해저 2만리가 동시대의 메인스트림과 질적인 틀을 달리 하는데는 표현대상의 상이함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소설들이 사회 혹은 개인들의 철학적 문제나 사랑 등등 인간사회를 주요 테마로 삼았던 것에 비해, 이 소설에는 '그 따위 인간사회'는 절대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굳이 이 작품에서 인간사회의 흔적을 찾으려고 한다면, 볼수 있는 것은 아마도 순수함으로 무장하고는 저속한 것은 상대도 하지않는 바다의 냉소적인 표정 뿐일 것이다.

네모라는 그 이름답게 선장은 노틸러스 호와 함께 신비한 최후를 맞는다. 여기에 대해서 구구절절 말이 많은데, 그다지 많은 주석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때묻지 않은 바다의 푸른 여운만이 기억에 남는다면 그것으로서 이 소설의 감상은 충분할 것이다. 자연에 있어서나, 인간 사회에 있어서나, 순수함이라는 것은 정말 무한한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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