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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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이 디스토피아를 주제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새롭게 SF를 그려낸 작가는 그때보다 더 나아갔을까.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제 한국의 대표 페미니즘 소설이 된 <82년생 김지영>의 이름은 작가의 곁에서 늘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책 제목을 대며 많은 기대를 하고, 때로는 불평을 하고, 책을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깎아내리려 용을 쓴다. 종종 이런 글들을 보며 한숨을 쉬면서 새 책을 집필하는 부담감이 어마어마할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작가는 최근 출간 인터뷰에서 ‘페미니즘 작가로 불리는 것에 대해 부담감은 없다’고 밝혔다. 그저 쓰고 싶은 주제를 쓰는 것이라고. 꽤 단단하고 믿음직한 말이다.

2012년부터 구상했고 조금씩 수정해나갔다는 신작 <사하맨션>은 오랫동안 작가가 품고 있던 문제의식이 촘촘히 들어차있다. 소설 속의 사회는 ‘타운’이라는 이름의 기괴한 도시 국가다. 기업의 인수로 탄생한 ‘타운’은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엄격한 통제로 유지된다. 공동 총리제를 도입하고, 무분별한 밀입국을 막기 위해 계급을 두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과 전문 지식 혹은 기술을 가진 L, 자격심사를 통해 2년 동안의 체류권을 가지는 L2, 그리고 그 둘에 모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하’라는 이름의 맨션에 숨어들었다. 각자의 상황을 가지고, 맨션의 이름을 따 ‘사하’라고 불리며 배척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작 소설처럼 펼쳐진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 모조리 귀 닫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작은 도시국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기시감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거대 기업은 거대 권력과 결탁하고, 주민이라는 이름 아래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타운의 주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2년마다 검사받는 L2의 인생은 비정규직의 일상과 닮았다. 전염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선한 사람들, 수상한 배의 침몰,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은 나비 혁명, 임신 중절이라는 이슈가 등장한다. 소설의 이야기는 격렬하지 않지만 그것을 읽는 내내 마음은 소용돌이친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여타의 한국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남주의 소설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부분들이다.

“우리,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서로 미안하지? 나한테 진짜 미안해야 할 사람은 누구지? 아무도 내게 사과를 안 해. 누군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요즘 분해서 자꾸 눈물이 나.” (117쪽)

사하 맨션에 정착한 사람들은 ‘몰려난’ 사람들이다. 폭력에 대항하다가 죄인이 되고, 누군가를 도와주려다가 죽음을 맞거나 사고를 내고, 조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이용당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들은 사회 속 어디에나 존재하는 약자들이다.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혐오는 소설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밖으로,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매정하게 내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그리고 당연히 그 사람들은 사과를 할 생각도, 사과를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데도.

작가는 사하맨션에 들어온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들려주면서 사회의 부조리함을 조용히 고발한다. 연작소설처럼 시점이 바뀌는 소설의 흐름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닫히지 않는 결말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야기의 큰 굴곡보다는 대화나 장면 속에 숨겨진 분노들을 응시하며 읽기를 바란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누가 알지? 누가, 나를, 용서해 주지?"
진경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고, 도경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등을 돌려 누우며 덧붙였다.
"나도 타운 주민이 되고 싶어." - P51

"위로는 받았어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받았어요. 위로와 배려를 받고 나니 그걸 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따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팔아먹은 게 됐어요. 그러니까 진경 씨, 살면서 혹시 위로받을 일이 생기더라도 받지 말아요. 위로도 배려도 보살핌도 격려도 함부로 받지 말아요."
아니요. 위로받아도 됩니다. 위로와 배려를 받게 되면 받는 거고 받았더라도 따질 게 있으면 따지는 거고 그리고 더 받을 것이 있다면 받는 게 맞아요. 진경의 머릿속에 이아의 노랫소리가 맴돌았다. - P163

원장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정은 아이를 낳겠다는 결정만큼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하고 그래서 아이를 낳는 곳은 아이를 낳지 않는 곳도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람은 잘 모를 수도 있고 부주의할 수도 있고 상황이나 생각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 번의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P227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쁘지 않아. 어떻게든 둘러대는 사람들이 주로 나쁘지." - P240

― 당신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책임감?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나도 같아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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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자 - 체육관에서 만난 페미니즘
양민영 지음 / 호밀밭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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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학교에서 열린 체력장 시간이 고역이었던 내가 운동에 관심이 생긴 건 다이어트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다이어트 카페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정보들이 있었고, 충격적인 이야기도 쏟아져 나왔다. 가혹한 식단으로 식이 장애를 겪는 사람, 뚱뚱한 몸매를 면전에서 저격하는 친구와의 에피소드, 그렇게 원하던 마른 몸을 얻었지만 볼륨을 잃어버려 가슴 수술을 고민한다는 글이 있었다. 이후, 두 번째로 한 일은 브라탑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운동을 하다 보면 먼저 가슴 지방이 빠지고,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꼭 브라탑을 입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살이 빠지면 당연히 지방이 뭉쳐 있는 가슴이 빠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여자의 멋진 몸매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빛나는 바디 프로필의 이미지는 운동을 하는 여성들도 대상화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근력운동을 하면서도 여자들의 근육은 ‘남자같이’ 울룩불룩하지 않아야 한다. 볼륨과 근육은 특정한 부위에 있어야 하며, 한껏 섹시한 모습을 자랑해야 한다. 이상적인 몸은 한결같았다. 건강과 체력, 혹은 운동에 대한 순수한 열망보다는 섹슈얼한 몸의 이미지가 전면에 드러났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생각하게 된다. '운동하는 여자'들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날씬하고 매끈하며 섹시한 건강미의 콜라병 같은 실루엣. 이러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모습의 건강미를 발산하는 여자들이 있다. 거칠고 힘이 넘치며 강한 투지를 보이는, 우리의 인식 속에서 마치 '여성스럽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들. 그러나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일 듯한 모습들.

<운동하는 여자>는 오랫동안 남성적인 행위로 규정되었던 '운동'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찾고 있는 저자의 이야기다. ‘체육관에서 만난 페미니즘’이라는 부제가 적혀 있지만, 총체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상’에 대한 고민과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저자가 갖가지 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경험을 토대로 갖가지 편견들과 이슈들을 담았다. 그는 본격적으로 강도 높은 운동을 시작하면서 '운동하는 여자'들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번 체감하곤 했다. 근육과 힘이 늘어나면 여성적이지 않아 여성의 범주 안에 들 수 없고, 훌륭한 능력을 보여도 '여자치곤 - '이라는 말로 평가 절하되는 돌연변이 같은 존재가 바로 '운동하는 여자'들이었다. 저자는 주짓수를 배우면서 여자들이 싸움에 무지한 이유에 의문을 품고, 헬스장에까지 메이크업을 하는 여자들을 보며 현실을 인지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몸을 긍정하는 것과 예쁘게 치장함으로써 당당해지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다(66쪽)" 그리고 브라를 벗어던지고 힘차게 달린다. 자유로움을 향하여!

개인적인 경험은 책의 중반부에 이르러 사회적 문제로 확대된다. 출산 후 경력단절로 고생했던 '세리나 윌리엄스', 여자 선수와 남자 선수의 '샐러리 캡(팀 연봉 총액의 상한선을 정해두는 제도)'의 문제를 제기한 '김연경' 선수, 분노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맨스플레인의 대상이 되었던 '론다 로우지', 체육계의 성폭력을 고백한 '심석희' 선수 등,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스타들에게도 적용되는 여성차별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다. 또한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의 광고와, 반대로 외모지상주의와 고정관념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넷생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의 수많은 이미지들에 대해서도 문제 어린 시선을 던진다.

"넷생을 점유한 트렌드는 다시 현생에 영향을 끼친다. 넷생과 현생이 영향을 주고받는 양상을 살펴보면 체육관의 욕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다. (…) 이 방면에 크게 관심이 없던 여성들까지 자신의 몸에 의문을 갖는다. 내 몸은 매력적인가? 얼마나 섹시한가? 충분히 말랐는가? 여기까지 도달하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은 순간이다. (…) 물론 인터넷 자아를 선택하고 연출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노출과 그로 인한 섹스어필이 쿨한 것으로 통하고 그 반대는 따분하고 경직된 것으로 여기는 흐름 속에서 그것이 취향이고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188쪽)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운동에 대한 즐거움과 투지를 얻길 바란다고 썼다. 남이 만든, 남이 투영한 모습이 아닌 진정한 '나'를 바라보고 자신을 긍정하기를 바란다고. 오랫동안 다이어트를 했고 체중계의 숫자와 칼로리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던 나는, 요즘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로 무언지 계속 갈팡질팡하며 고민하는 중이다. 빼빼 마르거나 섹시한 몸이 아니라, 오로지 건강과 체력을 위하여 몸을 움직이는 것. 어쩌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진정한 행복을 찾아나가는 것이 바로 이쪽이 아닐까.

 

여성은 운동을 배우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법까지 함께 익힌다. 예를 들면 내가 처음 역도를 배울 때 가장 어려웠던 동작이, 양 무릎의 방향이 바깥을 향하도록 벌리는 것이었다. 평영을 배울 때는 바로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같은 여성이어야 마음이 놓였다. 나중에 함께 운동하는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왜 아니겠는가? 여성들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다리를 오므리라고 교육받는데. - P17

하지만 문제의 ‘남자 같은 여성’은 진짜 남성이 아니다. 그래서 남성들의 비교 대상에나 머무른다. 이를테면 ‘여자도 이거보다 더 들어요’, ‘여자보다 기록이 안 좋군요’ 하는 말이 대수롭지 않게 오고 간다. 이쯤에서 궁금한 것은, 운동을 하는 남성들도 이토록 다양한 평가와 비교를 당하는가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운동은 남성적인 행위로 규정돼 왔다. 남성이 운동하는 것은 남성성을 추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환영받는다. 그렇다면 운동하는 여성에게 가하는 평가나 비교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운동하는 여성을 편견에 따라서 대상화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이들을 남성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한 불청객으로 간주하기 때문이 아닌가? - P35

덧붙여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우리 사회의 폭력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최초로 이 사건을 전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심 선수가 침묵해야 했던 4년의 세월과 그 지난한 고통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못하며 침묵했던 시간은 나에게까지 아프게 와닿았다.
심 선수는 그 극심한 고통에 맞서서 세계 정상이라는 성적을 냈고 그런 다음에야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뢰할 만한 피해자가 되기 위해서, 이른바 꽃뱀을 골라내는 여론재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자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 P142

말하자면 우리는 단 한 번도 도와달라고 크게 소리치는 연습을 해본 적이 없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목을 조르는 남자의 팔을 어떻게 부러뜨리는지 배우지 못했고 가해자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 얼어붙지 않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요컨대 여성은 싸움을 모르고 싸우는 방법을 모른다. 그것이 여성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싸움은 너무 과격하다는 편견 때문에, 다칠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배려 덕분에, 싸움을 모르는 존재로 길들여진 것이다. 그 결과 일부 여성들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은 마치 사칙연산을 모르지만 함수를 풀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폭력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인가?
- P83

우선 근육은 필수지만 너무 크거나, ‘예쁘지 않게’ 발달해서는 안 된다. 전반적으로 마른 가운데 근육질인, 전문 댄서 같은 실루엣을 갖춰야 한다. 여기에 복근과 애플힙이 반드시 추가돼야 하며 몸이 완성될 무렵에 인공 태닝 등으로 피부색을 어둡게 해서 더욱 슬림하게 보이게끔 효과를 준다. 화보의 콘셉트는 시선을 끌면서도 너무 흔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콘셉트를 선택하든 노출을 빼놓을 수 없다. 어렵게 만든 몸을 인정받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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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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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누군가가 죽는다. 그의 죽음을 못 견디게 슬퍼하다가, 언제까지나 절망에 빠져있을 수는 없어서 (사람이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그의 죽음을 비로소 인지하며 애도를 시작한다. 시작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나, 애써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거나 마음의 일부를 조금씩 떼어놓기 시작하는 시점을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처 애도조차 시작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 어떤 이유도 밝혀지지 못하고, 무의미한 이유들로 진짜 이유가 숨겨지고, 더 이상 대답조차 할 수 없는 누군가의 죽음에 부조리가 더해진 때. 바로 권여선의 소설 <레몬>에서 등장하는 여고생의 죽음 같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꼬이고 꼬여버린 해언이라는 소녀의 죽음 앞에서, 작가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세히 그리는 데 집중한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단연 소녀의 가족들이다. 언니의 유별나고 위태로운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다언’은 이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킨다. 자신의 얼굴에서 언니의 모습을 속속들이 찾는 엄마를 보고 성형을 결심한다. 수년, 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죽음이 압도한 삶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한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동급생 ‘태림’은 그때의 기억을 잊기 위해 신에게 매달린다. 사건과는 관련이 없지만 자매의 고통을 지켜본 ‘정희’는 죽을 만큼 괴로워하는 ‘다언’의 모습에 또 한 번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 잡을 수 있는 것들을 붙잡고 꾸역꾸역 살아간다. 

사건의 진실은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는다. 의뭉스러운 채로 넘어가는 것이 결코 시원치는 않으나, 세상엔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 누군가는 입을 닫고, 누군가는 보지 않았다고 세뇌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또 누군가를 위해 비밀을 만든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을 관망한다는 신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한다. 신은 있는가, 어쩌면 신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그동안 작가의 장편소설을 생각하면 사실 이 소설은 조금 느슨한 감이 있다. 이전의 소설들이 울먹이며 꽉꽉 채워진 느낌이라면, 이번 <레몬>은 하고 싶은 말들을 조금씩 삼키는 느낌이었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생략된 부분을 읽어내는데 약간의 수고가 들어가는 책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줄을 넘기고,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 한꺼번에 모든 답답한 가슴이 품어졌다고 이야기한다면 과장일까. 소설 속에서 삼켜진 모든 말들을 다시 은은하게 채워 넣는 ‘작가의 말’ 전문을 나는 책상 한편에 베껴 적어 놓고 종종 읽어보려 한다.

“사람이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을 수 없다는 걸,
그게 당연하다는 걸 아는데,
저는 그게 가장 두렵고,
두렵지만, 두려워도
삶의 실상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삶의 반대는 평(平)인 것인가,
그래서 나는 평하지 못한 삶의 두려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그러나 우리는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눈앞에 임박한 대입시험의 생생하고 폭력적인 부담감이 모든 정서적 충격을 녹여버렸다. 그래, 몇명이 사고를 당하고 유학을 가고 전학을 가고 이런저런 이유로 떠난 것뿐이야. 그래도 우리는 여기 그대로 남아 있잖아? 죽을 맛이야.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사는 게 이게 뭐냐. 이게 사는 거냐. 그런 식으로 그 사건은 우리에게서 끝이 났다. - P57

다언은 내가 계속 시를 써으면 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다언을 관찰하고 다언의 말을 들으며, 이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저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관대한 척 고개나 끄덕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다언에게 내 속을 들키자 발끈하여 그녀를 공격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나는 자문했다. 나 또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 P67

나는 사물들을 누르거나 밟거나 던지곤 했다. 필연적으로 그 사물들은 보드랍고 물렁하고 깨지지 않는 것들이어야 했다. 그 이유는 내가 부딪치거나 깨지는 소리를 도저히 듣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콱, 퍽, 와작하는 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끔찍한 공포에 휩싸였다. 나는 그 소리를 귀로 들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보았다. 무엇인가 단단한 것이 단단한 것과 부딪쳐 깨지는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가고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눈앞에 파열음과 굉음들이 만들어내는 타는 듯한 지옥도가 펼쳐졌고 그 한영을 보는 내내 피처럼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P93

결국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에요,라고 다언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 이런 식으로 위대하든 초라하든, 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그 사람과 나머지 전인류 사이에 무섭도록 단호한 선을 긋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라고, 탄생이 나 좀 끼워달라는 식의 본의 아닌 비굴한 합류라면 죽음은 너희들이 나가라는 위력적인 배제라고, 그래서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언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래 다져진 땅 같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다언의 관념은 곱씹고 또 곱씹어 어떤 날도 들어가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노인들의 그것보다 더 무섭고 더 죽음에 가까운 듯 보였다. - P179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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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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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던 제발트라는 이름. 나는 사실 이 책을 꽤 매끄럽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종 변덕을 부리는 그래서 어떤 특징으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내 독서 취향에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위기를 탄다’ 이런 말이 어울릴까. 나는 자주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 딱딱한 책은 싫어하고 책의 느낌에 압도당해서 빠져들어 읽는 것을 좋아한다. <토성의 고리>의 경우, 상실과 폐허와 문명의 파괴에 관련된 줄거리가 평소 좋아하던 주제일뿐더러 발췌된 문장 또한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렇게 혹해서 제발트의 우주로 발을 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큰 우주는 너무도 깊고 험난했다.

책의 갈래는 소설이지만 마치 산문처럼 읽히다가도 백과사전만큼의 딱딱한 역사적 사실들을 접한다. 이야기는 뒤섞이고 사건들은 수시로 방향을 바꾼다. 너무도 많은 지식이 나를 덮쳐온다. 깊은 수렁에 빠져 계속해서 빠져나오려다가 미끄러지는 듯한 독서, 참 오랜만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 책을 읽어야만 했던 이유는, 머리를 쥐어 싸매다가 우연히 발견되던 문장들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259쪽) 

1990년대 화자인지 작가 자신인지 모를 ‘나’의 도보여행으로 시작되는 사색은 그가 바라보는 장소에 따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이어진다. 장소에는 당연하게도 수많은 시간과 역사가 스며든다. 화자는 도시의 몰락과, 자연의 황폐화, 동물들의 몸짓, 기계와 노동, 건축물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등을 화제로, 관련된 방대한 이야기들을 꺼내놓는다.

온전히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함에도, 나는 제발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종종 감탄을 했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 인간도, 문명도, 우리가 끝없이 쌓아올린 모든 것들은 이내 사라진다. “우리 자신보다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얼마든지 파괴해도 좋다고 여기는 종에게 거듭하여 떠넘긴다는 뜻이 아닌가?(85쪽)” 인간은 같은 종과 다른 종을 파괴하고, 또 파괴하고 파괴한다. 끊임없는 문명과 파괴의 반복.

종종 세상이 너무나도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 이러다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리고, 병들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어느새 일상으로 되돌아가 또다시 이전의 실수들을 반복한다. 인간이라는 게 그렇다.



위대한 종족보다 더 오래 산 떡갈나무는 세 그루도 못된다 어떤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았다고 해도 기억될 권리를 확보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최상의 인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누가 알겠는가. 양귀비 씨앗은 어디서나 꽃을 피우지만, 어느 여름날 느닷없이 비참함이 눈처럼 우리 위로 내리면 우리는 이제 잊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 P35

꿈에서 본 것이 이상하게도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면, 이는 아마도 파묻힌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꿈속에서 다른 무언가를, 흐릿하고 뿌연 어떤 것을 통과하면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훨씬 더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물방울이 호수가 되고, 미풍이 폭풍으로, 한줌의 먼지가 황야로, 유황 입자 하나가 분출하는 화산으로 변한다. 우리가 시인과 배우, 기계 기술자, 무대 미술가, 관객 등의 역할을 한꺼번에 떠맡는 이런 연극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꿈의 도열을 거쳐가는 데는 우리가 잠들 때 가지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사유능력이 필요한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 P97

제4의 철학학파의 대표자들은 이미 모든 시간이 지나갔으며, 우리의 삶이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의 여운이 비치는 것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계가 이미 가능한 변이들을 얼마나 많이 겪없는지,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이 있다면 그게 몇개인지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개별 생명이나 생명 전체, 나아가 시간 자체를 상위의 시스템과 비교해보면, 낮보다 밤이 훨씬 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뿐이다. - P183

우리가 고안해낸 기게들은 우리의 신체나 우리의 동경처럼 서서히 작열하는 심장을 갖고 있다. 인간 문명 전체는 애당초부터 매시간 더 강렬해지는 불꽃일 뿐이었으며, 이 불꽃이 어느정도까지 더 강렬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 서서히 사그라들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장은 우리의 도시들이 빛을 발하고, 아직은 불이 번져간다. - P199

마이클이 말했다. 몇주동안 새 한마리 안 보이네. 마치 만물이 어떤 식으로 파내어진 것처럼 보여.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인데, 잡초들만 계속 자라나. 서양메꽃은 덤불의 목을 조르고, 쐐기풀의 노란 뿌리는 땅속에서 앞으로 기어나가고, 다년초 덩굴들은 나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크고, 갈색 반점 세균과 진드기가 번져가고, 끙끙대며 단어와 문장을 병렬해놓은 종이조차 진딧물이 짜낸 감로로 칠한 것처럼 느껴지네. 몇날 몇주동안 성과도 없이 머리를 쥐어자지만, 만일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계속 글을 쓰는 것이 습관 때문인지, 과시욕 때문인지, 아니면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삶에 대한 경탄이나 진리에 대한 사랑, 절망, 분노 때문인지 말을 할 수 없고, 글을 쓰면 점점 똑똑해지는 건지 아니면 더 미쳐가는 건지도 대답할 수 없다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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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가토 - 2012년 제45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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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지 감정으로만 구별되는 추억은 없다. 좋은 추억, 나쁜 추억, 딱 둘로 나눌 수는 없음은 분명하다. 그 속엔 수많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추억은 과거의 일, 우리가 살아가는 일들이 모두 그렇다. 과거의 기억은 그저 일부일 뿐이라도 어떻게든 현재에 작용하고, 우리가 거쳐온 수많은 우연들은 끊어지지 않고 인생을 움직인다. 너무도 당연하고 당연한 이야기. 음악의 주법 이외에도 예술은 종종 인생에 비유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매우 친숙한 주제일 수도 있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권여선이 한다. 식상하거나 고루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작가의 문장을 만나 펄떡거리는 생명력을 갖는다.

냉혹했던 유신이 지나고 학생 운동이 열렬히 일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 내의 ‘카타콤’이라 불리는 지하 써클에서는 데모와 피쎄일 (전단 돌리기)로 뜨겁게 권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서툴렀고, 두려웠고, 때로는 불굴의 의지와 긍지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갔던 청년들이었다. 몇 개월, 혹은 몇 년, 너무나도 짧은 시간에 인생을 걸었던 이들이었다. 이후 삼십 년이 지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동창들에게 어느 날 ‘정연’의 동생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언니의 과거를 알고 싶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로, 그들은 소식을 알 수 없이 실종된 정연의 과거를 다시 추억하게 된다. 각기 다른 관계이니만큼 그들의 기억 속 정연의 모습도 모두 다르다. 그들의 추억은 자연스럽게 과거의 사건들과 연결된다.

철없고 서투른 청춘들의 이야기와 위트 넘치는 대화들, 마음이 따뜻해지는 장면들…… 다양한 인물들 만큼이나 풍성한 이야기가 가득한 소설이다. 그러나 사건의 중심이 된 오정연을 둘러싼 이야기를 그리는 방식은 사실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선배 ‘박인하’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완전히 달라진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정연이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복잡한 감정이었고 끊임없이 의문이 생겼다. 왜 당신은 숨어 살아야 했는가. 왜 당신은 제대로 된 화해조차 하지 못했는가. 이 물음은, 이어 등장한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피쎄일을 하다가 사복경찰과 마주쳐 ‘무섭다’며 떨던 정연은, 광주에서 마치 각성하듯 발 벗고 일어나 총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남성과 선배라는 권력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고 당시 풀리지 않았던 분노는 또 다른 ‘권력’에 대한 크나큰 분노로 표출되었던 것일까.

‘앞선 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 음은 이미 시작되는, 그렇게 음과 음 사이를 이어서 연주하는 레가토 주법은 시간에 대한 인식에서도 유효하다’. 책의 마지막 부분, 후기에서 권여선 작가는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 변주되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썼다. 우려 섞인 말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걱정할 필요 없이 소설의 몰입감은 상당해서 물 흐르듯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문장들은, ‘역시 권여선’이라는 탄성이 흘러나오게 만든다.

 

솔직히말해 그는 다시 옛 기억에 깊이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늙은 인간이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럭저럭 꾸려나가다 모자라는 게 있으면 그때 그때 조금씩 조달하며 사는 데 익숙해져버린 존재인 것이다. 갑작스런 기억의 환기로 일상에 작은 혼란이나 번거로움이 초래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게 된 존재인 것이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정연의 얼굴에 단단한 결기가 서렸다. 그녀는 그날 흘린 한 티스푼의 피를 생각했다. 그러자 한 티스푼만큼의 힘이 났다. 처녀도 뭣도 아니면서 베개를 눈물로 흠뻑 적시거나 툭하면 한숨짓고 입술을 깨무는 일 따위는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사정이야 어찌되었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쇠떡심처럼 질기고 염소처럼 힘이 세져야 하며 화전보다 기름지고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신발끈보다 매섭게 동여져야 한다. 망자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듯,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까딱까딱 양쪽으로 흔들어 자기 속의 죽은 처녀를 애도했다.

 인하는 손바닥 모서리로 눈가를 누르다 말고 양손으로 바지춤을 잡았다. 흥분했다가도 이 자세로 몇발짝만 걸으며 피가 싸늘히 식으면서 감각이 바위처럼 무뎌지곤 했다. 가장 끔찍한 과거와의 대면을 망각하고 가는 인생도 있지만, 그것을 굳이 환기함으로써 나아갈 힘을 얻는 인생도 있다. 그는 바지춤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정연에게 천 겹의 고통과 슬픔과 능욕을 안겨준 자신을 기억함으로써 퍼펙트한 자술서로 동지들을 팔아먹고 번번이 어머니의 치마폭에 감싸여 사지를 빠져나온 자신을 기억함으로써 그는 또 한번 삶에 단단한 옹이를 짓는다.

 순간 누가 귀에 속삭이기라도 한 듯 그녀는, 지금은 못 간다,고 생각했다. 인하형은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오난이도, 재현이도, 진태도, 경애와 명식이도, 주춤거리면서라도 끝끝내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그녀는 문득 울고 싶었다. 그녀만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나 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살아야 할 이유들이 곧 싸워야 할 이유였다. 해산을 마치고 회복된 몸처럼 헝클어지고 혼란에 빠졌던 생각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울컥 스며나오는 섬뜩한 두려움은 여전했다.

 자신이 운동권이 되고 안되는 것이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었다는, 어느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한때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신입생 헌터의 역할을 맡은 선배들은 한달 안에 낙점을 끝냈고, 낙점된 신입생들은 대개 한 학기 안에 마음의 결정을 끝냈다. 운동권에 몸담고 지낸 십수년의 기간에 비해 한달과 반년은 얼마나 짧은가. 그 짧은 동안 일어난 몇가지 단편적인 사건들의 우연성이 그후의 기나긴 청장년의 삶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에 그는 당황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모든 인생이 그렇지 않나 싶엇다. 하룻밤의 방황이 창녀와 부랑아를 만들고, 한번 발각된 도둑질이 전과로 점철된 인생을 부른다. 편재하는 우연이 새처럼 날아들면 그 순간 인생은 단박에 뒤틀린다. 그런 의미에서 스무살 청춘에게 허여된 한달 또는 반년의 말미는 필연의 첨탑을 쌓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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