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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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이 덮인 책은 또다시 다른 책으로 독자를 이끈다. 매개체는 때로 작가의 이름, 출판사, 혹은 인용된 문장, 그림 등이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하나가 끝없는 독서를 만든다. 한 권의 책을 인상 깊게 끝맺은 사람은 또 다른 책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경우, 만약 꼼꼼히 읽게만 된다면,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몽테뉴’의 『수상록』 을 궁금해하며 기웃거리게 될 것이다.

『위로하는 정신』 은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자신이 흠모하는 작가인 ‘몽테뉴’의 생애에 대하여 정리한 책이다. “지금 몽테뉴를 큰 기쁨으로 자주 읽고 있거니와 그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유혹을 느껴요. 또 하나의 에라스무스. 진정 위로하는 정신.(편집 후기)” 츠바이크가 아내에게 써보냈다는 글에 이러한 문장이 있듯, 책 속에는 그가 전하는 인물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 나온다. 단순 역사적 사실을 포함하여 저자가 세심하게 살펴 서술한 기록이기에, 비록 어느 정도 주관적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몽테뉴를 향한 그의 사심은 독자에게 깊이 전해져 오고, 독자 또한 몽테뉴라는 인물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갖게 만든다.

“인문주의에서 야만성으로의 추락을—우리가 오늘날 다시 겪고 있는 것 같은 인류의 광증의 폭발을—무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던 것, 흔들림 없는 정신의 각성과 누구보다도 뛰어난 공감 능력으로 인해 영혼이 깊은 충격을 받고 있는데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몽테뉴의 삶에서 근원적인 비극이었다. 그는 평화와 이성, 온화함, 관용 등 자신이 영혼을 다 바쳐 맹세한 고결한 정신적 힘들이 자기 세계, 자기 나라에서 효력을 내는 것을 평생 단 한순간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시대를 바라보았을 때나 마지막으로 시대를 바라보았을 때에도 그는 (오늘 우리가 그러하듯이) 두려움에 차서, 자신의 조국과 인류를 치욕스럽게 하는 증오의 생지옥에서 고개를 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광증의 시대를 바라보며 생을 마감했던 츠바이크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이 『위로하는 정신』이라는 점은 단순 우연이 아닌 듯 보인다. 실제 ‘몽테뉴’가 살았던 시대는 종교 전쟁으로 너무도 복잡하고 잔혹했던 시기였다. 젊은 시절 공직, 궁정에 몸을 담았고 아버지의 요구를 통해 일하기도 했으나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의 힘이 너무도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격랑의 시대, 몽테뉴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에 집중하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 탑으로 향하며 세상과의 단절을 꾀했다.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내밀한 ‘자아’를 지키길 원했다. 그리고 글을 썼다. 위대한 작품은 그곳에서 나왔다.

“몽테뉴가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표어를 메달에 새겨 넣고 다닌 이 사람은 무엇보다 경직된 주장을 싫어했고, 자신에게 정확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체념과 물러섬으로 시대에 대항했던 몽테뉴. 그 시대 몽테뉴와 같은 삶이 유일한 해답이었다고 말할 순 없으나, 자신의 자유를 추구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자유 또한 존중했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내밀한 자아와의 싸움을 계속해갔던 몽테뉴의 삶은 오늘날에도 빛나는 교훈이 되지 않을까.

 

 

 

 

자유롭고도 흔들림이 없는 그의 사색은 우리 세대처럼 운명에 의해 폭포 같은 격동의 세계 속으로 던져진 세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전쟁, 폭력, 전제적 이데올로기가 목숨을 위협하고, 한 사람의 삶에서도 가장 소중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시대를 뒤흔들린 영혼으로 겪어본 사람만이 그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라야 이런 집단 광증의 시대에 가장 내밀한 자아에 충실하기 위해선 얼마만 한 용기와 정직성과 단호함이 필요한지를, 그리고 이 거대한 파멸의 한가운데서 정신적·도덕적 독립을 흠 없이 지키는 일보다 세상에 더 어렵고도 심각한 일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품위나 이성에 대해 스스로 의심을 품고 그것에 대해 절망도 해봐야 비로소, 그런 전체적인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모범적으로 똑바로 서 있는 어떤 개인을 진짜로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이 온갖 위협과 위험에 맞서, 서로 다투는 당파들의 광기 어린 분노 한가운데서 어떻게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이런 야만성 한가운데서 어떻게 마음속 휴머니즘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의지에 반해 국가나 교회나 정치가 나를 몰아가는 전제적인 요구들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말할 때나 행동할 때에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자아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도록 어떻게 나 자신을 지킬 수가 있는가? 나의 자아, 이 작은 구석에 우주 전체를 반영하는 유일무이한 나의 자아가 어떻게 하면, 외부에서 정해주는 척도를 따르는 태도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타인의 광증이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할 위험에서 어떻게 나의 본래의 영혼과 오직 내게만 속한 물질인 내 몸, 내 건강, 내 신경, 내 생각, 내 느낌을 지킬 수 있을까?

글쓰기와 메모는 그냥 부산물이고 앙금일 뿐이다—오줌에 들어 있는 알갱이요, 조개 속에 들어 있는 진주라고 악의적으로 말하고 싶다. 진짜 생산물은 삶이고, 이런 메모들은 삶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며 쓰레기일 뿐이다. "나의 소명과 나의 예술은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술작품 대 사진의 관계,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다. 문필가 몽테뉴는 인간 몽테뉴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간 몽테뉴를 보면서 그의 글쓰기 기술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의 삶의 기술이 얼마나 하찮은지 수없이 놀라게 된다.

몽테뉴가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표어를 메달에 새겨 넣고 다닌 이 사람은 무엇보다 경직된 주장을 싫어했고, 자신에게 정확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내 영혼의 바탕까지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어떤 사람을 해칠 능력이 없다는 것, 복수나 질투를 하지 못하며 공공연히 분노를 야기할 줄 모른다는 것, 소문을 퍼뜨리거나 불안을 야기하지 못한다는 것, 내가 한 말을 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가 다른 모두에게 그랬듯이 내게도 그럴 기회를 주었지만, 나는 다른 프랑스 사람의 소유물이나 재산을 움켜쥠으로써 손을 더럽힌 적이 없고, 전쟁이 났을 때나 평화 시에 오직 내가 소유한 것만으로 살았다. 또한 누군가에게 적당한 보수를 주지 않은 채 나를 위해 일을 하도록 한 적이 없다. …… 나는 나를 심판할 나 자신의 재판소와 나의 법규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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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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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예루살렘에서는 특별법정 재판이 열렸다.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에 가담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 잠적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된 것이었다. 악명 높은 전범의 재판 소식에 전 세계가 들썩였고, 독일의 철학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한나 아렌트’ 또한 이 재판을 참관했다. 그러나 그는 이 재판에서, 무엇보다도 정의로워야 할 이 장소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만다.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전범의 모습은 너무나 평범했다. 전문가들이 판정한 기록에 따라서도 피고는 전혀 위험하거나 타락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부정’하진 않았지만 죄의 ‘의도’에 관해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는 유대인에게 특별히 악감정이 있지도 않았다.

아이히만에게 결함이 있었다면, 그가 체면을 중시하는 이상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상투어’를 통해 스스로를 세뇌하는 데 매우 익숙했던 점이었다. 이러한 성격 결함은 그가 당시의 현실에 아주 잘 적응하게 하는 원동력이었고, 자연스럽게 자기기만을 반복했다.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유대인 강제 이주 및 학살의 중책을 맡았는데,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의 학살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사들이 그를 향해 양심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일은 전혀 효과가 있지 않았다. 저자인 한나 아렌트는 의문을 가진다. 그는 아이히만의 재판에 내려진 반론 등을 통해서, 이러한 재판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이 재판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법한 대안을 제시한다. 예루살렘 재판은 분명 이점도 있었으며 크나큰 함정도 존재한 재판이었다. 아렌트는 전례 없는, 너무나도 예외적인 재판의 성격이 판사들을 혼란케 한 점은 인정하나, ‘차별과 추방, 대량학살’의 대상을 유대인으로 한정하며 처벌에 한계를 씌우지 않고, 온 인류를 향한 범죄로서 효과적인 국제 재판이 이루어졌다면 하는 아쉬움을 이 책에 남기고 있다. 어떤 한 인종을 ‘청소’하려 했던 나치의 어마어마한 악행은 오직 전범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만으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에게 내려진 유죄 판결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민족주의를 강화시키는 데 이용되거나 잘못된 방향의 정당화, 어떤 특정한 인종의 복수가 아니라, 오직 인류가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의를 내세워야 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에필로그의 마지막 부분 - 판사의 입을 빌린 가상의 텍스트처럼, 아이히만의 재판이 우리가 진정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방식으로 전해졌다면 어땠을까?

이러한 내용을 담은 책은 출판 전부터 논쟁의 중심에 섰다. 사람들은 저자가 전혀 생각조차 안한 주제들로 왈가왈부했다. ‘유대인이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는가’라는 잔인한 질문이나, 유대인과 유대인 지도층을 동일시하는 문제, 독일 레지스탕스 운동에 대한 논쟁들이 벌어졌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복잡한 문제 속에서 뒤섞인 도덕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점으로 드러났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에 난색을 표하는 듯 보인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왜 그것이 독일인이었는가? 왜 그것이 유대인이었는가? 전체주의 통치의 본질은 무엇인가?(389쪽)”였던 것 같다. 그는 뒤이어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독일인 일반’-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 또는 근대사 전체, 또는 인간과 원죄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재판이 오직 ‘정의’에 대한 관심에 따라 이루어졌어야 했다고 다시금 강조한다.

‘분명한 양심’이란 무엇인가? 히틀러에게 반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로지 독일의 패망 (예를 들면 ‘승리의 가능성이 없는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명백한 범죄(171쪽)’라는 말과 관련한) 에 관련하여 근심에 쌓였던 것뿐이었다. 자신의 입지를 걱정하는 쪽으로 작용하는 양심과, 타인의 고통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작용하는 양심은 그 성격이 명백하게 다른 것이 아닌가. 당시 국가의 범죄는 현실 정치의 긴박성에 따라 허용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재판 당시 그러한 상황에 놓여있었다면 하는 가정을 스스로에게 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꼬집는 아렌트의 말은 조금 섬뜩하게 들린다. 권력(또는 특정한 소수의)의 목소리가 세지면 그 앞에 선 인간은 너무도 나약해진다.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던 우리는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권력의 명령, 또는 예외적인 상황에 놓였던 우리의 병사들은 아이히만의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다 여긴다. (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민족은 과거의 행위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는다’는 아렌트의 말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신을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끊임없이 연습하듯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세상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망각의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망각이 가능하기에는 이 세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불필요’하지 않다.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아니다. 만일 그러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진다면, 이는 오늘의 독일을 위해서, 단지 독일의 해외에서의 위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슬프게도 혼란스러운 내면적 조건을 위해서도 실질적으로 아주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단순하며 모든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훈이란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324쪽)”

이 책의 목적과 결론을 모두 관통하는 문장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억’하는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때로 누군가가 쓸데없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거나 커다란 권력에 무모하게 몸을 부딪치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다. 이전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포의 현실 앞에서 어떤 사람들(국민들)은 갖가지 핑계를 만들어 나치에 저항했다.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지는 않았다는(325쪽)” 아렌트의 말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는 이유도 이 발췌와 연결된다. 기억하고, 기억하기 위해 연습하는 것. 우리 안의 악을 자라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것은 불성실의 교과서적인 예, 즉 터무니없는 어리석음과 허위의 자기기만이 결합한 전형적인 예인가? 아니면 이것은 단지 영원히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의 예일 뿐인가? 그런 사람이란 자신의 범죄가 현실의 한 부분으로 되어 버렸기 때문에 현실을 대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경우는 평범한 범죄자의 경우와 다르다. 평범한 범죄자는 자기의 범죄집단이라는 좁은 한게 내에서만 범죄 없는 현실로부터 효과적으로 자신을 분리할 수 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를 상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세상과 그는 한때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8000만 명으로 이루어진 독일 사회가 동일한 방법, 동일한 자기기만,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 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 P109

문제는 양심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는 데서 느끼게 되는 동물적인 동정심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힘러가 사용한 책략은 아주 단순했고 또 아주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이러한 본능을 뒤집는 것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 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P174

이 문제에 관한 슬픈, 그리고 아주 불편한 진리는,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종전 무렵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갖도록 만든 것은 그의 광신이 아니라 바로 그의 양심이라는 점이다. 마치 그 양심이 3년 전에는 그를 잠시 동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 것처럼 말이다. - P223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 P349

물론 그들은 만일 아이히만이 실제로 괴물이었더라면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재판은 중지되어버렸거나 또는 최소한 모든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을지라도, 실제로 아이히만이 괴물이라고 믿는 것은 많은 위로를 줄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물론 푸른 수염의 사나이를 무대에 올려놓음으로써 전 세계의 주목을 끌고 또 전 세계로부터 편지를 받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이히만의 경우 성가신 점은 바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다는 점,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다는 점, 즉 그들은 아주 그리고 무서울 만큼 정상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정상적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법률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판결에 대한 우리의 도덕 기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정상적인 모습은 잔혹한 일들을 모두 모아놓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 P37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집단적 죄나 집단적 무죄 같은 것은 없다는 점에, 그리고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어느 한 개인은 유죄이거나 무죄일 수가 없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집단의 개별 구성원이 한 일과는 완전히 별개로 존재하는 정치적 책임과 같은 것이 있어서 도덕적 관점에서 판단될 수도 또 형사재판에 세울 수도 없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정부는 그의 선임 정부의 행위와 과실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으며, 모든 민족은 과거의 행위와 과실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는다. -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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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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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산술적으로 생각해도 내가 차별을 당할 때가 있다면, 할 때도 있는 게 아닐까?”

책의 초반, 프롤로그에 적힌 저자의 글을 읽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차별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인데, 왜 세상엔 차별적인 발언들과 그것을 당한 사람들의 에피소드가 넘쳐날까?

차별에 대해 연구를 하는 저자는 어떤 강연 장소의 많은 장애인들 앞에서 ‘결정 장애’라는 말을 써서 지적을 받은 일을 이야기한다. 아주 사소하고, 흘러가는 이런 말들 속에도 누군가를 비하하고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차별’이 존재한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과 차별을 하는 사람의 경계는 항상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지는 않다.

세상에는 다양한 차별이 있다. 인종, 성별, 학벌, 직업, 장애인, 성소수자, 외국인(난민)……. 시대가 변하고, 평등을 외치는 목소리는 커졌다 하더라도 어디선가 차별은 목격된다. 저자는 이에 관한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흔히 우리가 하는 착각과도 같은 생각들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비장애인은 교통수단을 편리하게 탑승할 수 있다는 사실을 ‘특권’이라 생각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다. 사회적으로 약한 집단을 이용한 농담들을 듣고 때로 우리는 ‘웃겨서’ 웃고 ‘혼자 웃지 않는 게 이상해서’ 웃는다. 성소수자들이 거리에 나와 축제를 벌이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거리는 모두의 것이다. 그들은 이용할 자격이 없는가? 남들이 불쾌하다는 이유로 늘 숨어 있어야 하는가?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비난의 대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과 변화의 시작은 생각의 전환부터 시작된다는 믿음을 토대로 약간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모두’를 위한 이러한 해법들도 개인들의 생각이 바뀜으로써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

이 책의 시작이 되었던 자기반성과 검열은 내게도 필요하다. 일상이 된 나의 언어는 누군가를 깎아내리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 비하의 농담을 핑계로 어떤 집단을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지는 않은가. 혹시나 이 글에도 차별이 들어 있진 않은가. 내 언어를 점검하는 것은 분명 피곤한 일이지만,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은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를 힘들게 한다. 게다가 기회가 주어지는 만큼 과업이 따르고,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책임이 무거워지는 법이다. 그러니 누구의 삶이 더 힘드냐 하는 논쟁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모두가 똑같이 힘들다”는 말도 맞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르게 힘들다고 봐야 한다. 불평등한 구조에서는 기회와 권리가 다르게 분배되고, 그래서 다르게 힘들다. 여기서 초점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삶을 만드는 이 구조적 불평등이다. 그렇기에 불평등에 관한 대화가 “나는 힘들고 너는 편하다”는 싸움이 되어서는 해결점을 찾기 어렵다. “너와 나를 다르게 힘들게 만드는 이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공통의 주제로 이어져야 한다.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나는 어디에 서서 어떤 풍경을 보고 있는가. 내가 서 있는 땅은 기울어져 있는가 아니면 평평한가. 기울어져 있다면 나의 위치는 어디쯤인가. 이 풍경 전체를 보려면 세상에서 한발짝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 나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대화해보아야 한다. 한국 사회는 정말 평등한가? 나는 아직까지 한국사회가 그 이상향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더 발견해야 할 때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세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니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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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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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는 간단하다. 오로지 주인공의 시점에서 바라본 영상을 담을 뿐. 그러나 단 한 줄의 줄거리로 요약될 수도 있는 이 소설은 어째서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것인지.

죽음은 단연 무섭고 반갑지 않다. 삶을 치열하게 살기 위해 죽음을 생각하라는 말도 있지만 막상 떠올리면 막막하고 두렵다. 고통이 더해진 누군가의 죽음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하지만, 격랑 같은 삶을 살다가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죽음은 무척이나 마음 시린 것이 아닌가. 절대로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아닐 수 있을까.

그러나 <아침 그리고 저녁>은 이러한 ‘죽음’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아름답게 미화하거나 과장해서 그려내지 않았다. 그저 생과 사의 경계에 선 한 남자를 둘러싼 주변의 세계들을 촘촘하게 담아냈다. 오랜 시간 살아온 터전, 어우러지는 자연,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들, 기억, 남아있는 모든 존재들을. 책 속에서 흘러가는 주인공의 일상은 ‘모든 것이 다르면서 여느 때와 같고,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으면서 동시에 다르다(58쪽)’. 어제, 그리고 지난주, 비슷하게 흘러갔을 ‘오늘’을 흘러가듯 잠잠히 서술하고 있으나, 책의 후반부 어딘가 다른 그림을 발견하고 그것이 하나로 맞춰질 때 독자는 경이로운 순간을 경험한다.

초록의 오랜 바닷속 물로 된 오래된 집 그곳에 오래된 모든 것 더이상 없고 빛나는 별들 멀리 물러났다 가까이 다가와 흐릿한데 모든 것에 별과 같은 광채, 땅속으로부터 드러난 부드럽고 또렷한 차가운 선 하나 그리고 저 고요 이 그곳에서 비롯되었으나 더이상 그 안에서 오지 않을 있어야 할 것 그러나 다시 오지 않고 사라지는 무엇 그 소멸은 늙음에 다름 아니나 결코 그와 같지 않으며 저 또렷한 외침 맑게 외침 별처럼 또렷하고 이름처럼 감각처럼 바람 이 숨 고요한 숨 그러고 나서 고요히 고요히 고요한 움직임들 (19쪽)

책 속에 묘사된 아이 탄생의 순간, 무의식으로 내뱉는 언어는 언뜻 보면 시 혹은 정리되지 않은 비문과도 같지만 각각의 어절을 발음할 때마다 야릇한 기분이 들게 된다. 고요하고 잠잠하지만 역동적으로 뛰고 있는 생의 모든 것들을 상상하게 한다. 소설 속에는 생과 사가 혼재되어 있다. 섞이고 섞이고, 마침내 분리되는 순간 ‘아침과 저녁’이라는 이 책의 제목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눈부신 아침, 그리고 저녁. 다가오는 죽음이 마치 날마다 이어지는 아침과 저녁의 순환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떠나는 거야, 자네와 내가(129쪽)”

최근의 숱한 안타까운 죽음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이 책을 만나며, 모두가 이렇듯 (갑자기 찾아온 죽음은 혼란스러울지라도) 평온하고 잔잔하게 사랑하는 존재들을 떠올리며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 잘될 거야, 그럼그럼, 마르타가 여전히 느리고 깊은 숨을 쉬며 말한다, 이 세상 바깥의 고요한 어딘가에서 오는 숨이라고, 올라이는 마르타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서 생각한다, 그리고 어린 요한네스는 큰 소리로 울고 또 울며 세상 밖으로 울려퍼지는 제 목소리를 듣는다, 울음.소리는 아이가 새로이 속한, 세상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다뜻하고 검고 조금 붉고 조금 축축하고 온전한 것은 더이상 없다, 이제 저 자신의 움직임뿐이다, 모든 것을, 존재하는 모든 것을 메우려는 듯한, 무엇인가, - P24

그래, 아침을 유달리 좋아한 적은 없지만, 아침에는 항상 너무 춥고 집안이 썰렁하니까, 어차피 춥고 흐린 날씨라 해도, 아침은 유독 흐리고 추운데다 하늘도 아침이면 제일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래 누가 뭐래도 하늘이 눈부시게 푸른 여름 아침도 물론 있었고, 이따금 하늘빛이 부드럽고 가벼운 새벽도 있었지만, 그래 물론 그렇지만, 그의 눈에는 항시 달리 보였다, 춥고 흐린 아침이라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했던가, 밝고 부드럽든, 어둡든 심지어 칠흙 같든, - P54

부잔교와 부표에 묶여 있는 그의 작은 노 젓는 배, 그리고 보트하우스들과 거리 위쪽의 집들을 바라보며 그는 그 모든 것에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낀다, 야생초들과 그가 아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그가 속한 자리다, 그의 것이다, 언덕, 보트하우스, 해변의 돌들, 그 전부가, 그런데 그것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것들은 마치 소리처럼, 그렇다 그 안의 소리처럼 그의 일부로 그 안에 머물 것이었다, 요한네스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본다, 모든 것이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것을, 하늘 저 뒤편에서, 사방에서, 돌 하나하나가, 보트 한 척 한 척이 그에게서 희미하게 멀어져가고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오늘은 모든 것이 과거 어느 때와도 다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일까? - P74

그리고 요한네스가 올려다보니, 페테르의 고깃배는 난바다를 향해 서쪽 항로로 나아가고 있다

나갈 수 있으려나, 파도가 높은데다 비바람까지 부는데? 요한네스가 말한다

갈 수 있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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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 With Frida Kahlo 활자에 잠긴 시
박연준 지음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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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것들을 만날 때 나는 당황하고 막막해진다. 시의 문장 속에 담긴 생각을 파악하지 못해서 답답해진다. 어떤 예술 작품 앞에서 창작자의 마음을 골똘히 생각한다. 사랑 앞에서 시시각각 널뛰는 기분이 못마땅하다. 문학과 예술과 사랑, 나는 이것들을 아직 다 알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능숙한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이들이 다 같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정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이 모호함이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각각은 더욱 풍성해진다’. 그림과 시와 사랑, 셋의 공통점이라 생각한다.

이 셋 모두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는 정말로 풍성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은 ‘활자에 잠긴 시’라 이름으로 예술과 문학을 접목시킨 시리즈 중 한 권의 책인데, 화가 ‘프리다 칼로’와 시인 ‘박연준’이 주인공이다. 박연준 시인은 책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번역’한다. 그림에 대해 해박하지 않을뿐더러 낮은 수준의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솔직하게 밝히는 시인은, 그림 번역을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그림과 시의 공통점을 말한다. “그림과 시는 비와 눈처럼 닮았다 (‘책을 펴내며’ 중에서)” 미술 평론가의 해석 대신에, 시인은 “‘왜’라는 물음 대신 이미지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보았다"라고 말한다. 장르의 변형은 시인에게도 도전이지만, 그림 속에 살아 숨 쉬는 프리다 칼로의 영혼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나는 프리다 칼로의 형상을 한 시의 관절들 ―기형으로 꺾이다 나뭇가지처럼 자라나는 창작 욕망, 날것으로 파닥이는 혀, 꿰뚫는 시선, 우회하지 않는 손가락, 달을 가리키는 입술―에 매료되어 이 책을 썼다. 쓸모없어 보이는 이야기들과 주변을 맴도는 나 자신의 이야기들이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이룰 것이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청소년기 사고로 몸 한가운데 강철봉이 박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낸 자화상은 한동안 잊히지 않고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그림과 함께 알게 된 그의 삶은 고통과 비극이 넘쳐 났다. 사랑하는 사람은 줄곧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여성 편력과 외도로 그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프리다 칼로는 그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그의 그림 속에는 그가 사랑했던 ‘디에고 리베라’의 모습이 종종 담겨 있으며, 때로는 상처 입은 마음과 눈물이 그대로 담겨 있다. 프리다 칼로의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프리다 칼로는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사랑이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선택한 사랑과, 삶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시인을 통해 이 책에서 몇 편의 시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시인이 생각하는 사랑과 삶의 자질구레한 모습들이 더해졌다. 이 책은 프리다 칼로를 향한 애정의 기록이기도, 온갖 감정을 드러냈던 한 여인의 삶을 통해 쓴 사랑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림과 시와 사랑, 셋이 만나 풍성하기도 하거니와 각각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사랑을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사랑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인생이 어떤 원리로 흘러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봄나무에 꽃망울이 맺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늙은 개의 입에선 비린내가 나고 눈곱이 많이 생기는 새끼의 건강은 좋지 못하다는 것을 ‘그냥’ 아는 것처럼, 받아들일 뿐이다. 살아 있는 것은 왜 늙는지, 왜 죽음을 피할 수 없는지 답을 알 수 없다. 그저 늙은 동물을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사람처럼 동물도, 늙으면 휜다, 모든 면에서. 익은 모과에선 향이 나고 오래된 모과는 기어코 썩는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냥’ 아는 것. 어떤 사랑은 죽지 못한다.

외로움이란 누구를 골라 찾아가고 비켜가는 감정이 아니다. 불시에, 누구에게든 온다. 비나 눈처럼. 온다.

이제 나는 외로운 상태를 ‘조금’ 안다. 하나일 때보단 둘일 때 오롯해지는 감정. 젖은 옷 같은 것. 비에 젖은 옷 아니라, 눈에 젖어 시나브로 축축해진 옷. 입고 있기엔 축축하고, 벗어 말리자니 유난을 떠는 일 같아 감추게 되는 것. 설명할 수 있지만, 하려다 마는 것.

"탁자를 벽으로 밀고, 밀고, 밀면 벽에 닿지. 벽에 닿으면 어느 순간 벽을 뚫고 벽 너머의 세계로 갈 수 있을 것 같거든? 정말, 벽 너머로 말이지. 아주 잠깐. 테이블이. 벽 너머로. 그 기분과 비슷해. 황홀하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려)는 일이니까. 벽 너머로 갈 수만 있다면! 동시에 불행한 일이기도 하지.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하염없는 짓이니까. 끝나면 벽 밖으로 다시 튕겨져 나와야 하거든. 나는 다시 벽 밖의 사람이 돼. 허기지지(원래 사랑에 빠진 자는 허기지잖아?). 다른 사람이라는 벽. 사랑이 벽 밖에서 거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게 비극이지. 그렇지만 또 시도하는 거야. 벽 속으로, 벽 너머로, ‘잠시’라도 들어갔다고 착각하기 위해서. 당신이라는 벽, 말이야. 사랑의 환락을 경험하려고. 환락 끝에 마주하는 게 다시 벽일지라도. 다시 우리는 테이블을 밀고, 밀고…. 밀어 보는 거지."

마음이 변해서 사랑이 죽는 게 아니야.

돌보지 않아서 사랑은 죽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돌보지 않으면 죽어. 이 자명한 진리를 사람들은 모를 때가 많아. 특히 더 많이 사랑받는 자들은 모르지. 사랑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 그러나 끝난 사랑은 누군가 돌보지 않은 결과야. 가꾸지 않으면 집 안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은 죽는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사랑은 깨지기 쉬운 원료로 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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