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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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이 덮인 책은 또다시 다른 책으로 독자를 이끈다. 매개체는 때로 작가의 이름, 출판사, 혹은 인용된 문장, 그림 등이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하나가 끝없는 독서를 만든다. 한 권의 책을 인상 깊게 끝맺은 사람은 또 다른 책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경우, 만약 꼼꼼히 읽게만 된다면,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몽테뉴’의 『수상록』 을 궁금해하며 기웃거리게 될 것이다.

『위로하는 정신』 은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자신이 흠모하는 작가인 ‘몽테뉴’의 생애에 대하여 정리한 책이다. “지금 몽테뉴를 큰 기쁨으로 자주 읽고 있거니와 그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유혹을 느껴요. 또 하나의 에라스무스. 진정 위로하는 정신.(편집 후기)” 츠바이크가 아내에게 써보냈다는 글에 이러한 문장이 있듯, 책 속에는 그가 전하는 인물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 나온다. 단순 역사적 사실을 포함하여 저자가 세심하게 살펴 서술한 기록이기에, 비록 어느 정도 주관적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몽테뉴를 향한 그의 사심은 독자에게 깊이 전해져 오고, 독자 또한 몽테뉴라는 인물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갖게 만든다.

“인문주의에서 야만성으로의 추락을—우리가 오늘날 다시 겪고 있는 것 같은 인류의 광증의 폭발을—무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던 것, 흔들림 없는 정신의 각성과 누구보다도 뛰어난 공감 능력으로 인해 영혼이 깊은 충격을 받고 있는데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몽테뉴의 삶에서 근원적인 비극이었다. 그는 평화와 이성, 온화함, 관용 등 자신이 영혼을 다 바쳐 맹세한 고결한 정신적 힘들이 자기 세계, 자기 나라에서 효력을 내는 것을 평생 단 한순간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시대를 바라보았을 때나 마지막으로 시대를 바라보았을 때에도 그는 (오늘 우리가 그러하듯이) 두려움에 차서, 자신의 조국과 인류를 치욕스럽게 하는 증오의 생지옥에서 고개를 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광증의 시대를 바라보며 생을 마감했던 츠바이크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이 『위로하는 정신』이라는 점은 단순 우연이 아닌 듯 보인다. 실제 ‘몽테뉴’가 살았던 시대는 종교 전쟁으로 너무도 복잡하고 잔혹했던 시기였다. 젊은 시절 공직, 궁정에 몸을 담았고 아버지의 요구를 통해 일하기도 했으나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의 힘이 너무도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격랑의 시대, 몽테뉴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에 집중하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 탑으로 향하며 세상과의 단절을 꾀했다.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내밀한 ‘자아’를 지키길 원했다. 그리고 글을 썼다. 위대한 작품은 그곳에서 나왔다.

“몽테뉴가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표어를 메달에 새겨 넣고 다닌 이 사람은 무엇보다 경직된 주장을 싫어했고, 자신에게 정확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체념과 물러섬으로 시대에 대항했던 몽테뉴. 그 시대 몽테뉴와 같은 삶이 유일한 해답이었다고 말할 순 없으나, 자신의 자유를 추구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자유 또한 존중했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내밀한 자아와의 싸움을 계속해갔던 몽테뉴의 삶은 오늘날에도 빛나는 교훈이 되지 않을까.

 

 

 

 

자유롭고도 흔들림이 없는 그의 사색은 우리 세대처럼 운명에 의해 폭포 같은 격동의 세계 속으로 던져진 세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전쟁, 폭력, 전제적 이데올로기가 목숨을 위협하고, 한 사람의 삶에서도 가장 소중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시대를 뒤흔들린 영혼으로 겪어본 사람만이 그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라야 이런 집단 광증의 시대에 가장 내밀한 자아에 충실하기 위해선 얼마만 한 용기와 정직성과 단호함이 필요한지를, 그리고 이 거대한 파멸의 한가운데서 정신적·도덕적 독립을 흠 없이 지키는 일보다 세상에 더 어렵고도 심각한 일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품위나 이성에 대해 스스로 의심을 품고 그것에 대해 절망도 해봐야 비로소, 그런 전체적인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모범적으로 똑바로 서 있는 어떤 개인을 진짜로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이 온갖 위협과 위험에 맞서, 서로 다투는 당파들의 광기 어린 분노 한가운데서 어떻게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이런 야만성 한가운데서 어떻게 마음속 휴머니즘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의지에 반해 국가나 교회나 정치가 나를 몰아가는 전제적인 요구들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말할 때나 행동할 때에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자아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도록 어떻게 나 자신을 지킬 수가 있는가? 나의 자아, 이 작은 구석에 우주 전체를 반영하는 유일무이한 나의 자아가 어떻게 하면, 외부에서 정해주는 척도를 따르는 태도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타인의 광증이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할 위험에서 어떻게 나의 본래의 영혼과 오직 내게만 속한 물질인 내 몸, 내 건강, 내 신경, 내 생각, 내 느낌을 지킬 수 있을까?

글쓰기와 메모는 그냥 부산물이고 앙금일 뿐이다—오줌에 들어 있는 알갱이요, 조개 속에 들어 있는 진주라고 악의적으로 말하고 싶다. 진짜 생산물은 삶이고, 이런 메모들은 삶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며 쓰레기일 뿐이다. "나의 소명과 나의 예술은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술작품 대 사진의 관계,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다. 문필가 몽테뉴는 인간 몽테뉴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간 몽테뉴를 보면서 그의 글쓰기 기술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의 삶의 기술이 얼마나 하찮은지 수없이 놀라게 된다.

몽테뉴가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표어를 메달에 새겨 넣고 다닌 이 사람은 무엇보다 경직된 주장을 싫어했고, 자신에게 정확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내 영혼의 바탕까지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어떤 사람을 해칠 능력이 없다는 것, 복수나 질투를 하지 못하며 공공연히 분노를 야기할 줄 모른다는 것, 소문을 퍼뜨리거나 불안을 야기하지 못한다는 것, 내가 한 말을 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가 다른 모두에게 그랬듯이 내게도 그럴 기회를 주었지만, 나는 다른 프랑스 사람의 소유물이나 재산을 움켜쥠으로써 손을 더럽힌 적이 없고, 전쟁이 났을 때나 평화 시에 오직 내가 소유한 것만으로 살았다. 또한 누군가에게 적당한 보수를 주지 않은 채 나를 위해 일을 하도록 한 적이 없다. …… 나는 나를 심판할 나 자신의 재판소와 나의 법규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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