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학개론 리토피아포에지 55
윤종환 지음 / 리토피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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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쪽지가 한통 와 있었다. 목록에 쌓인 많은 쪽지들이 '안녕하세요'로 시작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뻔했던 쪽지 한 통. 그 속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자신은 젊은 새싹 시인이며 순수한 독자와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말. 어투는 수줍지만 강단이 있는 느낌이었다. 겸손한 마음이 드러나면서도 호평과 혹평 모두를 받아들여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러났다. 내가 고르는 책만으로도 요즘은 유독 읽는 시간이 빠듯해 이런 글에 긍정적인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진심 어린 쪽지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사실, 쪽지 얘기를 빼고서라도 이 책을 읽어볼 이유는 충분하긴 했다. 짧은 글과 감성 글, 그리고 시時의 경계가 허물어져 누구나 자유롭게 시를 따라 쓰는 지금. 하루에도 몇 건씩 SNS에 올라오는 사진 속엔 예쁜 그림과 캘리그라피 등으로 편집해 꾸민 글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조금 더 고뇌하고, 조금 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잡다하게 꾸밀만한 것들을 벗어던지고, 단지 글로만 승부하는 젊은 시인의 시들은 어디에 있는가. 궁금해도 정보가 없다. 한 발짝 뒤에 물러나 서 있는, 시는 어렵다는 편견 속에서 독자를 필요로 하는 젊은 시인의 시를 읽어보고 싶었다.

 

당신과 머문 곳을 별이라 할 때
별과 별을 연결하는 선은
우리가 걸어온 길입니다
캄캄한 은하 저 너머에는
수만 개의 .과 .이 -으로 이어져 빛이 납니다 (59쪽, 점과 선의 밤하늘)

 

 '별빛학개론'이라는 제목처럼 감성적인 이미지의 시가 많았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마음과 마음이 주고받는 일들을 ('벽이 못에게') 누구에게나 애틋한 관계인 가족들의 모습을 ('김밥 단무지') 표현하는 따뜻한 그림이 돋보였다. 작은 존재들과 소외받는 이들을 위한 시, 기억해야 할 사람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추모 시 또한 실려 있는데,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그대라는 바다를 품고'는 응급환자 구조를 위해 출항했다가 순직한 故 오진석 경감의 추모시라고 한다. 별과 별, 점과 선을 말하는 시인의 모습처럼 따스한 시선이 느껴졌다.

 

뜨겁게 끌어안는 듯 가슴에
시집을 품고 잠들겠노라
그러면 꿈에
가장 아름다운 은유가 날 반길 터이니,
그 뜻을 음미하며
나와 그 사람과, 또 나의 글이 하나가 되겠노라 (33쪽, 한 시인의 고백)

 

 대부분의 시들이 '감성'과 '공감'을 매개로 독자와의 소통을 청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이 시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대학생활을 하는 청년으로서 주변의 사물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연상하고 고심해 쓴 것 같은 풋풋한 시들도 있고, 세태를 풍자하거나 깊은 감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털어버리는 것 같은 시들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고 싶은 건 시를 잘 안다고 하기엔 어려운, 단지 시와 책을 사랑하는 일반 독자의 마음에 박힌 문장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 아직 젊은 새싹 시인이 무럭무럭 자라나, 깊게 무르익기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17쪽, 번역하는 남자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르게 살아온 두 식물성 객체
번역된 글과 주제 하나로 결합되는 밤
서로를 비틀며 자라나는 줄기
결말로 갈수록 짙어지는 활자 향기

55쪽, 사랑니 · 1
누구나 하나씩은 갖고 있는 망치
고통을 박제하는 방법으로
힘껏 두더지 머리를 내려치지만
흔들리는 것은 그 밤처럼 고요했던 기억
더욱 더뎌지는 두더지의 진도//
밖으로 튀어나와
응어리진 것을 토할 때, 아파도 된다며
망치질을 포기하는 게 이기는 게임
마취는 빨리 풀려야 한다

65쪽, 달팽이가 달팽이인 이유
묵묵히 걷는 이를 무심코 밟지 않기를,
부지런한 느림보에 은총이 있기를,
가장 낮은 것도 지킬 것이 있다

143쪽, 떡
사람의 발은 모두 떡이다
뛰지 않으면 금방 말라버리고
걷지 않으면 딱딱하게 굳는다
출근길에 구두를 신는 아버지
그의 발은 질은 시루떡이고
설거지하는 오색버선의 어머니
그녀의 발은 무지개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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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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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보다 민주주의 이슈가 불거진 요즘. 어둠과 죽음, 폭력은 조금이나마 걷혀졌으나, 권력과 법과 힘 있는 자들의 농간들은 쉬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불과 몇 달 전, 특검 한가운데에 울려 퍼졌던 억울한 외침을 기억해본다.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아주 당당하게 말하던 최순실. 그 모습을 보고 분노를 담아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었고, 혀를 끌끌 차며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편에, 40년 전 재판정 앞에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한 여자를 추억하는 사람도 있었다.

 

"독재정권 물러가라! 민주주의 쟁취하자!" 교도관이 영초언니의 입을 틀어막았고, 언니는 거세게 발버둥 쳤다. 우리에게 다가오려는 가족들은 교도관과 법원 경비들에게 차단당했고, 가족들은 격렬하게 항의하고 소리치며 몸부림쳤다. 아비규환, 아수라장이었다. (199쪽)

 

 너무도 다른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어감과, 두 상황과 두 시대의 간극이 이 책을 나오게 했다. <오마이뉴스> 편집장이자 제주 올레길로 잘 알려져 있는 언론인 서명숙은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천영초'라는 이름을 세상에 더 많이 알리기로 결심했다. 제주에서 태어나 박정희 키드로 자랐던 저자가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감옥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중심에는 좋은 세상을 위해 누구보다 열렬히 싸웠던 영초언니가 있었다. '담배를 가르쳐준 나쁜 언니'이자 부조리한 일이라면 기꺼이 나섰던 그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환멸을 받고, 불운의 사고로 어린아이가 되기까지의 일들을 저자 서명숙의 시선으로 담았다.

 

 혹독했던 유신정권 아래, 거리에선 최루탄과 곤봉, 발길질이 난무하고, 사람들은 독재에 신음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런 사회에서 평안하게 대학생활을 하는 것은 허울뿐임을 알고 있었다. 저자는 대학에서 '행동하는 양심' 영초언니를 만나 새로운 세상을 알아갔다.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책들을 영초언니의 집에서 읽고, 전태일의 가장 큰 소망은 '자신들을 도와줄 법을 아는, 대학을 나온 친구(51쪽)'였다는 사실을 듣고 야학에 참여하기도 했다. 몇백 장에 이르는 유인물을 직접 등사하여 세상에 뿌리고 시위를 했다. 영초언니에게 붙은 감시를 통해 '산천초목사건'으로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학생을 보호해야 하는 학교는 보란 듯이 제적 처리를 했다.

 

 특히, 책 속에서 가장 마음을 흔들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가라열'이라는 고려대 여학생들의 모임이었다. 지독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튀는 행동'을 하는 여성들은 몰매를 맞는 시대였다. 영초언니는 <동일방직 똥물 사건>을 비롯한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의논을 통해 만들어진 이 모임에선 여성들이 모여 자유롭게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었다. 열정적이며 진취적인 청춘이었다.

 

'영초언니'라는 제목 속에는 그때 거리에 나갔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까지 담겨 있다. 연약한 외모로 '짭새'들의 아지트를 박살냈던 혜자언니, "여자들끼리 술먹고 담배를 피우는 주제에(123쪽)"라는 옆테이블 남자에게 막걸리를 부은 순자라는 이름과, 엄주웅, 문화 형,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과 노동자들…… 그 그리운 이름들. 영화 <택시운전사>의 화면 속 스쳐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희생과 도움이 값진 것이었던 것처럼, <영초언니>를 통해 본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도 무척이나 눈부시다. 기억해야겠다. 감사한 마음으로, 잊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으로.

 

 

 

 

53쪽,
"유치환의 시 「깃발」처럼 명숙이 네가 남겨두고 간 빨래를 깨끗이 빨아서 마당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어놓고 보니 네가 너무나 보고 싶다. 네 빨래 펄럭이고 내 그리움도 펄럭이고……"
아마 연인에게서도 이런 애틋한 엽서를 받긴 힘들 것이다.
뿌리 뽑힌 채 이식된 것 같은 낯설고 삭막한 서울에서의 삶, 철저하게 ‘기브 앤 테이크‘로 일관하는 듯한 도시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 붙일 곳 없어 서성대던 나였다. 그런 내게 언니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오랜만에 햇볕을 쪼인 화초처럼 쑥쑥 자랐다.

79쪽,
"한꺼번에 다 잡혀들어가는 게 능사는 아니야. 남아서 뒷바라지할 사람도 필요하고, 다음에 데모할 사람도 있어야지. 차례차례……"
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인지, 도망치는 자의 비겁한 자기변호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눈앞에서 남학생들이 마치 비료포대처럼 질질 끌려가고, 팔이 뒤로 꺾인 채 닭장차에 집어던져지는 걸 보면서도 어찌 이리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104쪽,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엄주웅이 사랑한 대상은 ‘서명숙‘이라는 특정한 여학생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 암울한 시대에 불의한 국가권력과 감히 맞장을 뜨려는 자가 끊어내야 하는, 포기해야 하는, 남겨두고 떠나야만 하는, 그 모든 그리운 것들의 한 조각이었는지도 모른다.

256쪽,
모두들 돌아가고 난 뒤 그제서야 아이를 꽉 끌어안으니 갑갑한지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끄으윽 엉엉……" 둑이 터지듯 참았던 울음이 쏟아져내렸다. 그 공포스럽던 순간이 이렇게 무탈하게 지나가다니. 허탈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다시는 절대로 영초언니와 엮이지 말아야지‘ 결심했다. 그 한낮의 해프닝을 계기로 나는 나 자신을 더욱더 소시민적인 삶 안에 가둬놓았다.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그날까지 더 가열하게 싸우겠노라‘고 구치소 앞에서 선언했듯이 가파른 투쟁의 길로 걸어들어가는 영초언니와는 점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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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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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눅했던 여름이 지났다. 날짜로, 입추(立秋)를 보내고 나니 믿기지 않게도 시원한 바람이 줄곧 불어온다. 여름이 싫은 건 눅눅함에서 오는 짜증 때문. 언제 이것들이 사라질까 싶었더니 이제야 서서히 얌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면 사실 모든 일들이 그랬다. 울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분노했던, 참을 수 없이 싫었던, 얼굴 빨개지도록 부끄러웠던, 시간 한 토막을 딱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슬펐던 모든 것들을 우리는 지나쳐간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모른대도 멀뚱멀뚱 걷고는 있다. 김애란의 소설 속 인물들 또한 그러한 지점들을 지나치고 있는데,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온 힘을 다하여 빠져나와야 할 정도로 가파르다. 대부분의 단편들이 상실과 부재에 대해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잃고, 무언가를 잃고, 탄탄히 흘러가던 삶의 중간이 뚝 끊어지는 일들을.

 

"웃는 것, 또 웃는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웃는 것. 그리하여 영원히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구는 것." ('침묵의 미래' 133쪽)

 

 왠지 모르게 눅눅함이 깃들어 있음에도 시원해 보이던 표지에 취해 읽은 단편들 속에서, 상실을 맞이하는 건 눅눅한 여름날에 읽기엔 꽤 힘든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오싹할 정도로 춥기까지 해서 낯설은 감정이었다. 소설은 첫 단편 <입동>부터 너무 가혹했다(다른 책에서 이미 읽은 것인데도). 아이의 죽음과 새롭게 얻은 집 사이에서 도저히 우뚝 설 수 없는 부부의 모습을 다뤘다. 그를 시작으로 죽음, 이별, 소멸, 실패, 온갖 어두운 것들이 밀려들었다. 너무 우울해서 책을 잠깐 덮었다. 누군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럴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었던 이유는 뒤로 갈수록 어두운 것들보다는 적응과 이해, 용서와 같은 '다시' 걸어가기 위한 것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상실이란 배경 속에 사는 '그쯤의 어른'들의 모습을 이렇게 잘 묘사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를테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바깥을 인식하고 이를 악무는 것 ('건너편'),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 속에 담긴 과거를 보는 것 ('풍경의 쓸모'), 슬픔 대신 무의미한 일상에 기대는 것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과 같은. 작가는 '그쯤의 어른'들이 위기와 상실을 겪고 마치 관성처럼 꿋꿋이 해내고 다시 돌아오는 모습들을 아주 적확하게 그려내고, 파장이 큰 이야기 속에서 또한 정말 그럴듯한 문장으로 중심을 잡는다. 이런 조화로움 때문일까. 참을 수 없이 우울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김애란의 소설을 찾는 건.

 

 작가의 전작인 <비행운>을 읽었을 때 서른을 상상했던 나는 이제 그쯤에 와있고, 또다시 언제 올까 싶은 김애란의 소설 주인공들은 이제, 아이에게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고 설명하는 ('가리는 손') 어른이 되어 있다. 그의 다음 소설은 어떨까. 뭐가 됐든 작가는 우리에게 닥친 위기들을, 어디로 걸어갈지 고민하는 모습들을 묵묵히 그리고 있을 것만 같다.

 

 

20쪽, <입동>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어버린‘ 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99쪽, <건너편>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게다가 도화는 국가가 인증하고 보증하는 시민이었다. 반면 자기는 뭐랄까,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애매한 성인이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되 아직 시민은 아닌 것 같은 사람이었다.

173쪽, <풍경의 쓸모>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럼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266쪽,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가.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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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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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두려워질 때가 있었다. 의식 있는 사람이고 싶어하지만 내 속에서 어떤 차별적인 시선이 흘러나올 때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목격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는 내가 보였다. 여성으로서 여성을 보는 시선이 얼룩질 때도 있었고 누군가가 당하는 차별을 자연스레 방관하고 인정할 때도 있었다. 부끄러웠고 배우고 싶었다. 계속 그렇게 고개를 숙이다 보면, 나 또한 은연중에 당하고 있었던 차별에 대해 당당히 말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조용히 억울한 마음을 삭이기보다는 말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자그만 관심의 시작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을 때였다. 바짝 호기심이 일었던 때라 많은 책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정작 걸음마 단계인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은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멋지게 디자인된 표지와, '엠마 왓슨이 추천한'이라는 카피보다, '모두를 위한'이라는 제목의 수식어가 마음에 들었다. 페미니즘이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만의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 책의 주장은 그동안 페미니즘에 대해 의아했던 부분들을 해소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의 페미니즘 작가 '벨 훅스'는 어렵고 학문적인 페미니즘 이론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일만한 간결하고 쉽게 읽히는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잘못된 정보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카더라와 오해들이 페미니즘의 발전을 저해한다 믿었다. 오랫동안 그러한 책을 찾던 작가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책을 직접 집필했다. "명료하고, 간결하고, 쉽게 읽히는" 페미니즘 입문서를 말이다.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책은 놀라울 정도로 재밌게 읽힌다.

 

작가는 일단 페미니즘 정치의 역사와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한 후, 다양한 측면에서 발생한 페미니즘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구별한다. 그 과정에서 임신 선택권, 인종과 젠더, 페미니즘 남성성, 결혼과 육아, 페미니즘 성 정치 등의 쟁점과도 마주하는데, 현대에 와서 이러한 쟁점이 일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다양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간 페미니즘 신봉자들에게는 선택과 행동의 기회가 주어졌고, 기존의 잘못된 사회구조에 젖어 있던 사고와 행동을 유지한 채로는 아무리 페미니즘을 외친다 하더라도 성차별주의를 완전히 극복해낼 순 없었다. 지배와 불평등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페미니즘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페미니즘 사고는 상호 관계와 상호의존의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우리에게 불평등이 초래한 결과를 바꾸고 동시에 지배를 종식할 방법을 제안한다 (262쪽)"고. 또한, 페미니즘은 백인 우월주의와 자본주의, 계급주의, 가부장제와 관련된 문제들을 포함한, 우리를 괴롭혀온 모든 것들에 대항하는 "상호성의 토양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사회운동(236쪽)"이라고.

 

페미니즘을 둘러싼 온갖 부정적인 소문들을 듣고 '설마'하면서도 믿어본 적이 있는가. 남성과 여성이 욕설을 하고 서로를 비아냥대며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책에 의하면, 페미니즘의 적은 단지 남성이 아니며 성별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페미니즘을 읽어야 한다.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는 시작이 바로 여기에 있다.

 

 

16쪽,
이런 얘기를 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묻는다. 페미니즘에 관해 어떤 책이나 잡지를 읽어봤는가. 페미니즘 담론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가. 페미니즘 활동가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나면, 그들이 아는 페미니즘은 십중팔구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것일 뿐이며 페미니즘 운동이 실제로 무엇인지 거기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세히 알아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98쪽,
베티 프리단은 『여성의 신비』에서 여성이 전업주부로 가정에 속박되고 예속된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불만을 "이름 없는 문제"라고 이름 붙였다. 이 문제를 여성 전체의 위기인 양 제시했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고학력자 백인들의 위기였을 뿐이다. 그들이 가정에 속박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에 대해 불평할 때, 이 나라의 수많은 여성들은 일터로 향했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 중 다수에게 전업주부가 될 권리는 오히려 ‘해방‘처럼 보였을 것이다.

176쪽
남성중심주의만 강조하면 페미니즘 이론가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여자가 다양한 형태로 아동을 학대하는 현실을 쉽사리 무시하게 한다. 우리 모두 가부장적 사고에 익숙해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지배할 권리가 있으며 어떤 수단으로든 힘없는 사람을 복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지배의 윤리학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정도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235쪽,
우리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비전의 맥박은 여전히 근본적이고 필연적인 진실과 공명한다. 즉, 지배가 있는 곳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은 동반자 관계와 육아를 통한 상호성장과 자아실현의 가치를 강조한다. 누구나 욕구를 존중받고, 누구나 권리를 누리고, 누구든 예속이나 학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관계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가부장제가 관계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고수하는 모든 것과 반대된다.

260쪽,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이 천차만별이므로 각자의 삶에 곧장 말을 건네는 페미니즘 이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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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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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편지를 그대로 엮어 만든 책들은 특별한 구성이나 미사여구 없이도 마음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 나와는 관계없는 시대와, 사람들과,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 우체통에서 방금 편지를 꺼내와 읽는 것처럼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되는 것이다. 왜일까. 오랜만에 만나본 편지글 형식의 책 『채링크로스 84번지』에도 눈에 띌만한 독특한 문장이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는 없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이나 책을 주문하는 요청의 편지가 다수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한 리듬으로 주고받은 편지들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출간된 후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로 남아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뉴욕의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가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기 위해 먼 바다를 건너 영국의 채링크로스 헌책방에 편지를 보낸다. 작가의 요구는 고집스럽다. 판본과 장정, 어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까다롭게 책을 고른다. 채링크로스 가에 위치한 마크스 서점은 이 까다로운 고객의 요구에 친절히 응답하고, 이들은 곧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선물을 주고받는 친구가 된다. 처음 편지를 나눴던 담당자 '프랭크' 뿐만 아니라, 서점 동료, 이웃집 어르신, 프랭크의 가족들까지 모두 친구가 된다. 바다 건너 먼 거리를 오가는 편지 속에 진득한 우정이 깃든다.

 


한 장의 편지 속에 고스란히 담긴 '마음'은 책을 읽는 독자를 흐뭇하게 한다. 게다가 첫 번째 편지와 마지막 편지에 찍힌 '날짜'를 보면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1949년부터 1969년. 무려 20년에 걸쳐 편지를 나눈 그들이다. 또한, 가장 궁핍한 시대에도 각자의 장소에서, 각자의 일상을 보내면서, 가끔가다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구해달라는 책을 아직 찾지 못했냐는 장난스러운 핀잔도, 짓궂은 농담도, 편지 속에 수두룩한 책의 제목들도 (물론 다 알지 못하지만) 남다른 재밋거리다. 무엇보다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에 더 마음이 가는 것도 있겠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사실 이제는 시대가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편지의 아날로그 감성을 되찾기엔 너무도 편리한 것들이 많이 나왔고, 우리는 편리함에 이미 너무 익숙해졌다. 일일이 한 자 한 자 마음을 다해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 발송하는 건 자주 하기엔 매우 번거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아주 작고 사소한 핑계를 만들어보고 싶어진다. 읽은 책을 이웃들에게 보내면서 작은 쪽지 하나라도 적어보고, 일부러 인사 한번 더 해보고, 고마움을 전해보고. 비록 20년간의 편지에는 비할 바 못되겠지만 따뜻한 마음이라면 된 것이다.

 

 

50쪽,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에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112쪽,
임대료에 적당한 가격 같은 건 없어요. 그리고 가만히 적당한 가격으로 있어주지도 않고요 - 광고에 뭐라고 떠들던 간에 말이죠. 하긴 이제는 광고라고도 할 수 없죠. 그냥 장삿속이죠.
저는 코앞에서 영어가 겁탈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어요. 미니버 치비가 그랬듯이, 저는 너무 늦게 태어난 거예요.

131쪽,
"당신과, 당신의 그 오래된 영국 책들이란!"
어떤지 아시겠지요. 프랭키? 살아 있는 사람 중 저를 이해하는 사람은 당신뿐이랍니다.

145쪽,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대로가 나을지도. 너무나 긴 세월 꿈꿔온 여행이죠. 단지 그곳 거리를 보고 싶어서 영국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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