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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눅눅했던 여름이 지났다. 날짜로, 입추(立秋)를 보내고 나니 믿기지 않게도 시원한 바람이 줄곧 불어온다. 여름이 싫은 건 눅눅함에서 오는 짜증 때문. 언제 이것들이 사라질까 싶었더니 이제야 서서히 얌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면 사실 모든 일들이 그랬다. 울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분노했던, 참을 수 없이 싫었던, 얼굴 빨개지도록 부끄러웠던, 시간 한 토막을 딱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슬펐던 모든 것들을 우리는 지나쳐간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모른대도 멀뚱멀뚱 걷고는 있다. 김애란의 소설 속 인물들 또한 그러한 지점들을 지나치고 있는데,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온 힘을 다하여 빠져나와야 할 정도로 가파르다. 대부분의 단편들이 상실과 부재에 대해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잃고, 무언가를 잃고, 탄탄히 흘러가던 삶의 중간이 뚝 끊어지는 일들을.
"웃는 것, 또 웃는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웃는 것. 그리하여 영원히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구는 것." ('침묵의 미래' 133쪽)
왠지 모르게 눅눅함이 깃들어 있음에도 시원해 보이던 표지에 취해 읽은 단편들 속에서, 상실을 맞이하는 건 눅눅한 여름날에 읽기엔 꽤 힘든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오싹할 정도로 춥기까지 해서 낯설은 감정이었다. 소설은 첫 단편 <입동>부터 너무 가혹했다(다른 책에서 이미 읽은 것인데도). 아이의 죽음과 새롭게 얻은 집 사이에서 도저히 우뚝 설 수 없는 부부의 모습을 다뤘다. 그를 시작으로 죽음, 이별, 소멸, 실패, 온갖 어두운 것들이 밀려들었다. 너무 우울해서 책을 잠깐 덮었다. 누군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럴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었던 이유는 뒤로 갈수록 어두운 것들보다는 적응과 이해, 용서와 같은 '다시' 걸어가기 위한 것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상실이란 배경 속에 사는 '그쯤의 어른'들의 모습을 이렇게 잘 묘사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를테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바깥을 인식하고 이를 악무는 것 ('건너편'),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 속에 담긴 과거를 보는 것 ('풍경의 쓸모'), 슬픔 대신 무의미한 일상에 기대는 것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과 같은. 작가는 '그쯤의 어른'들이 위기와 상실을 겪고 마치 관성처럼 꿋꿋이 해내고 다시 돌아오는 모습들을 아주 적확하게 그려내고, 파장이 큰 이야기 속에서 또한 정말 그럴듯한 문장으로 중심을 잡는다. 이런 조화로움 때문일까. 참을 수 없이 우울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김애란의 소설을 찾는 건.
작가의 전작인 <비행운>을 읽었을 때 서른을 상상했던 나는 이제 그쯤에 와있고, 또다시 언제 올까 싶은 김애란의 소설 주인공들은 이제, 아이에게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고 설명하는 ('가리는 손') 어른이 되어 있다. 그의 다음 소설은 어떨까. 뭐가 됐든 작가는 우리에게 닥친 위기들을, 어디로 걸어갈지 고민하는 모습들을 묵묵히 그리고 있을 것만 같다.
20쪽, <입동>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어버린‘ 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99쪽, <건너편>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게다가 도화는 국가가 인증하고 보증하는 시민이었다. 반면 자기는 뭐랄까,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애매한 성인이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되 아직 시민은 아닌 것 같은 사람이었다.
173쪽, <풍경의 쓸모>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럼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266쪽,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가.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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