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편지를 그대로 엮어 만든 책들은 특별한 구성이나 미사여구 없이도 마음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 나와는 관계없는 시대와, 사람들과,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 우체통에서 방금 편지를 꺼내와 읽는 것처럼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되는 것이다. 왜일까. 오랜만에 만나본 편지글 형식의 책 『채링크로스 84번지』에도 눈에 띌만한 독특한 문장이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는 없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이나 책을 주문하는 요청의 편지가 다수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한 리듬으로 주고받은 편지들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출간된 후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로 남아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뉴욕의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가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기 위해 먼 바다를 건너 영국의 채링크로스 헌책방에 편지를 보낸다. 작가의 요구는 고집스럽다. 판본과 장정, 어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까다롭게 책을 고른다. 채링크로스 가에 위치한 마크스 서점은 이 까다로운 고객의 요구에 친절히 응답하고, 이들은 곧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선물을 주고받는 친구가 된다. 처음 편지를 나눴던 담당자 '프랭크' 뿐만 아니라, 서점 동료, 이웃집 어르신, 프랭크의 가족들까지 모두 친구가 된다. 바다 건너 먼 거리를 오가는 편지 속에 진득한 우정이 깃든다.

 


한 장의 편지 속에 고스란히 담긴 '마음'은 책을 읽는 독자를 흐뭇하게 한다. 게다가 첫 번째 편지와 마지막 편지에 찍힌 '날짜'를 보면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1949년부터 1969년. 무려 20년에 걸쳐 편지를 나눈 그들이다. 또한, 가장 궁핍한 시대에도 각자의 장소에서, 각자의 일상을 보내면서, 가끔가다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구해달라는 책을 아직 찾지 못했냐는 장난스러운 핀잔도, 짓궂은 농담도, 편지 속에 수두룩한 책의 제목들도 (물론 다 알지 못하지만) 남다른 재밋거리다. 무엇보다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에 더 마음이 가는 것도 있겠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사실 이제는 시대가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편지의 아날로그 감성을 되찾기엔 너무도 편리한 것들이 많이 나왔고, 우리는 편리함에 이미 너무 익숙해졌다. 일일이 한 자 한 자 마음을 다해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 발송하는 건 자주 하기엔 매우 번거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아주 작고 사소한 핑계를 만들어보고 싶어진다. 읽은 책을 이웃들에게 보내면서 작은 쪽지 하나라도 적어보고, 일부러 인사 한번 더 해보고, 고마움을 전해보고. 비록 20년간의 편지에는 비할 바 못되겠지만 따뜻한 마음이라면 된 것이다.

 

 

50쪽,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에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112쪽,
임대료에 적당한 가격 같은 건 없어요. 그리고 가만히 적당한 가격으로 있어주지도 않고요 - 광고에 뭐라고 떠들던 간에 말이죠. 하긴 이제는 광고라고도 할 수 없죠. 그냥 장삿속이죠.
저는 코앞에서 영어가 겁탈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어요. 미니버 치비가 그랬듯이, 저는 너무 늦게 태어난 거예요.

131쪽,
"당신과, 당신의 그 오래된 영국 책들이란!"
어떤지 아시겠지요. 프랭키? 살아 있는 사람 중 저를 이해하는 사람은 당신뿐이랍니다.

145쪽,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대로가 나을지도. 너무나 긴 세월 꿈꿔온 여행이죠. 단지 그곳 거리를 보고 싶어서 영국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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