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틈만 나면 걱정을 한다. 한심하게 시간을 보냈던 옛날을 걱정하고, 잘못하다간 역시 한심해질지 모르는 앞날을 걱정한다. 얼마 전에도 나는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나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그 '털실'을 가지고 싶단 생각을 했다.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 나왔던 그 털실은, 잡아당긴 만큼 내 삶을 진행시켜 미래로 보내는 마법의 물건이다. 나는 그 털실을 죽 당겨서 스스로를 취업 걱정 없는 순간에 살게 해 주고 싶다고 종종 생각한다. 또 가끔 나는 내가 드라마 속 주인공이었으면 하고도 생각한다. 특별한 에피소드 위주로 미성숙한 과도기의 삶이 며칠간 진행되다가, 갑자기 '몇 년 후' 자막이 뜨면서 이미 그럴싸한 어른이 된 내가 화면에 짠 등장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한 지 불과 며칠 뒤, 김혜정의 <판타스틱 걸>(비룡소 펴냄)을 읽었다. 제목만 봤을 땐 거 참 자아도취 넘치는 명명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책을 읽기 전 미리 본 뒤표지에서 귀띔한 줄거리에는, '17살의 나와 27살의 내가 만난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갈수록 이상적인 하이틴 판타지가 아닐까 하는 염려가 커졌다. 하지만 금세 궁금증이 따라붙었다. 과거와 미래의 만남? 내가 꿈꾸던 상황과 좀 비슷한 거 아닌가?

그러나 웬걸. 시간을 건너뛰고 싶었던 나에게, 그 밀회는 뜻밖에도 부러움이 아닌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 <판타스틱 걸>(김혜정 지음, 비룡소 펴냄). ⓒ비룡소
이 소설은, 꼬꼬마 주인공이 마법의 주문만 외우면 인형 같은 몸매의 전문직 여성(!)이 되는 요술 공주 만화가 아니었다. 여기엔 너무도 현실을 살고 있는 스물일곱 살의 오예슬과, 꿈꾸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자신하는 열일곱의 오예슬만이 있었다.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의 모델이 될 줄만 알았던 주인공 예슬이 자신이 제일 끔찍하게 여기던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 되어 있는 모습은, 우리 주변의 흔한 사실이면서도 단번에 진실이라고 수긍하기만은 힘든 것이었다.

예슬보다 천만 배는 걱정투성이인 나는 학생이라는 신분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으로 나갈 일이 벌써부터 잔뜩 두려웠다. 내겐 대학교에 합격하자마자 공무원 학원을 다니겠다는 친구도 있었고 같이 스펙(Specification)을 쌓으러 다니자는 친구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물자가 풍족해 보이기만 하는 21세기에, 선배를 아사로 떠나보낸 예술학도가, 안개 낀 미래 앞에 떨지 않을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예슬이 나를 완전히 대변하는 인물인 것은 아니었다. 걱정만큼 몽상이 많은 나는 쑥스럽게도-혹은 뿌듯하게도-여전히 꿈을 꾸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사건건 열 살 연상의 인생 선배-그것도 다른 인생 아닌 자기 인생을 진짜 살아본-에게 잔소리를 쏘아대는 열일곱 예슬을 계속 보다 보니, 지금보다 더 어렸던 내 생각이 징그럽도록 났다.

열다섯 살 때부터 블로그를 해온 나는 종종 4~5년 전 쓴 그 글들을 보면서 미칠 듯한 민망함을 느끼곤 한다. 호우주의보를 발령받은 질풍노도의 한복판, 허세와 조울이 최고조로 발휘되는 '중 2병'의 발병 시기에 써제낀 글들은 하나같이 감성을 더블 샷으로 끼얹은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잘난 척, 멋있는 척, 똑똑한 척, 삼척동자 수준의 지식에서 쏟아져 나온 그놈의 오만 '척' 덕분에 내 수많은 글들은 비공개 딱지를 달고 숨김 폴더에 감춰졌다.

아마 스물일곱 예슬의 서랍도 내 블로그 폴더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덩달아 그가 느끼는 마음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했다. 나는 아무리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이 수줍어도 차마 삭제는 하지 못한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순수하고 진실했었는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새벽에 쓴 유치한 편지, 자책의 끝에 울면서 쓴 다짐의 글, 미래를 상상하면서 쓴 설레는 일기…….

아마도 이건 비단 오예슬과 나만이 공유하는 타임캡슐이 아닐 것이다. 잊어버린 척 했지만 실은 내밀한 곳에 담아두었던 꿈과 추억, 쪽팔리지만 그만큼 용감했던 과거의 나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난 나도 모르게 예슬에게 마음을 내 주었다. 중학생 시절 <아리랑>을 읽다 동학 농민 운동에 참가한 민초가 되어 두들겨 맞는 꿈을 꾸었던 난, 이 책을 읽던 중 잔 낮잠 속에서 열일곱 오예슬이 되었다. 스물일곱 오예슬로부터 '삼겹살 한 근 샀는데 반 근은 너 먹어'라는 새침한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게 책에 본디 있는 내용인 줄로 알았다. 깨어나 찾아보니 그런 대목은 없었다. 책 이야기가 꿈에 나온 건 딱 두 번째로 있는 일이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청소년 소설을 자주 읽는 편이다. 그 아무리 무거운 주제라도 산뜻하고 행복하게 감싸는, 청소년 소설 특유의 발랄한 질감이 좋기 때문이다. 그중 다른 책들과 구별되는 이 책의 매력은 필요 이상으로 희망적이거나 '아이 다운' 내용을 집어넣으려 애쓰지 않은 점이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들의 세계를 잘 아는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호기 부리며 만들어놓은 세계에 오히려 거북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아이들의 것으로만 치부되는 애니메이션이 그 속에 놀랄 만큼 포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듯이, 이젠 청소년을 위한 소설들도 기본적 순수함은 잃지 않되 그 메시지를 풍부하고 현실감 있게 가꿔야 마땅하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장르는 여러 작가와 출판사들의 노력으로 어느덧 작지 않은 힘을 길렀다. 그러나 청소년 소설로 분류된 도서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버'하고 있음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별한 장르라는 것은 그 안에 속한 작품들에게 사명감은 줄지언정, 작품 자체의 가능성을 스스로 국한하게끔 하는 딱지가 되면 안 될 텐데도 말이다.

이 책은 과잉 정서와 파격 소재가 난무하는 '애들 책' 사이에서 특별히 담백하다. 무리해서 착해지는 이야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판타스틱 걸>은 그 글감 면에서 틀림없이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다. 이 소설이 거울 노릇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그 덕일 것이다. 너무 불행하지도 않고 너무 행복하지도 않고, 너무 못나지도 너무 잘나지도 않고, 너무 망하지도 않고 너무 잘되지도 않는 주인공만이 수많은 '나'와 같아질 수 있으므로.

10년 전 나는 매일 도서관과 만화방에 얼굴을 내미는 초등학생이었다. 그러고 보니 딱 그 시절, 나도 모델이 나오는 만화를 좋아했었다.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천사의 립스틱'을 바르고 매력적인 톱스타가 되는 여자아이의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와 말하는데 사실 난 어릴 적에 '오타쿠'였다. 집에서 야무지게 만화만 봤다. 오예슬처럼 인기가 넘치는 애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될 줄도 몰랐다. 그 시절 난 차라리 스스로가 호그와트에 입학하는 게 현실성 있다고 생각했을 거였다.

그럼에도 나는 미래로 멀리뛰기하고 싶은 만큼 과거로 돌아가고도 싶어 한다. 너무 한심해서 싹 갈아엎고 싶은 때를 생각하거나, 혹은 반대로 아주 행복해서 영원히 살고 싶은 때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럴 때 나는 잡아당긴 만큼 나를 미래로 보내는 털실 말고, 돌돌 감은 만큼 나를 과거로 보내는 털실 생각을 한다. 그 전후좌우의 줄다리기를 겪은 오예슬은 그러나 여전히, 부러운 이상으로 두려운 대상이다. 나와 다르면서, 또 나 같기 때문에.

스물일곱의 오예슬이 결국 어떻게 됐을지 우린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될 지도 알 수 없다. 처음엔 답도 주지 않고 글을 맺은 작가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났다. 도덕 교과서에 나온 털실 뭉치의 주인은 결국 원하는 순간만을 사는 삶에 질려 버렸다. 차근차근 순간을 밟는 인생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웃었다. 아마도 미래에서 돌아온 오예슬은, 사악한 털실 타래를 부러워하는 나의 철없음을 기다려주기 위해 멈춰 섰을 것이었다. 슈퍼모델이 아닌 거울의 모습으로, 내가 다 클 때까지 옆에서 걸어주려는 모양이었다.

실로 판타스틱한 계집애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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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석 달간 한국의 보통 사람들은 소, 돼지 수백만 마리가 단지 '전염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매장되는 현장을 보면서 몸서리를 쳤다. 아직 죽지 않은 소, 돼지가 살겠다고 몸으로 쏟아지는 흙을 피하며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바로 그 소, 돼지를 불판에 구우면서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눌지 모른다. "앞으로 쇠고기, 돼지고기 가격 좀 오르겠는걸." 어쩌면 그런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밑에는 고기 냄새를 맡고 달려온 개, 고양이가 다리에 몸을 비비며 고기 한 점을 기다리고 있을 테고.

소, 돼지의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신문, 방송을 통해서 지켜보던 이들 중 몇몇은 (소, 돼지만 먹지 않는) '채식'을 선택한 자신의 결심이 "옳았다"며 주저하는 지인들에게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던 그의 젓가락에는 참치회가 들렸을 수 있고, 술자리가 끝나고 나면 그는 쇠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을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은 이런 모습에 메스를 들이댄 책이 잇따라 나왔다. 제목부터 노골적이다.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노순옥 옮김, 모멘토 펴냄), 할 헤르조그의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김선영 옮김, 살림 펴냄).

이런 책을 만약에 이번에 생매장된 소, 돼지들이 읽는다면 어떻게 말할까? '프레시안 books'는 어렵게 지난 11월 경상북도 안동에서 최초로 생매장됐다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돼지 한 마리와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경북 모처에서 은신 중인 그 돼지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 자세한 정보는 생략한다. 그 돼지는 자신을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 생매장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돼지 '소크라테스'. ⓒ프레시안(손문상)

'역겹고' '더럽고' '우둔한' 돼지?

프레시안 : 그 아비규환에서 어떻게 탈출했습니까?

소크라테스 : 운이 좋았습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축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주인을 비롯해 축사에서 일하는 이들의 표정이 부쩍 상기돼 있고, 수의사도 자주 오가고. 그러다 그날이 왔어요. 모든 돼지에게 (마취) 주사를 놓더군요.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어요.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나 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네, 맞습니다. 생매장된 것이지요. 나를 짓누르는 흙도 답답했지만, 사방에서 압박하는 다른 돼지들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나랑 살이 닿은 아래에 있던 돼지 몇 마리는 차갑게 식은 게 이미 숨 막혀 죽었고요. 아,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다행히 맨 위 가장자리에 묻혔나 봐요.

침출수에 의한 토양 오염을 방지하려고 깔아놓은 비닐을 찢어서 지지대로 삼아서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버둥대다 포기하려던 찰나에 신선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더군요. 살았다!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프레시안 : 많은 독자들이 돼지치곤 용하다, 생각할 것 같네요. 그렇게 발 빠르게 행동하다니….

소크라테스 : 뭘 모르는 소리 하지 말아요. 사람들은 돼지의 진짜 모습을 모릅니다. 사실 돼지는 사람들이 애지중지 기르는 개 따위보다 훨씬 똑똑하고 예민해요. 미국의 한 대학의 연구를 보면, 돼지는 훈련을 시키면 컴퓨터 게임도 할 수 있어요. 코로 조이스틱을 움직이면서 80% 정확도로 타깃에 적중시키니까요.

3주밖에 안 된 새끼 돼지도 이름을 붙여 부르면 알아듣고 반응합니다. 또 같은 집단 내의 돼지를 서른 마리까지 구별하고, 또 친한 돼지, 싫은 돼지도 구분해요. 진창에서 구르는 돼지의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은데, 땀샘이 없기 때문에 몸을 식히려는 것뿐이에요.

돼지가 얼마나 예민한지 알려주는 직접적인 증거는 바로 내 돼지 꼬리에요. (소크라테스는 돼지 꼬리가 잘린 상태였다.) '돼지답게' 살지 못하는 우리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돼지가 서로의 꼬리를 물어서 끊어버리는 행동을 자주 보이니까, 태어나자마자 꼬리를 잘라버리는 거죠. 영문도 모르고 꼬리가 잘려나갈 때의 그 고통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육식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방법

프레시안 : 얘기를 듣고 보니, 같이 대화를 나눌 자격이 충분하네요. 잠시라도 무시했던 것 사과합니다. 본격적으로 미리 준비한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수백만 마리의 소, 돼지가 목숨을 잃는 사태를 보면서, 한국에서는 드물게 '동물권(animal right)'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동물 보호 단체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해당 주제의 책 몇 권도 소개되었습니다.


▲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멜라니 조이 지음, 노순옥 옮김, 모멘토 펴냄). ⓒ모멘토
특히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는 아주 강경한 목소리로 '육식주의(carnism)'를 고발합니다. 이 '육식주의'라는 말은 조이가 만들어낸 용어인데요. 그는 육식을 '자연스러운' 행위로 보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갖는 신념 체계를 육식주의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조이는 이 책 전체에서 육식주의가 어떻게 유지되고 어떠한 폐해를 낳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물론 결론은 육식주의의 거부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 돼지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주장인가요? 그런데 도대체 그 빌어먹을 육식주의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던가요?

프레시안 : 조이에 따르면, 사람들은 동물과 그 고기에 대한 인식을 조작하는 과정을 통해서 육식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이 책에는 이런 인식을 조작하는 과정에 동원되는 여러 가지 수단들이 등장합니다. 돼지에 '역겨운' 동물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면서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먹는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 한 예이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 돼지, 닭 등을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깔끔하게 포장된 모습으로 접하는 것도 이런 조작의 다른 예입니다. 조이는 만약 사람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소, 돼지, 닭이 뒹굴다 도살·가공되는 모습을 사람들이 생생히 목격한다면 이처럼 육식이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밖에도 많은 예가 있습니다만….

소크라테스 : 네, 대충 무슨 얘기인지 알겠네요. 의미 있는 지적이지만 그렇게 새로운 주장은 아닙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 제임스 서펠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영향력 있는 연구로 유명합니다. 그가 1996년에 펴낸 책(In The Company of Animals)이 2003년에 국내에도 소개되었어요. <동물, 인간의 동반자>(윤영애 옮김, 들녘 펴냄).

이 책을 보면 조이가 언급한 그 왜곡의 수단을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구분합니다. 절연(detachment), 은폐(concealment), 책임 전가(shifting the blame), 왜곡(misrepresentation), 이 네 가지가 그것입니다. 내용은 조이가 책에서 언급하는 것과 대동소이할 것 같아요.

앞에서 소개한 두 가지 예는 '왜곡'과 '은폐'입니다. 인간의 특성 중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돼지에게 뒤집어씌우는 방법은 왜곡의 대표적 수법이고, 보통 사람이 목축장이나 도축장의 끔찍한 현실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은폐입니다. '절연'은 인간을 동물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부각하고, 또 동물을 여러 범주로 나누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조이의 책에도 절연의 예가 나옵니다. 소, 돼지, 닭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재조차도 고통을 느끼는데도, 마치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존재로 인식하며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부각하는 것이나,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먹을 수 없는 것', '귀여운 것/역겨운 것' 등으로 나눠서 한 쪽을 먹는다든가….

소크라테스 : 네, 책임 전가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어요. 하느님이 동물을 지배할(먹을) 권리를 주었다거나, 육식은 인간의 본성이라거나, 혹은 (사실은 육식을 하기 싫지만) 단백질을 섭취하려면 어쩔 수 없다거나 등이요. 이런 얘기를 듣다 보면 돼지 입장에서는 참담할 뿐입니다.

대량 학살, 인권 침해…인간은 다른가?

프레시안 : 뭔가 더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소크라테스 :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조작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네요.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다른가요? 2009년에 일어났던 용산 참사 후에 권력과 대중이 보인 모습을 살펴볼까요? 용산 참사가 일어나고 나서 경찰, 대중은 이런 말을 되뇄어요.

경찰 : "과잉 진압은 없었다." (은폐) / "철거민이 뿌린 시너에 화염병 불이 붙어난 사고이므로 경찰에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책임 전가) / "전국철거민연합과 같은 외부 세력의 개입이 근본 원인이다." (절연) / "진압 책임자 사퇴 주장은 반정부 세력의 체제 전복 시도다." (왜곡)

대중 :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절연) / "겉보기와는 다르게 진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누가 알겠어?" (은폐) / "전국철거민연합과 같은 과격 단체의 꾐에 빠진 자기들이 그런 일을 자초한 거나 마찬가지야!" (왜곡) / "내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질까?" (책임 전가)

왜 대중은 인권 침해와 같은 대량 학살을 외면하는지를 따져 물은 스탠리 코언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조효제 옮김, 창비 펴냄)이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에서 코언은 20세기의 끔찍한 인권 침해 사건을 살피면서 대중이 진실을 '부인(denial)'하는 과정을 파헤칩니다. 코언이 해명한 그 과정은 앞에서 언급한 인간과 동물의 관계와 놀랍도록 흡사합니다.

공감의 그릇

프레시안 : 인간은 가망 없는 족속이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소크라테스 : 네, 실제로 그런 생각이 드네요.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은 종끼리 끔찍한 인권 침해,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인간에게, 다른 종과의 공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 아닌가요? 사실 나는 평소에 인간이라는 종은 아주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왔어요. 이번에 생매장을 당하고 보니까, 더욱더 확신이 드는데요.

안타깝게도 인간은 공감의 그릇이 아주 작은 것 같아요. 최근에 개,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가족처럼 끔찍이 아끼는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개, 고양이 같은 동물에게는 좋은 일이지요. (물론 평생을 집에 갇혀 지내다, 한순간에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불행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개, 고양이를 아끼는 이들이 이웃을 대하는 태도는 어떤가요?

나는 이런 애완동물에 대한 애정이 이웃에 대한 공감이 없어진 자리를 대체한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물론 동물만큼이나 이웃, 인류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또 현실에서는 그 반대의 예도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동물의 팔자가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인지 아나요?


▲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할 헤르조그 지음, 김선영 옮김, 살림 펴냄). ⓒ살림
프레시안 : 네, 오늘 같이 얘기를 나눠볼 또 다른 책인 할 헤르조그의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에 답이 나옵니다. 바로 히틀러가 지배하던 독일이었지요.

소크라테스 : 맞습니다. 1933년 히틀러의 독일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동물보호법을 제정했어요. 일상적인 동물 학대를 금지한 것은 물론이고, 닭에게 강제로 모이를 주는 행위, 가축을 잔인하게 죽이는 행위도 금지했습니다. 어류를 죽이기 전 반드시 마취를 해야 하고, 바닷가재를 죽일 때도 신속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니 정말 동물 세상이었지요.

히틀러와 나치의 동물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헤르만 괴링의 연설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동물은 유기체적 의미에서 생명체일 뿐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살고 지각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며,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고 충성심을 지닌, 애정의 대상이다." "동물을 여전히 소유물로 취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버리겠다"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 97쪽)

이 히틀러와 나치는 유태인이 기르던 애완동물 수천 마리를 안락사 시킬 때도 인도적 도살을 명했어요. 그러나 정작 유태인은 자기 애완동물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했지요. 강제 수용소에서 그들이 어떤 취급을 받다가 죽었는지는 많은 기록이 있으니 자세히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이현경 옮김, 돌베개 펴냄)를 권합니다!)

물론, 히틀러와 나치가 동물 애호가였다는 사실이 동물 보호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동물 해방>을 쓴 피터 싱어의 낙관적인 전망대로 인간의 공감이 가족, 민족, 인류 더 나아가 동물로까지 넓어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감의 그릇이 작은 것이야말로, 인간을 자기 파멸로 이끌 뇌관이 아닐까요.

인간의 역량

프레시안 : 인간의 전횡을 견제하려는 '신의 저주'처럼 들리네요. 그런 비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동물과의 관계를 성찰하고 행동하는 길로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은 인간과 동물 간의 여러 가지 관계를 냉정하게 살피면서도 이런 변화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합니다.

예를 들자면, 육식주의를 거부하고 채식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프레시안>에서 연초에 채식 기획 기사를 내놓았는데, 큰 호응을 얻었고요. 물론 헤르조그가 정확히 지적하듯이, 채식을 하는 이유가 꼭 신념 때문은 아닙니다. 건강 때문에 채식을 선택한 사람도 많지요.

소크라테스 : 사람과 같은 잡식 동물인 돼지 입장에서 기꺼이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나 역시 식물성 단백질뿐만 아니라 (온갖 동물에서 유래한) 동물성 단백질이 포함된 사료를 먹으면서 이렇게 단시간에 살을 찌웠으니까요.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됩니다. 잡식 동물인 사람이 채식만 하는 게 정말 문제가 없나요?

프레시안 : 사실 채식과 건강의 관계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조이는 (대개의 채식주의자가 그렇듯이) 아주 단호한 어조로 '채식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만, 진실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헤르조그가 최신의 연구 성과를 활용해서 균형 있게 서술하고 있어요. 국내의 채식주의자들이 이 책의 7장을 꼭 읽었으면 좋겠어요.

많은 연구 결과를 보면, 채식과 건강의 영향은 개인의 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그건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주변에도 채식을 해서 건강이 좋아진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 채식을 해서 건강을 해친 사람도 있거든요. 심지어 고기를 섭취하고 나서야 오히려 건강이 좋아진 이도 많습니다. 헤르조그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고 있고요.

그러니 채식을 전파하겠다는 성급한 마음에 '채식=건강!' 이런 구호를 외치는 일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역사상 존재한 어느 문명을 막론하고 지역과 상관없이 최소한 15% 이상은 육식을 해왔다는 지적이었어요. 즉, 진화 과정에서 효율적인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고기가 선택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 그러나 진화의 경로가 그랬다고 해서 꼭 그렇게 살라는 법은 없으니…. 헤르조그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변화할 가능성을 낙관하는 편인가요?

프레시안 : 그렇습니다. 헤르조그가 동물 보호를 주장하는 사람이나 채식주의자들이 보면 불편할 정도로 깐깐하게 온갖 불편한 사실(fact)을 들이대면서도 결국에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바꿔보려는 이들을 옹호하는 것도 그런 변화에 대한 지지겠지요. 독일의 지식인 틸 바스티안도 헤르조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나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시금석은 여전히 인간의 식습관에 있다고 확신한다. 육식을 포기하는 것에는 많은 철학적-윤리적, 정치적-이유들이 있겠지만, 육식을 하지 않는 생활 방식이 (생명의 진화가 인간을 잡식성 동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가 그런 생활 방식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 그런 방식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선택은, 이를 테면 지속 가능한 경제 방식을 지지하는 것이나 몇몇 빈곤 국가들의 대외 부채를 즉각 면제해 줄 것을 촉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역량이다.

자의식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함께 사는 세상을 성찰할 줄 아는 존재, 바로 이러한 성찰력으로 인해 다른 모든 동물들과 달라진 존재의 역량이다." (<가공된 신화, 인간>(손성현·박성윤 옮김, 시아출판사 펴냄), 47쪽)

재앙의 불씨

소크라테스 :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헤르조그나 바스티안은 현실이 어떤지 정확히 못 보고 있어요. 카산드라의 경고를 무시한 트로이가 참담하게 망했듯이, 때로는 비관론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법입니다. 아까 인간이 가진 공감의 그릇이 작은 것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인류를 파멸로 이끌 뇌관일 수도 있다고 얘기했지요?

그런데 실제로 육식이 그런 재앙의 불씨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바로 식량 문제입니다.

프레시안 : 맞습니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나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은 육식과 식량 문제의 관계를 제대로 짚지 않고 있어요. 최근에 나온 폴 로버츠의 <식량의 종말>(김선영 옮김, 민음사 펴냄)은 바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요. 로버츠는 에너지와 먹을거리의 문제를 함께 고려해 신뢰를 줍니다.

여담입니다만, 지구를 지킨다면서 채식을 한다는 사람이 있어요. 소가 내뿜는 메탄이 지구 온난화에 큰일이라고요. 맞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몸에 좋다며 비행기로 운반해온 '물 건너온' 유기농 채소를 고르면 어떻게 될까요? 비행기가 내뿜는 온실 기체의 양을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오지요. 이처럼 여러 가지 문제를 통합해서 사고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 <식량의 종말>(폴 로버츠 지음, 김선영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소크라테스 : 바로 먹을거리 문제가 그렇지요. 이제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2006년 전 세계에서 생산한 곡물 20억 톤(t) 중에서 3분의 1 이상이 소, 돼지, 닭과 같은 동물의 먹이로 쓰였습니다. 이 추세대로라면 2050년이 되면 세계 육류 수요가 4억6500만 톤으로 현재 수준의 두 배를 넘어서요. 그러면 사료용 곡물을 무려 10억 톤이나 더 생산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농지를 다른 용도로 전용하고, 토양 유실과 같은 이유로 농지가 황폐화되면서 식량 생산 여건이 계속 안 좋아지고 있어요. 최근에는 옥수수와 같은 곡물을 자동차 연료로도 쓰고요. 이런 상황에서 소, 돼지, 닭에게 먹이려고 10억 톤을 더 생산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세계 도처의 굶주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용인할까요?

인정을 해야 해요. 현재처럼 육류가 풍부한 미국식 식단은 지속 불가능합니다. 인류 전체가 미국 수준의 육류 소비(1년에 1인당 약 100㎏)를 한다면, 세계에서 수확한 곡물로는 단 26억 명만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인구의 40%, 2070년 인구 수 100억 명의 4분의 1에 해당합니다.

다른 가정도 비관적입니다. 이탈리아처럼 1인당 육류 소비가 미국의 80% 정도인 상황을 적용해도 단 50억 명만 먹여 살릴 수 있어요. 레스터 브라운에 따르면, 2070년에 예상되는 인구 100억 명을 살릴 수 있으려면 세계가 인도 수준(1년에 1인당 약 5.4㎏)으로 육류를 소비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 수천 만 명의 인도인은 칼로리를 제대로 공급 받지 못합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소크라테스 : 생매장 당했다 살아난 내게 인류가 살 방도를 묻는 건가요? (웃음)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곳곳이 조이의 표현을 쓰자면, 이미 육식주의에 포획되었어요. 수십 년간의 육류 소비에 길들여진 세계가 쉽게 '밥상 혁명'에 나설 가능성은 없습니다. 육식이 재앙의 불씨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에요.

아, 방도가 하나 있기는 해요. 이번에 소, 돼지에게 했던 방식을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 것입니다.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70세 이상의 노인을 생매장한다든가, (동물만큼 장애인에게는 공감을 하지 않나 봐요!) 싱어가 제안하는 것처럼 영구 장애아를 안락사 시킨다든가…. 그러다 갈등이 생겨서 또 서로를 죽이고 죽이면 그 역시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프레시안 : 농담이 심하군요. 육식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부터 나서서 육류 소비 수준을 적당히 조정한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정말로 혁명과 같은 변화가 필요하긴 합니다만….

소크라테스 : 혁명을 함부로 말하네요. 당장 당신부터 육류를 끊을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사실 축산업에 종사하는 농민을 염두에 두면, 무조건 육식을 끊는 게 꼭 바람직한 일도 아니고요. 일이 이토록 꼬인 상황에서 과연 육류 섭취를 획기적으로 줄여서 '식량의 종말'을 막는 혁명이 가능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예 한 가지만 더 들게요. 미국에 사는 고양이 9400만 마리가 하루에 먹어치우는 고기의 양은 5400톤이에요(고양이 한 마리당 약 57g). 매일 닭 300만 마리가 고양이 뱃속으로 들어갑니다. (고양이는 동물 보호의 적?) 인도인 한 사람이 고작 1년에 5.4㎏의 고기에 만족할 때, 미국 고양이 한 마리는 연간 약 21㎏의 고기를 먹어요.

생각해 보세요. 미국이 이런 (시한부) 풍요를 포기하겠습니까? 중국, 인도 사람이 '우리도 (또 고양이도) 고기 좀 실컷 먹자'고 나설 때 과연 '너희는 안 돼!' 하고 막을 도리가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바꿔보자, 이런 얘기는 한가하게 들리네요.

축사의 진창에서 사료만 먹던 내가 자연 상태에서 돼지의 원래 평균 수명인 20년을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능하면 눈 똑바로 뜨고 이 인간이라는 종의 몰락을 지켜볼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상황이 안 좋으면 가족처럼 믿었던 걸신들린 주인에게 잡아먹힐 개, 고양이들이 불쌍하네요. 하긴, 인간이라는 믿을 수 없는 종에 의탁한 그들의 운명이죠.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런 말을 했어요.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 굶주린 소크라테스가 과연 돼지 혹은 다른 동물보다 나은지 한 번 봅시다. 행운을 빕니다! 하하하!


이 인터뷰는 최근에 나온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 <식량의 종말>을 읽고 든 단상을 돼지와의 가상 대화 형식으로 꾸며본 것입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같은 탈출 돼지가 전국 도처에 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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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우가 3년 만에 펴낸 장편 소설 <돌풍 전후>(강 펴냄)는 연애 감정 위로 쌓아올려진 이야기 구조물이다. 작가의 말대로 연애의 속성이 "수많은 눈들을 의식하면서 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려는 섣부르나 성급한 열정이자, 내숭스럽게 난생 처음 겪는 어떤 색다른 성적 기대감"(147~148쪽)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말이다.

혹시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을 '연애 소설'로 오해한다는 핀잔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언급한 작품의 부분은 사실 액자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러 사건들이 긴박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도 겉으로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했던 1980년 4월 당시의 현실에 대한 느낌을 표현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애 감정 위로 쌓아올려진 이야기 구조물'이라는 설명에 약간의 보충과 변명이 있어야할 듯하다. 이를 위해 이 책에 같이 묶여 있는 두 편의 중편 소설 중 하나인 '나그네 세상'의 한 장면을 잠시 볼 필요가 있겠다. 자칭 '가방광'인 인물이 공항의 한 면세점에서 마음에 드는 가방을 두고 벌이는 장장 다섯여 장에 걸친 내면적 갈등 묘사의 한 부분이다.

그런 타협안은 그가 과소비증에, 좀더 정확히는 가방광으로서의 그 중독증에 꼼짝없이 들려 있다는 증후였으며, 그 심리적 암투에서 지고 말리라는 씁쓸한 신음이었다. 그러나 그 패배의 과정이 사정(射精) 전후처럼 황홀한 것도 사실이다. (262쪽)


▲ <돌풍 전후>(김원우 지음, 강 펴냄). ⓒ강
이처럼 김원우의 소설에서는 가방을 사는 행위, 그리고 나아가 1980년의 급박했던 현실을 대하는 태도 모두 일종의 연애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돌풍 전후>의 구절을 빌려 미리 결론을 말한다면, 이 작품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말로 하던 이바구와 글로 쓰는 서사물', '제도와 개인', 그리고 '사담과 공담'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팽팽한 연애 감정과도 같은 작가의 심리에서 비롯된 긴장감들로 가득하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언어와 문장에 대한 작가의 연애 감정이다. 소설가에게 언어에 대한 각별한 애정 운운 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 있다. 어찌 보면 그 둘의 애정 관계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작가에게 문체 측면에서 그만의 스타일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일이 점차 희박해지는 요즘이기에 자신만의 소설 언어에 대한 각별한 그의 애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김원우의 문장을 간략하게 평가하자면, 경상도 사투리를 바탕에 둔 '고어(古語)체 구어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사투리나 옛말 등에 작가가 달아 둔 주해(註解)의 도움 이외에도 사전을 찾아 볼 필요가 자주 생긴다. 그러면서도 그의 문장들은 실제 삶에서 떨어진 채 규범적인 언어나 사투리의 복원이라는 당위성에 얽매여 굳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말의 숨결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데에 불가해한 매력이 있다.

이 같은 문장을 통한 소설 읽기 경험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다른 정서를 환기한다. 마치 외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한글 자막의 도움 없이 여러 번 외국 영화를 볼 때처럼, 언어와 내용 간의 편안한 일체감보다는 긴장과 간섭이 생긴다. 결국 <돌풍 전후>는 소설 쓰기와 읽기 양쪽 측면에서 서사 자체에 대한 연애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서사 구조를 일별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재 대학에 재직 중인 '한 교수'에게 한때 같이 재직하다가 먼저 퇴임한 '임 교수'가 전자 우편으로 '회고담'(작중 인물이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회고록이 아니라)을 보낸다. 내화로 자리 잡은 이 회고담이 분량상 작품의 대부분으로, 소설 전체에 걸쳐 세 번에 나누어 임 교수가 보낸 그대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회고담의 앞뒤로 이를 읽은 한 교수의 평가나 임 교수와의 추억들, 또한 회고담의 형식이나 내용에 관련한 임 교수 자신의 의견 등이 놓여 있다. 문제는 이 부분이 다음과 같은 언급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긴밀성의 측면에서 내화와의 배치(背馳)를 유도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첫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한 선생은 보충 설명 같은 것을 각주 형식으로 달아가며 읽어야 되지 않을까 라는 소감이 퍼뜩 떠올랐고, 뒤이어 '그걸 내가 해야 한다고? 어디다? 말로? 글로 말이지?' 같은 생각을 뒤적거렸다. 귀찮은 일이었지만 힘들 것 같지는 않았고, 충실한 이해가 이어지려면 그러기도 해야 되지 싶다며 무르춤했다. (30쪽)

이번의 내 회고담에도, 그것을 명색 '작품'이랄 수 있다면, 그 속의 유사 현실이 그 당대의 여러 정황보다 지나치게 잘났거나 못나버려서 부등호로 견줘보기는커녕 거적때기로 햇빛이나 겨우 가린 움막이 아닐까 싶어 걱정이오. (144쪽)

결국 회고담의 앞뒤에 놓인 언급들은 위에서처럼 기능상 끝없는 간섭을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화에 몰입하기보다는 한발 물러나 그것을 의심하게 하고 나아가 지금 작가가 구성하고 있는 서사의 본래적 역할과 기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회고 내용이 "'80년 초봄이라는 그 엄혹했던 시대"(76쪽)와 그것에 민감했던 대학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거의 무관하게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연애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이유와 같다.

이렇게 김원우의 <돌풍 전후>는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개인의 이야기라는 서사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버린다. 대신, 개인을 짓누르는 사회적 현실과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의 두 축이 부단히 간섭하게 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은 현실에 대한 과도한 전망이 쌓아올리는 모래성이나 개인적이고 소설적인 낭만의 신기루 그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향한다.

그렇다면 작중 인물의 고민처럼 작가의 이 같은 고민이 소설에 "'윤리 의식' 같은 인간 실존의 기본 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이와 같은 고민조차 "철저히 깔아뭉개고 있는 '소설 산업'의 소비적 회로라는 거대한 구조악"(88쪽)을 벗어날 수 있을까. 소설 속 회고담이 미완결이듯 아직은 그 답을 알 수 없다.

다만 연애 감정과도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밀고 당기는 김원우의 문장과 서사가 앞으로도 우리를 설레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쉽게 저버릴 수는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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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책이 반갑다. 시간 때우기 용인 대중 소설부터 역사·경제·과학 분야의 제법 묵직한 책들까지 두루 좋다. 해서 어지간한 책이면 '언젠가 읽겠지' '재미있겠는데'라는 생각에 챙겨두는 편이다.

그런 와중에도 지은이 혹은 출판사가 딱하게 여겨지는 책들이 있다. '누가 읽으라고' '얼마나 팔려고' 싶은 책들이다. '책에 관한 책'이 그 중 하나다. 아, 물론 책을 소재로 한 스릴러물이나 고전 명저 해제집은 제외다. 흥미를 위해서 혹은 짧은 시간에 실용적 목적을 위해 찾는 이들이 있을 테니 말이다. 책 혹은 독서의 역사를 다뤘거나 독서술을 다룬 책들이 필자가 안쓰럽게 여기는 대상이다.

어느 책에선가 미국의 진정한 독서인이 2만 명 선이라는 사실을 읽은 적이 있다. 교양을 위해 자기 돈을 들여 다양한 책을 읽는 이가 그렇다는 이야기였는데 인구 비율로 치면 우리나라엔 5000명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이들 정도는 되어야 관심이 있을 '책을 위한 책'은 척박한 우리 독서 시장에선 그야말로 태생적 한계를 지녔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출판사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딱한 생각이 들 수밖에.

최근 선보인 <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톰 라비 지음, 돌베개 펴냄)과 <독서의 탄생>(마거릿 윌리스 지음, 황소자리 펴냄)이 바로 그런 딱한 책이다. 중독은커녕 한 달에 한 권 읽는 독자도 찾기 힘든 마당에, 책보다는 컴퓨터나 TV와 친숙한 풍토에 누가 손에 들까 싶어서다. 진정으로 책을 좋아하는 이들, 그중에서도 진귀한 이야깃거리를 찾는 소수의 책벌레들을 위한 책이라 할까.


▲ <독서의 탄생>(마거릿 윌리스 지음, 이상원 옮김, 황소자리 펴냄). ⓒ황소자리
<독서의 탄생>부터 보자. 우선 책 제목에 홀리지 말자. 영국의 출판인 출신이 썼는데 옮긴이가 책머리에 고백했듯이 "지난 500년간 영국인들의 독서"가 핵심 내용이다.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펴냄)나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펴냄), <읽기의 역사>(지영사 펴냄)처럼 역사 전반을 다룬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물론 이 책들도 서양 저자가 썼기에 인류 문명사의 독서 행위 전반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독서의 탄생>은 훨씬 범위가 좁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도서관 이야기가 한 장(章)을 차지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영국 이야기다.

16세기 귀족 부인 베스 헤드윅에서 시작해 20세기 정치인 데니스 힐리까지 저명한 독서인을 중심으로 영국의 출판계·도서관·장서가·독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적지 않다.

'일반 독자(Common Reader)'란 개념은 작가이자 비평가인 새뮤얼 존슨이 18세기에 처음 사용했단다. 그만큼 이전까지 책은 귀족과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다. 경제적 제약을 받는 노동자층은 문자 해독 능력도 떨어졌고, 비싼 책값을 감당할 여유가 없었기에 책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지은이는 이와 관련해 사회 태도도 특히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노동자 계층에게 독서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던 명재상 글래드스턴이나 소설가 찰스 디킨스 같은 인물조차 가난한 사람이 글을 읽고 생각하게 되면 비참한 처지를 인식하여 "복종이라는 위대한 법칙"에 도전하게 된다고 경계했다. 18세기 후반 존 트러슬러란 목사는 프랑스 혁명은 인쇄술의 발달 때문이라며 "노동하는 이들은 못 배울수록, 그리하여 미천하게 살수록 더 잘 복종하게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요즘 우리가 흔히 접하는 책 그리고 독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미국이 건국 직후 국립도서관 건립을 추진했으며 토머스 제퍼슨은 4개의 도서관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어떤가. 또 제퍼슨은 자기 장서 6487권을 의회도서관에 기증하면서 일괄 구입을 조건으로 내걸었는데 '이단적 철학'을 퍼뜨릴 수 있고 나쁜 책, 옛날 책, 가치 없는 책이 뒤섞였다는 정적들의 반대로 의회에서 구입 안에 대한 표결에 붙여져 10표 차이로 의결됐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어찌 보면 한가하게 들리지만 건국 초기에 이런 구상과 논의를 했다는 자체에서 미국의 힘의 뿌리를 느끼게 된다.

책은 이밖에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기원, 사회 개선의 불꽃을 지핀 레프트북 클럽,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펭귄북스 탄생의 뒷이야기 등 애서가들을 위한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 <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톰 라비 지음, 현태준 그림, 김영선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미국의 저널리스트가 쓴 <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은 독특하다. 앞에 든 책이 놀라울 정도로 자료를 뒤져낸 정통 인문서라면 이 책은 '책 중독자'를 자처하는 이가 쓴 에세이집이다. 더러 장서가나 책 수집광을 둘러싼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풍자에 가깝다. <카사노바는 책을 더 사랑했다>(열린책들)나 <젠틀 매드니스>(뜨인돌)에서처럼 책에 관한 에피소드를 기대하지 말란 뜻이다.

책 도취증 환자를 위해 '모호한 표현 찾기 표'란 게 나온다. 난수표처럼 3행 10열로 된 표에서 적절한 표현을 고르면 책에 관한 이야기에서 상대방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거다. 예를 들면 이 표에서 739를 고르면 "부르주아의 메타 언어적인 허튼소리"가 되는데 어떤 책에 이 같은 평을 하면 누가 감히 대거리를 하겠는가.

그런 조언이 또 있다. 서가에 있는 책의 대략 10%에 책갈피가 꽂혀 있어야 한단다. 그 이하면 풋내기 같아 보이고 그 이상이면 호사가로 보인다나. 단 책갈피가 꽂힌 책은 너무 초보적이면 안 되고 정기적으로 책갈피 위치를 바꿔줘야 한단다. 단 사전 등 참고 도서에는 똑같은 쪽에 오래도록 책갈피가 꽂혀 있더라도 무방하단다.

토르콰토 타소란 이탈리아 작가는 고양이 눈 광채에 의지해 책을 읽었다든가 19세기 영국의 책 중독자 리처드 히버는 20만 권에서 50만 권의 책을 모아 8채의 집에 두었다든가 어떤 책 중독자의 사후 장서를 파는 데 5년이 걸렸으며 책 공급이 늘어나는 바람에 런던의 책값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들도 실렸다.

"목적을 가지고 책을 펴고 이익을 얻고 책을 덮으라"란 말이 있다. 글쎄, 책을 읽는 행위가 반드시 실용적일 필요는 없으니 꼭 따를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을 때 혹은 고를 때 '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유용한 충고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두 책 모두 아주 한정된 독자를 위한 책이다. 책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고자 하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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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1·2권, 민음사 펴냄)은 언뜻 보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들어가는 말'에서 밝히고 있듯 우선 책의 내용이 비록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토대로 하고 있어도 그와는 사뭇 다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대비 열전'이라는 원래의 제목이 말해 주듯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 중 비슷한 면모를 보이는 영웅들을 2명씩 대비하여 비교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총 23쌍의 대비 열전을 비롯하여 단독으로 서술한 영웅 몇을 포함하여 50여 명의 영웅들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그에 비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에는 총 20명의 그리스 로마 영웅들이 등장한다. 게다가 그가 다루고 있는 영웅들이 모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속에는 탈레스, 피타고라스, 디오게네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한니발, 스키피오 등 그가 스스로 선별한 영웅들이 7명이나 새롭게 포함되어 있다.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이윤기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두 영웅전은 쓰게 된 의도도 전혀 다르다. 플루타르코스는 독자들에게 영웅들의 성격의 장점과 단점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본보기 혹은 타산지석이 되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페리클레스를 다루는 글의 서두에서, 인간이란 원래 선하고 아름다운 행동을 보면 그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는 법인데,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며, 자신이 위대한 영웅들의 삶을 글로 남기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비해 이윤기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영웅들의 본색을 살피는 작업을 통하여, 다양한 경로로 우리의 언어로 삼투해 들어와 있는 서양 문화의 무수한 표현법과 수사법을 조명하고 여기에다 피를 통하게 하고 싶다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

이윤기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영웅 열전을 집필한 의도는 아주 분명해 보인다. 그는 고대 영웅들의 삶을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시각으로 다시 쓰고 싶었던 것이다.

이윤기는 우선 우리가 일상용어처럼 쓰고 있는 고대의 영웅들이 만들어낸 관용어에 주목한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나 "루비콘 강을 건너다" 등 그리스 로마 영웅의 입에서 흘러나와 우리 입에 회자되고 있는 많은 관용어의 출처와 그것들이 만들어진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아울러 이것이 "우리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작업"은 될지언정 "우리 문화에 때를 입히는 작업"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어휘가 중국 고전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서양 문화의 초석을 이루는 그리스 중심의 헬레니즘"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은 단순히 그런 관용어들을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영웅들이 사용한 수사법에 더 큰 지면을 할애한다. 그에 따르면 "수사법은 말이나 글을 다듬고 꾸미는 기술"이며 "고함보다 큰 울림을 자아낸다." 영웅들의 수사법의 핵심은 바로 촌철살인의 화법이다. 간결함의 화법이다. 솔론의 말을 빌자면 '메덴 아간(meden agan)' 즉 '과유불급'의 화법이다. 이런 화법은 필연적으로 영웅들이 만들어낸 관용어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관용어가 아주 간명한 것은 바로 그런 화법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한두 마디로 핵심을 찌르고 들어가는" 촌철살인의 화법의 대가였다. 가령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는 적의 침략을 막는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가를 묻자 "청빈하게 살되, 서로 잘난 체 하지 않으면 된다"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침공을 앞둔 상황에서 히페리데스가 주화론자였던 포키온에게 아테네 시민들은 언제 전쟁을 해야 하느냐고 따져 묻자 그가 이렇게 간결하게 대꾸했다.

"젊은이들이 질서를 제대로 지킬 때, 부자들이 나라에 돈 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때, 정치가들이 공금 횡령을 그만 둘 때면 승산이 있소."

아버지 필리포스가 계속해서 영토를 늘려가는 것을 보고 알렉산드로스가 내뱉은 말도 간명하면서도 의표를 찌른다.

"아버지가 다 해버리면 나는 할 일이 없어지잖아."

플라톤이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이탈리아 남부 시라쿠사를 방문했을 때 철학자를 자칭하던 시라쿠사의 왕과 나누던 대화도 짧은 한 문장씩으로만 이루어져있지만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 무엇 하러 오셨는가?" "덕이 있는 사람을 찾으러왔습니다." "벌써 찾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내 앞에서 이러긴가?" "폭군처럼 이러깁니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에는 이와 같은 촌철살인의 대화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영웅들은 그런 간명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전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아무리 짧은 문장이라도 그들은 서로의 의중을 금방 꿰뚫어 보았다. 심지어 포로로 잡은 적일지라도 대화중에 간결한 수사법으로 자신을 감동시키면 솔직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목숨을 살려줄 정도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인도를 점령했을 때 '김노소피스타이'라는 '나체 철학자'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민중의 지지를 업고 그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려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임기응변에 뛰어난 그들 중 10명을 초대하여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모두들 그가 묻는 어려운 질문에 촌철살인적인 답을 함으로써 쉽게 위기를 넘긴다.

가령 알렉산드로스가 아홉 번째 나체 철학자에게 "인간은 몇 살까지 살면 적당하게 사는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그 철학자가 이렇게 대답한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아보일 때까지요. 지금의 우리처럼요." 트집을 잡아 그들을 혼내주려 했던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그들의 화법에 감동하여 그들을 그대로 보내준다.

이윤기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끊임없이 설명과 변명과 해명이 필요한 시끄러운 세상과는 멀리 떨어진 채 한적한 숲 속을 유유자적하는 것 같다. 그것도 피톤치드가 가장 많이 나온다는 빽빽하게 우거진 편백나무 숲을 거니는 것 같다. 그래서 무거운 머리가 금세 가벼워지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마치 내가 그런 대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대리만족과 함께 통쾌함과 후련함이 밀려온다.

촌철살인의 수사법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내공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불교의 선문답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 수사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의 영웅들은 불교의 고승에 필적한다. 이윤기의 영웅들은 모두 이런 수사법의 도사들이다. 그는 마치 영웅이 되려면 이런 수사법에 능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하지만 이윤기의 의중은 다른 데에 있다. 그는 영웅들이 그런 수사법을 터득할 수 있게 된 이유를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것은 영웅들이 "자기보다 큰 것에 자신을 바침으로써" 결국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그가 계속해서 클로즈업시키고 있는 영웅들의 수사법은 단순한 수사법이 아니다. 그것은 시련의 미학을 상징한다. 시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윤기의 책에 등장하는 20명의 그리스 로마 영웅들이 모두 끝까지 진정한 자유를 누린 것은 아니다. 그는 영웅들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기 때문이다. "영웅에게는 상승과 하강의 주기가 있다. 욱일승천하던 영웅도 때가 되면 쓰러진다. 외부의 적에 쓰러지기도 하고 내부에서 싹트는 '히브리스(Hybris)', 즉 '오만'에 휘둘리다가 쓰러지기도 한다. 오만이 부주의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가 쓰러진 것도 바로 '보이지 않는 적'인 내부의 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윤기는 우리에게 부정적인 영웅보다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가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을 자기식대로 쓰려고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또 그가 선별한 새로운 영웅들이 정치가가 아니라 탈레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대부분 철학자였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윤기에 의하면 현대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영웅이란 바로 모든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몸과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운 사람이다. 그래서 이윤기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의 말을 인용하여 최고의 선은 자유이며, 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하며, 재물이나 명예에 구애되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가령 디오게네스는 자신을 참모로 기용하기 위해 찾아온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던 정복자 알렉산드로스에게 대담하게도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할 정도로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자유인이었다.

기원전 5세기에 활동했던 아테네의 아리스테이데스라는 정치가도 이윤기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자유인이다. 그는 공명정대한 의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그 당시 아테네에는 도편추방제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것은 범죄에 대한 징벌 수단이 아니라 권력의 편중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직접 투표에 의해 추방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6000표 이상을 얻은 사람은 아테네를 10년 동안 떠나있어야 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추방자 후보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그가 막 투표장으로 들어가는데 어떤 장님이 골편을 내밀면서 아리스테이데스라는 이름을 대신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그 이유를 묻자, 그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가는 곳마다 그 사람을 의로운 양반이라고 추켜세우니 듣기 거북하다는 것이었다. 아리스테이데스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그 골편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소경에게 건네주었다.

이런 자유인의 모습은 이윤기가 선별한 여러 영웅들을 거쳐 소크라테스에게서 정점을 이룬다. 소크라테스는 사약을 먹고 죽기 바로 직전 친구 크리톤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으니까 잊지 말고 갚아 주게." 이윤기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이다. 당시 그리스 땅에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빌어서 병이 나으면 이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살이라는 거대한 병통에서 놓여나게 되었으니 마땅히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바쳐야 하는데 그걸 바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크리톤에게, 자기를 대신하여 바쳐달라고 한 것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을 읽고 있는 내내 촌철살인적인 저자의 '일갈(一喝)'이 계속해서 귓가를 때린다.

"진정한 영웅은 자유로운 사람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놓은 사람이다. 진정한 영웅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버리고 내려놓아라! 그래도 부족하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더 버리고 더 내려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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