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틈만 나면 걱정을 한다. 한심하게 시간을 보냈던 옛날을 걱정하고, 잘못하다간 역시 한심해질지 모르는 앞날을 걱정한다. 얼마 전에도 나는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나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그 '털실'을 가지고 싶단 생각을 했다.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 나왔던 그 털실은, 잡아당긴 만큼 내 삶을 진행시켜 미래로 보내는 마법의 물건이다. 나는 그 털실을 죽 당겨서 스스로를 취업 걱정 없는 순간에 살게 해 주고 싶다고 종종 생각한다. 또 가끔 나는 내가 드라마 속 주인공이었으면 하고도 생각한다. 특별한 에피소드 위주로 미성숙한 과도기의 삶이 며칠간 진행되다가, 갑자기 '몇 년 후' 자막이 뜨면서 이미 그럴싸한 어른이 된 내가 화면에 짠 등장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한 지 불과 며칠 뒤, 김혜정의 <판타스틱 걸>(비룡소 펴냄)을 읽었다. 제목만 봤을 땐 거 참 자아도취 넘치는 명명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책을 읽기 전 미리 본 뒤표지에서 귀띔한 줄거리에는, '17살의 나와 27살의 내가 만난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갈수록 이상적인 하이틴 판타지가 아닐까 하는 염려가 커졌다. 하지만 금세 궁금증이 따라붙었다. 과거와 미래의 만남? 내가 꿈꾸던 상황과 좀 비슷한 거 아닌가?

그러나 웬걸. 시간을 건너뛰고 싶었던 나에게, 그 밀회는 뜻밖에도 부러움이 아닌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 <판타스틱 걸>(김혜정 지음, 비룡소 펴냄). ⓒ비룡소
이 소설은, 꼬꼬마 주인공이 마법의 주문만 외우면 인형 같은 몸매의 전문직 여성(!)이 되는 요술 공주 만화가 아니었다. 여기엔 너무도 현실을 살고 있는 스물일곱 살의 오예슬과, 꿈꾸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자신하는 열일곱의 오예슬만이 있었다.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의 모델이 될 줄만 알았던 주인공 예슬이 자신이 제일 끔찍하게 여기던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 되어 있는 모습은, 우리 주변의 흔한 사실이면서도 단번에 진실이라고 수긍하기만은 힘든 것이었다.

예슬보다 천만 배는 걱정투성이인 나는 학생이라는 신분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으로 나갈 일이 벌써부터 잔뜩 두려웠다. 내겐 대학교에 합격하자마자 공무원 학원을 다니겠다는 친구도 있었고 같이 스펙(Specification)을 쌓으러 다니자는 친구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물자가 풍족해 보이기만 하는 21세기에, 선배를 아사로 떠나보낸 예술학도가, 안개 낀 미래 앞에 떨지 않을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예슬이 나를 완전히 대변하는 인물인 것은 아니었다. 걱정만큼 몽상이 많은 나는 쑥스럽게도-혹은 뿌듯하게도-여전히 꿈을 꾸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사건건 열 살 연상의 인생 선배-그것도 다른 인생 아닌 자기 인생을 진짜 살아본-에게 잔소리를 쏘아대는 열일곱 예슬을 계속 보다 보니, 지금보다 더 어렸던 내 생각이 징그럽도록 났다.

열다섯 살 때부터 블로그를 해온 나는 종종 4~5년 전 쓴 그 글들을 보면서 미칠 듯한 민망함을 느끼곤 한다. 호우주의보를 발령받은 질풍노도의 한복판, 허세와 조울이 최고조로 발휘되는 '중 2병'의 발병 시기에 써제낀 글들은 하나같이 감성을 더블 샷으로 끼얹은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잘난 척, 멋있는 척, 똑똑한 척, 삼척동자 수준의 지식에서 쏟아져 나온 그놈의 오만 '척' 덕분에 내 수많은 글들은 비공개 딱지를 달고 숨김 폴더에 감춰졌다.

아마 스물일곱 예슬의 서랍도 내 블로그 폴더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덩달아 그가 느끼는 마음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했다. 나는 아무리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이 수줍어도 차마 삭제는 하지 못한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순수하고 진실했었는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새벽에 쓴 유치한 편지, 자책의 끝에 울면서 쓴 다짐의 글, 미래를 상상하면서 쓴 설레는 일기…….

아마도 이건 비단 오예슬과 나만이 공유하는 타임캡슐이 아닐 것이다. 잊어버린 척 했지만 실은 내밀한 곳에 담아두었던 꿈과 추억, 쪽팔리지만 그만큼 용감했던 과거의 나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난 나도 모르게 예슬에게 마음을 내 주었다. 중학생 시절 <아리랑>을 읽다 동학 농민 운동에 참가한 민초가 되어 두들겨 맞는 꿈을 꾸었던 난, 이 책을 읽던 중 잔 낮잠 속에서 열일곱 오예슬이 되었다. 스물일곱 오예슬로부터 '삼겹살 한 근 샀는데 반 근은 너 먹어'라는 새침한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게 책에 본디 있는 내용인 줄로 알았다. 깨어나 찾아보니 그런 대목은 없었다. 책 이야기가 꿈에 나온 건 딱 두 번째로 있는 일이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청소년 소설을 자주 읽는 편이다. 그 아무리 무거운 주제라도 산뜻하고 행복하게 감싸는, 청소년 소설 특유의 발랄한 질감이 좋기 때문이다. 그중 다른 책들과 구별되는 이 책의 매력은 필요 이상으로 희망적이거나 '아이 다운' 내용을 집어넣으려 애쓰지 않은 점이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들의 세계를 잘 아는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호기 부리며 만들어놓은 세계에 오히려 거북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아이들의 것으로만 치부되는 애니메이션이 그 속에 놀랄 만큼 포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듯이, 이젠 청소년을 위한 소설들도 기본적 순수함은 잃지 않되 그 메시지를 풍부하고 현실감 있게 가꿔야 마땅하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장르는 여러 작가와 출판사들의 노력으로 어느덧 작지 않은 힘을 길렀다. 그러나 청소년 소설로 분류된 도서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버'하고 있음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별한 장르라는 것은 그 안에 속한 작품들에게 사명감은 줄지언정, 작품 자체의 가능성을 스스로 국한하게끔 하는 딱지가 되면 안 될 텐데도 말이다.

이 책은 과잉 정서와 파격 소재가 난무하는 '애들 책' 사이에서 특별히 담백하다. 무리해서 착해지는 이야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판타스틱 걸>은 그 글감 면에서 틀림없이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다. 이 소설이 거울 노릇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그 덕일 것이다. 너무 불행하지도 않고 너무 행복하지도 않고, 너무 못나지도 너무 잘나지도 않고, 너무 망하지도 않고 너무 잘되지도 않는 주인공만이 수많은 '나'와 같아질 수 있으므로.

10년 전 나는 매일 도서관과 만화방에 얼굴을 내미는 초등학생이었다. 그러고 보니 딱 그 시절, 나도 모델이 나오는 만화를 좋아했었다.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천사의 립스틱'을 바르고 매력적인 톱스타가 되는 여자아이의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와 말하는데 사실 난 어릴 적에 '오타쿠'였다. 집에서 야무지게 만화만 봤다. 오예슬처럼 인기가 넘치는 애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될 줄도 몰랐다. 그 시절 난 차라리 스스로가 호그와트에 입학하는 게 현실성 있다고 생각했을 거였다.

그럼에도 나는 미래로 멀리뛰기하고 싶은 만큼 과거로 돌아가고도 싶어 한다. 너무 한심해서 싹 갈아엎고 싶은 때를 생각하거나, 혹은 반대로 아주 행복해서 영원히 살고 싶은 때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럴 때 나는 잡아당긴 만큼 나를 미래로 보내는 털실 말고, 돌돌 감은 만큼 나를 과거로 보내는 털실 생각을 한다. 그 전후좌우의 줄다리기를 겪은 오예슬은 그러나 여전히, 부러운 이상으로 두려운 대상이다. 나와 다르면서, 또 나 같기 때문에.

스물일곱의 오예슬이 결국 어떻게 됐을지 우린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될 지도 알 수 없다. 처음엔 답도 주지 않고 글을 맺은 작가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났다. 도덕 교과서에 나온 털실 뭉치의 주인은 결국 원하는 순간만을 사는 삶에 질려 버렸다. 차근차근 순간을 밟는 인생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웃었다. 아마도 미래에서 돌아온 오예슬은, 사악한 털실 타래를 부러워하는 나의 철없음을 기다려주기 위해 멈춰 섰을 것이었다. 슈퍼모델이 아닌 거울의 모습으로, 내가 다 클 때까지 옆에서 걸어주려는 모양이었다.

실로 판타스틱한 계집애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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