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우가 3년 만에 펴낸 장편 소설 <돌풍 전후>(강 펴냄)는 연애 감정 위로 쌓아올려진 이야기 구조물이다. 작가의 말대로 연애의 속성이 "수많은 눈들을 의식하면서 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려는 섣부르나 성급한 열정이자, 내숭스럽게 난생 처음 겪는 어떤 색다른 성적 기대감"(147~148쪽)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말이다.

혹시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을 '연애 소설'로 오해한다는 핀잔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언급한 작품의 부분은 사실 액자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러 사건들이 긴박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도 겉으로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했던 1980년 4월 당시의 현실에 대한 느낌을 표현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애 감정 위로 쌓아올려진 이야기 구조물'이라는 설명에 약간의 보충과 변명이 있어야할 듯하다. 이를 위해 이 책에 같이 묶여 있는 두 편의 중편 소설 중 하나인 '나그네 세상'의 한 장면을 잠시 볼 필요가 있겠다. 자칭 '가방광'인 인물이 공항의 한 면세점에서 마음에 드는 가방을 두고 벌이는 장장 다섯여 장에 걸친 내면적 갈등 묘사의 한 부분이다.

그런 타협안은 그가 과소비증에, 좀더 정확히는 가방광으로서의 그 중독증에 꼼짝없이 들려 있다는 증후였으며, 그 심리적 암투에서 지고 말리라는 씁쓸한 신음이었다. 그러나 그 패배의 과정이 사정(射精) 전후처럼 황홀한 것도 사실이다. (262쪽)


▲ <돌풍 전후>(김원우 지음, 강 펴냄). ⓒ강
이처럼 김원우의 소설에서는 가방을 사는 행위, 그리고 나아가 1980년의 급박했던 현실을 대하는 태도 모두 일종의 연애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돌풍 전후>의 구절을 빌려 미리 결론을 말한다면, 이 작품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말로 하던 이바구와 글로 쓰는 서사물', '제도와 개인', 그리고 '사담과 공담'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팽팽한 연애 감정과도 같은 작가의 심리에서 비롯된 긴장감들로 가득하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언어와 문장에 대한 작가의 연애 감정이다. 소설가에게 언어에 대한 각별한 애정 운운 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 있다. 어찌 보면 그 둘의 애정 관계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작가에게 문체 측면에서 그만의 스타일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일이 점차 희박해지는 요즘이기에 자신만의 소설 언어에 대한 각별한 그의 애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김원우의 문장을 간략하게 평가하자면, 경상도 사투리를 바탕에 둔 '고어(古語)체 구어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사투리나 옛말 등에 작가가 달아 둔 주해(註解)의 도움 이외에도 사전을 찾아 볼 필요가 자주 생긴다. 그러면서도 그의 문장들은 실제 삶에서 떨어진 채 규범적인 언어나 사투리의 복원이라는 당위성에 얽매여 굳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말의 숨결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데에 불가해한 매력이 있다.

이 같은 문장을 통한 소설 읽기 경험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다른 정서를 환기한다. 마치 외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한글 자막의 도움 없이 여러 번 외국 영화를 볼 때처럼, 언어와 내용 간의 편안한 일체감보다는 긴장과 간섭이 생긴다. 결국 <돌풍 전후>는 소설 쓰기와 읽기 양쪽 측면에서 서사 자체에 대한 연애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서사 구조를 일별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재 대학에 재직 중인 '한 교수'에게 한때 같이 재직하다가 먼저 퇴임한 '임 교수'가 전자 우편으로 '회고담'(작중 인물이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회고록이 아니라)을 보낸다. 내화로 자리 잡은 이 회고담이 분량상 작품의 대부분으로, 소설 전체에 걸쳐 세 번에 나누어 임 교수가 보낸 그대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회고담의 앞뒤로 이를 읽은 한 교수의 평가나 임 교수와의 추억들, 또한 회고담의 형식이나 내용에 관련한 임 교수 자신의 의견 등이 놓여 있다. 문제는 이 부분이 다음과 같은 언급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긴밀성의 측면에서 내화와의 배치(背馳)를 유도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첫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한 선생은 보충 설명 같은 것을 각주 형식으로 달아가며 읽어야 되지 않을까 라는 소감이 퍼뜩 떠올랐고, 뒤이어 '그걸 내가 해야 한다고? 어디다? 말로? 글로 말이지?' 같은 생각을 뒤적거렸다. 귀찮은 일이었지만 힘들 것 같지는 않았고, 충실한 이해가 이어지려면 그러기도 해야 되지 싶다며 무르춤했다. (30쪽)

이번의 내 회고담에도, 그것을 명색 '작품'이랄 수 있다면, 그 속의 유사 현실이 그 당대의 여러 정황보다 지나치게 잘났거나 못나버려서 부등호로 견줘보기는커녕 거적때기로 햇빛이나 겨우 가린 움막이 아닐까 싶어 걱정이오. (144쪽)

결국 회고담의 앞뒤에 놓인 언급들은 위에서처럼 기능상 끝없는 간섭을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화에 몰입하기보다는 한발 물러나 그것을 의심하게 하고 나아가 지금 작가가 구성하고 있는 서사의 본래적 역할과 기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회고 내용이 "'80년 초봄이라는 그 엄혹했던 시대"(76쪽)와 그것에 민감했던 대학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거의 무관하게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연애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이유와 같다.

이렇게 김원우의 <돌풍 전후>는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개인의 이야기라는 서사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버린다. 대신, 개인을 짓누르는 사회적 현실과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의 두 축이 부단히 간섭하게 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은 현실에 대한 과도한 전망이 쌓아올리는 모래성이나 개인적이고 소설적인 낭만의 신기루 그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향한다.

그렇다면 작중 인물의 고민처럼 작가의 이 같은 고민이 소설에 "'윤리 의식' 같은 인간 실존의 기본 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이와 같은 고민조차 "철저히 깔아뭉개고 있는 '소설 산업'의 소비적 회로라는 거대한 구조악"(88쪽)을 벗어날 수 있을까. 소설 속 회고담이 미완결이듯 아직은 그 답을 알 수 없다.

다만 연애 감정과도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밀고 당기는 김원우의 문장과 서사가 앞으로도 우리를 설레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쉽게 저버릴 수는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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