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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마이크 데이비스 외 지음, 유강은 옮김, 아카이브 펴냄)는 두 다리 뻗고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을 읽다 들이차는 착잡함과 침울함은 우연히 지나가게 된 호화찬란한 명품 백화점 1층 회랑에서 맞닥뜨리는 기분과 흡사할 듯싶다. 어쩌면 나와는 큰 상관이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그 상점들 곁을 총총히 지나면서 우리 눈에 띄는 것은 문가에 도열한 쇼핑객의 초조한 표정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쯤은 경멸감과 또 반쯤은 위화감을 억누르며 황망하게 스쳐 가던 그 상점 안으로 걸음을 딛고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을 기회가 생겼다면, 그 때 드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 때 들이닥칠 기분이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흡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책 뒤표지에 실린 "자본의 상상력과 억만장자들의 욕망이 빚어낸 19편의 지옥도"란 글귀는 신랄하지만 이 책을 읽을 이들이 감지할 기분에 충분히 호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자고 작정했으면 모두 알 수 있었을 이야기를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편이다.


▲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마이크 데이비스 외 지음, 유강은 옮김, 아카이브 펴냄) ⓒ아카이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억만장자의 야단스럽고 구역질나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넘쳐나리 만치 많지 않는가. 미국 호텔 재벌인 힐튼의 손녀, 패리스 힐튼의 엽기적인 일상에서부터 중국 베이징 부잣집 도련님의 명품 스포츠카 폭주족 동호회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매일 우리는 TV와 점잖은 신문에서부터 싸구려 잡지의 가십을 통해서까지, 초현실적인 부자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허다하게 듣고 본다.

이 책에서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미국 신자유주의적 도시 공간의 상징이자 증후라 할 "폐쇄형 주거 단지"가 예시하듯이 우리는 부자들만을 위한 파티와 이벤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는다. 온갖 보장이 다 된다는 암 보험이니 생명 보험이니 하는 광고들이 허술한 의료 보험으로 인해 겁에 질린 가난한 이들의 낯빛을 집요하게 반사한다면,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개인 맞춤 건강 진단 서비스를 제공하고 첨단 의료 경영을 실현하여 수익성 높은 의료 기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국내 굴지 병원들의 호들갑은 천국과 지옥이라기보다는 현실과 초현실의 차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과연 그 엄청난 부자들에게도 천국과 지옥이 있을지 우리는 확신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새로운 도시 개발과 공간 형성의 원리를 위하여 동원된 포스트모던 철학을 비웃기 위하여 곧잘 들먹이는 철학적인 비유들 가운데 하나가 말해주듯이 말이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제3의 공간에 위치한 사람들처럼 대다수의 사람은 이 물리적인 공간 속에서 단단하게 현존하지만 그 세계가 내세우는 공간적 체험과 지각의 원리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고 감히 말하기는 어렵다.

내가 지각하고 체험하는 것이 세계란 것을 내세우는 이 환상적인 공간 속에서 우리는 어차피 빠져나와 있다. 이를테면 내가 서울 어딘가에 은신할 곳을 두고 살아가고 전철을 타고 그 곳을 쏘다닌다 하더라도 어차피 서울은 내가 사는 곳이라는 감각을 제공하지 않으므로 나는 서울에 산다고 말하기 어렵다. 외려 나는 서울에 적을 두고 있지만 나는 서울에서 객이다. 서울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라기보다는 방문하고 관람하고 떠돌아다니는 공간처럼, 철학적인 잘난 체를 한다면, '현상할' 뿐이다.

이런 서울을 일러 '세계 디자인 수도'라 한다면 그건 그렇다 쳐둘 일이다. 그런데 이는 물론 포스트모던한 공간을 예찬했던 이들이 희구했던 사악한 유토피아가 실현된 모습이라는 것을 잊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서울시 종로구 북창동 몇 번지라는 마을보다 한옥 마을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한다. 전통이나 공유하는 삶의 의미, 오랜 사회적 상호작용의 경험이 침전된 공동체를 예찬하는 포스트모던한 공간은 획일적으로 격자화된 잿빛 도시의 콘크리트 숲을 증오하는 척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 국가가 만들어놓은 공간의 도구적 추상화를 반영하는 행정 구역상의 명칭보다 한옥 마을이니 하는 공동체적인 후광이 더 근사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은 '장소 마케팅'이라는 신종의 신화 팔아치우기 혹은 장소 브랜드를 만들려는 미사여구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장소 없음(placelessness)'을 개탄하며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근대적인 공간의 정언명령에서 탈출하여 그 장소에 서식하는 또는 거처하는 인간의 장소를 되찾거나 창안해야 한다는 전투적인 포스트모던 건축가들과 도시 계획자들의 심미적 이념은 공간의 경제적 현실을 은폐한다. 이 아름다운 장소 회복의 꿈은 부동산 개발 업자와 투기 자본, 지대를 추구하는 금리 생활자의 탐욕에 이바지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말이다. 나아가 그것이 진정으로 은폐하는 것은 공간이 교통, 배수, 안전을 비롯한 다양한 공적인 서비스를 위하여 구성된 근대 도시의 공간적 편성이기도 하다.

이제는 제법 유명해진 푸코의 말을 빌자면 근대 자유주의 국가가 공간을 집합적인 생명체로서의 '인구'를 위한 것으로 상상하였을 때, 공간은 언제나 그것의 상대 항으로서 공간 안팎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어떻게 파악하고 규율할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간을 생태적 환경이란 개념으로 다듬어냈을 때 그것은 단순히 공간을 둘러싼 지식이 바뀐 것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공간을 영유하는 인간을 생물학적인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고전적 자유주의가 인구-도시의 짝을 만들어 냈다는 푸코의 제안을 수긍한다면 신자유주의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어떤 새로운 배치 속에 밀어 넣는 것일까. 아마 우리는 이에 답하기 위하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하비의 제안처럼 복지국가 혹은 사회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국가로의 이행은 관리주의적 도시(managerialist city)로부터 기업가적 도시(entrepreneurial city)로의 이행과 궤를 같이 한다는 주장은 물론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서구의 대도시를 위한 분석에 그치고 마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전직 서울 시장은 CEO 시장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기업가적 도시 행정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그를 생각할 때 하비가 관측하는 기업가적 도시 모델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를 전후한 지방자치제의 실현을 목격한 한국 사회의 공간 관리를 이해하는데 전연 손색이 없는 도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보여주듯이 남미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많은 도시들을 이해하는데 이 같은 모델은 많은 부족한 부분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금융 세계화를 전후하여 나타난 새로운 자본의 지구적 운동이 국가 내외부에서 이뤄지는 정치적 규율과 맞물리면서 공간을 어떻게 새롭게 재편하는지 이해하는데 기업가적 도시란 모델은 너무나 국민국가란 공간적 이미지에 매달린다.

그렇다고 해서 사스키아 사센 같은 이들이 말하는 '글로벌 도시' 역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지구화가 어떻게 세계 주요 도시들을 국민국가라는 사회적 신체로부터 떼어내어 허브니 명령 센터니 하는 이름으로 자본과 지식, 정보의 폐쇄 회로를 형성하였는지 밝혀내고 그 도시들을 글로벌 도시라 부르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고 또 충분히 설득력 있다. 그렇지만 글로벌 도시와 동시 병행적으로 만들어지는 그 도시 아닌 도시들의 윤곽은 흐릿해질 뿐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비약하여 신자유주의적 공간의 시학(詩學)을 읊는 일로 나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뉴욕, 파리, 도쿄, 런던, 상하이, 두바이 같은 휘황찬란한 신자유주의적 도시의 세계가 결국은 대다수의 삶을 안전 무법 지대, 일자리 없는 빈곤의 나락, 갖은 질병과 죽음의 위협이 도사린 연옥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은 전연 맞는 말이고 또한 명심할 일이다. 그러나 이를 비참과 고통의 서정적 풍경 속에 가두어 놓고 이를 다양한 철학적 요설로 감싸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들을 호모 사케르라고 부르든 아니면 배제되고 추방된 자들이라 부르든 그것은 이 책의 글 가운데 하나에서 언급하듯 인도주의적 자선의 대의를 참칭하며 국제적인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저 잘난 비정부기구를 위한 윤리적인 핑계가 되어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된 자본주의가 어떻게 공간을 규정하고 지배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걸음을 이제 떼고 있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변화의 규칙과 그에 대항할 수 있는 공간적인 투쟁을 위한 전략을 사고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저분하고 구역질나는 부유한 부르주아들과 그들이 사는 장소들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착취와 탈취, 점유와 개발, 구획과 투자 같은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실천이 벌어지는 곳이고 또한 그에 예속되고 착취당하며 투쟁하는 자들이 머무는 곳이자 가장 첨예한 공간적 갈등이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가 지닌 진가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불편하고 거북하지만 그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부패와 허영의 세계를 묘파하는 풍경화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공간을 둘러싼 운동을 위해 고려해야 할 주요한 쟁점들을 망라하는 지도책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흔해 빠진 속물근성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인문 교양을 살찌우는 그저 또 한 가지 군것질거리로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이 아무리 우리 시대의 공간의 질서를 둘러싼 역겨운 추문을 폭로하는 짜릿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해도 말이다.

2

두바이, 아르그에자디드, 카불, 베이징, 홍콩, 요하네스버그, 노에바 마나과, 부다페스트, 메데인, 브라질, 이집트 드림랜드, 애리조나, 오렌지카운티 그리고 테드 터너의 목장, 개인 미술관, 라이프스타일 관광지가 된 수도원, 해상 도시의 꿈을 희구하며 10만 명의 주민을 태우고 유랑하겠다는 프리덤십호 프로젝트 등등.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에 등장하는 도시와 사유지, 관광지, 프로젝트 따위의 이름이다.

모두 19개가 꼽혔고, 이렇게 "새로운 배제의 지리학과 부의 풍경"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선정된 이 19개의 장소는 또한 우리 시대의 가장 불길한 현장이기도 하다. 그곳이 천국이라면 바로 길 하나 건너의 거리에 혹은 은폐된 그 곳의 어느 다락방에 지옥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부유층이 기거하는 이 19개의 아이콘적 공간은 또한 그 공간을 건축하고 유지하며 재생산하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의 참담한 세계를 끝내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이 책과 짝을 이루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인, 이 책의 편집자 마이크 데이비스의 눈부신 저작 <슬럼, 지구를 뒤덮다>(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에서 고발하고 있는 그 세계 말이다. 그 세계를 기억할 때 편자 서문에서 묶은 이들이 아도르노를 인용하여 말하듯이 천국과 지옥의 변증법이 고스란히 현상하는 이미지가 만들어질 것이다.

지금은 문화 비평의 정전이 되어버린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분석은 자본이 만들어내는 신기루 같은 도시의 환등상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현실을 환영적인 풍경으로 대체하였는지 고발한다. 그런데 그의 동료였던 아도르노는 이러한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힐난하였다고 한다. 이는 또 다른 환상의 명부(冥府)인 지옥이 벤야민의 묘사 속에 지워져있다는 이유에서였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도르노의 비판을 과대평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비판이기에 앞서 벤야민이 매혹당한 19세기 후반의 파리 풍경과 다른 지옥의 풍경에 경악한 이들이 그려낸 수많은 도시의 초상도 잊지 말자는 당부에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말로 번역된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나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삶의 상태>를 위시해 페비언협회를 이끈 베아트리스 웹의 영국 노동자 거주지에 대한 조사 같은 글들은 바로 벤야민이 매혹당한 풍경의 음화들을 묘파한다. 즉 천국의 길 건너편에는 지옥이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천국과 지옥은 서로의 부정적 규정일 뿐이다. 천국과 지옥이 서로 다른 세계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서로를 자신의 부정적인 존재조건으로 정립한다. 이는 이 책을 여는 첫 번째 글이자 편자 가운데 한 명인 마이크 데이비스가 쓴 '노동자들은 배제된 낙원, 두바이'에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낙원이 되었고, 연일 30도가 넘는 뜨거운 사막 도시인 두바이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큰 실내 스키장,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세계에서 가장 큰 쇼핑몰을 가진 도시가 되었다. 알막툼이 이끄는 왕실 가문이 지배하는 이 작은 도시-기업은 세계에서 최고, 최선이라 할 만한 것들은 모두 게걸스럽게 삼킨다.

그렇지만 이 도시의 휘황한 풍경의 보이지 않는 장막 뒤에는 필리핀, 스리랑카, 인도에서 온 수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그 어떤 권리의 체계와는 아랑곳없이 그 최선과 최고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예 노동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차라리 '두바이 주식회사'의 모습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도시의 풍경을 적나라하리만치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점이지대도 가지지 않은 지옥과 천국이 동거하는 희한한 세계인 두바이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불길한 최후일 뿐이다. 과연 어느 누가 이 죄악으로 가득 찬 세계를 좌시하겠는가. 따라서 두바이는 공간을 걸고 윤리적 내기를 걸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유사한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이란의 인공도시 아르그에자디드나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이집트의 도시들은 어떨까. 이 도시들은 너무나 불투명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책에 실린 글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슬람 혁명을 경과하며 퇴폐적인 서구의 라이프스타일과 가장 거리가 먼 세상으로 변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란. 그 나라의 경제자유구역 도시인 아르그에자디드는 자본의 유연함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보수주의자들의 악몽에 가까운 예측과 달리 자본의 논리는 전통과 관습을 비롯한 모든 것을 형해화시키기는커녕 그것과 화해하며 나아가 그 안에서 더욱 번식하고 성장한다. 본야드라는 이슬람 재단은 이슬람 전통 경제 기관이 되어 이제는 신자유주의적인 개발의 첨병이 되어버린다. 아르그에자디드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이 갖은 악담을 퍼부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적 가치의 변방이라고 규탄하는 곳에서 자본은 자유를 만끽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얻은 부를 행사하는 신심 깊은 이슬람 부르주아지들은 쾌적한 환경과 결합된 자신들의 도시에서 행복을 만끽한다.

전쟁 이후의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펼쳐지는 정경 역시 이란과 대동소이하다. 탈레반을 몰아내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후원을 통해 자생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키겠다는 끝없는 농담을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지만, 그 저열한 구상이 어떻게 카불이란 도시를 기상천외한 도시로 만들어내는지 알아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복원이란 이름하에 진행된 새로운 개발 계획이 군벌, 정치인, 개발업자들을 배불리기 위해 어떻게 토지 강탈을 묵인하고 나아가 이를 외래 침략자들을 물리친 데 대한 대가로 자축하는 일로 되었는지 그리고 글쓴이가 '군벌 키치'라고 명명한 기괴한 건축 미학을 성행시키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예외적인 부패와 무법의 세계라는 억측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이는 중국의 베이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들을 총동원하여 연일 기념비적 건축물을 신축하는 중국 도시들의 빌딩 숲 속에서 사회 양극화를 거론하는 것은 이젠 숫제 민망한 일이 되어버렸다. 올림픽 개최를 전후하여 후진타오가 내건 사회적 통합의 슬로건인 '조화 사회'는 박탈당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의 울분과 원한을 잠재우는데 그들이 얼마나 발버둥치고 있는지 웅변해줄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 역시 정실 자본주의의 새로운 혈맥을 잇는 중국 경제의 예외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시시덕대는 서구 언론의 말장난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부유층들이 몰려드는 베이징 외곽의 폐쇄형 주택 단지나 그들이 이용하는 그로테스크한 쇼핑몰 등은 자본의 새로운 운동의 궤적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한 이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둘러싼 환멸의 드라마 역시 요하네스버그란 도시의 비극을 통해 다시금 이해되어야 할지 모른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좌파 정치 세력의 쇠락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에서의 변화는 많은 이들에게 세계는 여전히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꿈을 붓는 샘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점진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채 '선제 공격식 신자유주의'로 나아갔고, 백인 부르주아 계층과 타협을 통해 보다 자본의 운동에 유리한 세계로 개조하는 남아공식 구조 조정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들의 지지 기반이자 운동의 터전이었던 타운십과 거기에 거주하는 대다수 흑인 빈민들을 아파르트헤이트시대보다 못한 빈궁 속으로 내동댕이쳐버렸다. 그리고 요하네스버그를 둘러싼 우리의 응시가 배경을 달리하면 누에바 마나과란 도시로 다시 콜롬비아의 메데인으로 다시 홍콩의 팜스프링스로 이어진다. 이 동종 복제의 공간적 질서를 그저 공간 문화의 지역성 탓으로 돌리는 우리 시대의 흔해 빠진 문화이론은 이제 농담처럼 들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새로운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공간의 착취와 개발이 도시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넓고 비옥한 경작 농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녹색 혁명을 경유하였으면서도 농산물 수입국으로 전락해 버렸으며 무토지 농민들의 토지 획득을 위한 운동이 가장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어버린 나라인 브라질에서, 도시는 농토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CNN 창립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인 생태운동가로 알려진 테드 터너가 소유한 제주도 네 배 넓이라는 개인 목장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 엄청난 미국 갑부의 기괴한 개인 소유지가 어떻게 생태적인 비전과 새로운 소비 문화와의 제휴를 통해 짭짤한 비즈니스의 원천이 되는지를 배우는 순간, 우리는 다시 저 유명한 미국의 기념비적 쇼핑몰로 들어가게 되고 창궐하는 새로운 개인 미술관들의 세계 속으로 운반된다.

그러나 이 쯤 해두도록 하자. 이 책이 소개하는 우리 시대의 공간을 주유하는 만화경은 서로 다른 수사와 힘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빼어난 필자들의 글과 해후하면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반감시키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 어떤 아름다운 솜씨도 지옥을 관람하는 불쾌를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한 불쾌를 자아내는 책을 근자에 우리가 읽은 적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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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은 세금을 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돈도 별로 못 버는 나한테서 왜?!"

급여 명세서에서 소득세 내역을 확인했을 때나 간접세인 부가가치세가 자동으로 징수된 영수증을 보면서 가끔 우리 속이 끓을 때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제목부터가 이러한 고민과 한탄을 갖고 사는 우리 보통사람을, 또 우리 월급쟁이를 정말 기쁘게 해준다. '세금을 없애고 지대를 걷자'라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 말인가!

신고전파 경제학과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맹점들

영국 왕립경제학회 종신회원인 로널드 버지스가 쓰고 '토지+자유 연구소'의 연구위원인 경북대학교 교수 김윤상이 옮긴 <세금을 없애고 지대를 걷자>(시대의창 펴냄)는 이른바 '경제학'으로 불리는 기존의 주류 경제학 이론을 공급 측면 학파와 수요 측면 학파로 양분해 설명하고 있다.

전자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 또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어 이 학파는 경제 불황을 논의할 때 주로 기업의 잠재 생산 능력이 저하된 것에서 그 원인을 찾으며,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적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여 시장의 경쟁성을 높임으로써 기업 경영의 효율화 및 경영 환경 변화에 대한 신속한 대응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전자의 학파는 이뿐만 아니라 고용 및 임금의 유연화 역시 기업과 경제의 활기를 높여주는 좋은 방안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후자의 수요 측면 학파는 일반적으로 '케인스주의 경제학'을 지칭한다. 수요 측면을 중시하는 이 학파는 경제 불황의 원인 및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에 관해서 전자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경제가 어려워진 것의 원인을 주로 설비 투자 및 소비 수요의 침체에서 찾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후자는 불황기에 고용과 임금을 삭감하게 되면, 디플레 스파이럴(Deflation spiral)로 불리는 경제적 악순환이 초래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한다.


▲ <세금을 없애고 지대를 걷자>(로널드 버지스 지음, 김윤상 옮김, 시대의창 펴냄). ⓒ시대의창
이와 같이 공급 측면을 강조하는 경제학과 수요 측면을 강조하는 이 두 학파는 그동안 경제학의 주류 자리를 서로 번갈아가며 독점해왔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945년 이후 경제학의 주류 자리를 차지하게 된 수요 측면을 중시하는 학파는 정부의 몸집을 엄청 크게 만들었는데, 비대해진 정부는 시장의 빠른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기가 점점 어려워졌고, 1970년대 초반에는 경제 성장도 침체될 뿐만 아니라 이에 물가까지 급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맞으면서 그 주도권을 공급 측면을 중시하는 학파에 넘겨주게 되었다.

그렇다고 공급 측면을 중시하는 학파가 그 이후 경제를 잘 관리해왔느냐 하면 그것 또한 아니다. 2008년에 발발한 세계적 규모의 미국발 금융 위기가 금융 산업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 완화의 귀결임은 지금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고 있으며, 이 학파는 이미 1929년의 그 전설적인 대공황의 큰 실패를 맛본 경험마저 가지고 있다.

사실 이와 같은 두 학파의 실패는 원유 등의 원자재 값 상승이니 큰 정부 탓이니 규제 완화로 인한 금융 시스템의 방만함 탓이니 지나친 시장의 자율성 때문이니 등등, 상당히 다양한 원인에 의해 설명될 수 있지만, 그 실패의 결과는 이 책에서 설명하는 두 가지로 귀결된다.

실업과 인플레이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

경제학과 이에 기반을 둔 경제 정책이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그 두 가지 결과, 즉 현대 선진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첫째가 고실업이며 둘째가 인플레이션인데, 이 책의 저자는 이 두 가지 중대한 경제적 문제의 원인을 바로 '잘못된 조세 제도'로 지목하고 있다.

즉 고실업과 인플레이션을 해결해내기 위해서는 위의 두 학파가 내세우는 경제 정책적 처방이 아닌 '잘못된 조세 제도'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저자는 세금이 왜 필요한지, 또 어떤 기준으로 세금을 걷는지를 해명하는 학문인 '조세론'마저 더 근본적으로는 조세 그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러니 경제 문제의 원인을 조세 제도에서 찾고자 하는 경향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활동하기 위해서 조세가 필요악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또 이를 전제로 현대 경제학이 구축되었으며 현대 국가 역시 작동해온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돈이 없는 정부가 어떻게 우리의 생활 안전과 사회 서비스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저자는 위의 두 학파로 대표되는 지금까지의 경제학이 '조세만이 정부의 수입'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정부는 조세가 아닌 과연 어떤 수입을 기반으로 하여 공공사업을 해야 하며 또 국민의 생활 안전과 사회 서비스를 책임져야 하는가?

이 책의 저자는 이와 같은 파격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중농주의 학파와 헨리 조지의 경제 사상에서 찾고 있다. 중농주의 학파는 생산을 중요시하였으며, 이들은 그 생산은 토지에서 창출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일반적인 순환 개념에 의거하여 지주에게 세금을 물릴 수 있는 토지세를 선호하였다.

또 헨리 조지는 중농주의 학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반적인 상품과는 다른 토지의 자연적 존재에 관심을 기울였고, 지대와 지가의 상승분이 고스란히 노동에 대한 대가 저하로 이어지는 점에 주목하여 토지세만을 유일한 세금으로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경제학적 논리들과 신자유주의의 시초인 마셜의 이론에 따르면, 토지에 대한 조세는 일반적인 조세 제도와는 구분된다. 이 책에서는 이와 같은 토지세를 '토지 가격에 대한 공공적 수입을 확보할 수 있는 열쇠'로 규정하고 있는데, 토지 가격을 만드는 요소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보고 있다.

토지에만 세금을 물린다면?

예를 들어 땅 위에 아파트를 짓고 분양한다면 토지 그 자체는 공적인 가치이며 반면에 아파트는 사적 가치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 둘을 합친 것이 바로 토지의 가격이다.

시장 경제 체제에서는 사적 가치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 아파트는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있지만, 그 아파트가 세워진 그 토지는 공공의 소유물이므로 당연히 이에 대한 정부 수입을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적인 논리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따르게 되면, 정부는 한정된 토지에 근거한 수입밖에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동안 자행되어 왔던 정부의 방만한 운영은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토지에 대한 세금밖에 정부 수입의 원천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지금 강권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같은 전시성 사업은 애초 구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동안 물가 안정과 경제 성장 중에서 항상 하나만을 선택해야만 했던 정부와 경제학자들의 고민 역시 줄어들게 된다. 각종 조세를 제거함으로서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할 수 있음과 동시에, 토지의 공공 가치에 대한 정부의 세금 부과로 인해 순환 경제 시스템이 구축되고 또 이에 따라 인플레이션 또한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이 토지에 대해서만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경제 성장과 물가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낼 수 있게 되며, 또 이로 인해 사회는 더욱 좋아질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풀고 있다.

세금에 대한 시민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짜증나지만 어쩔 수 없이 내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정당한 소득을 국가가 가져가는 것에 대해 기분은 나쁘지만 필요한 것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뭐 이렇게 세금이 많나' 싶을 정도다. 근로소득세, 소득세, 부가가치세, 자동차세, 주민세 등등…. 이렇게 일상적으로 내는 세금의 종류도 많지만 이를 법인과 기업까지 확대하면 어마어마한 액수에 달한다.

이 책도 지적하고, 또 일반적인 조세론도 언급하고 있으며, 심지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또 관리하는 경제를 옹호하는 케인스주의 경제학파조차 긍정하는 것이 바로 '조세가 미치는 경제 효율 저하'다. 그렇다면 위에서 본 것처럼 이렇게 많은 세금 종류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원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특히 어렵게 낸 세금으로 보건복지 활성화, 환경오염의 저하, 불평등 해소 등과 같은 공공적 정책 노력이 아닌 맹목적인 경제 성장이나 효율 추구, 이벤트성 사업에 마구 써대는 것을 보면 정말 가슴이 찢어질 정도다. 애당초 세금을 걷어가질 말던가.

봉이 김선달인들 토지를 은닉할 수 있으랴?

이 책은 정부가 세금을 걷는 것과 또 이를 지출하는 것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적인 생각을 일깨워 주며, 대안적 조세 방안으로 조세 일원화를 통해 토지에 대해서만 그 조세(사실 토지 가격에 대해 정부가 부과하는 세금이지만, 토지세로 해석하는 것이 알아듣기 쉽다)를 부과하는 것이 좋은 방법 중 하나임을 매우 체계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특히 토지의 사적 소유가 당연한 것으로 적용되고 또 인식되는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자연스럽게 토지의 공공적 가치조차 사유화되고 있는, 이런 '잘못된 문제'에 대한 우리의 논리적이고도 정책론적인 문제의식을 세워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기존의 경제학과 경제 정책이 간과하고 있는 '틈새'를 제대로 공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토지라는 자연물은 그 상태 그대로 존재해왔고, 또 그 위에서 건물을 짓거나 땅을 파거나 농사를 짓거나 하는 것이지 이를 가공하여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물건처럼 변환시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토지 위에 인간의 노동과 자본을 투입하여 생겨난 건물은 사적으로 소유될 수 있는 것이지만, 토지는 태고 적부터 조상들에 의해 물려내려 온 것이기 때문에 이를 누군가의 사적 소유물로 보기에는 꽤 강한 위화감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한 과세는 아주 명쾌하다. 소득세나 법인세 등은 정확하게 거두어 낼 수 없다는 문제점이 존재하지만, 토지는 봉이 김선달처럼 숨기거나 은닉할 수도 없다. 이러한 점 역시 토지를 세금 부과 대상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이 책의 핵심적 논의를 제대로 뒤받쳐주는 것이지 않고 무엇이겠는가.

헨리 조지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설명

이 책에서도 설명하고 있지만, 오로지 지대에만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것에 관한 유사한 논리와 설명을 담고 있는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은 '지대=가장 효율적이면서 유일해야 하는 세금'이라는 공식을 제시한 명 고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 역사적 논리와 철학적 이치로 이 공식을 설명했다면, 이 책은 조지의 작업을 넘어 기존의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설명하고 또 기존의 조세 제도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그 작업을 발전시키면서 이 공식을 매우 현실적으로 설파해내고 있다. 사전 작업과 관련한 설명이 다소 긴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논리 흐름에 따른 전개는 결과에 잘 나타나 있다.

물론 오로지 토지에 대한 세금 부과가 자본주의 경제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와 모순점을 해결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자본주의적 문제에 대한 유효성 있는 '각론적인' 해결 방법이 매우 명확히 제시되어 있으며, 그것이 역사와 경제 논리에 매우 정합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신자유주의적 정책 처방을 차치하더라도, 자본주의적 모순 극복을 위해 제기되는 여러 실천적 방법들이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또 '특정 이론'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다소 이론 환원주의적인 점을 부정할 수 없다면, 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토지세'의 실천은 매우 현실적이고 또 이론 환원적이지도 않다.

이 땅의 부동산 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무현 정부 때 적용된 '종합부동산세'는 '토지세'의 정신이 깃든 그 초보적 제도다. 조상이 물려준 공공적 소유물인 토지가 낳은 가치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사람들의 순수한 '이성'에 정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과 자본이 투입되지 않는 공공적 토지가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거나 사유되는 것을 도덕 법칙과 경제적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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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런 내용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1980년대 초에 휴대전화가 나오는 소설을 썼다면 분명 SF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연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가? 21세기가 되고서도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삶의 풍경은 20세기와 큰 차이는 없다. 신혼여행을 우주 정거장으로 가지도 못하고, 저마다 하늘을 나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런데 돈이 많은 극소수의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20세기 로스앤젤레스의 모습에다 사람들 손에 휴대전화만 들려놓으면 21세기다, 라는 말도 들어본 것 같다. 그런데 단순히 휴대전화가 있고 없고의 차원은 물론 아니다. 휴대전화, 혹은 컴퓨터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등장함으로써 우리네 삶과 사회의 작동 메커니즘에 근본적인 변화가 왔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1980년대라면 약속이 엇갈린 연인이 서로 평생 오해를 품고 헤어져 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휴대전화로 즉각적인 안부 확인이 가능하다. 또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하는 쇼셜 네트워크 서비스 덕택에 사회 구성원 사이의 소통 양상도 근본적으로 변했다. 지금 이집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런 기술은 체제의 혁명적인 급변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요컨대 21세기적 미래상이 실제로 구현되는 것은 우리가 20세기에 그려왔던 것처럼 우주여행이니 자가용 비행기니 하는 거시 기계 장치 분야가 아니라 마이크로한 안쪽 우주(inner space)로의 방향인 셈이다. 근미래의 신기술로 주목받는 유전공학, 나노기술 등도 다 이런 쪽이다. 물론 우주여행이나 공중 부양 자동차도 멀지 않은 미래에 대중화가 될 가능성은 없지 않겠지만….

사실 과학소설(SF) 팬이라면 미래상에 대한 이러한 괴리는 익숙하다. 1980년대 중반에 윌리엄 깁슨이 장편 <뉴로맨서>를 발표하고 나서 컴퓨터 네트워크와 가상 현실이 순식간에 21세기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그를 두고 브루스 스털링은 '진부한 미래는 이젠 안녕!'이라고 고한 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면 진부하지 않은 새로운 미래의 모습이 점점 우리의 현실로 되어 가는 상황에서 정작 우리 자신들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가? 아니, 본질적인 변화가 정말로 진행되고는 있는가?


▲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듀나 외 지음, 사이언티카 펴냄). ⓒ사이언티카
SF는 20세기에 그랬듯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위와 같은 의문에 대한 다양한 해답을 시도하는 장르이다. 그리고 21세기의 한국이라는 인문 지리적 토양에서도 그 다양한 시나리오의 스펙트럼은 꾸준히 생산된다. 사설이 길었는데, SF 단편 소설을 묶은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사이언티카 펴냄)를 읽는 나의 입장은 대략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듀나, 김창규, 박성환 이 세 작가는 길게는 십 수 년 이상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던, 한국 창작 SF 계의 소중한 자산이다. 자연히 그들의 이전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을 읽었다.

듀나의 '수련의 아이들'은 아이디어나 문체나 정서가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 큰 차이가 없다. 이번에도 아이디어는 돋보이고, 듀나식 하드보일드의 아우라도 여전하다. 꼼꼼한 디테일 역시 변함없는 웰메이드라는 느낌을 준다. 아쉬운 점은 마무리가 좀 급해 보인다는 것인데, 아마 작가는 분명 '수련의 아이들'에 대해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향한 '그곳'과 그들의 의지, 또 그들의 우주관에 대해 언젠가는 새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김창규는 액션 스릴러에 대한 창작욕을 늘 품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SF적인 제재와 결합되는 작품들이며, 그중에는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문명'이라는 테마와 잘 어울릴 법한 탐구가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 책에 수록된 '백중'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읽힐 수 있는 소품이다. 인공지능과 귀신, 신선한 병치이다.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인공지능은 오시이 마모루의 '고스트'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다. 그것의 전 단계라고나 할까?

김창규 작품의 주인공들은 대개 아픈 기억을 품은 채 회색빛 일상을 살며 외부의 신선함에 대해서는 나태하거나 적대적인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결말에 가면 대개는 어떤 식으로든 수용 내지는 화해를 한다. 작가 본인의 철학이 반영된 것인지 때때로 궁금할 때가 있다.

박성환의 '관광지에서'는 작가의 예전작인 '레디메이드 보살'처럼 불교와 관련된 테마를 다루어 흥미로웠다. 물론 주제의 핵심은 불교 그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지만, 이른바 'SF의 토착화'라는 수용 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주목할 만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진지한 읽기를 요구하는 결말 부분의 묵직함도 좋았다.

또 이 책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화려한 비주얼 묘사를 기본으로 깔고 있어서 오히려 시각적으로는 막연한 느낌이었는데, '관광지에서'를 읽으면서는 생생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경험을 했다. '고요히 잠든 노인'의 침묵이 이후 수천 년의 '야단법석'을 압도한다는 화두를 곱씹어 볼 만 하다.

김현중의 '물구나무서기'와 정보라의 '사랑 그 어리석은'은 아이디어와 플롯의 수평적 결합이라는 차원을 극복하려는 접근이 돋보였다. 비록 완성도나 짜임새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런 시도가 쌓이면 곧 이 작가들은 더 주목할 만한 이야기들을 내놓으리라 기대한다.

김린의 '우주와 그녀와 나'는 아름다운 '판타지'로서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다. 작가의 스토리텔링 솜씨가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여운이 꽤 남는다. 백상준의 '시공간-항'과 조나단의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 나병우의 '달에게는 의지가 없다'는 나름대로 깔끔한 소품들이다. 전통적인 SF의 틀에 충실한 이런 작품들이 양적으로 풍부해질수록 창작 SF의 저변은 튼튼해질 것이다. 설인효의 '전화 살인'은 그 나름의 독자적인 계보를 지니고 있는 '미스터리와 SF의 결합'이다. 결말이 좀 나이브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느낌이다.

나는 SF가 아이디어의 유희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SF의 대표적인 미덕으로 꼽는 '경이감(sense of wonder)'은 엄밀히 말하자면 시적 감동인데, 과학기술의 미래가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세계상, 그리고 SF적 상상력이 형상화 할 수 있는 다른 세계, 다른 생각은 그런 시적 감동의 차원에서 이야기와 융합되어 구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SF가 시대가 변해도 계속 문학으로서, 예술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이 책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에서는 수록작의 일부나마 그런 가능성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한국에서 SF를 창작하는 작가들은 늘 그랬듯 열악한 상황에 있다. 그래서 더더욱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가 펴내는 웹진 <크로스로드>의 존재가 소중하다. 작품을 선별하여 꾸준히 온라인으로 발표하고, 또 해마다 이렇게 작품집까지 내는 과정을 여러 해째 이어오기가 순탄치만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부디 앞으로도 오래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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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간과 6시간 사이의 큰 차이

'일자리 창출'은 매력적인 구호다. 실업 문제 따위야 일자리만 창출되면 자동으로 해결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자리 창출'이 절대적 목표라는 상식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한 대안은 없는 것 같다.

다른 생각은 '일자리 창출'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관습적 사유의 마법에서 깨어나야 떠오른다. '일자리 창출' 속에 숨어 있는 무한 성장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노동 시간을 줄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공유하는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라는 해법과 마주친다.

일을 하는 사람은 시간이 없다. 매일 8시간 노동을 하는 사람은 집에 돌아오면 쌓인 피로를 푼다고 잠을 자거나 누워 텔레비전 리모컨을 쥐고 졸고 있기 마련이다. 반면 실업자는 시간이 남아돌아서 탈이다. 고용 여부에 따라 사람들에게는 시간 자원이 매우 불평등한 방식으로 배분된다.

실업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한, 노동 시간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거나 가족을 살피는 일을 할 수 없는 노동자들은 시간이 부족하다고 투덜대지 않는다. 시간이 없음을 오히려 자신이 실업자가 아니라는 표식이라 여기기에 시간이 부족할 때 오히려 안도감을, 시간 여유가 생기면 역설적으로 불안감을 느낀다. 반면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의 상태에 처한 사람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들의 소원은 시간 부족이다.

한정된 일자리를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무한의 경쟁을 벌이는 시장적 방식이 지속되는 한, 그 시스템 속의 모든 개인들은 행복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행복에서 멀어진 원인은 다르다. 일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시간이 부족하기에 자율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져서 행복과 거리를 둔 삶을 살고,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간은 많아도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돈이 부족하기에 행복에서 멀어진다. 원인은 다르지만 모두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위험을 공유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에게 보장하는 길이다. '일자리 나누기'는 일자리를 둘러싼 무한 경쟁의 악마성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 <8시간 vs 6시간>(벤저민 클라인 허니컷 지음, 김승진 옮김, 이매진 펴냄). ⓒ이매진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의 <8시간 VS 6시간>(김승진 옮김, 이매진 펴냄)은 미국 미시건 주 배틀 크리크에 있는 켈로그 공장에서 펼쳐진 '일자리 나누기' 실험에 대한 꼼꼼한 기록이다. 허니컷은 '일자리 나누기'를 이론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일자리 나누기'가 채택되었던 켈로그 공장의 사례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허니컷은 1930년에서 1985년 사이에 켈로그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광범위한 자료들을 분석해서, '일자리 나누기'로 인한 삶의 변화를 포착해낸다. 이 책에서 '6시간'은 '일자리 나누기'로 인한 노동자들의 변화와 경제 성장의 물신주의에서 벗어난 태도를 상징한다. 반면 '8시간'은 성장 만능주의와 일을 삶의 중심이라고 간주하는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를 상징한다.

이 책에서 '6시간'이 도입되었던 1930년대의 배틀 크리크는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재현된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수사학과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벌어진 성장 제일주의의 대반격과 방어에 실패한 '6시간'의 패배를 이 책은 기록한다.

배틀 크리크의 노동자들은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노동 시간 단축이 낳은 놀라운 변화와 '8시간'의 반격에 대해 증언하고, 허니컷은 그 증언을 글로 옮겨 놓는다. 다큐멘터리 감독 허니컷은 중립적인 태도를 지키지 않는다. 여가학자인 허니컷은 노동자들이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가 주입하는 강박에서 벗어났을 때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에, 당연히 그는 '6시간'의 편이다.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

배틀 크리크의 '6시간'은 1930년 12월 1일 켈로그 공장의 사장 루이스 브라운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브라운은 하루 8시간 3교대제로 운영되던 공장을 하루 6시간 4교대제로 바꿔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고용된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8시간에서 6시간으로 두 시간 줄여 4교대제를 실시하면 공장에서 수용할 수 있는 노동자의 수가 늘어난다는 계산을 염두에 둔 것이다.

브라운은 시장이 불안정할 때 노동 시간 단축이 유일한 치료제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흡혈귀가 아니었던 브라운의 제안을 돈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받아들이면서 허니컷이 '해방적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배틀 크리크의 '6시간'은 탄생했다.

'8시간'과 '6시간'은 겨우 두 시간의 차이지만, 그 차이는 노동자들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6시간 노동제는 노동자들이 갖고 있던 전통적인 일에 대한 태도, 즉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의 수정을 초래했다. 6시간 노동제는 노동과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자라는 인큐베이터였다.

6시간 노동제가 실시되면서 노동자들은 "삶에서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19쪽)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추가적으로 얻는 하루의 2시간은 "일과 여가 사이의 무게중심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8시간 동안 일을 했기에 여가 시간이 없었을 때, 노동자들은 살면서 필요한 것들을 모두 구매해야 했고 그래서 돈이 더 필요했지만, '6시간'은 시장적 관계가 아닌 공동체적 관계를 회복시켰다. 공동체적 관계는 줄어든 임금을 보완해줬다. 임금이 조금 줄어들었다고 노동자들의 삶은 궁핍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2시간은 노동자들의 삶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들어주었다. '6시간'과 만나기 이전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처럼 켈로그 공장의 노동자들에게도 일은 세계의 전부였다. 이들에게 일은 인생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였고, 여가는 그저 남는 쓸모없는 시간이었다. 인생을 일을 중심으로 생각했기에 전형적인 노동자들에게 '근면성'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만능 언어"(279쪽)였다.

8시간을 일하는 노동자들은 언제나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기에 그들은 친구를 돌볼 시간도,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할 여유도,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틈도 없었다. 6시간 노동제는 노동자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보다 많은 시간을 얻게 되자, 노동자들은 긴 노동 시간 때문에 상실했던 노동자 문화를 회복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연대는 공장에서뿐만 아니라 공장 외부의 삶 속에서도 뿌리를 내렸다.

두 시간을 적게 일하면서 임금은 예전보다 줄어들었지만, 노동자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을 얻었다. '6시간'은 새로운 태도를 배우는 학교였다. 6시간제는 "절대 노동의 세계와 모든 것을 쓸모 있는 목적으로 바꾸려는 효용 우선주의를 넘어서 창조적인 활동을 위한 독립된 영역을 추구"(26쪽)하는 움직임을 유발했다.

두 시간을 추가로 얻게 되면서 노동자들은 "집안일, 직장일, 사회적 의무, 돈 걱정의 범주를 벗어나서 얻을 수 있는 휴식"을 회복했다. '6시간'만 일하게 되면서 노동자들은 '8시간'제 하에서는 포기했던 인간의 욕구들을 다시 실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산책하고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고 무언가를 배우고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고 글을 쓰고 감상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즐기고 좋은 이웃이 되고 돌보고 이야기하고 새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일을 삶의 중심에 놓았기에 한 개인이 포기해야 했던 그 모든 것을 하루 2시간의 추가적인 자유 시간은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을 더 많이 하더라도 소비할 돈이 늘어나기만 한다면…

노동의 인간화보다 더 많은 이윤이 목적인 경영자들에게 탈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의 학교인 '6시간'이 반가울 리 없었다. 배틀 크리크에는 '해방적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경영자가 있었지만, 켈로그 외부의 경영자들은 배틀 크리크 모델보다는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의 지속을 원했다.

켈로그 외부의 경영자들의 지원군은 대통령 루스벨트였다. 대공황이 닥쳤을 때 루스벨트는 적자 재정 편성을 통해 경기를 진작시키고 필요하다면 공공 고용을 일으켜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일자리를 나눠 실업 위험을 분산시키고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는 보편성을 지지하는 배틀 크리크의 모델과 달리, 루스벨트는 고용된 사람만 행복할 수 있는 선택적 모델이었다. 배틀 크리크가 노동자들의 연대를 먹고 자란다면, 루스벨트 모델은 보다 많은 향한 노동자들의 욕심을 자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루스벨트의 모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전쟁 기간 동안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배틀 크리크의 켈로그 공장 역시 1943년 2월 28일 8시간 3교대제로 되돌아가야 했다. 물론 '8시간'으로의 복귀는 전시 기간 동안만 실시되는 예외적인 조치였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종결되면 '6시간'은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실시되었던 '8시간'은 배틀 크리크에서 퇴장하지 않았다. 임시로 배틀 크리크에 등장한 '8시간'은 오히려 1930년대생 '6시간'을 퇴장시키려 했다.

전쟁 기간 동안 '8시간'제가 실시되면서 '6시간'보다 임금의 총량이 늘어나자, 더 많은 임금의 달콤한 맛을 잊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율적인 삶을 구성할 수 있는 보다 많은 시간보다, 더 많은 임금을 손에 쥐고 그 돈으로 '소비주의'가 제공하는 행복을 '구매'하기를 원했다.

더 많은 돈에 관심이 있는 노동자들은 '6시간'으로의 복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노동조합마저 1950년대 이후 '풀타임'(8시간 노동)만을 유일한 선택으로 간주하고, 풀타임이라는 전제 하에 최대한의 임금 인상이라는 노선을 채택했다. 이로써 전쟁 이전 1930년대의 배틀 크리크의 실험 속에 담긴 이상으로부터 노동조합은 더욱 멀어졌다.

'소비주의'를 위한 더 많은 돈을 원했던 사람들은 '8시간'을 정당화할 수 있는 담론들을 만들어냈다. 8시간 노동제를 옹호하는 노동자들은 주로 남성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8시간 노동제를 옹호하기 위해 6시간 노동제가 갖고 있는 탈노동 중심주의적 전복 가능성엔 눈을 감고, 6시간 노동제는 가장이 아닌 여성들에게나 적합한 고용 형태라는 주장을 만들어냈다.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는 가부장제와 결합하여 '6시간'을 압박했다. 일을 삶의 중심에 놓는 노동자들은 탈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윤리를 지향하는 '6시간' 진영을 주변화하고, 여성화하고, 게토화했다.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이 노동 중심과 탈노동 중심의 세계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8시간'은 일을 중심에 놓는 자신을 정상적 규범이라 간주했고, '6시간'은 계집애들, 게으른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이나 선호하는 비정상적 규범이라 폄하했다.

'일돼지'가 승리한 1985년 이후

일자리의 수사학이 배틀 크리크를 뒤엎고 노동자들은 자율적인 삶보다는 보다 많은 임금을 선택하는 인간형으로 바뀌었지만, '6시간'을 옹호하는 노동자들은 배틀 크리크 내에서 일종의 '하위 문화'를 구성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8시간'이 주류 문화가 되었지만, '6시간'의 노동자들은 '8시간'을 선택한 노동자들을 경멸하는 고유한 수사학을 만들어냈다. '6시간'의 편에서 보자면 '8시간'의 노동자들은 '일돼지'였다.

켈로그 공장이 '일돼지'로 가득 찬 1980년대 6시간 노동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1985년 2월 8일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의 실험장이었던 배틀 크리크 켈로그의 '6시간'은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사라졌다. 단지 지역 신문만이 켈로그에서의 '6시간'의 사망을 보도했을 뿐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던 '6시간'의 화려한 순간과 사망을 이 책의 저자 허니컷은 배틀 크리크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문건의 꼼꼼한 독해를 통해 망각의 늪에서 구원해냈다. 역사학자 톰슨의 <영국 노동자 계급의 형성>이나 버밍햄 학파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 재생산>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이 책에서는 노동 시간 단축이 노동자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꼼꼼히 노동자들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다. 허니컷의 책은 다큐멘 터리 필름과도 같다. 허니컷의 책을 읽고 있으면, '6시간'을 회상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생생한 육성처럼 들려온다.

배틀 크리크의 '6시간'과 '8시간' 사이의 대립을 다루는 허니컷의 연구 방법은 독창적이다. 일자리 나누기라는 정책을 경제학적 분석의 틀에서 언급하는 기존의 연구와 달리 허니컷은 이 책에서 여가학자로서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여 노동 시간 단축으로 인한 효과를 공장 외부에서의 여가 시간의 변화와 결합하고 있다.

게다가 허니컷은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에스노그래피(ethnography·민족지) 전통을 물려받아 '6시간'을 꼼꼼하게 기술하고 있다. '꼼꼼한 기술'은 일자리 나누기가 얼마든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일자리 창출이 보장하지 못하는 행복을 노동자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음을 확신하게 만들어준다.

노동자들의 삶에서 발생한 일상의 변화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이 책의 장점이지만, 때로 허니컷의 섬세한 시선은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허니컷의 책에서 '6시간'이 지배했던 1930년대는 다소 낭만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일돼지'들이 승리하기 이전인 1930년대를 회고하는 노동자는 '좋았던 옛날'이라는 회고적인 시선에 사로잡혀 있는데, 허니컷은 이 시선과 거리를 유지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이 책은 영국 노동자 계급의 문화를 연구했던 리처드 호가트의 <교양의 효용(The Uses of Literacy)>처럼 타락하지 않았던 건강한 노동자 문화가 있었던 옛 시절('6시간')과 일돼지들이 지배하는 타락한 현재('8시간')를 비교하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독자는 낭만적인 회고담을 자구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모든 과거는 회상될 때 미화되기 마련이라는 경계를 놓치지 않으면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또 이 책에서는 8시간제와 6시간제의 배경을 구성하는 자본 축적 구조의 상이함보다는 일과 여가에 대한 노동자들의 생활 철학의 차이가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내리는 해석에 대한 주목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책 속에 수록하는 민중주의적 방법론은 이 책의 분명한 장점이지만, 이 장점이 임계치를 넘어설 경우 8시간 노동제와 6시간 노동제가 노동자들의 삶의 태도의 차이로 환원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

'6시간'의 패배는 노동자들의 태도 변화뿐만 아니라 '6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자본주의 축적 구조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지만, 허니컷은 '6시간' 패배의 배후 원인인 축적 구조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 책의 독자는 영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는 허니컷의 민중주의적 방법의 장점은 취하면서 이 책의 약점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6시간'은 아름다웠던 과거가 아니라, 실현되어야 할 미래이다. 영리한 독자는 '6시간'에서 과거를 아쉬워하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실현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갈망을 물려받아, 책을 덮으며 '그래 바보들아. 문제는 '노동 시간'이야!'라고 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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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애커로프와 레이첼 크렌턴의 <아이덴티티 경제학>(안기순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은 '사람들의 정체성이 경제 행위를 좌우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사회학자나 문화이론을 접한 이들의 처지에서는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주류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깜짝 놀랄 일이 될 수도 있다. 주류 경제학의 기본적인 관점은 사람들의 경제 행위는 자신에게 돌아 올 이익 여부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들 시각에서 어떻게 정체성이 경제적 행위를 일으키겠는가.

일단 이 책의 주장을 간단하게 담배 구매와 금연으로 풀이해보자. 사람들이 담배를 끊는 이유는 자신의 건강과 그리고 비용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의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상실시킨다. 담배 구매 지출만이 아니라 의학적 지출과도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금연을 결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만으로 금연을 할까. 다른 이유는 없을까. 예전에는 대중문화 속 흡연은 남성다움의 상징이었다. 말보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카우보이 모델을 생각하면 영락없다. 담배를 태우는 여성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찾는 진보된 존재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관점이 크게 줄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은 타인의 건강을 해치며,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들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또 흡연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제한적이다. 적어도 흡연자는 더 이상 우러러볼 멋진 사람은 아니며, 오히려 연민과 때로는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담배 소비 행위를 줄이게 만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소비 행위엔 개인적인 선호만이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작용한다는 점이다.

경제학자들은 이익을 효용 함수(Utility Function)로 표기한다. 사람들은 투자를 하거나 소비를 할 때 이 효용 기능을 최대화하는 선에서 판단·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효용이 없으면 경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효용은 순전히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한정된다.


▲ <아이덴티티 경제학>(조지 애커로프·레이첼 크렌턴 지음, 안기순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랜덤하우스
최근에 주류 경제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크게 주목을 받아온 행동경제학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본능이나 감정, 무의식이 경제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이덴티티 경제학>이 이런 개인 선호의 경제학과 차별화되는 점은 바로 정체성의 기본적인 성격에 있다.

흔히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표현을 생각하면 정체성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적인 차원의 개념은 개인의 취향이나 기호에 한정하는 것이다.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이며 누구인가는 '사회적'으로 규정된다. 또한 정체성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확립된다.

라캉은 어린 아이가 거울 단계에 들어서면 자신이 상상하던 자신의 이미지와 거울을 통해본 자신의 이미지를 비교하면서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현실에서 이 거울은 타인, 다른 구성원들이다. 다른 구성원들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적 모습을 인식하고,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혼자만의 세계, 상상의 세계인 나르시시즘의 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결국 사회적 구성원으로 영위할 수 없다. 이는 경제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며 사회적 행위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이 사회학적 관점에서 정체성과 소비 현상을 분석하는 것과 다른 점은 좀 더 일목요연한 경제학적 분석틀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학에서는 수요 공급을 분석할 때 개인을 구매자와 판매자로 구분한다. 이것이 범주화다. 두 번째는 사회적으로 보급되어 있거나 접근 가능한 기술과 시장구조를 규정한다. 이것을 규범이라고 칭할 수 있다.

세 번째는 특정 행위에 따른 개인의 이익과 손실을 살핀다. 이를 효용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필자들은 정체성을 경제 행위와의 연관성에 적용시킬 때 마찬가지 맥락에서 세 가지를 적용한다. 즉, 정체성과 경제적 행위를 분석할 때도 사회적 범주, 규범, 정체성의 손실과 이익을 분석한다.

예컨대, 노동자를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로 범주화할 수 있다. 인사이더는 회사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웃사이더는 회사에 대한 노력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여긴다. 아웃사이더는 조직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한다. 반대로 인사이더는 때로 자신보다 자신이 속한 조직을 위해 더 일한다.

인사이더는 적은 노력을 들일 때 정체성 효용을 잃는다. 많은 노력을 들일수록 인사이더는 더 많은 정체성 효용을 얻게 된다. 아웃사이더는 자신이 완전히 속해 있다고 여기지 않는 조직에 많은 노력을 투입할수록 정체성 효용을 상실하게 된다. 덜 일할수록 정체성 효용은 아웃사이더에게 증가한다.

요컨대 인사이더라고 생각하거나 규정된 사람들은 많은 급여를 받지 않아도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적은 급여를 받으면 일을 하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작업 집단 구성원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이상적 규범이며, 아웃사이더의 이상적 규범은 노력을 덜 기울이는 것이다.

정체성 효용 상실은 그러한 이상적인 규범에서 벗어날 때 발생한다. 군대의 경우, 나라를 사랑하여 당연히 군 복무를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는 이들은 급여에 관계없이 열심히 근무한다. 즉, 군인은 금전적 보상보다는 정체성에 의존한다. 물론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고 기업과 비교하면 월등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군인의 경우,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구분을 사회적 범주로 만드는 상징적 매개물은 군복이다. 이러한 상징적 매개물은 각 조직에 따라서 다양하게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CI(Corporate Identity·기업 이미지) 같은 것이다.

조직 운영자 입장에서는 인사이더가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작업 집단과 동일시하여 인사이더가 되는 정도는 기업의 경영 정책에 달려있다. 예컨대, 엄격한 감독을 실시하면 누가 열심히 일했는지 알 수 있으므로 인센티브를 적용하는데 유리하다. 하지만 엄격해지면 엄격해질수록, 적은 노력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는 아웃사이더들이 양산된다. 반면 느슨한 감독을 실시하면 인센티브 적용은 세밀하지 못하지만, 적절한 노력을 기울이는 노동자를 양산한다. 따라서 느슨한 감독이 최고의 경영 전략일 때가 많다.

노동 시장에서 여성과 남성이라는 범주도 독특하게 분석될 수 있다. 사회적 범주인 남성과 여성에 따라 특정 임무에 남성이나 여성에게 적합하다는 (규범적) 꼬리표가 붙는다. 남성의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이나, 여성의 직업에 종사하는 남성은 정체성 효용을 잃는다. 여성이 남성의 직업에 있으면 남성은 정체성 효용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성 모델에 따르면 여성들은 기술을 더 적게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적합한 직업을 수행하기 위해 기술을 습득한다. 예컨대 경영대학원보다는 교육대학원에 진학한다. 남녀의 개인적 취향과 능력에 관계없이 특정 직업에 종사해야 이상적이라는 규범이 문제인 것이다.

또 정체성 모델에 따르면 남녀가 자신의 성에 적절하지 않은 일을 수행할 때 정체성 효용을 잃게 되므로 여성은 가정의 수입을 대부분 벌어 와도 남성보다 여전히 많은 가사 일을 하게 된다. 이러한 성 규범을 바꾸려면 사회 전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경쟁적 시장이 아니라 사회운동과 정부의 개입이 이 영역에 필요한 이유가 경제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셈이다.

흑인 노동자와 백인 노동자를 정체성 모델로 분석하면 기존의 주류 경제학에서 설명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해소된다. 사회적 범주 차원에서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를 각각 백인과 흑인 노동자로 구분할 수 있다. 아직도 백인들은 흑인들을 '우리'가 아니라 '그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 노동자에게는 인사이더가 되거나 일하는 아웃사이더, 일하지 않는 아웃사이더가 되는 규범이 있다. 인사이더가 되려고 애쓰는 흑인은 백인의 인정을 받지 못해 괴로움을 겪고, 자존심을 상실한다. 일하지 않는 아웃사이더 흑인 노동자는 자존심은 지킨다. 일하는 아웃사이더는 정체성 효용을 잃는다. 이유는 아웃사이더의 이상적 규범은 백인을 위하거나 협력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동료들의 승인 여부가 중요하다. 정체성 모델로 볼 때 주류 경제학에서 머뭇거리는 흑인의 중도 학업 포기가 잘 설명 된다. 정체성 모델에 따르면 학업 중단 이유는 성공하지 못한 채 백인의 세계에서 학업을 계속하는 것은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즉 아웃사이더가 될 바에야 차라리 학업을 통해 성공하는 일보다 다른 일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소수 인종 우대 프로그램들이 소수 인종에 해당하는 이들을 피해자로 만들고, 아웃사이더의 정체성을 부추겨 도중 이탈하도록 만든다. 효과 있는 시행안도 있었다. 정체성 모델에 따르면 기숙 프로그램은 아웃사이더를 인사이더로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조지 애커로프와 레이첼 크렌턴이 이 책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경제적 행위에 관련된 정체성의 중요성만이 아니다. 그들은 교육적인 측면에서 백인과 흑인 학생의 학습 효과 차이도 이 정체성 모델로 설명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흑인에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주지시켜도 백인과 흑인으로 사회 범주화하고 그에 따른 규범이 정해지면 그들 각자의 효용은 달라진다. 따라서 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범주화를 '쇼핑몰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특정한 범주를 정하지 말고 그에 따른 규범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화해서 쇼핑몰처럼 스스로 고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학교와 학교 조직을 자신과 동일시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정체성과 그에 따른 사명감이 높은 학교에서 학생들은 인사이더가 되고 높은 성취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 모델의 적용은 기업의 인사, 조직 운영, 노동 시장과 남녀 성별 분업 등에서 설득력 있는 분석을 가능하게 하고 대안을 합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분석은 사회 정책적으로도 여러 가지 면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경제학적인 분석이지만 정체성 모델의 적용이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거나 놓치고 있는 공공 정책에도 여러 가지 함의를 주므로 주목해야할 이유가 되겠다.

저자들은 이를 위해서 필요한 작업들, 예컨대 규범과 정체성의 원천에 대한 탐구, 규범과 정체성의 변화 양상, 정체성과 경제 정책 사이의 피드백, 국가별 정체성과 규범의 차이 등에 대해서는 후속 과제로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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