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간과 6시간 사이의 큰 차이
'일자리 창출'은 매력적인 구호다. 실업 문제 따위야 일자리만 창출되면 자동으로 해결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자리 창출'이 절대적 목표라는 상식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한 대안은 없는 것 같다.
다른 생각은 '일자리 창출'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관습적 사유의 마법에서 깨어나야 떠오른다. '일자리 창출' 속에 숨어 있는 무한 성장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노동 시간을 줄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공유하는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라는 해법과 마주친다.
일을 하는 사람은 시간이 없다. 매일 8시간 노동을 하는 사람은 집에 돌아오면 쌓인 피로를 푼다고 잠을 자거나 누워 텔레비전 리모컨을 쥐고 졸고 있기 마련이다. 반면 실업자는 시간이 남아돌아서 탈이다. 고용 여부에 따라 사람들에게는 시간 자원이 매우 불평등한 방식으로 배분된다.
실업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한, 노동 시간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거나 가족을 살피는 일을 할 수 없는 노동자들은 시간이 부족하다고 투덜대지 않는다. 시간이 없음을 오히려 자신이 실업자가 아니라는 표식이라 여기기에 시간이 부족할 때 오히려 안도감을, 시간 여유가 생기면 역설적으로 불안감을 느낀다. 반면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의 상태에 처한 사람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들의 소원은 시간 부족이다.
한정된 일자리를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무한의 경쟁을 벌이는 시장적 방식이 지속되는 한, 그 시스템 속의 모든 개인들은 행복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행복에서 멀어진 원인은 다르다. 일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시간이 부족하기에 자율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져서 행복과 거리를 둔 삶을 살고,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간은 많아도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돈이 부족하기에 행복에서 멀어진다. 원인은 다르지만 모두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위험을 공유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에게 보장하는 길이다. '일자리 나누기'는 일자리를 둘러싼 무한 경쟁의 악마성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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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시간 vs 6시간>(벤저민 클라인 허니컷 지음, 김승진 옮김, 이매진 펴냄). ⓒ이매진 |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의 <8시간 VS 6시간>(김승진 옮김, 이매진 펴냄)은 미국 미시건 주 배틀 크리크에 있는 켈로그 공장에서 펼쳐진 '일자리 나누기' 실험에 대한 꼼꼼한 기록이다. 허니컷은 '일자리 나누기'를 이론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일자리 나누기'가 채택되었던 켈로그 공장의 사례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허니컷은 1930년에서 1985년 사이에 켈로그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광범위한 자료들을 분석해서, '일자리 나누기'로 인한 삶의 변화를 포착해낸다. 이 책에서 '6시간'은 '일자리 나누기'로 인한 노동자들의 변화와 경제 성장의 물신주의에서 벗어난 태도를 상징한다. 반면 '8시간'은 성장 만능주의와 일을 삶의 중심이라고 간주하는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를 상징한다.
이 책에서 '6시간'이 도입되었던 1930년대의 배틀 크리크는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재현된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수사학과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벌어진 성장 제일주의의 대반격과 방어에 실패한 '6시간'의 패배를 이 책은 기록한다.
배틀 크리크의 노동자들은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노동 시간 단축이 낳은 놀라운 변화와 '8시간'의 반격에 대해 증언하고, 허니컷은 그 증언을 글로 옮겨 놓는다. 다큐멘터리 감독 허니컷은 중립적인 태도를 지키지 않는다. 여가학자인 허니컷은 노동자들이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가 주입하는 강박에서 벗어났을 때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에, 당연히 그는 '6시간'의 편이다.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
배틀 크리크의 '6시간'은 1930년 12월 1일 켈로그 공장의 사장 루이스 브라운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브라운은 하루 8시간 3교대제로 운영되던 공장을 하루 6시간 4교대제로 바꿔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고용된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8시간에서 6시간으로 두 시간 줄여 4교대제를 실시하면 공장에서 수용할 수 있는 노동자의 수가 늘어난다는 계산을 염두에 둔 것이다.
브라운은 시장이 불안정할 때 노동 시간 단축이 유일한 치료제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흡혈귀가 아니었던 브라운의 제안을 돈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받아들이면서 허니컷이 '해방적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배틀 크리크의 '6시간'은 탄생했다.
'8시간'과 '6시간'은 겨우 두 시간의 차이지만, 그 차이는 노동자들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6시간 노동제는 노동자들이 갖고 있던 전통적인 일에 대한 태도, 즉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의 수정을 초래했다. 6시간 노동제는 노동과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자라는 인큐베이터였다.
6시간 노동제가 실시되면서 노동자들은 "삶에서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19쪽)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추가적으로 얻는 하루의 2시간은 "일과 여가 사이의 무게중심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8시간 동안 일을 했기에 여가 시간이 없었을 때, 노동자들은 살면서 필요한 것들을 모두 구매해야 했고 그래서 돈이 더 필요했지만, '6시간'은 시장적 관계가 아닌 공동체적 관계를 회복시켰다. 공동체적 관계는 줄어든 임금을 보완해줬다. 임금이 조금 줄어들었다고 노동자들의 삶은 궁핍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2시간은 노동자들의 삶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들어주었다. '6시간'과 만나기 이전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처럼 켈로그 공장의 노동자들에게도 일은 세계의 전부였다. 이들에게 일은 인생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였고, 여가는 그저 남는 쓸모없는 시간이었다. 인생을 일을 중심으로 생각했기에 전형적인 노동자들에게 '근면성'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만능 언어"(279쪽)였다.
8시간을 일하는 노동자들은 언제나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기에 그들은 친구를 돌볼 시간도,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할 여유도,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틈도 없었다. 6시간 노동제는 노동자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보다 많은 시간을 얻게 되자, 노동자들은 긴 노동 시간 때문에 상실했던 노동자 문화를 회복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연대는 공장에서뿐만 아니라 공장 외부의 삶 속에서도 뿌리를 내렸다.
두 시간을 적게 일하면서 임금은 예전보다 줄어들었지만, 노동자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을 얻었다. '6시간'은 새로운 태도를 배우는 학교였다. 6시간제는 "절대 노동의 세계와 모든 것을 쓸모 있는 목적으로 바꾸려는 효용 우선주의를 넘어서 창조적인 활동을 위한 독립된 영역을 추구"(26쪽)하는 움직임을 유발했다.
두 시간을 추가로 얻게 되면서 노동자들은 "집안일, 직장일, 사회적 의무, 돈 걱정의 범주를 벗어나서 얻을 수 있는 휴식"을 회복했다. '6시간'만 일하게 되면서 노동자들은 '8시간'제 하에서는 포기했던 인간의 욕구들을 다시 실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산책하고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고 무언가를 배우고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고 글을 쓰고 감상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즐기고 좋은 이웃이 되고 돌보고 이야기하고 새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일을 삶의 중심에 놓았기에 한 개인이 포기해야 했던 그 모든 것을 하루 2시간의 추가적인 자유 시간은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을 더 많이 하더라도 소비할 돈이 늘어나기만 한다면…
노동의 인간화보다 더 많은 이윤이 목적인 경영자들에게 탈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의 학교인 '6시간'이 반가울 리 없었다. 배틀 크리크에는 '해방적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경영자가 있었지만, 켈로그 외부의 경영자들은 배틀 크리크 모델보다는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의 지속을 원했다.
켈로그 외부의 경영자들의 지원군은 대통령 루스벨트였다. 대공황이 닥쳤을 때 루스벨트는 적자 재정 편성을 통해 경기를 진작시키고 필요하다면 공공 고용을 일으켜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일자리를 나눠 실업 위험을 분산시키고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는 보편성을 지지하는 배틀 크리크의 모델과 달리, 루스벨트는 고용된 사람만 행복할 수 있는 선택적 모델이었다. 배틀 크리크가 노동자들의 연대를 먹고 자란다면, 루스벨트 모델은 보다 많은 향한 노동자들의 욕심을 자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루스벨트의 모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전쟁 기간 동안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배틀 크리크의 켈로그 공장 역시 1943년 2월 28일 8시간 3교대제로 되돌아가야 했다. 물론 '8시간'으로의 복귀는 전시 기간 동안만 실시되는 예외적인 조치였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종결되면 '6시간'은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실시되었던 '8시간'은 배틀 크리크에서 퇴장하지 않았다. 임시로 배틀 크리크에 등장한 '8시간'은 오히려 1930년대생 '6시간'을 퇴장시키려 했다.
전쟁 기간 동안 '8시간'제가 실시되면서 '6시간'보다 임금의 총량이 늘어나자, 더 많은 임금의 달콤한 맛을 잊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율적인 삶을 구성할 수 있는 보다 많은 시간보다, 더 많은 임금을 손에 쥐고 그 돈으로 '소비주의'가 제공하는 행복을 '구매'하기를 원했다.
더 많은 돈에 관심이 있는 노동자들은 '6시간'으로의 복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노동조합마저 1950년대 이후 '풀타임'(8시간 노동)만을 유일한 선택으로 간주하고, 풀타임이라는 전제 하에 최대한의 임금 인상이라는 노선을 채택했다. 이로써 전쟁 이전 1930년대의 배틀 크리크의 실험 속에 담긴 이상으로부터 노동조합은 더욱 멀어졌다.
'소비주의'를 위한 더 많은 돈을 원했던 사람들은 '8시간'을 정당화할 수 있는 담론들을 만들어냈다. 8시간 노동제를 옹호하는 노동자들은 주로 남성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8시간 노동제를 옹호하기 위해 6시간 노동제가 갖고 있는 탈노동 중심주의적 전복 가능성엔 눈을 감고, 6시간 노동제는 가장이 아닌 여성들에게나 적합한 고용 형태라는 주장을 만들어냈다.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는 가부장제와 결합하여 '6시간'을 압박했다. 일을 삶의 중심에 놓는 노동자들은 탈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윤리를 지향하는 '6시간' 진영을 주변화하고, 여성화하고, 게토화했다.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이 노동 중심과 탈노동 중심의 세계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8시간'은 일을 중심에 놓는 자신을 정상적 규범이라 간주했고, '6시간'은 계집애들, 게으른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이나 선호하는 비정상적 규범이라 폄하했다.
'일돼지'가 승리한 1985년 이후
일자리의 수사학이 배틀 크리크를 뒤엎고 노동자들은 자율적인 삶보다는 보다 많은 임금을 선택하는 인간형으로 바뀌었지만, '6시간'을 옹호하는 노동자들은 배틀 크리크 내에서 일종의 '하위 문화'를 구성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8시간'이 주류 문화가 되었지만, '6시간'의 노동자들은 '8시간'을 선택한 노동자들을 경멸하는 고유한 수사학을 만들어냈다. '6시간'의 편에서 보자면 '8시간'의 노동자들은 '일돼지'였다.
켈로그 공장이 '일돼지'로 가득 찬 1980년대 6시간 노동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1985년 2월 8일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의 실험장이었던 배틀 크리크 켈로그의 '6시간'은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사라졌다. 단지 지역 신문만이 켈로그에서의 '6시간'의 사망을 보도했을 뿐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던 '6시간'의 화려한 순간과 사망을 이 책의 저자 허니컷은 배틀 크리크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문건의 꼼꼼한 독해를 통해 망각의 늪에서 구원해냈다. 역사학자 톰슨의 <영국 노동자 계급의 형성>이나 버밍햄 학파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 재생산>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이 책에서는 노동 시간 단축이 노동자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꼼꼼히 노동자들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다. 허니컷의 책은 다큐멘 터리 필름과도 같다. 허니컷의 책을 읽고 있으면, '6시간'을 회상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생생한 육성처럼 들려온다.
배틀 크리크의 '6시간'과 '8시간' 사이의 대립을 다루는 허니컷의 연구 방법은 독창적이다. 일자리 나누기라는 정책을 경제학적 분석의 틀에서 언급하는 기존의 연구와 달리 허니컷은 이 책에서 여가학자로서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여 노동 시간 단축으로 인한 효과를 공장 외부에서의 여가 시간의 변화와 결합하고 있다.
게다가 허니컷은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에스노그래피(ethnography·민족지) 전통을 물려받아 '6시간'을 꼼꼼하게 기술하고 있다. '꼼꼼한 기술'은 일자리 나누기가 얼마든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일자리 창출이 보장하지 못하는 행복을 노동자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음을 확신하게 만들어준다.
노동자들의 삶에서 발생한 일상의 변화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이 책의 장점이지만, 때로 허니컷의 섬세한 시선은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허니컷의 책에서 '6시간'이 지배했던 1930년대는 다소 낭만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일돼지'들이 승리하기 이전인 1930년대를 회고하는 노동자는 '좋았던 옛날'이라는 회고적인 시선에 사로잡혀 있는데, 허니컷은 이 시선과 거리를 유지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이 책은 영국 노동자 계급의 문화를 연구했던 리처드 호가트의 <교양의 효용(The Uses of Literacy)>처럼 타락하지 않았던 건강한 노동자 문화가 있었던 옛 시절('6시간')과 일돼지들이 지배하는 타락한 현재('8시간')를 비교하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독자는 낭만적인 회고담을 자구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모든 과거는 회상될 때 미화되기 마련이라는 경계를 놓치지 않으면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또 이 책에서는 8시간제와 6시간제의 배경을 구성하는 자본 축적 구조의 상이함보다는 일과 여가에 대한 노동자들의 생활 철학의 차이가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내리는 해석에 대한 주목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책 속에 수록하는 민중주의적 방법론은 이 책의 분명한 장점이지만, 이 장점이 임계치를 넘어설 경우 8시간 노동제와 6시간 노동제가 노동자들의 삶의 태도의 차이로 환원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
'6시간'의 패배는 노동자들의 태도 변화뿐만 아니라 '6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자본주의 축적 구조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지만, 허니컷은 '6시간' 패배의 배후 원인인 축적 구조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 책의 독자는 영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는 허니컷의 민중주의적 방법의 장점은 취하면서 이 책의 약점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6시간'은 아름다웠던 과거가 아니라, 실현되어야 할 미래이다. 영리한 독자는 '6시간'에서 과거를 아쉬워하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실현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갈망을 물려받아, 책을 덮으며 '그래 바보들아. 문제는 '노동 시간'이야!'라고 외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