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권력이다. 울리히 렌츠가 쓴 <아름다움의 과학>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무소불위의 권력이라고 한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아름다운 이성 앞에서는 지나치게 배려하고, 어리석을 정도로 헌신하며, 바보처럼 유치하게 군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외모 차별, 동안 선호 등을 루키즘(lookism)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 남과 여, 아름다움과 젊음을 얻기 위해 무엇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페이스 오프>란 영화도 있었지만, 연녹색 빛깔의 화사한 소설을 집어 들고 무심히 제목을 생각해 보니, 기가 막혔다. <페이스 쇼퍼>(자음과 모음 펴냄). 일명 얼굴 쇼핑. 즉 성형으로 이 얼굴 저 얼굴 원하는 얼굴로 바꿀 수 있는 시대. <비포 앤 애프터> 라는 성형을 소재로 한 드라마처럼 칙릿 작가 정수현의 세 번째 작품은 성형을 소재로 한 달콤 살벌한 이야기이다. 즉, 욕망의 편의점 <페이스 쇼퍼>에 가면, 거기 멋진 가면 하나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 <페이스 쇼퍼>(정수현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1인칭 내레이션을 전면에 내세운 소설의 화자는 바로 청담동에서 성형외과를 개업한 정지은. "고소영의 눈, 한가인의 코, 김희선의 얼굴형, 김혜수의 가슴, 이효리의 잘록한 허리를 갖고 싶어요"라고 하는 게 "뭔가 크고 시원하면서도 섹시한 고양이 같은 매력이 느껴지고 절대 질리지 않는 눈으로 부탁드려요" 라고 말하는 것보다 낫다는 게 지론인 미모의 성형외과 의사이다.

그녀의 병원, '란 성형외과'를 닳도록 넘나드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어머님 날 낳으셨고 성형외과 선생 날 만드셨으며, 산부인과에서 태어났으되 성형외과에서 부활한다. 섹시한 곡을 부를 때는 도발적인 얼굴로, 청순한 역할을 맡았을 때는 천사의 마스크를. 곡마다 배역마다, 상대 배우마다 선보는 남자가 달라질 때마다 가면 바꿔치듯 얼굴을 뜯어 고친다. 그녀들에게 보톡스는 신이 내린 회춘의 비액이고, 한마디로 라생라사, 라인에 죽고 라인에 사는 것이다.

동시대를 사는 미혼 여성으로서 작가는 젊은 여성 독자들의 가려운 곳을 어떻게 긁어 주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듯 보인다. 문체는 감각적이고, 스토리텔링은 흡인력이 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쁘띠 성형, 배꼽 내시경, 가슴 성형 수술, 악센트 PPC, 코 필러에서 성형 부작용까지 첨단 성형 정보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의 당의정에 쌓여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성형의 부작용이나 성형의 무의미함, 성형 받는 사람들의 심리를 세심하게 배치하여 성형에 대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려 든다.

특히 주인공의 어머니이자 배우인 50대 이해정을 둘러싼 성형에 서서히 중독되어가는 여배우들. 서로의 미모를 질투하고 그 비법을 알아내려 경쟁하는 40대 여배우 고보경, 20대 여배우 주혜나의 스토리 라인은 아름다움의 획득이 좋은 남자 혹은 좋은 가정 같은 구시대적 유물을 쫒는 것보다, 지극히 현실 타당한 계급 상승의 동력을 갖는다는 것을 한 눈에 헤집게 한다.

게다가 두통약과 수면제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딸 정지은에게, 그녀의 엄마 이해정은 황당하게도 재혼 기념으로 가슴 수술을 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이해정은 내 얼굴과 몸을 만들었고, 나는 이해정의 얼굴과 몸을 만들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닮은 구석이 사라지는 모녀"라는 대사에서도 드러나듯이 작가는 저마다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에 머무르며 어떤 소통도 할 수 없는 현대 가족의 파열음도 숨겨 두었다.

여기에 회춘을 위해 중국에 까지 가서 젊은이들의 피를 수혈 받았다는 강남 부유층의 피 세탁 이야기나, 자신의 피를 뽑아 혈장만 채취해서 다시 자신에게 주입하는 피 성형 과정이 곁들여 지면서, 왠지 2010년 강남의 성형 왕국에는 뱀파이어적인 분위기까지 물씬하다. 600명의 처녀를 살해해 그 피로 목욕을 하여 젊음을 유지했다는 16세기의 악녀 엘리자베스 바토리의 이야기를 반주삼아 책의 전반부는 와인, 피 성형, 피 세탁의 삼중주가 차가운 금속성의 수술대 위에 흥건하게 고여 있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 이다. 칙릿 소설답게 <페이스 쇼퍼>는 더 이상의 사회 비판이나, 더 이상의 위험한 상상력의 늪에 빠지려 들지 않는다. 정지은의 성형외과 옆에는 소아과가 들어오고, 소아과를 하고 싶었던 성형외과 의사와 성형외과 의사를 하고 싶었던 소아과 선생은 점차 티격태격 사랑에 빠져든다. 영화 <니키타>를 보고 여주인공을 흉내 내어 지은이 누군가와 똑같이 장을 보면, 그 뒤에 소아과 선생이 어느 새 다가와 그녀의 장바구니를 내려다본다. 한마디로 <미술관 옆 동물원> 대신 <성형외과 옆 소아과>라는 영화 한편을 찍을 수 있을 정도이다.

두 사람의 가슴 아픈 과거, 트라우마라 불리우는 과거 사건은 독자들의 마음을 베는 법이 없이 친절하고 달콤하게 러브 라인을 돋보이는 장식이 된다. 착한 여성들을 꾀어 브로커 노릇을 하는 '시크릿 성형 카페'라는 인터넷 사이트와 연관된 비리와 음모 역시 '착한 사람은 더 착하게, 나쁜 사람은 더 나쁘게' 만들어 주는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페이스 쇼퍼>는 시절에 민감하고 유행에 발랄한 재기가 넘치지만, 여기에 신경숙을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드는 것은 명백히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고로 예쁘고, 최고로 지적이고, 최고로 좋은 남자를 만나 최고로 부유한 직업 여성이 되는 것. 이 불가능한 꿈의 화신으로 오늘도 수많은 페이스 셀러 정지은이 성형외과를 열고, 수많은 페이서 쇼퍼 처자들이 시크릿 카페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두 (주)성형외과의 주식을 사들여야 하는가.

성과 계급, 미모와 권력이 동반상승 레이스를 펼치는 오늘, 한 여자가 얼굴의 창조주로 시작하여 자신의 마음을 치유해 가는 성장소설이기도 한 <페이스 쇼퍼>는 2010년을 살아가는 젊은 여성들의 비밀스런 욕망에 대한 진단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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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민란 프로젝트'(문성근), '빅 텐트'(김기식), '민들레 연대'(노회찬)….
평소 신문의 정치 기사를 질색하는 이들이라면 알쏭달쏭할 이 말들은 최근 진보·개혁 세력의 유행어(?)이다. 100만 민란 프로젝트는 진보·개혁 세력의 단일 정당을 촉구하는 100만 명의 시민을 모으는 운동인데 12월 3일 현재 3만3977명이 참여했다. 빅 텐트, 민들레 연대는 각각 시민단체, 진보정당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호소다.

이 말들을 꿰뚫는 문제의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2012년 총선, 대선에서 진보·개혁 세력이 집권에 성공하려면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사회당 등으로 쪼개져 있는 진보·개혁 세력이 어떤 식으로든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무상 급식',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지난 6·2 지방 선거에서 무상 급식이 핵심 쟁점으로 부상한 데 이어서, 최근에는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시민운동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 국민이 평균 1만1000원의 국민건강보험료를 더 내,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을 받는 진료를 획기적으로 늘리자는 것이다.

무상 급식, 국민건강보험 등을 꿰뚫는 열쇳말은 '복지 국가'다. 정당, 학계, 시민단체에서 복지 국가로 가는 길을 모색하고 실천하자, 시민들이 폭발적으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오는 2012년 총선, 대선은 복지 국가로 가는 길을 놓고 진보, 보수가 진검 승부를 벌이는 장이 될 가능성도 크다.

2012년 집권에 성공해 복지 국가를 꿈꾸는 진보·개혁 세력의 이런 움직임에 발 맞춰, 진보의 전망, 정책, 계획을 점검하는 책들이 올해 쏟아졌다.

<리얼진보>(진보신당 상상연구소 기획, 레디앙 펴냄), <역동적 복지 국가의 논리와 전략>(복지국가소사이어티 기획, 밈 펴냄), <진보 집권 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오마이북 펴냄),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이창곤 엮음, 밈 펴냄)….

'프레시안 books'는 진보·개혁 세력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 책들을 놓고 색다른 자리를 마련했다. 정태인 (사)정치바로 소장(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박성민 '정치 컨설팅 민' 대표,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가 이 책들을 읽고서 진보·개혁 세력의 실력을 점검하고, 전망을 따져봤다.

복지 국가, 한국 사회에서 가능할까? 2012년 최후에 웃는 자는 누구일까? 정말로 뭉치면 총선, 대선에서 진보·개혁 세력이 승리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표심을 가르는 '38선'의 정체는 무엇인가? 세계 금융 위기는 과연 끝났을까? 세 사람은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놓고 신랄하고, 날카로운 답변을 내놨다.

다음은 지난 11월 29일 서울 종로구 옥인동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진행된 대담의 주요 내용을 추린 것이다. 진행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맡았다. <편집자>

▲ 왼쪽부터 정태인 (사)정치바로 소장,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박성민 '정치 컨설팅 민' 대표,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보수와 진보, 건널 수 없는 강은…


프레시안 : 최근 들어서 진보·개혁 세력이 바라는 미래상을 그리고, 그것을 실현할 정책을 담은 책들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지난 2007년 대선 패배, 2008년 금융 위기, 2009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을 계기로 진보·개혁 세력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명박 정부가 임기의 반환점을 돌면서 2012년 대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이런 책의 출간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참에 올해 나온 이런 책들 중에서 눈에 띄는 책 네 권(<진보 집권 플랜>, <리얼 진보>, <역동적 복지국가의 논리와 전략>,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을 중심으로 진보·개혁 세력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먼저 네 권의 책을 평가해 보면?


▲ <진보 집권 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오연호·조국 지음, 오마이북 펴냄). ⓒ오마이북

최태욱 : 우선 비교적 최근에 나온 <진보 집권 플랜>(<플랜>)부터 살펴보자.

이 책은 여러 가지 주제를 일반 시민이 정리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면서도 중요한 대목을 놓치지 않았다. 이 책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결국은 정치다', 이렇게 요약된다. 신자유주의가 문제다, 말로만 떠들지 말고 대안 경제 모델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결국 정치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대안 경제 모델을 구현하는 방법도 일단은 무상 급식, 국민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 이른바 생활 정치부터 시작해서 그것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높이고 동의를 구하자,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데 상당히 중요한 주장이다. 또 진보·개혁 세력의 집권 전략으로 이탈리아의 '올리브 동맹'을 소개했는데, <리얼 진보>에서 노회찬 대표가 말한 '민들레 연대'와 통한다.


정태인 : <플랜>을 읽고 나면, 누구나 '조국이 정말 매력 있는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물론 조국 교수가 정치인이 아니어서 아쉽지만.
(웃음)인터뷰어(오연호)의 기획과 인터뷰이(조국)의 식견이 돋보이는 책이다. 다만 법학자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으니까, 독자들의 생각과 다른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매력 있는 지식인과 토론하듯 읽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박성민 : <플랜>을 보면서, 내용도 내용이지만 20대, 30대 젊은이들을 타깃으로 한 조국 교수의 화보집인 줄 알았다. 책 곳곳에 화보 같은 조 교수 사진이 실려 있으니까.
(웃음)이 역시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의 타깃이 정확히 20대, 30대 젊은이를 염두에 뒀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시안 : <리얼 진보>는 어떻게 읽었나?


최태욱 : <리얼 진보>는 우선 제목이 마음에 안 든다.
(웃음)'리얼'은 뭐고, 아닌 것은 뭔가? 지금 진보 세력에게 필요한 것은 '유연성'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선명성'만 강조한 게 아닌가? 사실 읽어보면 내용은 그렇지도 않은데…. 더구나 앞서 발표한 글들을 묶은 책이라서 상호 모순되는 글들도 있었고, 기획 자체에 점수를 주기는 힘든 책이었다.

다만 이 책의 핵심은, 이 자리에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정태인 소장이 '사회 경제'를 강조한 대목이다. 한국 사회의 미래에 희망을 주는 대안을 찾으려는 진보·개혁 세력이 복지 국가와 함께 염두에 둬야 할 또 다른 화두를 잘 제시했다. 사실 정태인 소장 얘기를 빼놓고는 그냥 좋은 얘기라서….
(웃음)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진보와 보수>)는 한국의 합리적 보수주의자, 이른바 '중도 보수'의 생각을 살필 수 있어서 좋았다. 언론 연재가 골격이라서 깊이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보수와 진보의 소통의 장을 마련한 점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특히 이 책의 결론에 최장집 교수와 박세일 교수의 대담에 인상 깊은 대목이 있다.

박세일 교수가 "구체적인 정책 논쟁을 하면 보수든 진보든 한 70~80%는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런 얘기를 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30%만 타협하고 양보하면 보수, 진보가 같이 좋은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다.


▲ <리얼 진보>(진보신당 상상연구소 기획, 레디앙 펴냄). ⓒ레디앙

정태인 : 방금 최태욱 교수가 <리얼 진보>의 한계를 평했는데, 이 책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를 반박하고자 급하게 기획한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책이 대중의 주목을 받으면서, 원래 자신의 정체성을 '진보'로 규정했던 이들이 '이제 진보라는 말까지 親盧 그룹이 빼앗아가겠구나!'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수세적으로 기획된 책이다.

<진보와 보수>를 읽으면서 나는 한국의 이른바 합리적 보수주의자에 대해서 실망했다. 구체적인 정책 논쟁에서 진보, 보수가 70~80% 정도는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진보가 한국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상식적인 얘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식적인 얘기에도 보수가 동의를 해오지 않았으니까 문제였지 않나?

이 책에서도 보수, 진보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과 같은 것도 많이 나온다. 경제만 놓고 보면, 우선 보수는 여전히 토목·건설에 굉장한 집착을 보인다. 또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자유롭지 못한 서비스 산업화, 또는 민영화 논리를 되뇌는 것도 보수의 특징이다. 이런 신자유주의 논리는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월스트리트로 대표되는 미국 금융 자본-한국의 기획재정부가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속내를 확인하면, 현대자동차가 현대건설과 같은 폭탄이 될 만한 기업의 인수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앞으로 여전히 토목·건설은 괜찮을 것이라는 보수의 경제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토록 한국의 보수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집착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 전면적인 서비스 산업화의 계기가 되리라는 판단에서다.


박성민 : 사실 <진보와 보수>가 제대로 된 소통의 장을 열었는지 미지수다. 진보 쪽 인사들이야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참여한 분들이니 날카롭게 창을 휘두를 수가 있었겠지만, 보수 쪽 인사들은 대부분 현직에 있는 처지에 어떻게 현안을 놓고 자기 속내를 얘기할 수 있겠나?


프레시안 : <역동적 복지 국가의 논리와 전략>(<복지 국가>)은 어떻게 읽었나?


최태욱 : 네 권의 책 중에서 제일 낫다. 한국에서 복지 국가를 실현하고자 실천하는 이들의 고민을 한곳에 모았다. 특히 이 책을 펴낸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한국이 추구해야 할 구체적인 복지 국가의 모델로 '역동적 복지 국가'를 내세웠는데, 이 책을 읽으면 그 모델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 진보·개혁 세력의 관심이 복지 국가로 모이고 있는데, 그것은 복지 국가가 바로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시대정신의 구체적인 상을 가장 잘 드러낸 책이라고 본다. 다만 <플랜>에서 강조했던 정치, 제도에 대한 관심이 다른 것과 비교했을 때 적어서 아쉬웠다.

정치, 제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복지 국가를 구현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것은 아주 큰 약점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처럼 한국에서 복지 국가를 구현하려는 이들이 더 심사숙고해야할 대목이 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분들은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다.


박성민 :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철학, 정책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철학, 정책을 구현하려면 집권을 해야 하고, 집권을 하려면 선거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네 권의 책에는 그런 얘기는 간단히 언급한다. 마치 좋은 철학, 정책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집권할 수 있는 듯한 모습이다.

방금 최태욱 교수가 정치, 제도 얘기의 공백을 얘기했는데, 사실은 정당 구조, 선거 제도, 공천 시스템, 지구당 부활 더 나아가서는 이런 변화의 계기가 될 개헌 이런 것에 대한 논의가 훨씬 중요하다. 그런데 네 권 모두 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상 침묵하고 있다. 이런 논쟁을 주도하는 이들이 정치인이 아닌 지식인, 시민운동가여서 그런 걸까?

세계 금융 위기, 우리가 알던 세상의 종언


▲ <역동적 복지 국가의 논리와 전략>(복지국가소사이어티 기획, 밈 펴냄) ⓒ밈

정태인 : 최태욱 교수가 지적했듯이 <복지 국가>는 잘 만든 책이다. 이 책이 훌륭한 이유는 과거에는 개량주의자로 욕을 먹었던 사람들, 그러니까 1990년대부터 진보 쪽에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복지 정책을 실천했던 이들의 고민과 경험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의 한계도 명백하다.


프레시안 : 한계라면 어떤….


정태인 : 사실 <복지 국가>를 포함한 네 권의 책 모두 지금까지 그 여파가 계속되는 2008년의 금융 위기에 대한 고민이 없다. 1929년 대공황보다 더 큰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금융 위기 이후에 과거의 생각이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금융 위기의 실체가 파악이 안 되었기 때문일까?

보수뿐만 아니라 진보도 '그래, 우리가 옳았어!'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금융 위기의 메커니즘을 살피면서, 이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모색하려는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 <리얼 진보>에 그런 고민의 단초가 보이기는 하는데, 원론적인 언급 수준에서 그쳐서 아쉬웠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보수가 추종해온 세상의 틀이 붕괴된 것인데 <진보와 보수>에서는 그런 보수의 위기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복지 국가>도 마찬가지다. 복지 국가는 금융 위기를 통해서 드러난 여러 가지 문제에서 자유로울까? 아니다. <복지 국가>가 본보기로 제시한 나라들이 스웨덴, 핀란드와 같은 북유럽 국가들인데 이 나라도 똑같이 위기를 맞았다.

복지 제도가 세계 자본주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해결해주리라고 여기는 것은 큰 착각이다. 이들 복지 국가도 부동산 투기, 금융 신용의 팽창이 있었고 외환 위기를 맞았다. 물론 이들 국가들이 미국과 같은 나라에 비해서 위기에서 빨리 빠져나온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금융 위기 이후의 복지 국가의 모습을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 국민참여당에 포진한 자유주의 세력도 마찬가지다. 서비스를 복지 차원에서 접근할 것인가, 산업 차원에서 접근할 것인가? 민주당의 70% 이상, 유시민 씨를 포함한 국민참여당의 상당수는 서비스를 산업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 FTA나 서비스 산업화를 놓고 여전히 잘한 일이라고 여긴다. 금융 위기가 여전히 남의 일인 것이다.

한미 FTA가 노무현 정부의 원래 계획대로 2006년 말까지 비준을 완료했다면 한국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거품 경제학' 없는 진보는 '거품'


▲ 정태인 (사)정치바로 소장.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방금 정태인 소장이 중요한 지적을 했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부동산 얘기를 잠깐 하고 넘어가자.


정태인 : 부동산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정교하게 보는 이론이 현재로서는 없다. 어처구니없게도 주류 경제학 자체는 거품을 인정하지 않는다. 시장에서 모든 정보를 다 반영한 합리적인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거품 가격이라고 보는 것도 정상으로 여긴다. 이런 전제가 있으니 거품에 대한 대응도 수세적이다.

우선 어떤 시점, 어느 가격이 거품인지를 놓고 누구도 제대로 답변을 못한다. 또 설사 자산 가격에 거품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품을 줄이는 데는 방법을 강구하는 데는 회의적이다. 거품을 터뜨리려면 이자율을 높여야 하는데, 그것은 바늘로 풍선에 구멍을 뚫는 격이니 차라리 거품이 터진 다음에 수습하는 게 비용이 덜 든다는 논리다.

물론 요즘 들어서는 주류 경제학자도 이런 접근에 대해서 회의를 하고 있다. 거품에 대한 경제학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경제학의 상황이 이러니, 노무현 정부 때 부동산 문제를 놓고 제대로 대응을 못했던 게 어쩌면 당연했다. 그 때는 20세기 초반에 나온 헨리 조지의 이론대로 종합부동산세를 올리면 부동산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소박하게 생각했다.

공급은 공공 임대 주택을 지으면 되지, 이런 식으로. 부동산이 경제 전체에 미치는 효과를 염두에 둔 대응을 내놓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이번 금융 위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부동산이 경제 전체에 미치는 효과가 얼마나 큰가? 집값이 오르면 은행에 담보를 잡혀서 돈을 빌리고, 자산이 늘어난 은행은 대출을 늘리고….

그나마 이렇게 부동산이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염두에 두고 노무현 정부에서 했던 게 LTV(Loan To Value) 정책이었다. 부동산 자산 가격에 따라서 담보 대출 금액을 규제한 것이다. 미국 경제가 부동산 때문에 휘청대는 걸 보면, 이 LTV 정책은 얼마나 선진적인 정책이었는지 알 수 있지 않나? 물론 한나라당은 LTV 정책 도입도 반대했었지만….


프레시안 : 그렇다면, 진보·개혁 세력이 집권을 하더라도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수단이 없다는 얘긴가?


정태인 : 그렇다. 이번 세계 금융 위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부동산, 금융이 상호작용해 거품이 커져서 경제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을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일종의 '허들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층층이 규제가 있어서 거품에 계속 제동이 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막힌 돈이 제조업에 기반을 둔 중소기업으로 흘러가도록 하는….

세계 금융 위기를 보면서 진보·개혁 세력이 이런 새로운 경제학을 내놓지 않으면 절대로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서도 얘기해왔고 한나라당이 지금도 얘기하는 '성장', '혁신' 이런 얘기만 되뇌는 데서 벗어나야 하지 않나? 여전히 진보·개혁 세력에게 그런 고민이 부족한 듯하다.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정신, '복지 국가'


프레시안 : 아까 최태욱 교수가 복지 국가가 시대정신이다, 이런 얘기를 했다. 실제로 진보·개혁 세력이 과거 어느 때보다 복지 국가를 내세우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다음 선거에서 진보·개혁 세력은 복지 국가를 전면에 내세울 것 같은데….


정태인 : 아무래도 6·2 지방 선거의 핵심 쟁점이었던 무상 급식의 여파다. 무상 급식이 중요한 선거에서 폭발력 있는 쟁점으로 부각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정치인이든 지식인이든 복지 화두를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특목고', '뉴타운'이 열쇳말이었던 지난 2008년 4월 총선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최근 들어서 대중의 정서가 달라진 것도 한몫했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로 한 10년간 이런 생각이 대한민국에 팽배했다. '나는 부동산으로 몇 십억 원 벌어서 부자가 될 수 있다', '내 아이는 사교육 경쟁에서 승리해 특목고, 서울대 갈 수 있다' 이런 식의…. 2008년 총선 때, 이런 흐름이 한 절정에 달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이른바 '5대 불안', 그러니까 일자리 불안, 교육비 불안, 주거 불안, 건강 불안, 노후 불안이 이렇게 환상에 빠져서 10년을 살아온 이들의 삶을 덮쳤다. 이제는 누구나 안다. '나도 예외가 아니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복지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있기 때문에 심지어 한나라당도 복지 제도를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진보·개혁 세력의 보편 복지와 한나라당의 선별 복지 사이의 차이가 있지만, 한나라당 역시 선별 복지의 양을 늘리는 추세를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복지가 한국 사회에서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핵심 화두가 될 것은 확실하다.

다만 앞으로 복지 국가를 실현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어쩔 수 없이 증세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여전히 대중이 생각하는 복지는 가능하면 (세금을) 덜 내면서도 복지는 더 받는 식이니까. 진보·개혁 세력이 이런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박성민 : 복지에 대한 관심의 한 축에 대중의 변화가 있다는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거칠게 구분을 하자면, 1970~80년대에는 국가 권력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면서, 민주주의가 주된 화두였다. 그런데 1987년 민주주의로 이행하고 나서는 1990년~2000년대에는 진보에 대한 회의가 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욕망으로 바뀌었다.

세계화의 흐름 염두에 두더라도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신자유주의로 경도되었고, 이른바 386(486) 세대들이 욕망을 좇는 흐름에 기꺼이 몸을 던지지 않았나? 부동산, 주식 투자(투기?)에 뛰어들고, 룸살롱을 다니고, 골프를 치러 다니고…. 그러다 지금은 반대로 그 욕망, 즉 시장에 회의를 하는 시기로 접어든 듯하다.

정태인 소장의 말처럼 심화된 양극화 등을 보면서 욕망의 정치를 실현하는 게 어렵다, 이런 걸 각성한 듯하다. 만약에 지금도 아파트 값이 몇 억씩 오르고 또 주식으로 큰돈을 버는 이들이 주변에서 보이면 쉽게 그런 환상을 포기하겠나. 그런데 많은 이들이 한 20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욕망의 정치가 사실은 '바닥으로의 경주'라는 진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각성한 대중들이 정치·경제에서 사회·문화로 관심의 초점이 바뀌고 자연스럽게 복지 화두에 관심을 쏟게 된 것이다.


최태욱 : 일단 현실 정치 세력도 복지를 최우선 과제로 놓았다. 우선 진보신당, 민주노동당에 이어서 민주당도 보편 복지를 강령에 넣었다. 앞으로 내용을 봐야 알겠지만, 박순성 동국대학교 교수가 원장을 맡은 민주당의 공식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이 강령에 부합하는 복지 정책을 내놓으리라고 생각한다.

한나라당의 변화도 놀랍다. 구체적인 내용을 봐야겠지만, 공공연히 70% 복지를 거론하는 상황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복지 국가를 거론하는데 이어서 남경필, 원희룡, 홍준표 의원 등이 참여했다. 정태인 소장의 얘기처럼, 한나라당이야 선별 복지의 틀을 내세우겠지만, 그 양과 질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좋아질 수 있다.

이런 각 정당들의 움직임을 보면, 아까 잠깐 언급한 이른바 '연대'의 가장 중요한 접착제가 복지가 될 가능성도 있다.


▲ 최태욱 한림국제대하원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복지 세력 없이 복지 국가도 없다


프레시안 : 그동안 복지는 진보·개혁 세력의 무기였다. 그런데 이렇게 진보신당, 민주노동당, 민주당, 한나라당 모든 정당이 복지를 내세운다면, 다음 선거에서 설사 복지가 화두가 되더라도 진보·개혁 세력에게 유리하다고 할 수 있을까?


최태욱 : 6·2 지방 선거 이후에 한나라당이 '개혁적 중도 보수 정당'을 표방하고 나섰다. 이런 분위기에 맞춰서 한나라당 내부의 중도 보수 정체성의 정치인 몇 사람이 "중도 보수 정당으로 갈 거면 부자 감세를 철회해야 한다," 이렇게 얘기를 해도 메아리가 없다. 이게 바로 한나라당의 한계다.

만약에 선거에서 복지가 핵심 쟁점이 된다면, 시민들은 누가 진심으로 복지 국가를 위해서 체계적인 정책을 내놓고 실행할지 지켜볼 것이다. 이런 실천의 핵심은 반 복지 세력 돌파다. 한국 사회의 반 복지 세력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한국 사회 주류다. 재계, 정계, 관계,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 등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력이다.

이런 신자유주의 반 복지 세력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복지 국가로 가는 길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자신의 핵심 지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이익에 반해서 복지 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한나라당이 중도 보수를 표방하면서도 부자 감세 정책을 철회하지 못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한나라당으로는 그렇게 가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은 반 복지 세력에 맞서서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정체성을 내세우면서 구체적인 방안을 자신 있게 내놓아야 한다. 아까 정태인 소장이 얘기했듯이, 핵심은 증세다. '어떤' 복지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이런' 증세 방안을 내놓겠다,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복지가 쟁점이 될 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정태인 : 글쎄…. 나는 비관적이다. 민주당이 방금 최 교수가 조언한 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증세를 말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가령 무상 급식을 찬성하던 시민도, 세금을 더 내서 공공 임대 주택을 늘린다는 정책에 선뜻 동의하기 쉽지 않다.

재원을 마련하려면 흔히 얘기하는 부유세 즉 자산세를 걷어야 하는데, 중산층은 대부분 예금, 주식, 부동산 등의 자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뜻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중산층을 설득해야 하는데, 민주당 의원들이 일시적인 대중의 반감을 무릅쓰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 대다수 민주당 의원은 그럴 의지가 없다.

거기다 진보·개혁 세력 안에는 여전히 시장을 통한 복지에 미련을 가진 이들이 많다. 서비스 산업화를 여전히 주장하는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씨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국·공립 보육원을 더 짓기보다는 시장에서 사립 보육원들이 경쟁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결국 보편 복지보다는 시장 복지를 지지할 테고, 그건 한나라당과 똑같다.

결국 대선에서 설사 복지가 쟁점이 되더라도 한나라당, 민주당, 국민참여당이 주도하는 식이라면 말잔치만 벌이면서, 실제로는 한나라당의 의도대로 시장 복지-선별 복지만 강화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된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2년간 열심히 노력을 해야겠지만….


최태욱 : 보편적 복지 국가의 건설에 관한 것이라면, 사실은 나도 비관적이다. 아주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복지 국가가 만들어지려면 복지 세력이 있어야 한다. 복지 국가를 원하는 시민과 복지 국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지키려는 정치 세력이 있어야 한다. 이들이 복지 동맹을 형성하고 버틸 때, 복지 국가가 가능하다.

특히 복지의 맛을 본 시민이 중요하다. 한 번 복지의 맛을 본 시민은 복지 국가의 강한 지지자가 되고, 이들의 복지 선호를 대변하는 정당이 있다면 웬만해서는 복지가 후퇴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복지의 맛을 본 시민이 많지 않고 또 복지 국가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힘 센 정당도 없다.

정태인 소장이 잘 지적했듯이 시민부터 불안하다. 무상 급식에 환호했던 시민들이 증세해도 복지 국가로 가자, 이렇게 선뜻 찬성할 가능성은 적다. 또 정치권도 말로는 다들 복지 얘기를 하지만 민주당 내에도 한나라당 정도는 아니지만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반 복지 세력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 역시 정 소장처럼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복지 세력이 튼튼하지 않은 한국의 상황에서 어느 정당이 책임을 지고 복지 국가 건설에 나서겠는가? 좀 더 부연하면, 복지 국가를 만들려면 현실 정치에서 '포괄의 정치(politics of inclusion)'가 작동되어야 한다.

아까 한국에서 복지 국가를 세우기 어려운 이유가 주류를 차지하는 신자유주의 반 복지 세력 탓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에 맞선 친 복지 세력이 형성되어야 하고, 시민사회에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조직도 필요하다. 유럽의 복지 국가 같은 경우에는 강력한 노동조합이 그런 역할을 했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그런 친 복지 세력이 될 수 있는 이들이 비정규직, 자영업자다. 현재 정규직, 비정규직, 자영업자가 3분의 1씩 차지한다. 그런데 정규직 노동자는 복지 국가에 대한 바람이 덜 할 것이다. 그들은 기업 복지도 어느 정도 돼 있는데다가, 시장 복지에 접근할 만한 여력이 되니까.

그런데 비정규직, 자영업자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장 복지에 접근할 만한 여력도 없다. 그들이야말로 복지 국가로부터 가장 수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이 없다. 이런 비정규직, 자영업자의 조직화가 시급하고, 더 나아가 이들의 정치 세력화가 필요하다.

이런 친 복지 세력의 선호가 정치 결정 과정에 제도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즉, 그런 친 복지 세력을 안정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정당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정당이 민주당인가? 민주당은 중산층과 서민을 대표하는 정당이라고 말한다. 말이 중산층과 서민이지, 사실상 한국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를 대표한다는 얘기다.

도대체 누구의 정당인지 헷갈린다. 모두를 대표한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건 실제로는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주당이 지금까지 해온 모습을 봐도 그렇고. 이렇게 비정규직, 자영업자와 같은 친 복지 세력을 대표할 수 있는, 포괄할 수 있는 정당이 부재한 상황에서 복지 국가 건설이 쉽게 될 리가 없다.

이런 포괄의 정치가 작동될 때 이른바 '사회적 합의'도 가능하다. 포괄의 정치가 없는 상황에서는 사회적 약자 누구도 테이블에 나가지 않는다. 테이블에 나가봤자 법제도로 이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아까 <복지 국가> 얘기를 하면서 강조했듯이, 포괄의 정치가 작동될 수 있는 정치, 제도 개혁이 중요하다.


정태인 : 친 복지 세력으로 묶일 수 있는 이들 중에는 비정규직,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주부, 노인과 같은 비경제 활동 인구도 있다.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 사람들이야말로 대표적인 한나라당에게 표를 주는 이들 아닌가. 이런 점까지 염두에 두면 더 비관적이 되는데….

'복지', 한나라당의 무기도 될 수 있다


▲ 박성민 '정치 컨설팅 민'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박성민 : 그 동안 정책이 진보해온 역사를 살펴보면 그 동력은 정치 세력의 의도, 결단이라기보다는 선거였다. 선거는 복지 정책의 도입을 빨라지게 하고, 범위를 넓히는 효과를 낳는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정치인은 선거 때 팔릴 만한 상품이라면 즉 표만 되면 뭐든지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2012년의 총선, 대선을 앞둔 지금 시점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 특히 수도권에 기반을 둔 이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지난 6·2 지방 선거 결과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20~30대의 투표율이 크게 늘었다. 이전 2008년 총선 때는 46.1%였는데, 6·2 지방 선거 때는 8.3포인트가 늘어서 54.4%가 되었다. 전 세대 중에서 20~30대만 늘었다.

20~30대 투표율보다 더 중요한 것은 40대의 표심이다. 2000년대 이후 주요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40대에서 민주당에 진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 6·2 지방 선거에서 민주당이 처음으로 이겼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총선, 대선에서 한나라당에서 복지가 아니라 뭔들 못하겠나?

정당은 선거 때 자신의 지지 기반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외연을 확대하는 것에 골몰한다. 방금 정태인 소장이 잠깐 언급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저소득, 저학력 계층은 전통적으로 한나라당을 지지한다. 이번 6·2 지방 선거에서 볼 수 있는 더 확실한 지표가 하나 더 있다. 수도권에서 60대 이상이 오세훈 후보에게 70%, 김문수 후보에게 80%의 표를 줬다.

수도권 60대 이상에서는 호남 사람, 영남 사람의 구분도 없었다. 절대 다수가 한나라당에게 표를 준 것이다. 왜 이랬을까? 이들에게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이 있다. 바로 천안함이 일깨워준 냉전의 경험이다. 이런 공통의 역사적 경험 앞에서 세금 덜 내고, 더 내고 이런 쟁점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자, 이런 선거 결과를 염두에 두면 한나라당이 한미 동맹 강화, 대북 강경 입장을 고수하는 한 2012년 선거에서 수도권의 60대 이상이 이탈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이 외연을 확대할 세대는 어디인가? 바로 40대다. 이들을 다시 한나라당으로 끌어오는 게 핵심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40대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복지에 민감한 세대다. 일단 부모 중에 치매가 걸린 이들이 부지기수다. 맞벌이를 하는데 누구 부모를 간병할 것인가? 자기와 부인 건강도 문제다. 건강 진단을 할 때마다 큰 병이나 걸린 것은 아닌지 가슴이 덜컥한다. 직장에서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 아이들 대학교 등록금도 걱정이다. 이 모든 게 복지의 문제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선거 때 왜 복지 얘기를 하지 않겠나? 진보·개혁 세력이 성장 얘기를 하는 것보다 한나라당이 복지 얘기를 하기가 훨씬 쉽다. '분배'는 뺏어서 나누는 진보·개혁 세력의 용어 같은데, 복지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니까 보수도 수용할 수 있는 용어로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으니까.

한나라당이 자신의 (60대 이상의 지지층은) 지키면서도 40대에게 호소력이 있는 이 복지를 왜 선거 때 주장을 안 하겠나?


프레시안 : 선거 때 복지가 부각될수록 한나라당에 유리할 수도 있다?


박성민 : 물론 어느 정당에 유리할지 불리할지 확정할 수는 없다. 아까 정태인 소장이 지적한 것처럼 복지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이다. 다른 세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자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40대가 재원 부담을 염두에 두고 복지에 소극적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성장을 통해서 재원을 마련해 복지를 확충하겠다는 한나라당과 같은 보수의 주장이 진보·개혁 세력의 얘기보다 더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을 수도 있다. 진보·개혁 세력이 40대에게 호소력이 있는 정교한 재원 마련 방안을 마련하고 복지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복지에 대한 강조가 자충수가 될 수도 있고.

그들의 거짓말 : 신자유주의→성장→복지?


정태인 : 문제의 핵심은 한나라당이 선호하는 신자유주의를 고집하다가는 성장을 통한 재원 마련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에도 나오지만(13장 :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지난 30년의 세월 동안 성장을 가속화하는 데 실패했다.

극적인 예를 들어보자. 복지 국가 스웨덴이 휘청거리면서 '스웨덴 병' 이런 얘기가 나온 게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이다. 그 때 스웨덴이 추진했던 게 바로 규제 완화와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이었다. 스웨덴은 금융 규제를 완화하고, 유동 자산이 부동산으로 흘러가는 걸 방치했다. 인위적 평가 절하로 수출을 늘리는 정책을 썼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스웨덴의 부동산, 주식과 같은 자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잠깐은 성장률이 높아지는 것 같더니 곧바로 경제 위기를 맞았다. 예정된 결과였다. 신자유주의라는 게 거칠게 말하면 자산에 대한 세금을 깎아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거품이 생기고, 그런 거품이 되레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동산, 주식 등 자산에 거품이 생겨서 그 분야의 수익률이 높아지면, 자산을 가진 이들이 제조업에 투자할 생각을 하지 않고 투기에 눈을 돌린다. 제조업 투자가 안 되니 고용이 안 되고, 기껏해야 질 낮은 일자리만 양산된다.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 전체 성장률은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거품이 터지면 이번 세계 금융 위기와 같은 사태를 맞고.


프레시안 : 그런데 대중에게 그런 것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정태인 : 그렇다. 부동산, 주식에 투자해서 돈을 번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나? 대부분은 잃었을 것이다. 그런데 언론에 나오는 사람은 주식에 투자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박경철 씨 같은 사람이다. 대중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바로 '신자유주의→성장→복지'와 같은 논리가 확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개혁 세력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이 부동산, 주식에 세금을 부과하고, 중소기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정책을 써야, 일자리가 늘어나고 성장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해야 한다. 스웨덴, 핀란드도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버리면서 비로소 다시 성장률이 올랐다. 그런데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민주당이든 다른 진보·개혁 세력이든 '신자유주의→성장→복지' 논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여전히 토목·건설 산업과 서비스 산업에만 매달리다가는 절대로 한나라당을 이길 수 없다. 잠재적인 친 복지 세력 비정규직, 자영업자, 노인·여성·20대와 같은 비경제 활동 인구를 설득할 논리,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최태욱 : 박성민 대표의 지적에 동의하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한나라당이라도 복지에 앞장서는 것도 좋은 일 아닌가? 물론 그들은 정태인 소장이 지적한 대로 시장에 기반을 둔 보편 복지가 아닌 선별 복지를 주장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 앞장서서 복지가 확충되면 그 만큼 많은 사람이 복지의 맛을 볼 수 있다.

1970~80년대도 처음부터 민주화 세력이 많았던 게 아니다. 여러 가지 일을 거치면서 조금씩 지지자가 많아지지 않았나? 복지 세력 역시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이 앞장서서 복지를 확충하고, 그만큼 복지의 맛을 본 세력이 늘어나니까. 그런 점에서 복지 국가를 얘기하는 박근혜 전 대표를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박성민 : 한나라당 내에서도 박근혜 전 대표뿐만 아니라 복지 국가를 내세울 수밖에 없는 이들이 많다. 모두 수도권에서 2012년 총선에서 승리가 불안한 이들이다. 이들이 선거 때 복지를 전면에 내세운다면, 그래서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복지 확충이라는 제도적 성과로 이어진다면 그 역시 정책의 진보 아닐까?


ⓒ프레시안(손문상)

뭉치면 산다? 뭉쳐도 죽는다!


프레시안 : 최태욱 교수, 박성민 대표가 지적했듯이 복지 국가가 실현되려면 그것이 현실 정치의 의제가 되어야 한다. 최근에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진보·개혁 세력의 연대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다. 문성근 씨의 '100만 민란 프로젝트', 김기식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의 '빅 텐트' 등이 구체적인 안인데…. 이런 움직임을 어떻게 봐야 하나?


박성민 : 흔히 한국 사회를 분석할 때 영남/호남, 산업화/민주화, 보수-중도-진보 등으로 분류를 한다. 그런데 현실 정치를 염두에 두면 이런 분류가 그다지 신통치 않다. 보수가 다 한나라당 지지자인 것도 아니고 또 민주당 지지자가 다 진보인 것도 아니고. 현실 정치를 염두에 둔 제대로 된 분류가 필요한데, 아직 그런 틀을 만들지 못했다.

현실 정치를 고려하면, 지난 20년간 한국 정치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90년 체제'다. 1990년 3당 합당을 하면서 부산·경남(PK), 대구·경북(TK), 충청도가 결합했다. 이때의 충청도 세력이 떨어져 나와서 자민련, 자유선진당 등으로 이어지면서 선거 때마다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고 있지만 큰 덩치인 PK-TK 연합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바로 이 PK-TK 연합이야말로 바로 선거 때마다 무조건 한나라당을 찍는 굳건한 지지 기반이다. 이 반대편에는 한나라당을 찍어본 적도 없고, 찍을 것 같지도 않은 반한나라당 세력이 있고, 그 사이에 이른바 당파성이 없는 '중도'라고도 불리는 '무당파'가 있다. 내가 보기에 한나라당의 지지 기반은 투표율에 상관없이 38%다.

이렇게 38%를 잡은 이유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1997년 대선을 생각해 보자. 한나라당으로서는 그 때 최악의 선거를 치른 셈이었다. 외환 위기 직후였고, 이인제가 나갔다. 그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이회창 후보가 38.2%를 가져갔다. 이번 6·2 지방 선거는 어떤가? 한나라당이 참패했다지만, 광역의원 비례대표 투표에서 한나라당이 39.8%를 가져갔다.

이명박 정부, 한나라당에 대한 불신이 상당히 큰 지금도 여론 조사를 해보면 정권 재창출에 동의하는 비율이 38.4%다. 또 한나라당을 찍겠다는 이들의 비율도 38.9%다. '90년 체제'가 지속되는 한, 어떤 조건의 선거에서도 무조건 한나라당을 찍는 이들이 대략 38%는 존재하는 것이다.


정태인 : 38선이네. 38선을 넘어야 하는구나!
(웃음)


박성민 : 그렇다면, 반한나라당 세력은? 최대로 봤을 때 35%다. 1997년에 한나라당이 바닥을 쳤다면, 진보·개혁 세력의 바닥은 지난 2007년이다. 그때 이명박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합이 64%다. 그리고 정동영, 문국현, 권영길 후보의 합이 딱 35%였다. 기존의 한나라당 고정 지지층 38%에 대략 26%의 무당파가 이명박, 이회창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 것이다.

이런 얘기를 길게 하는 것은 설사 2012년 선거에서 반한나라당 연합이 성사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한나라당과 반한나라당이 1대 1로 붙어도 야권이 승리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다. 그런데 마치 이념이든, 정책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반한나라당으로 뭉치면 2012년 선거에서 승리할 것처럼 주장하는 것을 보면 참 답답하다.

'묻지마' 식 통합? 미션 임파서블!


ⓒ프레시안(손문상)

최태욱 : '100만 민란 프로젝트', '빅 텐트' 이런 주장의 핵심은 진보·개혁 세력의 단일 야당을 만들자는 얘기인데, 나 역시 부정적이다. 우선 비현실적이다. 내가 진보신당 당원이라면 이런 흐름에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진보신당이 바라는 세상이 있고, 비록 소수지만 지지층도 있고, 비례대표제를 통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데, 왜 민주당과 같이 해야 하나?

또 이런 주장은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거대 여당-거대 야당 이런 양당제는 좋지 않은 정당 제도라고 여긴다. 아까 민주당 얘기를 하면서 잠깐 언급했듯이, 이런 양당제 하에서는 한 정당이 굉장히 많은 계층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어떤 계층도 잘 대변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더구나 현실적으로 우리나라는 1987년 이후로 다당제 아니었나? 또 2004년 이후에는 비례대표제를 통해서 다당제 구조가 가능하도록 제도가 뒷받침하고 있고. 즉 현실적으로도, 이상적으로도 다당제로 가는 것이 맞다. 다양한 계층을 여러 정당이 대변하는 모습. 당장 이명박 정부가 마음에 안 드니까, 단일 야당 얘기가 나오는 건 알겠는데 좋은 해법은 아니다.

그리고 설사 기적적으로 이런 단일 야당이 만들어진다고 하더라도 100% 깨진다. 이념으로 뭉친 것도 아니고, 정책에 대한 공감대가 확실히 뒷받침하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각 정당이 자기들이 지지 기반을 대표하면서 선거 연합, 정책 연합, 제도 연합을 하면서 연대를 하는 게 오히려 더 현실적이다.

나는 이런 연대의 구심점으로서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복지 국가. 둘째 선거 제도 개혁. 즉 국회의원의 50% 정도를 비례대표에 할당하는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이른바 '복지 국가+PR(proportional representation)'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을 전면에 내걸고 연대해서 권력을 확보하고, 이들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프레시안 : 지난 6·2 지방 선거에서는 경기도 고양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연대를 한 '무지개 연합'의 사례와 같은 긍정적인 얘기가 있었다. 그래서 조국 교수도 올리브 연대 이런 얘기를 한 것이고….


박성민 : 지방 선거와 총선, 대선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한 번 물어보자? 지금의 선거 제도 하에서 총선에서 어떤 연합이 가능할까? 지방 선거에서는 시장은 민주당, 구청장은 민주노동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 이런 식의 나눠먹기가 가능했다. 그러나 총선에서는 이런 일이 굉장히 어렵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노회찬, 심상정, 이정희 씨의 당선을 위해서 민주당이 관악구와 같은 곳에서 후보를 내는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당 지도부의 힘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셌던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정부 때도 선거(1998년 6월 지방 선거, 2000년 4월 총선)에서 공동 후보를 낼 수 없었는데?

더구나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입장에서도 아무런 명분도 실익도 없이 민주당 들러리를 서려고 하겠나? 국민참여당만 살펴보자. 이 당은 2012년에 총선, 대선을 처음 치르는데 그냥 자기 깃발 들고 가는 게 훨씬 더 유리하다. 왜? 민주당과 같이 해서 얻을 이익이 하나도 없으니까.

우선 민주당 대표보다 더 지지도가 높은 대선 후보(유시민)가 있다. 국민참여당과 유시민 씨의 경우에는 민주당의 호남 기득권 세력과 싸우다 본선에도 못 나갈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민주당과 따로 가다가 막판에 후보 단일화와 같은 '딜(deal)'을 시도하는 게 훨씬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또 국민참여당은 민주노동당이 지난 2004년 총선에서 13%의 표를 얻어서 8석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당선시킨 것을 보았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심지어 민주당 후보보다 인지도가 높은 노무현 정부 때의 장관, 수석 들이 대거 수도권에서 출마해서 당을 알린다면, 국민참여당이 2004년 때 민주노동당이 얻은 혹은 이상의 표를 얻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따로 가는 게 유리한데 왜 굳이 민주당과 연대를 하겠나? 민주당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민주당에는 2012년 총선도 이번 6·2 지방 선거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강남, 용산, 분당 같은 곳은 한나라당이 가져가겠지만, 도봉, 노원과 같은 곳은 민주당이 재탈환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6·2 지방 선거가 가져다준 착각인데….

이뿐만이 아니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정당의 약진, 국민참여당과 같은 자유주의 정당의 출현 등 반한나라당 세력은 계속 분화하는 중이고 그것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면 2012년 총선, 대선에서의 연대는 1987년의 김대중, 김영삼의 후보 단일화만큼이나 어려운 얘기다.

그런데 마치 몇 사람만 결단을 하면 이런 연대가 가능한 것처럼, 또 그렇게 연대만 하면 한나라당을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방금 최태욱 교수가 잠시 제도 개혁 얘기를 했는데 비례대표제의 도입, 대선에서의 결선투표제의 도입 등과 같은 선거 제도를 바꾸는 것을 통해서 '90년 체제'를 깨는 게 우선이지, '묻지 마' 식의 통합, 연대를 얘기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손문상)

선거 제도 개혁, 최우선 과제다!


프레시안 : 그런 비례대표제 도입, 결선투표제 도입과 같은 제도 개혁의 주도권을 누가 쥘 수 있을까?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주류는 나서지 않을 것 같은데….


박성민 :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 제도 개혁, 개헌 등의 얘기를 던지는데도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게 참 답답하다. 민주당에서는 정략적인 발상이라고 무시로 일관하는데, 정치 활동 중에서 정략적이지 않은 게 어디 있나?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상적이지는 않더라도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가는 게 바로 정치 아닌가?


최태욱 : 동의한다. 선거 제도 개혁, 개헌 등의 얘기를 이 대통령이 제기했을 때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받았어야 했다. 아까 한나라당이 복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얘기했다.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 한나라당이 비례대표제 도입과 같은 선거 제도 얘기를 하면 민주당이 그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박성민 : 아마도 이명박 정부, 한나라당이 비례대표제 도입을 얘기하면 일본의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고집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석패율 제도'가 특징인데, 이것은 일본 정당의 계파 보스가 지역에서 재선될 수 있도록 안전판의 역할을 하는 제도다. 가장 이상적으로 꼽히는 독일식 비례대표제와 비교하면 한계가 명백하다.


(석패율은 당선자와 낙선자의 득표 비율이다. 비례대표제에서 한 후보자가 지역구와 비례대표로 동시에 출마하는 것을 허용하고, 가장 높은 득표율로 낙선한 후보를 다시 비례대표로 뽑는 것이 석폐율 제도다. 일본에서 1996년부터 실시해오고 있는데, 지역구 선거에서 아깝게 떨어진 후보를 구제해주자는 게 기본 취지다. <편집자>)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한나라당, 민주당의 현직 의원에게 호소력이 있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과도기적으로 이런 권력별 비례대표제라도 도입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2004년에 제도의 힘을 우리 모두 다 보지 않았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없이 어떻게 민주노동당이 어떻게 국회의원 8명을 만들어 냈겠나?

이렇게 일단 제도 개혁에 성공하면 분명히 '90년 체제'에 균열이 생긴다. 진보·개혁 세력은 한나라당은 마치 한국 정치의 '상수'처럼 취급한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 상수를 해체하지 않으면 절대로 선거에서 이길 수 없는 상황인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 한나라당은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그 안에도 민주당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있는데 TK-PK 연합에 기반을 둔 90년 체제가 깨지지 않으니 이념적 보수, 지역적 영남, 계층적 부자, 연령은 노년에 기반을 둔 '올드 한나라당' 외에 다른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진보 입장에서 보자면, 이 올드 한나라당을 깨는 것이야말로 한국 정치 개혁의 핵심인데….


최태욱 : 진보·개혁 세력이 당장 이명박 정부가 마음에 안 드니까 정치 공학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서, 일이 해결될 수 있는 순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선거 제도와 같은 제도 개혁에 집중하면 그 결과 지금과는 전혀 다른 판이 펼쳐질 수 있는데,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에 매달리는 꼴이다.

이대로 가다간 북한은 중국의 식민지


정태인 : 전 세계가 칭송하는 핀란드의 교육 정책은 1968년에 가장 극우를 제외한 좌우의 정당이 모여서 합의한 것이다. 복지 정책이든 교육 정책이든 이런 정책의 일관성을 보장할 수 있는 합의의 틀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정권이 바뀌면 전 정부가 해놓았던 것을 모조리 부정하는 식이다.

그런 점에서도 지금처럼 한나라당과 반한나라당이 대립하는 정치 지형은 바람직하지 않다. 노무현 정부를 봐라. 상대 정치 세력의 동의를 얻지 못하니, 5년 내내 방어만 하다가 정권을 내놓지 않았나. 대통령의 자질, 정당의 비전 다 중요하지만 정책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정치 지형의 정착이 시급하다.


프레시안 : 사실 정권이 바뀌면서 가장 확 바뀐 게 대북 정책이다. 최근의 북한의 우라늄 농축, 연평도 포격이 갑작스럽게 바뀐 대북 정책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남북 관계가 한국의 정치 현실에 어떤 영향을 줄까?


박성민 : 사실 알 수가 없다. 우리 국민에게 남북 관계에 대해서 이중성이 있다. 예를 들자면, 북한이 조롱거리가 될 때, 그러니까 3대 세습 같은 논란이 불거지면 당연히 한나라당에 유리하다. 그런데 연평도 포격과 같은 일에 북한 폭격과 같은 자칫하면 전면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강경 대응을 하는 것에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질까? 과연 찬성할까?

그런 점에서 이번 연평도 포격을 둘러싼 민주당의 대응이 참 답답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확전 자제' 발언을 놓고 물고 늘어졌는데…. 민주당은 오히려 그 발언을 잘 했다고 해야 일관성이 있는 것 아닌가? 평화를 지향하는 정당이라면서 확전 자제 발언에 토를 다는 건 일관성이 없는 것 아닌가?


정태인 : 일단 이명박 정부가 이런 상태를 방치하면 북한은 중국에 넘어가는 것으로 봐야 한다. 장기적으로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는 구조가 만들어질 테고,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북한을 구슬려서 한반도 전체를 중립 지대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가 하는 식이라면 북한은 중국, 남한의 미국 이런 식으로 쪼개져서 그대로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보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북한은 절대로 안 무너진다. 지금 중국을 보라. 전 세계의 돈이 중국으로 모이고 있다. 이런 중국 입장에서는 엄청난 투자를 하는 동북 3성의 발전을 위해서 북한이 안정적으로 그 경제권에 편입되는 게 좋을 것이다. 북한은 무한한 지원이 가능한 든든한 친구를 옆에 두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한국 사회 주류 중에서 재계도 남북한의 대결 구도가 유지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문제는 정치야, 바보야!


프레시안 : 이제 2012년 총선, 대선이 금방이다.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박성민 : 이명박 정부 들어서 반한나라당, 반이명박, 이런 식의 정치 세력 간의 극단적 대립이 더욱더 두드러졌다. 그러면서 사실상 정치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다. 자, 생각해 보자. 이런 상황에서 미소를 짓는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이 뒤에서 시민을 비웃고 있다.

관료, 검찰, 법원 같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삶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재벌, 주류 언론도 계속 웃으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고.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국민이 선출한 이들, 즉 정치 세력이 가장 큰 힘을 가져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다. 진보·개혁 세력도 바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정치'에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최태욱 : 오늘의 얘기를 종합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도가 미래다.' 시간이 없다고 미루지 말고 당장 지금부터 시작해서 제도와 그것에 기반을 둔 구조를 바꿔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아까 정태인 소장이 지적했듯이 아무리 진보·개혁 세력의 정책이 좋아도 그것이 지속될 수 없다면 말짱 헛일 아닌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두 대통령을 포함해서 많은 진보·개혁 세력이 좋은 뜻을 가지고 권력을 잡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렇게 실패한 근본에는 제도와의 부조화가 있다. 복지 국가, 조정 시장, 평화 체제…. 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 제도와 그것에 기반을 둔 구조 속에서는 설사 집권하더라도 제대로 추진할 수도, 또 연속성을 보장할 수도 없다.

이런 제도 개혁의 핵심에 바로 여러 차례 거론됐던 비례대표제와 같은 선거 제도의 개혁이 있다. 비례대표제가 전면적으로 도입될 때,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또 이들 정당이 정책을 매개로 연대를 한다면 장기적으로 한국에서도 '포괄의 정치', '합의의 정치'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정태인 : 여러 번 강조했듯이 이번의 금융 위기는 경제를 운영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성장은 시장에 맡고, 분배는 정부가 하자' 이런 접근으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대안적인 경제의 틀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것에 기반을 둔 연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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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맨더빌과 최윤재의 한국어판 <꿀벌의 우화>(문예출판사 펴냄)를 읽는 데에는 두 가지 즐거움이 있다. 먼저, 원서로는 도저히 읽기 어려운 책을 우리말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세상을 보는 신랄함과 사람을 설득하는 재주를 그대로 맛볼 수 있다. 더구나, 긴 해제는 원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잘 보여준다. 저자인 맨더빌에 못지않게, 역자인 최윤재는 자신의 해제를 통해 독자를 자신의 생각 속으로 곧바로 끌어들인다.

저자와 역자는 같은 곳에서 출발하지만,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한 사람은 이 세상의 질서에 머물러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이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 새로운 질서를 꿈꾼다. 사실 번역 자체가 그러한 작업이지 않은가. 훌륭한 번역서를 즐겁게 읽으면서도, 독자들은 두 개의 사상을 비교하는 지적 도전을 하게 된다. 최윤재는 거대한 상업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꿀벌의 세상인지 아닌지를, 우리 스스로 꿀벌처럼 살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맨더빌은 자신이 꿀벌의 세상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까발리고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밝힌다고 주장한다.

"힘들고 더러운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하고, 거친 삶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요구를 가난한 아이들보다 더 잘 채워줄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아무도 이들보다 더 가깝고 더 적합하지 못하다. 그 밖에도, 내가 고생이라 부른 것은, 그렇게 커왔고 더 나은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는 고생으로 생각되지도 않고 고생도 아니다. 가장 열심히 일하면서 세상의 화려함과 섬세함을 가장 모르는 그들보다 더 만족하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없다." (205~6쪽)


▲ <꿀벌의 우화 :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버나드 맨더빌 지음, 최윤재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문예출판사
이 비밀을 앞에 놓고 맨더빌은 조금도 불편해 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진실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작은 존경심을 별생각 없이 갖는 기분 때문이다. 이런 기분이 대중들에게 흐르고 있으며 특히 이 나라에서 그러한데, 이는 연민과 어리석음과 미신이 뒤섞여 나타나는 것이다."(206쪽)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작은 존경심', 요사이는 인권이라고 부르는 인간에 대한 존중은 맨더빌에 따르면 '별생각 없이 갖는 기분'이며, '연민과 어리석음, 미신의 혼합물'일 뿐이다.

그러나 맨더빌이 드러낸 비밀은 우리 시대에는 이미 비밀이 아니다. 길지만 한 문단만 더 인용해 보자.

"꾸준히 손을 써서 게으름을 줄여주면 강제하지 않고서도 가난한 이들을 일하게 만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무식하게 키우면 고생을 고생으로 느끼지 않도록 단련시킬 수 있다. 그들을 무식하게 키운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들의 지식이 그들 하는 일 언저리를 넘어서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며, 적어도 그 한계를 넘도록 일부러 애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수단으로 채비하여 노동을 싸게 만들면, 틀림없이 다른 나라보다 싸게 팔 수 있으며, 우리 인구를 늘릴 수 있다. 이것이 무역에서 상대에 맞서는 멋지고 당당한 길이며, 다른 나라 시장에서 우리가 실력으로 이기는 길이다." (207쪽)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맨더빌은 자신이 밝힌 '진실' 때문에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고 고발되고 자신의 책이 불타는 것을 보았지만, 이제 그의 주장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교육자들이, 정치인들이 학교에서, 언론에서 공공연히 가르치고 주장하는 '과학적 사실'이 되었다.

맨더빌은 '자선과 자선 학교'라는 글에서 "주제넘게 끼어들고 있는 자선 학교 간사들"을 비판하기 위해 이렇게 주장했지만, 이제 우리 시대에는 국가가 세금을 사용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원하고 관리하는, 더욱이 배우는 사람들 스스로가 상당한 돈을 갖다 바치는, 교육 기관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는 "악당이어도 좋다. 돈만 많이 벌게 해다오"라고 외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윤재를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맨더빌을 정반대 방향에서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13쪽)

맨더빌의 한국어판 역자는 맨더빌의 태도를 '차가운 머리'는 가지고 있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맨더빌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했다. 그럴듯한 겉꾸밈에 속지 않을 만큼 그에게는 차가운 머리가 있었다."(82쪽) 그래서 그는 당시의 위선적인 도덕 운동,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분수, 곧 신분 질서를 지키라고 가르치려는 것"(26쪽)을 비판했다. "그러나 따뜻한 마음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는 남의 속마음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남의 어려운 처지에는 좀처럼 공감하지 않았다."(82쪽)

바로 이 지점에서 최윤재 교수는 애덤 스미스를 데리고 온다.

"스미스는 있는 그대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제 일이든 남의 일이든―적절한지를 물었다. 그리고 그 적절성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지 물었다. 적절하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 함께 화를 내는 것이고 이것이 정의를 세우는 바탕이 된다. 스미스가 말한 '공정한 관찰자'는 있는 그대로 보되 적절성을 판단하는 관찰자다." (82쪽)

우리는 맨더빌에서 출발하더라도 스미스를 따라서 더 나아가야 한다. "맨더빌은 돈 벌 욕심을 아예 버리라는 낡은 도덕을 비판한 사람이다. 그런 맨더빌을 따라 돈 벌 욕심을 받아들이되, 나 돈 벌자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흐르게 하는 짓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스미스의 도덕 감정이고 그런 짓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칸트의 도덕 원칙이다. 공정한 사회는 그 위에 세워진다."(7쪽) 바로 이 도덕 감정에, 도덕 원칙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스미스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가? 역자 자신도 언급하고 있듯이, 스미스는 인간에 대해 더 깊이, 더 진지하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이 저자(맨더빌) 생각은 거의 모든 점에서 잘못되었지만, 어느 특정한 방식으로 본다면 사람 본성에는 얼핏 그의 생각이 맞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도 있다. 맨더빌 박사는 이 겉모습을 조잡하고 거칠긴 해도 생생하고 재미나는 말솜씨로 그려냄으로써 그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했는데, 서툰 사람은 여기에 쉽게 빠져든다." (48~49쪽, <도덕감정론> 7부 2편 4장)

스미스는 맨더빌 자신(183~5쪽)이 노상강도나 도둑이나 살인범조차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 연민(pity) 또는 동정심(compassion), 동료의식(fellow-feeling)으로부터 도덕의 원리를 찾아내고 도덕 체계를 세운다. <도덕감정론>(1부 1편 1장)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상정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 원리들이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과 동정이 이런 종류의 원리이다." 스미스는 이런 감정들을 동감(sympathy)이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스미스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감정'에서 출발해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상업 사회에 대해서도 맨더빌과는 전혀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있다. 맨더빌은 사회를 '나라/정치체제(body politick)'라고 하면서, "나라라고 하는 것은 제 몫을 얻으려면 남을 위해 일해야 할 줄은 알 만큼 힘이나 설득으로 깨우치게 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이며, 한 사람 밑에서 또는 다른 형태의 정부 밑에서 각자는 전체를 따르고 전체는 능숙한 통제로 하나처럼 움직이는 집단이다"(238쪽)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권위주의'의 결합체인 '신자유주의'의 '18세기 판'을 보는 것 같다. 반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는 '평등, 자유, 정의의 자연적 체계'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도덕감정론>에서는 개인을 장기판의 말처럼 다루려고 하는 '체제의 인간(man of system)'을 비판한다.

그런데 최윤재는 맨더빌의 인간관에 대해 비판하고 분노하면서도 '개인의 악덕'과 '사회의 이익'을 연결하는 그의 방식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맨더빌은 '사회의 본질을 찾아서'에서 "개인의 악덕은, 솜씨 좋은 정치인이 잘 다룬다면, 사회의 이득이 될 수 있다"(264쪽)고 말한다.

최윤재는 이를 받아서 "엄밀히 말하면 그는 이기심이 그저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도 않았다. 거기에는 적절한 제도와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 문제를 "스미스를 비롯하여 지난 200여 년간 경제학이 찾고 있는 중"이라고 주장한다.(81쪽) 그리고 더 나아가 맨더빌의 "솜씨 좋은 정치인의 능란한 경영"(46쪽) 또는 "악덕을 베어내고 동여맬 정의"(120쪽)를 "하이에크가 말한 의도하지 않은 제도 발전보다는 현대 제도 경제학이 강조하는 주의 깊은 제도 설계에 더 가까운 생각"(46쪽)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최윤재의 이러한 평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과연 맨더빌의 체계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정의와 법, 훌륭한 정치인은 맨더빌의 체계 자체로부터 나올 수 있는가?

맨더빌의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이라는 논리뿐만 아니라, 그를 비판하는 스미스의 '개인의 이익, 사회의 이익'이라는 논리 속에는 쉼표(반점)가 하나 있다. 우리는 이 쉼표(반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여전히 많은 논쟁을 해야만 한다. 당연히 "스미스는 맨더빌의 논증이 특별한 형태로 표현된 스미스 자신의 순수한 자연적 자유를 위한 논증임을 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슘페터의 주장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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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복지 국가에 관해 누구나 읽을 만한 책이 나왔다.

항상 펜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한겨레> 이창곤 기자가 새로운 책을 만들었다. 오랫동안 사회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가 <어떤 복지 국가에서 살고 싶은가>(이하 <어떤 복지 국가…>)(밈 펴냄)를 쓰고 엮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복지 국가에 관한 '대중적 눈높이'의 책을 표방한다. 그리고 복지 국가의 '실체를 매만질 수 있는 책'이 되길 원한다.

<어떤 복지 국가>는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한 듯하다. 이 책은 복지 국가의 이론, 개념, 유형을 정말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쳐서 발전한 한국 복지 국가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소개한다. 상아탑의 학자들뿐 아니라 현실 정치에 참여한 정책 결정자들의 입에서 잊힌 진실을 묻는다. 세계 복지 국가의 다양한 역사에서 한국 복지 국가의 새로운 방향에 이르기까지 실천적 과제와 씨름한다.

지금은 복지 국가의 전성시대인가?


▲ <어떤 복지 국가에서 살고 싶은가 : 대한민국 복지 국가 논쟁>(이창곤 지음, 밈 펴냄). ⓒ밈
한국의 역사에서 '복지 국가'는 뒤늦게 등장했다. 1880년대 독일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복지 제도가 탄생한 후 20세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서유럽 나라에서 복지 국가가 발전한 현실과 비교하면 너무 늦었다. 한 때 1980년대 전두환 군사 정부가 '복지 사회'라는 말을 쓰기도 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당해하거나 외면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수많은 진보 담론이 등장했지만 '복지 국가'가 진보 진영의 목표가 된 적은 없었다. 어쩌면 2007년 대통령 선거와 2010년 지방선거야말로 본격적으로 복지 국가에 대한 관심이 확산된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만 다루어졌던 용어들이 정치인의 입에서 나오고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복지 국가가 한국 정치의 대세이다. 노회찬부터 정동영, 천정배, 그리고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모두 복지 국가를 말한다. 그런데 대체 어떤 복지 국가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 보수와 진보는 모두 복지를 외치기는 하지만 구체적 정책과 프로그램에서는 사뭇 생각이 다른 듯하다.

특히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다.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와 노무현 정부의 '사회투자국가'는 서구의 복지 국가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최근에 등장한 '역동적 복지 국가'(정동영), '정의로운 복지 국가'(천정배), '3차원 복지 국가'(노회찬)는 또 어떤 것인지 혼란스럽다. 이창곤 기자의 책 <어떤 복지 국가…>는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이런 고민을 말끔하게 해결해준다.

어떤 복지 국가?

이창곤 기자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집권기를 "복지가 비약적 발전을 이룬" 시기이며, 복지 국가의 "토대를 형성한 시기"라고 평가한다. 그러면 앞으로 한국 복지 국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떤 복지 국가…>를 보면 진보 진영이 제시한 복지 담론의 최대공약수는 '보편적 복지'이다. 미국처럼 빈곤층 지원에 집중하는 복지 국가보다 스웨덴과 같이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제공하는 복지 국가를 선호한다. 이 책의 필자로 참여한 고세훈 교수, 신광영 교수, 이태수 교수, 문진영 교수 등의 생각도 비슷하다.

그러나 '적극적 복지'에 대한 견해는 약간 다르다. 이상이 교수(역동적 복지 국가)와 신동면 교수(정의로운 복지 국가)는 적극적 복지를 지지하는데 비해,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는 일자리 공유와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한 '노동 연대'를 주장한다. 이는 1990년대 후반 프랑스 조스팽 정부가 제안한 정책과 유사하다.

1990년대 후반 이래 '적극적 복지'라는 용어는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개념은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재분배를 강조하는 전통적 복지 국가를 인적 자본에 투자하는 '사회투자국가'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와 복지 사이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경제와 복지의 선순환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사회투자국가라는 용어가 보편적 복지의 이념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과연 그런가?

원래 인적 자본과 적극적 복지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나라는 스웨덴이었다. 1930년대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이론가이자 노벨 경제학자 수상자였던 군나르 뮈르달은 노동 생산성의 증가를 위해 '인적 자본'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0년대 스웨덴에서 시작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도 노동자가 노동시장에 다시 진입하기 위한 교육과 직업 훈련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복지 국가의 역사는 자본주의를 거부하기보다 자본주의를 합리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과정이다. 실제로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대대적인 국유화 방안을 포기한 것은 아주 오래 전 이야기이다.

스웨덴 모델의 역사적 진실을 찾아서

1990년 덴마크 출신 사회학자 에스핑-안데르센은 <복지 자본주의의 3가지 세계>를 출간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복지 체제를 사회민주주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유형으로 분류했다. 이에 대해서는 <불평등의 경제학>의 저자 이정우 교수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251~252쪽).

이 가운데 스웨덴은 대표적인 사회민주주의 유형으로 평가를 받는다. 스웨덴은 사회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탈상품화가 가장 발달된 복지 제도를 채택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수당을 도입했으며 가장 평등주의적 국가로 꼽힌다. 최근까지 스웨덴의 보편주의적 복지 국가가 무너진다는 아무런 조짐도 없다. 고용 확대, 재정 압박, 사회적 형평성이라는 3중 모순(trilemma)을 가장 효과적으로 잘 대처하는 나라는 스웨덴이다.

그러나 고정불변의 스웨덴 모델은 없다. 한국의 진보 세력은 스웨덴 모델의 끊임없는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1990년대 경제 위기 이후 스웨덴은 소득세와 법인세를 인하하고 상속세와 부유세를 폐지했다. 또 복지 국가의 관료화와 중앙 집중화를 막기 위한 분권화가 추진되었다. 실업 급여 지급 기간과 임금대체율도 약간 낮아졌다. 스웨덴은 독립 학교를 만들어 학교 선택권을 확대했다.

그러나 2010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은 소득세와 사회 보장성 기금 인상을 내걸었지만 참패하고 말았다. 세금 인상을 꺼려하는 중산층이 등을 돌린 것이다. 전통적인 스웨덴의 고부담-고수익 모델은 한계에 부딪힌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는 <어떤 복지 국가…>에 소개된 최연혁 남스톡홀름 교수와 이영 스톡홀름 대학교 연구원의 글에 담겨있다.

한국에서 복지 국가 만들기에 성공하려면?

<어떤 복지 국가>의 백미는 이창곤 기자가 마지막에 쓴 '한국형 복지 국가의 조건과 과제' 제하의 글이다. 그는 대안 국가와 대안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 정책, 주체를 고민한다. 그는 복지 국가가 "서민의 고통을 풀어주는 장치"이며 "진보 진영 집권의 유력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전혀 놀랍지 않게 그는 복지 국가의 최대의 관건은 조세 개혁이라고 지적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 비해서 한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조세 부담율과 복지 재정 비율은 매우 낮다. 그러나 증세냐 감세냐 이분법의 논리를 회피한다. 오히려 진보 진영이 제기해온 사회복지세와 부유세를 놓고 신중한 태도를 주문한다. 대신 간이 과세 제도 폐지, 금융소득세 인상 등 조세 개혁을 통해 세원을 확대하는 전략을 제안한다. 물론 장기적으로 세금 인상과 복지 확대가 오히려 개인들에게 더 효율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정치적 지지를 고려하는 정교한 조세 정책을 요청한다.

복지 국가를 추진하는 정치적 주체에 대한 고민은 더욱 진지하다. 1936년 노동조합, 기업, 정부 3자의 타협을 통해서 만든 스웨덴 복지 국가의 역사적 경험과 비교하면 사실 한국에는 복지 국가를 추진할 노동조합도 진보 정당도 친복지 세력도 취약하다. 스웨덴처럼 노사 타협의 전통도 없다.

그러나 모든 국가에서 복지 국가가 발전한 경로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독일에서 복지 국가를 추진한 세력은 1880년대 비스마르크 총리를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이었으며, 영국에서는 1910년대 로이드 조지 총리 등 자유주의 정치인들이었으며, 미국에서는 1930년대 뉴욕의 부유층 출신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이었다. 세계 역사를 두루 살펴본 후 이 책은 한국의 정치적 현실을 고려해 복지 정치를 주도할 시민사회의 복지 연합과 진보·개혁 정당의 선거 연합을 제안한다. 한국적 복지 국가 모델이 필요하듯이 한국 현실에 맞는 정치 전략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복지 국가를 넘어서

모든 책이 다 완벽할 수 없듯이 이 책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진정으로 서구 복지 국가의 경험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단순하게 서구 복지 국가의 장점만이 아니라 오류와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서구 복지 국가가 어떻게 중앙 집중제, 하향식 통제, 관료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하는지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유연 안정성을 강조하는 덴마크의 활성화 방안을 주목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국가는 사후에 빈곤에 대응하기보다 사전에 예방하는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 인도 출신 경제학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르마티아 센이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강조했듯이 일시적인 현금 급여만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개인의 능력을 키우는 복지가 더 중요하다.

다음으로, 개인의 권리만큼 책임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1950년 영국 사회학자 토마스 마샬이 <시민권과 사회 계급>에서 지적한 대로, 복지 국가의 발전을 보면 국가 권력의 확대보다 시민권의 등장이 더욱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 복지 국가의 발전에서 공민권, 정치권, 사회권을 포함한 시민권(citizenship)의 발전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시민권은 개인의 권리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도 요구한다. 모든 시민은 세금을 납부하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자녀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부모의 역할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특히 고용은 시민권의 필수조건이다. 복지 국가는 의존이냐 자립이냐 이분법이 아니라 상호의존의 문화를 강조한다.

에스핑-안데르센이 <21세기 새로운 복지 국가>에서 강조하듯이, 전통적 복지 국가는 남성 중심적 성격을 가졌다. 그러나 가족이 직면한 새로운 위험 구조가 등장하면서 일하는 엄마들은 가정과 직장의 양립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 양성 평등과 새로운 성 계약을 요구하는 투쟁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이다. 일찍이 1930년대 군나르 뮈르달 부부가 여성 친화 정책을 주장했듯이, 새로운 복지 국가는 취업모에 대한 공적 지원, 일자리 공급, 임금 격차 해소, 모성 보호를 추구하는 여성 친화적 복지 체제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복지의 궁극적 목표는 경제적 만족이 아니라 행복의 추구이다.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처럼 복지를 단순하게 가난한 사람을 돕는 제도로만 본다면 매우 일차원적 복지 국가에 머물고 말 것이다. 이 책의 앞에서도 밝혔듯이 한국의 행복지수는 세계적으로 밑바닥이다. 물질적 성공과 정신적 실패의 모순은 한국 사회의 한계이다.

서구의 복지 국가도 비슷한 딜레마에 빠져있다.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가 <승자독식사회>에서 지적한 것처럼 경쟁에서 이기는 것과 더 많이 돈을 벌고 소비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만들지는 못한다. 환경을 파괴하는 경제 성장에 의존하는 복지 국가도 미래가 없다. 앞으로 새로운 복지 국가는 물질적 복지를 넘어 환경 보호와 정신적 차원의 안녕을 함께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공백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복지 국가를 위한 정치 전략의 중요성을 역설한 이창곤 기자의 통찰력과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정말 알기 쉽게 쓴 <어떤 복지 국가…>에 이어 복지 국가 논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다양한 새 책들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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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존 레넌의 사망 30주기이자 탄생 70주년이다.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지냈던 다코타하우스와 뉴욕 센트럴파크 내 스트로배리 필드는 그의 사망일인 지난 8일 팬들이 바친 꽃으로 가득 찼고, 영국 리버풀은 이미 두 달 전 그의 탄생 월부터 문화 행사로 들끓었다. 심지어 쿠바에서도 이날 비틀스의 곡을 연주하는 추모식이 열렸다.

존 레넌과 비틀스에 관련된 문화 상품도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영국의 레이블 팔로폰은 존 레넌 박스 세트 <시그내처(Signature)>와 <김미 섬 트루스(Gimme Some Truth)>를 내놨다. 9일에는 그의 유년기를 파고든 영화 <존 레넌 비긴즈 : 노웨어 보이>도 국내에서 개봉했다.

미국의 음악 잡지 <롤링스톤>은 존 레넌의 사망 사흘 전인 1980년 12월 5일, 아홉 시간에 걸쳐 진행된 그와의 인터뷰를 최근 공개했다. (매체들은 그의 마지막 인터뷰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존 레넌은 사망 당일 다코타하우스에서 RKO 라디오의 프로듀서 데이브 숄린과 인터뷰했다).

이렇게 레넌 추모 열기가 뜨거운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여전히 장사가 잘 되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존 레넌이 부르짖던 '(내면의, 세상의) 평화'는 멋진 그림이 새겨진 티셔츠로 팔린다. 혁명마저 상품으로 소비하는 시대에 존 레넌에 대한 뜨거운 추모 열기는 누군가에게 매우 불편한 현실이 될 수 있다.


▲ <레논 평전>(신현준 지음, 리더스하우스 펴냄). ⓒ리더스하우스
최근에 나온 <레논 평전>(신현준 지음, 리더스하우스 펴냄) 또한 어찌 보면 불편할 상품이다. 1990년대 '록 키드'에게 비평 그룹 '얼트 바이러스'와 <얼트 문화와 록 음악>, 인디레이블 '강아지 문화 예술' 등으로 잘 알려진 성공회대학교 교수 신현준은 1993년 발간한 <이매진 : 세상으로 만든 노래>를 다시 손질한 이 책을 존 레넌 사망 30주기에 맞춰 내놨다.

분명히 문화 상품 중 하나인 이 책을 삐딱하게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바로 대중음악의 전설 존 레넌의 평전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으로 현대사에 우뚝 솟은 레논의 삶은 여러모로 되짚어볼 의미가 많다. 그는 계급 사회에 상처 입은 영혼이었고, 대중의 우상이었으며, 주류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존 레넌이 활동하던 1960~1980년대는 현대사에서 가장 격동적이었던 순간이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청년 세대의 사회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대다. 그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던 레넌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레논 평전>을 통해서 독자는 다양한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신현준의 이 책은 잘 정리된 레넌의 역사다. 리버풀 노동자의 아이로 태어났던 그가 무명 음악인에서 청년 문화의 상징으로, 그리고 영향력 있는 사회운동가로 변모해가는 과정이 밀도 있게 그려졌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방대한 양의 자료를 모으고 이에 살을 붙인 저자의 땀이다.

책은 존 레넌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로 그의 음악을 꼽는다. 신현준은 책 전체에 걸쳐서 레넌의 삶을 그의 음악을 통해서 살핀다. 예를 들자면, 비틀스를 나와 좌파 운동에 헌신할 때의 그의 생각을 그가 발표한 노래의 가사를 통해서 살피는 식이다. 신현준은 이런 접근을 통해서 인터뷰를 할 때마다 말을 바꾸는 등 혼란스러웠던 그의 진심을 추적한다.

이런 접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책에서 보이는 레넌은 '신현준의 레넌'이다. 책 전체에 걸쳐서 대중음악가에서 사회운동가로 변신한 레넌에 대한 흠모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록 저자가 "각자의 해석들이 서로 소통과 대화의 기회들을 풍부히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지만….

이런 저자의 시선 덕택에 이 책은 '비틀마니아'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훌륭한 읽을거리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었던 한 문제적 인간의 삶을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틀스와 레넌의 시대를 경험하지 못했던 젊은 세대에게 현대사를 읽는 유용한 참고 문헌이 될 듯하다.

대중문화와 사회 변혁의 연계를 꿈꾸는 이들이나 혹은 레넌에 못지않은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 그것을 활용할 줄 모르는 스타 음악인에게도 이 책은 유용할 듯하다. 책 곳곳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는 레넌의 놀라운 직관력은 대중음악의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지침이다.

물론 예술지상주의를 찬미하는 이들이라면 레넌 삶의 후반기를 다룬 이 책의 뒷부분을 편한 마음으로 읽기 어려울 것이다. 대중음악가로서 존 레넌은 사회 변혁에 너무나 열성적이었고, 또 사회운동가로 보기에 그는 지나치게 성공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부분에서 신현준은 레넌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비틀스가 록의 상업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으며, 존 레넌이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백만장자 사회주의자'였고, 사회운동에 깊이 빠져들었을 때조차 다른 사회운동가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었다. 존 레넌이 직설적이고 전복적인 가사를 썼음에도 대중이 그를 조안 바에즈, 피트 시거와 구분지어 이해하는 이유다.

존 레넌의 사상이 집약된 '이매진'은 오늘날 대중에게 광고 음악으로 더 친숙한 노래다. 이처럼 존 레넌을, 그리고 비틀스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렵다. 좋은 음악만으로 그를 소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반쪽만을 아는 것일 뿐이다. 이 책은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면서 존 레넌을 더 깊이 이해할 기회를 주는 책이다.

"결국 존 레넌은 음악 상업주의의 좋은 상품일 뿐 아닌가", 하고 일갈하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훌륭한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 존 레넌과 오노 요코. 오노 요코는 레넌이 폴 매카트니와 결별한 후 찾아낸 반쪽이었다. 둘은 레넌이 총에 맞아 사망할 때까지 연인, 모자, 동료, 동지로 함께 했다. ⓒ워너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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