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맨더빌과 최윤재의 한국어판 <꿀벌의 우화>(문예출판사 펴냄)를 읽는 데에는 두 가지 즐거움이 있다. 먼저, 원서로는 도저히 읽기 어려운 책을 우리말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세상을 보는 신랄함과 사람을 설득하는 재주를 그대로 맛볼 수 있다. 더구나, 긴 해제는 원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잘 보여준다. 저자인 맨더빌에 못지않게, 역자인 최윤재는 자신의 해제를 통해 독자를 자신의 생각 속으로 곧바로 끌어들인다.
저자와 역자는 같은 곳에서 출발하지만,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한 사람은 이 세상의 질서에 머물러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이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 새로운 질서를 꿈꾼다. 사실 번역 자체가 그러한 작업이지 않은가. 훌륭한 번역서를 즐겁게 읽으면서도, 독자들은 두 개의 사상을 비교하는 지적 도전을 하게 된다. 최윤재는 거대한 상업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꿀벌의 세상인지 아닌지를, 우리 스스로 꿀벌처럼 살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맨더빌은 자신이 꿀벌의 세상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까발리고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밝힌다고 주장한다.
"힘들고 더러운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하고, 거친 삶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요구를 가난한 아이들보다 더 잘 채워줄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아무도 이들보다 더 가깝고 더 적합하지 못하다. 그 밖에도, 내가 고생이라 부른 것은, 그렇게 커왔고 더 나은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는 고생으로 생각되지도 않고 고생도 아니다. 가장 열심히 일하면서 세상의 화려함과 섬세함을 가장 모르는 그들보다 더 만족하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없다." (20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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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꿀벌의 우화 :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버나드 맨더빌 지음, 최윤재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문예출판사 |
이 비밀을 앞에 놓고 맨더빌은 조금도 불편해 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진실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작은 존경심을 별생각 없이 갖는 기분 때문이다. 이런 기분이 대중들에게 흐르고 있으며 특히 이 나라에서 그러한데, 이는 연민과 어리석음과 미신이 뒤섞여 나타나는 것이다."(206쪽)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작은 존경심', 요사이는 인권이라고 부르는 인간에 대한 존중은 맨더빌에 따르면 '별생각 없이 갖는 기분'이며, '연민과 어리석음, 미신의 혼합물'일 뿐이다.
그러나 맨더빌이 드러낸 비밀은 우리 시대에는 이미 비밀이 아니다. 길지만 한 문단만 더 인용해 보자.
"꾸준히 손을 써서 게으름을 줄여주면 강제하지 않고서도 가난한 이들을 일하게 만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무식하게 키우면 고생을 고생으로 느끼지 않도록 단련시킬 수 있다. 그들을 무식하게 키운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들의 지식이 그들 하는 일 언저리를 넘어서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며, 적어도 그 한계를 넘도록 일부러 애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수단으로 채비하여 노동을 싸게 만들면, 틀림없이 다른 나라보다 싸게 팔 수 있으며, 우리 인구를 늘릴 수 있다. 이것이 무역에서 상대에 맞서는 멋지고 당당한 길이며, 다른 나라 시장에서 우리가 실력으로 이기는 길이다." (207쪽)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맨더빌은 자신이 밝힌 '진실' 때문에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고 고발되고 자신의 책이 불타는 것을 보았지만, 이제 그의 주장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교육자들이, 정치인들이 학교에서, 언론에서 공공연히 가르치고 주장하는 '과학적 사실'이 되었다.
맨더빌은 '자선과 자선 학교'라는 글에서 "주제넘게 끼어들고 있는 자선 학교 간사들"을 비판하기 위해 이렇게 주장했지만, 이제 우리 시대에는 국가가 세금을 사용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원하고 관리하는, 더욱이 배우는 사람들 스스로가 상당한 돈을 갖다 바치는, 교육 기관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는 "악당이어도 좋다. 돈만 많이 벌게 해다오"라고 외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윤재를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맨더빌을 정반대 방향에서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13쪽)
맨더빌의 한국어판 역자는 맨더빌의 태도를 '차가운 머리'는 가지고 있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맨더빌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했다. 그럴듯한 겉꾸밈에 속지 않을 만큼 그에게는 차가운 머리가 있었다."(82쪽) 그래서 그는 당시의 위선적인 도덕 운동,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분수, 곧 신분 질서를 지키라고 가르치려는 것"(26쪽)을 비판했다. "그러나 따뜻한 마음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는 남의 속마음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남의 어려운 처지에는 좀처럼 공감하지 않았다."(82쪽)
바로 이 지점에서 최윤재 교수는 애덤 스미스를 데리고 온다.
"스미스는 있는 그대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제 일이든 남의 일이든―적절한지를 물었다. 그리고 그 적절성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지 물었다. 적절하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 함께 화를 내는 것이고 이것이 정의를 세우는 바탕이 된다. 스미스가 말한 '공정한 관찰자'는 있는 그대로 보되 적절성을 판단하는 관찰자다." (82쪽)
우리는 맨더빌에서 출발하더라도 스미스를 따라서 더 나아가야 한다. "맨더빌은 돈 벌 욕심을 아예 버리라는 낡은 도덕을 비판한 사람이다. 그런 맨더빌을 따라 돈 벌 욕심을 받아들이되, 나 돈 벌자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흐르게 하는 짓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스미스의 도덕 감정이고 그런 짓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칸트의 도덕 원칙이다. 공정한 사회는 그 위에 세워진다."(7쪽) 바로 이 도덕 감정에, 도덕 원칙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스미스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가? 역자 자신도 언급하고 있듯이, 스미스는 인간에 대해 더 깊이, 더 진지하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이 저자(맨더빌) 생각은 거의 모든 점에서 잘못되었지만, 어느 특정한 방식으로 본다면 사람 본성에는 얼핏 그의 생각이 맞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도 있다. 맨더빌 박사는 이 겉모습을 조잡하고 거칠긴 해도 생생하고 재미나는 말솜씨로 그려냄으로써 그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했는데, 서툰 사람은 여기에 쉽게 빠져든다." (48~49쪽, <도덕감정론> 7부 2편 4장)
스미스는 맨더빌 자신(183~5쪽)이 노상강도나 도둑이나 살인범조차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 연민(pity) 또는 동정심(compassion), 동료의식(fellow-feeling)으로부터 도덕의 원리를 찾아내고 도덕 체계를 세운다. <도덕감정론>(1부 1편 1장)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상정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 원리들이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과 동정이 이런 종류의 원리이다." 스미스는 이런 감정들을 동감(sympathy)이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스미스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감정'에서 출발해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상업 사회에 대해서도 맨더빌과는 전혀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있다. 맨더빌은 사회를 '나라/정치체제(body politick)'라고 하면서, "나라라고 하는 것은 제 몫을 얻으려면 남을 위해 일해야 할 줄은 알 만큼 힘이나 설득으로 깨우치게 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이며, 한 사람 밑에서 또는 다른 형태의 정부 밑에서 각자는 전체를 따르고 전체는 능숙한 통제로 하나처럼 움직이는 집단이다"(238쪽)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권위주의'의 결합체인 '신자유주의'의 '18세기 판'을 보는 것 같다. 반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는 '평등, 자유, 정의의 자연적 체계'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도덕감정론>에서는 개인을 장기판의 말처럼 다루려고 하는 '체제의 인간(man of system)'을 비판한다.
그런데 최윤재는 맨더빌의 인간관에 대해 비판하고 분노하면서도 '개인의 악덕'과 '사회의 이익'을 연결하는 그의 방식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맨더빌은 '사회의 본질을 찾아서'에서 "개인의 악덕은, 솜씨 좋은 정치인이 잘 다룬다면, 사회의 이득이 될 수 있다"(264쪽)고 말한다.
최윤재는 이를 받아서 "엄밀히 말하면 그는 이기심이 그저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도 않았다. 거기에는 적절한 제도와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 문제를 "스미스를 비롯하여 지난 200여 년간 경제학이 찾고 있는 중"이라고 주장한다.(81쪽) 그리고 더 나아가 맨더빌의 "솜씨 좋은 정치인의 능란한 경영"(46쪽) 또는 "악덕을 베어내고 동여맬 정의"(120쪽)를 "하이에크가 말한 의도하지 않은 제도 발전보다는 현대 제도 경제학이 강조하는 주의 깊은 제도 설계에 더 가까운 생각"(46쪽)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최윤재의 이러한 평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과연 맨더빌의 체계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정의와 법, 훌륭한 정치인은 맨더빌의 체계 자체로부터 나올 수 있는가?
맨더빌의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이라는 논리뿐만 아니라, 그를 비판하는 스미스의 '개인의 이익, 사회의 이익'이라는 논리 속에는 쉼표(반점)가 하나 있다. 우리는 이 쉼표(반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여전히 많은 논쟁을 해야만 한다. 당연히 "스미스는 맨더빌의 논증이 특별한 형태로 표현된 스미스 자신의 순수한 자연적 자유를 위한 논증임을 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슘페터의 주장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