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렇습니까? 박민규입니다.

몇 달 전 <한겨레21>에서는 2000년대 한국 문학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인즉슨 최근 10년간 발표된 문학 작품 중 최고의 장편소설, 중단편소설, 시집 등을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2000년대 최고 작가와 이 시대 문학을 특징짓는 키워드 및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추천도 곁들어져 있었습니다.

기사가 나온 것을 보니, 문학 전문 기자 2명, 서점 MD 3명을 포함해 총 68명이 회신을 해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당연 여기서 나머지 63명은 문학평론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꼴에(?) 저도 63명에 속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만 동문서답을 하는 바람에 저의 회신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구둘래, '지난 10년, 문학은 이들 때문에 행복하였노라', <한겨레21>, 2010년 9월 3일(제826호))

제가 문학 비평을 하면서 받은 가장 당혹스러운 질문은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천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추천이 아니라면, 대충 얼버무릴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읽도록 권하는 일'이라면, 정말로 "이 작품 안 읽고 죽은 놈은 진짜 손해다'라고 말할 정도의 책이 아닌 이상, 그것을 권할 배짱은 없습니다.

하지만 설문조사를 거부할 배짱 역시도 없는 터라 일단 수락하기는 했습니다만, 최고의 장편, 단편, 작가와 같은 조항은 그냥 패스하고, 이 시대 문학계의 키워드에만 엉뚱하게 '문학동네'라고 써놓는 데에 그쳤습니다(물론, 그 이유에 대해 설명은 했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반응과는 상관없이 인기 투표의 결과는 잘 정리된 형태로 발표되었습니다. 소설의 경우, 김연수, 김훈, 박민규가 골고루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이라 할 수 있는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에는 박민규가 3김(김연수, 김훈, 김애란)을 제치고 1위로 뽑혀 '2000년대 문학의 아이콘'임을 과시했습니다. 이처럼 시대를 선도해가고 있는 박민규가 이번에 두 번째 소설집 <더블>(창비 펴냄)을 발간했으니, 문학계니 출판계니 언론계가 가만히 있을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터넷 서점을 보니 독자 평점도 그리 나쁘지 않는 같고요. 귀환한(돌아온) 한국 문학의 히어로를 반기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옵니다.

사실 저 역시 박민규가 2000년대 문학의 아이콘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일정 정도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평가를 문학적 평가와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소녀시대가 분명 오늘날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곧 그녀들의 음악성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니 듯이 말입니다. 물론 저는 누구처럼 가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래라며 '5초 가수' 운운하면서 그녀들을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소녀시대에 열광하는 이유가 가창력에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복면 작가의 기습


▲ <더블>(박민규 지음, 창비 펴냄). ⓒ창비
문학계에서 최근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 중 하나는, 작가에게도 어떤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자각입니다. 실제 소위 성공한 작가들을 하나둘 자세히 살펴보면, 나름대로 치밀한 이미지 메이킹이 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되는데, 이런 것 자체를 문학 외적인 것으로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문학가(소설가)란 본시 시장(마켓)을 떠나 살 수는 없는 존재(떠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한국 문학의 고질병입니다만)라는 점에서 보면,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것에 과민반응은 정말이지 촌스러운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많은 경우 문학에 있어 상업주의는 문학주의와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학주의야말로 문학이 마켓에서 가장 어필할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연예인에게 이미지 메이킹은 그 자체가 본질일 수도 있지만, 문학가에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쉽게 말해, 뭘 하든 다 좋은데, 무엇보다도 작품이 좋아야 그런 것도 애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 있습니다. 실제 작가의 이미지는 독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그 때문에 한때 문학상을 줄 때 얼굴을 본다는 괴소문(?)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얼굴까지는 안 보더라도, 주최 측이 가능한 한 젊은 쪽(기성 작가에게 주는 상이라면, 인기 작가)을 선호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즉 우리는 종종 박민규 소설에서 등장하는 엉뚱한 이미지 혼합이나 아연하게 만드는 퍼포먼스를 다소 기괴한 선글라스를 낀(어떤 사진은 레게 머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사진이나 그의 퍼포먼스(그는 황순원문학상 시상식에 복면을 쓰고 참석했고, 시상대에서 춤까지 추었다고 합니다)의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품이 허무맹랑하여 도저히 공감이 가지 않더라도 작가의 독특한 차림새를 보면, 그런 허무맹랑함이 도리어 작가적 개성으로 받아들여지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매우 독특한(또는 독창적인) 작가의 세계관이 반영된 매우 심오한 무엇이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작가가 아무리 "별 다른 생각 없이 한 것에 불과하다"고 호소해도, 비평가나 독자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도리어 뭔가 대단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다소 복잡한 최신 개념들과 일군의 이론가를 대동하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어떤 의미에서 작가의 노련한 의도에 충실히 속아주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작가에 대한 경외감에 시비를 걸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관대함이 지나칠 경우, 작품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방해받는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 소설집 <더블>의 책표지는 작가 박민규가 복면을 쓴 사진으로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으로 저자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는 것은 모든 새로운 시도에는 예외 없이 그 나름의 노림수가 내재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것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저자의 얼굴이 표지를 장식할 경우, 대개 자전적 이야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박민규라는 작가 자신이 이 책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일까요? 쉽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박민규의 소설은 박민규라는 작가 없이는 존립하기 힘들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복면'은 노출 욕망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면' 하니까 떠오르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일본의 소설가 마이조 오타로(舞城王太郎)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는 일본의 박민규와 같은 작가인데, 작품이 가진 파격성이나 새로움에서 가히 자웅을 겨룰 만합니다. 더구나 그 역시 복면 작가입니다. 그러나 이 두 작가에게 있어 '복면'이 갖는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나왔을 때, 적잖은 고급 독자들은 이 작품을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源一郎)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와 비교했습니다. 하지만 야구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두 작품 사이의 공통점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어떤 연관을 느꼈다면, 그것은 도리어 서사 행위 자체를 무의미화하는 이후 작품(예컨대 <핑퐁>)에서 그러합니다.)

'복면 작가'란 일본식 표현으로, 복면을 쓰고 등장하기 때문에 복면 작가인 것이 아니라, 이름은 물론 얼굴 등 프로필을 일절 공개하지 않고 시상식 등에도 불참하는 작가, 말 그대로 '작품으로만' 독자와 만나는 작가를 의미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사회적 공명심과 바로 직결되는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일본의 경우 적잖은 복면 작가들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마이조 오타로는 바로 그런 복면 작가 중 최근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작가인데, 출생연도와 고향 정도만 공개되었을 뿐, 어디서 무엇을 사람인지는 완전히 비공개인 채로 남아있습니다(단 인터넷에서의 활동은 일부 알려졌습니다).

(박민규와 마이조 오타로는 비슷한 시기에 소설가로 데뷔한 동시대 소설가입니다. 데뷔는 마이조 쪽이 조금 빠르지만(<연기, 흑 혹은 먹이>, 2001년) 문단의 인정을 받은 것은 2003년으로(<아수라걸>), 이 해는 박민규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지구영웅전설>로 두 개의 문학상을 받은 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박민규는 복면을 쓰고 선글라스를 걸치고 있을 뿐 복면 작가는 아닙니다. 즉 그의 복면(또는 선글라스)은 오로지 텍스트만을 부각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지우는 도구라기보다는 텍스트와 작가를 굳게 연결시키는 매개물로 봐야 정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가의 이미지가 텍스트와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작품의 세계관을 작가의 그것과 일치시키는 걸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작가와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도리어 작품의 세계관이 그만큼 위태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한없이 가벼워서 작가(현실 존재)라는 무게추가 없으면,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가 버릴 위험이 크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런 소설이 구원을 얻는 방법은 작가가 나서서 자신의 중력을 거부하는 형태로 현실을 다시 한 번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을 초월함으로써 성립된 그의 소설은 작가적 이미지 메이킹(복면 쓰기)을 통해 재차 부정됨으로써 역으로 어떤 현실감을 획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장르 문학을 만든 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박민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새롭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당한 반응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먼저 우리는 소위 박민규식 허무맹랑한 서사를 오래 전 장정일의 단편들(<아담이 눈뜰 때> 등에 수록된)에서 읽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기인 서브컬처에 대한 직간접적인 도용과 그로테스크한 이야기 전개 역시 백민석의 소설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박민규는 백민석이 더 이상 소설 쓰기를 포기한 바로 그 해(2003년), 두 개의 문학상을 한꺼번에 받고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마치 '바통 터치'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한국적 맥락에서 박민규를 문제 삼는다면-국제적인 맥락을 문제 삼는다면, 우리는 앞서 언급한 마이조 오타로와 커트 보네거트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장정일은 논외로 하더라도 백민석과의 비교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두 작가를 비교하는 글은 거의 본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아마 백민석의 경우 일반 독자의 관심을 얻는데 실패한데 반해, 박민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대 문화(서브컬처)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나름대로 문학을 재정립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보면, 둘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유사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백민석이 얻지 못한 독자를 박민규는 어떻게 얻을 수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박민규의 인기는 백민석 소설에는 없는 유머(사실상 개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단 두 작가 모두 현실세계를 서브컬처의 세계로 덧칠하고 전통적 소설에서 등장하는 등장인물로부터 내면을 적출하여 캐릭터로서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민규의 소설에는 백민석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울함과 어두움은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명랑하고 경쾌하기까지 한데, 제가 보기에 그것은 '초'장르적인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이에 비하면 백민석은 <목화밭 엽기전>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장르의 규칙에 비교적 충실한 편입니다).

이를 조금 더 설명해보기로 하지요. <더블>에 실린 단편들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여러 가지 장르(SF, 재난물, 로드물, 서부극, 판타지, 드라마)를 도용하여 박민규식 소설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위 기사에서 가져옵니다).

"박진 문화평론가는 '장르 혼종'이라는 2000년대적 현상의 중심에 박민규가 있다고 말한다. "2000년대는 역사 소설, SF, 판타지, 추리물과 스릴러 등 그동안 순문학이 아닌 대중문학이나 하위 장르로 평가돼왔던 경향이 문학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적극적으로 교섭·혼종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이제 누구도 장르 문학(대중문학)과 본격 문학의 경계를 가를 수 없는 시대, 그것이 얼마나 인위적인 구획이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경향이 2000년대 들어 문학의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으며 문학에 대한 배타적인 선입관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이런 경향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준 작가는 박민규이고, <지구영웅전설>, <핑퐁> 등의 장편소설과 단편집 <카스테라>가 그 좋은 예다."

쉽게 말해, 박민규는 그동안 하위 장르로 평가되던 장르 문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본격문학의 폐쇄성을 내부적으로 쇄신시켰고, 그를 통해 바른 의미에서 '문학'을 구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요? 박민규가 장르 문학의 요소를 다량 도입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곧바로 장르 문학에 대한 포용, 그리고 그것을 통한 본격 문학의 쇄신으로까지 간주하는 것은 너무나 앞서 간 게 아닌가 합니다. 문제가 되는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것들은 소위 말하는 장르 혼합이나 장르 쇄신이라기보다는 장르 학살에 가깝습니다.

SF를 도입하든 판타지 형식을 도입하든 그가 도입하는 것은 순전히 개별 장르의 분위기뿐입니다. 즉 그의 손에 의해 도입된 장르들은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로(장르 규칙 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 없습니다) 얼마간 이용된 후 이내 내팽개쳐지는데, 문제는 그가 바로 그런 파기 행위에 자신의 독창성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고 보면, 박민규는 애당초 개별 장르들에 존재하는 보편성을 인정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장르를 오로지 '장르'로서만 받아들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장르의 개별성이라기보다는 그것이 가진 일반성(쉽게 폐기처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잔인한 작업은 무언가에 대한 강력한 신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약간 다른 측면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가로서 박민규는 일견 반문학적 행위의 대표자(전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제스처를 취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반문학적 행위가 가진 '문학성'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학에 대한 신뢰감은 자신의 창작 행위에 존재하는 '성실성'(그는 청탁을 펑크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에 대한 강조와 나란히 합니다. 문학계에도 마침내 주당들의 시대는 가고 샐러리맨의 시대가 온 셈입니다.

그렇다면(어차피 그렇게 내버릴 거라면), 그는 왜 그토록 장르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혹시 그것은 '장르'야말로 작가가 현실 세계(현실적 문제)로부터 벗어날(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이런 탈출(거리 두기) 자체가 그의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로부터 '되돌아옴(장르 학살)'이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장르'로의 도피로만 끝났다면, 그는 아마 문단에서 논할 가치가 없는 작가로 취급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련하게도 그는 '현실로 되돌아오는'(장르로부터 재탈출하는) 결말을 선호합니다.

어떤 작가가 현실적인 문제와 정면으로 씨름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가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치열함과 그 결과(성공이든 실패든)를 모두 참조해 종합적인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작가 자체가 드문 오늘날, 장르로 도망친(도망친 것처럼 한) 작가가 현실 세계로 귀환하는 제스처만 취해도, 다른 작가들(현실과 씨름을 하는 작가)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이제 무언가를 제대로 보여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뭔가를 보여주는 대신에 '귀환'만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4. 민규가 우리 문학을 지켜줬어요.

이런 귀환에 대한 평가는 최근 그에 대한 '종합적 평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더블>에 실린 '근처'(황순원문학상), '누런 강 배 한 척'(이효석문학상)과 작품은 뜻밖에도 반(反)박민규적 서사 방식(고전적 서사)을 채용하고 있는데(그런데 많은 독자들은 도리어 이 두 작품을 <더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들로 꼽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이를 일종의 '긍정적 변화'로 보며 높은 점수를 준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이 작품들이 박민규의 것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수상작에서 제외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反)박민규적(즉 문학적인) 소설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요? 이것들은 그들의 지적처럼 정말로 새로운 변화의 징후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도리어 그런 소설들이야말로 가장 박민규적인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하고 물으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아쉽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는 그의 출세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도 간단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의 깊게 읽으신 분이라면, 이미 눈치를 채셨을 테지만, 이 작품은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개의 서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반부가 주인공의 소년기를 프로야구에 대한 재치 있는 장광설로 풀어낸 유머 서사라면, 후반부는 느림(또는 루저)의 미학을 다소 고전적인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는 전통 서사입니다. 전반부가 너무나 재미있어서 후반의 지루함을 기억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많을지 모르지만, 다시 한 번 읽어보시면 아마 그 차이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 작품을 처음 읽고 가진 위화감은 이런 단절감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일단은 꽤 흥미로웠던 전반부의 경쾌함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짐으로써 항간 떠돌았던 표절론(한 야구광의 인터넷 게시물에서 야구 지식을 대량으로 차용했다는 점에서)을 되돌아보게 만들었고, 그것은 곧바로 후반부의 '심각함'이 의도적인 배치라기보다는 전반부의 경쾌함 자체가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었기에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과 손을 맞잡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저는 전반부는 유쾌한 낚싯밥에 불과하고 후반부의 '심각함'이야말로 어쩌면 박민규 문학의 본질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1) 서브컬처(세대 코드)에 대한 집요한 고착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개그, 그리고 2) 그런 것들 뒤에 숨겨진 문학적 야심(문학주의)이 함께 존재한다는 점에서 박민규 소설의 양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그만의 트레이트 마크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없습니다(인기가 가장 있지만요). 소위 박민규식 상상력은 이 둘이 결혼하여 낳은 장르 학살(또는 장르 혼합) 쪽이라 하겠는데,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이후 <지구영웅전설>, <핑퐁> 및 상당수의 단편들을 통해 박민규 문학의 주류로서 자리를 잡습니다(<더블>에 실린 단편들도 실은 절반 이상이 그에 해당됩니다).

정리하자면, 박민규 소설을 떠받치고 있는 것으로는 크게 '서브컬처', '문학주의', '장르 학살'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삼위일체의 형태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들어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또는 어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변화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이들 사이에는 어떤 위계(이를 테면, 성부, 성령, 성자이라는)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차치하고 박민규 작품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서브컬처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백민석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기본적으로 유아기(적 대상)에 대한 집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그가 도용하는 서브컬처라는 것도 서브컬처 일반과는 전혀 무관한, 이를테면 작가가 성인이 되기 이전(특히 유소년 시절)에 경험한 문화 체험이나 특정 사물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좋게 해석하더라도 그의 서브컬처에 대한 집착에는 기본적으로 퇴행적인 면이 존재합니다. 작품 속에서 똥이나 우유가 자주 등장하고 성기 장난을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삽입되어 있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박민규식 상상력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지구계'라는 발상도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블>에서는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주었어요'나 '축구도 잘해요' 등이 바로 그런 작품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박민규식 '지구계'를 라이트노벨의 '세카이계(世界界)'와 비교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라이트노벨은 "사회를 묘사하지 않는 소설이 과연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가능하다!"고 답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진 문제점을 자세히 검토하는 것은 우리의 논의를 크게 벗어납니다.

('세카이계'란 작은 관계(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문제가 구체적인 중간항(사회)을 상실한 채로 추상적인 대문제(세계의 위기, 세계의 종말)로 직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최종병기 그녀>나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과 같은 작품은 들 수 있는데, 이는 비단 몇몇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라이트노벨에 존재하는 세계관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바로 그런 의미에서 라이트노벨은 '근대소설 이후의 소설'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유사한 세계를 보여주는 박민규 소설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그의 소설은 과연 근대소설로 분류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 이후의 소설'로 분류해야 할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앞에서 내린 바 있는데, 박민규는 사회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아니 제거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다고 표현해야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근대 문학'이란 결국 그가 귀환할 곳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블>이 보여주는 다채로움에 대해 마냥 감탄만 하고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생이 없는 아이가 레고 블록을 가지고 자신만의 성채를 만들었다가 해체하는 행위(TV 만화영화 내용을 재현해 보았다가 다시 무너뜨리는 것)를 반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이런 파괴 행위에서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결국 가상세계에 불과하며, 엄마(문학주의)가 등장하면 이 모든 혼란이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장르 학살 자체를 심각하게 분석하고 여러 방면에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문학 연구자에게는 가치가 있는 일일지 모르지만(외국 이론가 한두 명만 등장시키면, 그럴듯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비평가가 할 짓은 못됩니다. 그리고 정확히 반대의 의미에서 '근처'나 '누런 강 배 한 척', '낮잠'도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들 작품이 가작인 것은 확실하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민규를 한국 문학의 희망으로 여긴다면(이는 그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선택된 것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의 소설들이 한국 문학의 딜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한국 문학의 유아 성애를 충족시켜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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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창비 펴냄)을 눈앞에 정렬해 본다. 마스크를 쓴 두 명의 박민규가 등을 맞대고 있다. 'Double ArtBook'이라는 표제를 단 속지(?)도 함께 놓아 본다. 코팅지로 된 책 표지의 질감 때문에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다는 'LP 같은 느낌'을 얻을 수는 없지만, 이 자체로 하나의 '물건'이라는 생각만큼은 뚜렷하다.

2005년 이후 발표된 작품들 18편을 묶은 박민규의 소설집 <더블>을 두고 어떤 말을 더할 수 있을까, 소설집마다 으레 있는 해설 비평도 없고 작가의 약력조차 지워버린 마당에, 라는 생각을 지워준 것은 <더블>이 하나의 물건이라는 느낌이다. 그의 소설들이 사물의 질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무게가 있으며, 그 무게로 가라앉지 않도록 발판 또한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박민규의 소설 세계에는 바닥이 있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다.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이 어떻게 짜이든, 발을 디딜 수 있는 단단한 바닥 곧 우리의 일상이 전개되는 현실의 층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다. 하루키나 몇몇 젊은 작가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현실성이 박민규의 모든 소설에는 뚜렷이 있다.

박민규 소설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근처>나 <낮잠>, <아치> 등에서만이 아니라, SF로 분류될 수 있는 <깊>이나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아스피린> 등에서도 우리는 사건들이 뿌리를 박고 있는 땅바닥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주변의 특정 장소를 가리킬 때뿐 아니라 장르 문학 고유의 가상의 공간일 때도 그 땅바닥은 확실히 존재한다.


▲ <더블>(박민규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인물들이 발을 디디고 사건이 뿌리를 박는 이러한 바닥은, 일견 가볍고 경쾌해 보일 수 있는 문체가 담아내는 무거운 이야기들을 지탱해 준다. 원리를 말하자면 반대로 써야 할 것이다. 무거운 이야기들을 제시하기 위해 단단한 바닥이 마련되었다고. 박민규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독특한 문체 외에 말이다.

박민규의 소설이 이 사회의 소외된 자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음은 따로 말할 것도 없이 분명하다. 한 편 한 편마다 책장을 다 넘기고 나서 잠시 눈을 감아 보기만 해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박민규 소설 세계의 바탕색이라는 점 또한 자명해진다.

박민규가 풀어내는 사건들 그가 제시하는 인물들은 항상 우리의 삶에 닿아 있다. 사회의 하중을 견뎌내는 평범한 사람들이 땀과 눈물, 똥오줌을 분비하면서, 우리의 몸이 지구 위에서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감내하는 무게를, 새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의 소설들은 하나의 물건으로, 사물로서, 자신의 무게를 갖는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박민규의 소설을 읽는 일이 고통스럽거나 괴롭기는커녕 매우 즐겁다는 점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대답이 제시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인 저 독특한 문체와 눈에 띄는 행갈이 방식, 글자의 크기를 달리한다든가 글자에 색을 입힌다든가 하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형식 등이 한쪽 이유라면, 현실을 자유로이 초월하면서 일상의 소재를 독자적으로 변형시키는 거침없는 상상력이 다른 이유가 된다. 이 중에서, 박민규 소설 읽기가 즐거워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상상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상의 결과가 아닌 문학이 어디에 있겠느냐만, 박민규가 펼치는 상상의 세계에는 독특함이 있다.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황당하다 싶을 정도의 상상을 펼치지만 그러한 상상이 사실주의적인 기술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 하나고, 상상을 펼치는 작가의 시선이 인류와 우주에 닿아 있다는 점이 다른 하나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다. 상상 속에도 현실이 있고, 그 현실이 우리의 일상에 닿아 있으며, 이 일상은 소외된 자들의 끈끈한 것인데, 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우주 속의 인류라는 지평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깊>이 보여주는 문명에 대한 통찰이 그러하고, <끝까지 이럴래?>에서 확인되는 종말과 비루한 일상의 병치가 그래서 가능하며, <양을 만들 그분께서……>의 적나라하고 부조리한 상황 또한 앞서 말한 바 일상과 지평의 거리를 한눈에 담는 시선 속에서 하나의 소설로 포획된다.

<크로만, 운>이나 <굿모닝 존 웨인>, <(龍+龍+龍+龍)>, <아스피린>, <딜도가……>, <슬> 등 장르 문학으로 분류될 법한 작품들은 물론이고, <근처>나 <누런 강 배 한 척>, <낮잠> 또한 그러하다. 다분히 이상화된 추억이 가리키는 인간적 인류적 보편성과 일상의 쇠잔한 육체가 일깨우는 현실이 '바로 이 작품'으로 구체화된 데는 양자의 간극을 개의치 않는 상상의 힘이 작동하고 있다.

<루디>나 <별>, <아치>는 어떠한가. 죽음과 살인의 문턱을 앞에 둔 극한적인 상황과 일상 현실의 문제가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 놓인 채, 스토리를 풀어내는 작가의 시선이 위에서 굽어보고 있다. 우리 시대의 단면을 통찰하는 시선과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이질적인 삶들의 현장, 이 둘 사이의 거리가 경계를 모르는 상상력에 의해 채워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박민규 소설에 일반적인 것이어서 <더블>뿐 아니라 <지구영웅전설>이나 <핑퐁>, <카스테라> 등에서도 어김없이 확인된다(박상준, '한없이 초라한 인류에게 주는 박민규의 영가', <크리티카> 4, 2010). 이들 작품에서처럼 가볍고 경쾌하게 상상의 나래를 펴든,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처럼 잔잔하고 담담하게 은근히 상상의 세계를 깔아놓든, 그의 소설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대위법이 자리한다.

이 시대에서 소외되어 눈물콧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일상이 땅바닥을 딛고 제 무게를 지탱하는 한편, 그 비루한 현실의 비루함을 보다 근본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작가의 시선이 하늘과 별과 우주 가운데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더블>을 포함한 모든 작품에서 뚜렷한, 하늘과 땅 사이의 이 거리를, 박민규 특유의 문체가 슬쩍 가려주고, 두 근본에 닿아 있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상상력이 채우고 있다.

이 문체와 이 상상력 덕분에, '사회에 대해 비판적·반성적이되 가치 평가 체계를 내재한 완결된 의미체를 용납하지 않는' 박민규의 소설이 독자의 사랑을 받게 된다. 풀어 말하자면, 그의 이야기를 즐겁게 따라가다 읽기를 마치고 보면 마음속에 어느새 깊은 의미가 뚜렷한 잔상을 남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 잔상이 중독성이 있어 다시 그의 소설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일상의 파노라마를 극적으로 펼쳐주면서 우리네 삶의 속살을 땅과 하늘에 그려놓는 방식, 박민규 소설의 중독성은 여기서 유래한다.

우리 문단에서 <더블>이 갖는 이질성을 새삼 말할 필요가 있을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둔한 말로 지금껏 표현해 본 박민규의 소설 세계 자체가 21세기 한국 문학계에서 실로 독특한 것이다.

<더블>이 보이는 장르 문학 관습의 활용은 이 맥락에서 거론할 것이 못 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 등에 대해서 그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조건적으로 반영론을 고수하는 완고함이나 조금 자유로워졌다 해도 여전히 재현의 미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면, 바로 그러한 이유로, <더블>을 두고 장르를 이야기할 일은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팬덤의 세계에서 본다면 박민규는, 너무, 무겁고 그만큼 거리가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더블>의 이질성은 그것이, 꿋꿋하게 그래서 새삼스럽게, 육체의 무게를 끌며 우리가 맞닥뜨리는 일상생활의 현실성을 중시한다는 데서 온다. 넓고 유려한 상상의 날갯짓에 의해 언뜻언뜻 보이는 이러한 현실성, 그것을 이루는 몸뚱이와 땅바닥으로 해서 <더블>은 하나의 사물처럼 자신의 자리를 오롯이 지키고 있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박민규의 소설 세계는 서로 이질적인 많은 것들을 흡수하지만, 잡동사니가 뒤섞여 있는 장난감통이 아니다. '박민규적인 것'과 '박민규답지 않은 것'에 '장르적인 것'까지 표면상으로는 혼재하는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하늘과 땅바닥에 걸쳐 근본적인 상상력을 펼치는 한편 형식의 가벼움으로 읽는 고단함을 달래주는 그의 소설 세계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다른 차원으로 우리를 이끄는 웜홀이다.

우리 문단에 튼실하게 뿌리를 박은 사물인 그 구멍은, 21세기 한국 문학의 새로운 길을 열어내는 하나의 채널일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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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장을 덮고, 서평을 쓰려니 막상 이 책을 나에게 턱 하니 안겨준 <프레시안>이 참 얄밉단 생각이 든다. 이토록 묘한 만남이 어디 있단 말인가. 20년 전의 해직 교사가 쓴 글을, 20년 후의 해직 교사가 읽고 평을 쓰게 되다니.

결코 얇지 않은 책을 사흘 동안 앞으로 뒤로 읽고, 되새기고, 읊조렸다. 책장 사이사이 눈물도 많이 배었다. 지하철에서 문득 펴들었다가 이내 코끝이 시큰시큰해져 머쓱한 마음에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몰래 소매로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그렇게 이 책,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이상석 지음, 박재동 그림, 양철북 펴냄)는 20년의 세월을 지나 지금을 살고 있는 나와 마주했다.

2008년 12월, 일제고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해직을 당했다. 교직 생활 2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선택에 후회는 없었기에 말도 안 되는 징계 앞에서도 기죽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누구보다 더 씩씩하게, 아직 한참 어린 해직 막내니까 '뭘 해도 잘 살 수 있다' 며 호기롭게 여겼다.

그러나 생각보다 마음의 상처는 깊었다. 수업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던 나였다. 학교에서 모질게 짓밟혀도, 잘 시간 아껴가며 다음 날 가르칠 것 고민하는 순간이 참 행복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일과 마음 주던 아이들을 억지로 빼앗겼으니 상처가 없을 리 없었다. 깊은 상처 앞에서 내가 택한 방법은 '도망'이었다. '선생님'으로 살았던 지난 2년 8개월의 세월을 마치 잊어버린 듯 지내는 것.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잊고, 지우고, 벗어나려 발버둥 치며 조금씩 기억은 흐려지고 마음은 무뎌져만 갔다. 그런 그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이 책 앞에서 나는 결코 담담할 수가 없었다. 서평이라는 것은 책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한 평을 조목조목 하는 것인데 나는 도저히 평을 쓸 만큼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있는 그대로 오롯이 나의 이야기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있었던 아이들과의 삶을 오밀조밀 풀어낸 장에서는, '나도 아이들과 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혹은 '아, 부럽다! 나도 교실에서 딱 저렇게 해봤으면 좋겠구나!' 하며 공감하고 감탄하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이상석 선생님의 교실이 얼마나 따스하고 감동이 넘쳤는지 마치 그 반 아이가 된 듯이 느낄 수 있었다. '교사도 인간이다'라는 말보다 '교육자는 인격적으로 완성되어야만 한다'라는 명제가 너무나 당연시되는 이 사회에서 인간적으로 완성되지 못해 늘 고뇌에 빠져야만 했던. 너무나, 너무나 인간다운 한 교사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이상석 지음, 박재동 그림, 양철북 펴냄). ⓒ양철북
모든 내용들이 그러했지만, 특히 '교사'란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견뎌야 했던 고통의 세월을 담은 장에서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감히 교직 생활 30년의 세월에 견주겠냐마는, 그 짧은 시간 교사로 살면서도 그 아픔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좋은 선생 해보겠다고 제 시간 아껴가며 수업을 고민하고 교실 삶을 꾸려보아도 그 꿈은 이 땅의 교육 현실 앞에서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입시 외에 다른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 경쟁 교육,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는 교사를 향한 동료 교사들의 질시어린 눈빛, 권위로 찍어 누르려고만 드는 교장의 모습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꼭 같은 틀로 찍어놓은 것 마냥 그대로다. 비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이며 억압적이고, 보수적이고, 권력에 휘둘리는 교육 현장에서 발버둥 치며 마지막으로 남은 교육자로서의 양심을 지키려는 처절한 노력 앞에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과 잘 살아보겠다며 뭐든 해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고작 2년 8개월을 채워먹은 나는, 무겁기 짝이 없는 현실에 짓눌려 지치고 길들여져 갔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현실은 너무나 무거웠다. 작게는 동료 혹은 선배 교사들의 시디 신 눈초리부터, 뼛속까지 스며드는 외로움, 크게는 이놈의 엉망진창인 교육 정책까지.

자꾸 작아지려고만 하는 자신을 단단히 붙잡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 나에게 있어 일제고사와의 싸움이었다면, 이상석 선생님 앞에는 '교육 민주화'라는 어마어마한 짐이 놓여 있었다. 해직의 생살 찢어지는 고통, 그리고 복직을 위한 기나긴 어둠의 시간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 할까. 일제고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전국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지부를 돌아다닐 때마다 해직 교사인 우리들을 보면 누구보다 먼저 다가와 손을 꼭 잡아주던 이들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건강 꼭 지켜야 합니다"라며 어깨를 토닥이던 사람들. 1989년 그 지옥 같은 나날을 온몸으로 겪으며 그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

해고자 단결 투쟁을 위해 명동성당 앞에서 1000여 명의 동지들과 어깨를 걸고서 참교육을 부르짖으며 나아가던 그 뜨거운 순간. 유치장에 갇혀서도 모여 앉아,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교단에서 아이들과 함께 부를 노래를 부르며 목이 메었던 순간. 그 순간의 기록들을 읽으면서는 다시 한 번 '전교조' 의 존재 이유에 대해 되새겨 보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뜨거운 마음으로 태어난 조직이던가.

누군가는 '전교조는 변했다' 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참교육과는 멀어졌다' 고 말하지만 그 20여 년의 세월동안 이끌고 지켜온 것은 이 뜨거운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또 다른 누군가의 뜨거움 아니었던가. 무엇 하나 얻는 것도 없으면서 '빨갱이' 소리 들어가며 해직의 공포를 끌어안고서도 밑바닥에서 잘 살아보려 노력하는 한 명 한 명의 교사들의 힘 아니던가. 어쩜 이렇게 전교조를 둘러싼 현실도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인가. 이런저런 생각 와중에 또 한 차례 해직을 앞둔 300여 명의 동료 교사들이 떠오르자 그저 한숨만 새어나올 뿐.

책을 다 읽은 뒤, 나는 다시 한 번 앞 장을 펼쳐 책의 앞머리에 실린 이상석 선생님의 글을 읽어보았다.

"아! 그러나 솔직히 말합시다. 돌아간들 무얼 가지고 즐겁게 삽니까? 무슨 일에 열정을 바칠 수 있습니까? 아이들과 내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20분도 안 됩니다. 쉼 없이 돌아치는 자습, 수업, 시험, 학원, 야자, 특강….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수업, 수업도 문제 풀이 수업뿐입니다. 언제 아이들과 삶을 나눌 수 있습니까."

눈물과 감동이 있던 그 시절 이야기, 20년 전의 이야기. 지금보다 더 거센 억압 속에서도 사람 사는 재미가 그대로 살아있던 그 교실의 이야기가 너무나 부러웠다. 나도 꼭 다시 돌아가 그런 수업을, 그런 감동을 만들어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은, 과연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감동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었다. 교사들의 학력은 더욱 높아지고 아이들의 형편도 예전보다 나아졌다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삭막하다 못해 정이라고는 바싹 말라버린 요즈음인데.

야성을 가진 아이들이 되기를 바란다는 이상석 선생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가슴에 와 박혔다. 반항할 줄 모르는 아이들, 눈빛이 이미 죽어있는 아이들, 수업 시간을 '때워야 하는 시간' 으로 아는 아이들, 배우고 익히는 데 뜻이 없는 아이들, 혹은 배우고 익히는 것을 그저 기계적으로 점수 내는 것으로만 아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앞에서 나날이 무너지는 자존심을 부여잡으며 하루를 살아내는 것으로 족한 교사들….

해직된 지 2년이 지났다. 첫 재판에 이어 항소심도 승소하면서, 복직에 대한 희망도 점점 부풀어만 갔다. 곧 교실로 돌아가리란 기대에 머릿속에 돌아가면 아이들과 할 많은 일들도, 교실의 모습도 떠올려보곤 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거듭 꺾여만 갔고, 결국 재판은 승소임이 너무나 분명한데도 대법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진보 교육감의 당선에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제고사 싸움과 교원평가제, 엉망진창으로 바뀌어 버린 교육 과정과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의 물결 속에서 만일 당장 학교로 돌아간다 해도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또 지독한 싸움을 이어가고, 거리로 내쫓길지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결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은, 어떻게든 아이들을 만나고 싸워야 할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 긴 싸움의 길에 지칠 때, 몇 번이고 이 책을 펼쳐들고 읽어야겠다. 사랑과 감동이 넘치는 교실을 되찾기를 간절히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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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 프로젝트라?

얼마 전 친구의 초등학생 아들이 성기의 크기 때문에 심한 고민에 빠졌단 말을 들었는데 박현욱의 <동정 없는 세상>이나 미국 영화 <아메리칸 파이>처럼 남자 아이들의 성에 관한 이야기인가? 표지의 알록달록한 제목부터 흥미를 끄는 이 책은 나의 음흉한(?) 예상과는 달리 지금은 우중충하고 칙칙하게 살지만 언젠가 화려한 비상을 꿈꾸는 한 여학생의 성장담이다.

소설가를 꿈꾸는 '수선'은 어수선한 삼겹살집에서 일하는 틈틈이 책을 읽다, 주인에게 들켜 주방의 질척거리는 바닥에 책이 내팽개쳐지는 참사를 당한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헤밍웨이보다 존경하는 작가 이보험의 책, <변비의 최후>를 보물처럼 아끼며 소중히 간직해 왔던 터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식당을 박차고 나가지만 이내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온다. '종업원이 일하다 뛰쳐나가면 그만이지 머리채까지 잡으면서 끌고 올 이유가 뭐란 말인가' 하며 악덕 주인을 욕하고 있을 때 쯤, 주인이 바로 주인공 수선의 아버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작가의 유머 감각에 미소를 짓게 되는 대목이다.

외삼촌의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빚을 갚으려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최저 임금도 못 미치는 2만 원에 혹독하게 부려 먹는 아버지 밑에 사는 가정사도 칙칙하지만 수선의 학교생활도 그리 화려하진 않다. 수업은 지루하고 서울의 4년제 대학은 꿈도 못 꾸는 성적에 외모가 예쁜 것도 아니고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어서 선생님들의 관심 밖에 있는 평범한 학생이다. 소설 속 교실 풍경은 자꾸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언제부턴가 학교는 학원으로 변해 버렸다. 선생도 교과서 대신 서점에서 파는 문제집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문제집을 사지 않으면 수업을 들을 수 없고 대학에도 갈 수 없었다. 문제집이 왕이었다." (71쪽)


▲ <번데기 프로젝트>(이제미 지음, 비룡소 펴냄). ⓒ비룡소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을 가르치며 교사로서 민망함을 느낀 것이 이 대목이었다. 대학 입시가 목표가 돼 버린 학교, 하지만 언제부턴가 전국 고등학생들의 염원이 되어 버린 서울의 4년제 대학에 갈 수 있는 학생은 한 반에 1~20% 정도이고 나머지 학생들에게 대학수학능력시험 공부는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는 척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교사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것처럼 말해야 하고 또 그렇게 믿어야만 학생들은 이 지루한 학교생활을 버틸 수 있다. 모두 '눈 가리고 아웅'이다.

수선의 이런 답답함을 해결해 준 것은 소설이었다. 우연히 게시판에서 대학에서 주최하는 백일장 공고를 보고 수업 시간에 몰래 쓴 소설이 우수상을 타게 된 것이다. 공부를 못하더라도 대학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을 하면 꿈에 그리던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들어갈 수도, 흠모해 마지않는 작가 이보험의 제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없는 시간을 쪼개 글쓰기에 매진한다. 문학 교사 허무식은 이런 수선을 위해 문학 코치까지 자처하며 도와준다.

성적이 좋지 않아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길이 있긴 하다. 소설 속의 수선처럼 글을 잘 쓰거나 발명품 대회에서 상을 받거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스펙'이란 걸 잔뜩 쌓아 수시 입학 원서를 쓸 때 자기 소개서에 쓸 수 있는 내용이 넘치거나, 얼굴이 초절정 꽃미녀라서 TV에 얼굴을 많이 알린 연예인이라면 수시 합격도 가능하다.

그러나 각종 스펙(가볍게 해외 봉사 정도?)을 쌓을 수 있는 넉넉한 가정에서 자라거나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학생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다수의 학생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아닌, 세상 사람들의 잣대로 보면 '루저'요 '잉여 인간'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풍부한 상상력과 그것을 글로 엮는 솜씨를 가진 수선은 평범한 학생들과는 다른 행운아다. 수선의 비범함은 소설의 중반으로 갈수록 더욱 드러난다.

"작가에게 없어선 안 될 재능이지. 일종의 연기력이야. 어떤 특정한 상활 속에 너 자신을 놓고 너라면 어떻게 할까 상상하는 능력을 말하는 거야. 대개는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인물을 부담스러워하거나 따로 노는 느낌이 많은데 넌 아주 자연스럽게 이 역할에 몰입하고 있어." (109쪽)

수선은 이런 능력으로 인터넷 카페의 모임에서 만난 한 남자의 꿈 이야기를 소설로 써 내고, 남자가 그 소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면서 새로운 미스터리가 시작된다. 왜 남자가 그토록 수선을 압박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소설의 흥미를 더하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퍼즐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음습한 기운은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고. '소설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언제 이 미스터리의 매듭을 지으려고 하나' 하는 쓸 데 없는 걱정까지 하게 한다.

어쨌든 삼겹살집에서 고기나 자르고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던 이 구질구질한 여학생의 번데기 프로젝트는 결론적으로 성공이다.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소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써서 각종 문학 공모에서 수상하며 문예 특기자로 대학을 입학했다." (앞날개 작가 소개)

수능 최저 등급의 난관을 통과해 대학에 진학하고 존경하는 선배 작가의 가르침을 받아 소설가로서 문학상까지 수상한 작가의 프로필을 보니 소설은 끝났지만 주인공 수선의 미래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은 상큼한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아! 어쩌란 말이냐! 나비가 되려고 죽은 듯 살고 있는 수천, 수만의 번데기들이 모두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나비가 되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나비만 가득 찬 세상 역시 있을 수 없다. 풍뎅이도, 개미도 벌도 심지어 모기에게도 존재의 이유는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것을 다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고 싶은 것이 없어도 좋고, 꿈이 없어도 좋고, 못하는 것이 많아도 좋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기만 하다면 우리의 본질은 언제나 꽤 괜찮은 것이라고."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중에서)

자! 이제 교실로 가서 나의 '찌질한' 청춘들을 더 많이 사랑해 줘야겠다. 나비가 못 되어도 괜찮다고 말해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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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법정 안 풍경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판사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데 검사나 변호인은 자유롭게 법정 안을 거닌다. 둘째, 자유롭게 법정 안을 거닐던 변호인은 밑줄 그어가며 기억하고 싶을 만한 철학적인 이야기만 골라서 말 한 번 더듬거리지 않고 술술 풀어낸다.

셋째, 위증을 하던 증인 앞에 갑자기 변호인은 사건의 실마리를 풀 증거를 들이댄다. 가끔 즉석에서 새로운 증인을 신청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방청석 어딘가에 앉아 있던 증인이 조용히 일어나면서 증인석으로 걸어 나온다. 넷째, 새로운 증거와 증언으로 상황은 급반전되면서 억울한 누명을 쓴 피고인은 무죄를 선고 받는다.

다섯째, 무죄를 선고 받기까지의 피고인의 인생 역정, 정확하게는 무죄를 선고 받기 위한 변호인의 고군분투 과정이 법정에, 아니 영화에 그대로 연출된다.

그렇다면 현실은?

한 번이라도 형사 법정에 가본 사람이라면 기대를, 혹은 상상을 깨는 풍경에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은행 창구 앞에서 번호표를 들고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썰렁한 방청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사건 번호가 호명되기를 기다리기 마련이다. 기다리는 시간보다 재판을 받는 시간은 더 짧기 마련이어서 생소한 법률 용어들의 뜻을 이해하려고 정신을 가다듬을 찰라 '자리로 돌아가라'는 판사 혹은 법정 경위의 불호령에 피고인은 당황해 하며 방청석으로 돌아온다.

검사는 너무 많이 읽어서 그대로 외워 버린 듯한 상투적인 문장을 기계적으로 읊으며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형량을 법원에 구한다. 변호인은 이야기할 때만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다가 피고인보다 더 상반신을 굽실거리며 판사에게 선처를 해줄 것을 호소한다. 판사가 피고인에게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할 때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절대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대신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봐 주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인도 늘 그래왔듯이 딱딱하고 기계적으로 능수능란하게 소송을 진행한다. 오로지 이런 소송을 처음 해보는 피고인만이 '이게 아닌데'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다. 꽉 짜인 형사 재판의 틀 안에서 피고인이 자신의 인생 역정을 혹은 사정을 마음껏 이야기할 기회는 없다.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자신의 분노나 억한 심정을 형사 법정에 표출할 방법도 적당하지 않다. 신속성, 혹은 공정성을 이유로 판사는 귀와 눈을 막는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기가 막히고 적나라한 총천연색의 인생 극장이 형사 법정 안에서는 그저 사건 제○호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게 건조하다.

그렇다면 진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서 다 똑같은 살인자가 아니다. 돈을 훔쳤다고 해서 다 똑같은 도둑놈은 아니다. 범죄를 즐기는 사이코패스가 있는가 하면 (적당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있다. 그게 범죄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걸 범죄로 간주하는 법 규정이 더 문제가 있는 때도 있다. 범죄라고 볼 수 있는지 애매모호할 때도 있다. 예컨대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건 똑같은 데도 어떤 경우에는 단순한 채무 불이행으로 그칠 뿐이고 어떤 경우에는 사기로 처벌을 받기도 한다. 저마다 동기와 이유가 다르고 방법도 다르고 피해자와의 관계도 다르고 시간과 때도 다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실체도 다르다. 단정하건대 백 개의 살인이 있다면 그 백 개의 살인은 모두 다르다.


▲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지음, 김희상 옮김, 갤리온 펴냄). ⓒ갤리온
물론 이러한 단정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살인을 저질렀는지 여부조차 불분명하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비록 법정 안에서는 초라한 대우를 받을지라도 형사 사건 제○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드라마다.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김희상 옮김, 갤리온 펴냄)는 저자가 직접 경험한 그 완벽한 드라마 11개를 엮은 것이다.

저자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는 1964년 뮌헨에서 태어났다. 1994년부터 베를린에서 형사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2009년 8월에 출간되고 나서 무려 50주 이상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건조한 형사 사건 제○호를 완벽한 드라마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심과 열정이 필요하다.

변호인이라고 하더라도 관심과 열정을 가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사건과 의뢰인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다. 하나의 사건을 풀기 위해 의뢰인의 인생을 탐구하고 의뢰인 주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철저하게 사건에 집중한다.

저자는 의뢰인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기 위해 23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결국 사건을 풀어내고 만다. 사건 주변을 찍은 사진 한 장을 골몰히 지켜 본 끝에 상황을 반전시키는 대목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의도하지 않았을 테지만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변호사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끔 만든다. 변호사에게 필요한 제1덕목은 관심과 열정이라는 것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건조한 형사 사건 제○호를 완벽한 드라마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경험도 빼 놓을 수 없다. 같은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허구와 실제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이야기에 대한 해석도 저자의 지식과 경험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직업이 변호사라는 것은 이 책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책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책 제목에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어떻게 감히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는가'와 '어떤 방식으로 살인자를 변호하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예, 변호할 수 있습니다."

변호인이라면 자기가 변호하는 사람이 극악무도한 자라고 하더라도 변호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당연히 무죄를 주장해야 한다.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사실이 밝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형량을 낮추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변호사는 고객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물론 최선은 진실을 아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정황만 알고 있어도 혹 억울한 판결을 당할 수 있는 의뢰인을 보호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된다. 의뢰인이 정말 무죄일까 하는 의문은 중요한 게 아니다. 변호사의 1차적인 임무는 의뢰인의 변호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161쪽)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비교적 간단하다. "법이 정하고 있는 절차를 잘 활용해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확립되어 있는 형사 절차 안에서 어쨌든 피고인은 형이 확정될 때까지 무죄를 추정 받는다. 증거가 없으면 피고인이 자백을 하더라도 유죄를 선고할 수 없고 그럴싸한 증거들이 아무리 많아도 결정적인 단서가 없으면 역시 유죄를 선고할 수 없는 게 원칙이다. 물론 현실은 다르다. 기소만 되어도 피고인은 범죄인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피고('피고인'이라는 표현이 맞다. '피고'는 민사 소송에서 쓰이는 말이다)의 말을 믿고 안 믿고 하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법정에서 필요한 것은 증거일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피고가 훨씬 유리하다. 그는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지 않아도 좋으며 정확한 진술을 했다는 증거를 낱낱이 열거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검사와 판사에게는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 이들은 증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주장해서는 안 된다. 말은 간단하게 들리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추정과 증거를 항상 정확히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객관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짐작에 지나지 않음에도 우리는 확실히 알았다고 믿고 앞만 보며 성급히 달려 나가기 일쑤다. 그리고 앞질러간 모든 것을 다시 주워 담기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306쪽)

자칫하면 가십거리로 치부될 뻔한 이야기들이 음미하고 곱씹어 볼 이야기로 재탄생한 것은 직업에 대한 고뇌와 양심을 가진 변호사가 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50주 이상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는 말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진중한 책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책 안 표지에는 "약자의 편에 서서 활약한 경험을 묶은 것이 이 책이다"라고 쓰여 있지만 그보다는 "누구나 호기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들을 묶은 것이 이 책이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독일의 언론 <슈피겔>이 "대단한 이야기꾼의 탄생"이라고 평가한 것이 찬사의 의미만은 아닐 테다. 최소한 이 책을 읽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가벼이 여기는 사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의미가 들어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신문의 사회면에 난 오늘의 사건, 사고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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