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렇습니까? 박민규입니다.
몇 달 전 <한겨레21>에서는 2000년대 한국 문학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인즉슨 최근 10년간 발표된 문학 작품 중 최고의 장편소설, 중단편소설, 시집 등을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2000년대 최고 작가와 이 시대 문학을 특징짓는 키워드 및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추천도 곁들어져 있었습니다.
기사가 나온 것을 보니, 문학 전문 기자 2명, 서점 MD 3명을 포함해 총 68명이 회신을 해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당연 여기서 나머지 63명은 문학평론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꼴에(?) 저도 63명에 속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만 동문서답을 하는 바람에 저의 회신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구둘래, '지난 10년, 문학은 이들 때문에 행복하였노라', <한겨레21>, 2010년 9월 3일(제826호))
제가 문학 비평을 하면서 받은 가장 당혹스러운 질문은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천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추천이 아니라면, 대충 얼버무릴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읽도록 권하는 일'이라면, 정말로 "이 작품 안 읽고 죽은 놈은 진짜 손해다'라고 말할 정도의 책이 아닌 이상, 그것을 권할 배짱은 없습니다.
하지만 설문조사를 거부할 배짱 역시도 없는 터라 일단 수락하기는 했습니다만, 최고의 장편, 단편, 작가와 같은 조항은 그냥 패스하고, 이 시대 문학계의 키워드에만 엉뚱하게 '문학동네'라고 써놓는 데에 그쳤습니다(물론, 그 이유에 대해 설명은 했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반응과는 상관없이 인기 투표의 결과는 잘 정리된 형태로 발표되었습니다. 소설의 경우, 김연수, 김훈, 박민규가 골고루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이라 할 수 있는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에는 박민규가 3김(김연수, 김훈, 김애란)을 제치고 1위로 뽑혀 '2000년대 문학의 아이콘'임을 과시했습니다. 이처럼 시대를 선도해가고 있는 박민규가 이번에 두 번째 소설집 <더블>(창비 펴냄)을 발간했으니, 문학계니 출판계니 언론계가 가만히 있을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터넷 서점을 보니 독자 평점도 그리 나쁘지 않는 같고요. 귀환한(돌아온) 한국 문학의 히어로를 반기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옵니다.
사실 저 역시 박민규가 2000년대 문학의 아이콘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일정 정도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평가를 문학적 평가와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소녀시대가 분명 오늘날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곧 그녀들의 음악성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니 듯이 말입니다. 물론 저는 누구처럼 가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래라며 '5초 가수' 운운하면서 그녀들을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소녀시대에 열광하는 이유가 가창력에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복면 작가의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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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블>(박민규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문학계에서 최근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 중 하나는, 작가에게도 어떤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자각입니다. 실제 소위 성공한 작가들을 하나둘 자세히 살펴보면, 나름대로 치밀한 이미지 메이킹이 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되는데, 이런 것 자체를 문학 외적인 것으로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문학가(소설가)란 본시 시장(마켓)을 떠나 살 수는 없는 존재(떠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한국 문학의 고질병입니다만)라는 점에서 보면,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것에 과민반응은 정말이지 촌스러운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많은 경우 문학에 있어 상업주의는 문학주의와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학주의야말로 문학이 마켓에서 가장 어필할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연예인에게 이미지 메이킹은 그 자체가 본질일 수도 있지만, 문학가에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쉽게 말해, 뭘 하든 다 좋은데, 무엇보다도 작품이 좋아야 그런 것도 애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 있습니다. 실제 작가의 이미지는 독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그 때문에 한때 문학상을 줄 때 얼굴을 본다는 괴소문(?)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얼굴까지는 안 보더라도, 주최 측이 가능한 한 젊은 쪽(기성 작가에게 주는 상이라면, 인기 작가)을 선호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즉 우리는 종종 박민규 소설에서 등장하는 엉뚱한 이미지 혼합이나 아연하게 만드는 퍼포먼스를 다소 기괴한 선글라스를 낀(어떤 사진은 레게 머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사진이나 그의 퍼포먼스(그는 황순원문학상 시상식에 복면을 쓰고 참석했고, 시상대에서 춤까지 추었다고 합니다)의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품이 허무맹랑하여 도저히 공감이 가지 않더라도 작가의 독특한 차림새를 보면, 그런 허무맹랑함이 도리어 작가적 개성으로 받아들여지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매우 독특한(또는 독창적인) 작가의 세계관이 반영된 매우 심오한 무엇이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작가가 아무리 "별 다른 생각 없이 한 것에 불과하다"고 호소해도, 비평가나 독자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도리어 뭔가 대단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다소 복잡한 최신 개념들과 일군의 이론가를 대동하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어떤 의미에서 작가의 노련한 의도에 충실히 속아주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작가에 대한 경외감에 시비를 걸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관대함이 지나칠 경우, 작품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방해받는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 소설집 <더블>의 책표지는 작가 박민규가 복면을 쓴 사진으로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으로 저자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는 것은 모든 새로운 시도에는 예외 없이 그 나름의 노림수가 내재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것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저자의 얼굴이 표지를 장식할 경우, 대개 자전적 이야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박민규라는 작가 자신이 이 책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일까요? 쉽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박민규의 소설은 박민규라는 작가 없이는 존립하기 힘들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복면'은 노출 욕망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면' 하니까 떠오르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일본의 소설가 마이조 오타로(舞城王太郎)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는 일본의 박민규와 같은 작가인데, 작품이 가진 파격성이나 새로움에서 가히 자웅을 겨룰 만합니다. 더구나 그 역시 복면 작가입니다. 그러나 이 두 작가에게 있어 '복면'이 갖는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나왔을 때, 적잖은 고급 독자들은 이 작품을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源一郎)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와 비교했습니다. 하지만 야구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두 작품 사이의 공통점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어떤 연관을 느꼈다면, 그것은 도리어 서사 행위 자체를 무의미화하는 이후 작품(예컨대 <핑퐁>)에서 그러합니다.)
'복면 작가'란 일본식 표현으로, 복면을 쓰고 등장하기 때문에 복면 작가인 것이 아니라, 이름은 물론 얼굴 등 프로필을 일절 공개하지 않고 시상식 등에도 불참하는 작가, 말 그대로 '작품으로만' 독자와 만나는 작가를 의미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사회적 공명심과 바로 직결되는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일본의 경우 적잖은 복면 작가들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마이조 오타로는 바로 그런 복면 작가 중 최근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작가인데, 출생연도와 고향 정도만 공개되었을 뿐, 어디서 무엇을 사람인지는 완전히 비공개인 채로 남아있습니다(단 인터넷에서의 활동은 일부 알려졌습니다).
(박민규와 마이조 오타로는 비슷한 시기에 소설가로 데뷔한 동시대 소설가입니다. 데뷔는 마이조 쪽이 조금 빠르지만(<연기, 흑 혹은 먹이>, 2001년) 문단의 인정을 받은 것은 2003년으로(<아수라걸>), 이 해는 박민규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지구영웅전설>로 두 개의 문학상을 받은 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박민규는 복면을 쓰고 선글라스를 걸치고 있을 뿐 복면 작가는 아닙니다. 즉 그의 복면(또는 선글라스)은 오로지 텍스트만을 부각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지우는 도구라기보다는 텍스트와 작가를 굳게 연결시키는 매개물로 봐야 정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가의 이미지가 텍스트와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작품의 세계관을 작가의 그것과 일치시키는 걸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작가와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도리어 작품의 세계관이 그만큼 위태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한없이 가벼워서 작가(현실 존재)라는 무게추가 없으면,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가 버릴 위험이 크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런 소설이 구원을 얻는 방법은 작가가 나서서 자신의 중력을 거부하는 형태로 현실을 다시 한 번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을 초월함으로써 성립된 그의 소설은 작가적 이미지 메이킹(복면 쓰기)을 통해 재차 부정됨으로써 역으로 어떤 현실감을 획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장르 문학을 만든 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박민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새롭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당한 반응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먼저 우리는 소위 박민규식 허무맹랑한 서사를 오래 전 장정일의 단편들(<아담이 눈뜰 때> 등에 수록된)에서 읽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기인 서브컬처에 대한 직간접적인 도용과 그로테스크한 이야기 전개 역시 백민석의 소설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박민규는 백민석이 더 이상 소설 쓰기를 포기한 바로 그 해(2003년), 두 개의 문학상을 한꺼번에 받고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마치 '바통 터치'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한국적 맥락에서 박민규를 문제 삼는다면-국제적인 맥락을 문제 삼는다면, 우리는 앞서 언급한 마이조 오타로와 커트 보네거트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장정일은 논외로 하더라도 백민석과의 비교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두 작가를 비교하는 글은 거의 본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아마 백민석의 경우 일반 독자의 관심을 얻는데 실패한데 반해, 박민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대 문화(서브컬처)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나름대로 문학을 재정립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보면, 둘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유사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백민석이 얻지 못한 독자를 박민규는 어떻게 얻을 수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박민규의 인기는 백민석 소설에는 없는 유머(사실상 개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단 두 작가 모두 현실세계를 서브컬처의 세계로 덧칠하고 전통적 소설에서 등장하는 등장인물로부터 내면을 적출하여 캐릭터로서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민규의 소설에는 백민석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울함과 어두움은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명랑하고 경쾌하기까지 한데, 제가 보기에 그것은 '초'장르적인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이에 비하면 백민석은 <목화밭 엽기전>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장르의 규칙에 비교적 충실한 편입니다).
이를 조금 더 설명해보기로 하지요. <더블>에 실린 단편들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여러 가지 장르(SF, 재난물, 로드물, 서부극, 판타지, 드라마)를 도용하여 박민규식 소설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위 기사에서 가져옵니다).
"박진 문화평론가는 '장르 혼종'이라는 2000년대적 현상의 중심에 박민규가 있다고 말한다. "2000년대는 역사 소설, SF, 판타지, 추리물과 스릴러 등 그동안 순문학이 아닌 대중문학이나 하위 장르로 평가돼왔던 경향이 문학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적극적으로 교섭·혼종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이제 누구도 장르 문학(대중문학)과 본격 문학의 경계를 가를 수 없는 시대, 그것이 얼마나 인위적인 구획이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경향이 2000년대 들어 문학의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으며 문학에 대한 배타적인 선입관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이런 경향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준 작가는 박민규이고, <지구영웅전설>, <핑퐁> 등의 장편소설과 단편집 <카스테라>가 그 좋은 예다."
쉽게 말해, 박민규는 그동안 하위 장르로 평가되던 장르 문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본격문학의 폐쇄성을 내부적으로 쇄신시켰고, 그를 통해 바른 의미에서 '문학'을 구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요? 박민규가 장르 문학의 요소를 다량 도입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곧바로 장르 문학에 대한 포용, 그리고 그것을 통한 본격 문학의 쇄신으로까지 간주하는 것은 너무나 앞서 간 게 아닌가 합니다. 문제가 되는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것들은 소위 말하는 장르 혼합이나 장르 쇄신이라기보다는 장르 학살에 가깝습니다.
SF를 도입하든 판타지 형식을 도입하든 그가 도입하는 것은 순전히 개별 장르의 분위기뿐입니다. 즉 그의 손에 의해 도입된 장르들은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로(장르 규칙 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 없습니다) 얼마간 이용된 후 이내 내팽개쳐지는데, 문제는 그가 바로 그런 파기 행위에 자신의 독창성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고 보면, 박민규는 애당초 개별 장르들에 존재하는 보편성을 인정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장르를 오로지 '장르'로서만 받아들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장르의 개별성이라기보다는 그것이 가진 일반성(쉽게 폐기처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잔인한 작업은 무언가에 대한 강력한 신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약간 다른 측면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가로서 박민규는 일견 반문학적 행위의 대표자(전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제스처를 취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반문학적 행위가 가진 '문학성'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학에 대한 신뢰감은 자신의 창작 행위에 존재하는 '성실성'(그는 청탁을 펑크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에 대한 강조와 나란히 합니다. 문학계에도 마침내 주당들의 시대는 가고 샐러리맨의 시대가 온 셈입니다.
그렇다면(어차피 그렇게 내버릴 거라면), 그는 왜 그토록 장르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혹시 그것은 '장르'야말로 작가가 현실 세계(현실적 문제)로부터 벗어날(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이런 탈출(거리 두기) 자체가 그의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로부터 '되돌아옴(장르 학살)'이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장르'로의 도피로만 끝났다면, 그는 아마 문단에서 논할 가치가 없는 작가로 취급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련하게도 그는 '현실로 되돌아오는'(장르로부터 재탈출하는) 결말을 선호합니다.
어떤 작가가 현실적인 문제와 정면으로 씨름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가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치열함과 그 결과(성공이든 실패든)를 모두 참조해 종합적인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작가 자체가 드문 오늘날, 장르로 도망친(도망친 것처럼 한) 작가가 현실 세계로 귀환하는 제스처만 취해도, 다른 작가들(현실과 씨름을 하는 작가)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이제 무언가를 제대로 보여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뭔가를 보여주는 대신에 '귀환'만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4. 민규가 우리 문학을 지켜줬어요.
이런 귀환에 대한 평가는 최근 그에 대한 '종합적 평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더블>에 실린 '근처'(황순원문학상), '누런 강 배 한 척'(이효석문학상)과 작품은 뜻밖에도 반(反)박민규적 서사 방식(고전적 서사)을 채용하고 있는데(그런데 많은 독자들은 도리어 이 두 작품을 <더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들로 꼽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이를 일종의 '긍정적 변화'로 보며 높은 점수를 준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이 작품들이 박민규의 것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수상작에서 제외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反)박민규적(즉 문학적인) 소설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요? 이것들은 그들의 지적처럼 정말로 새로운 변화의 징후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도리어 그런 소설들이야말로 가장 박민규적인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하고 물으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아쉽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는 그의 출세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도 간단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의 깊게 읽으신 분이라면, 이미 눈치를 채셨을 테지만, 이 작품은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개의 서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반부가 주인공의 소년기를 프로야구에 대한 재치 있는 장광설로 풀어낸 유머 서사라면, 후반부는 느림(또는 루저)의 미학을 다소 고전적인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는 전통 서사입니다. 전반부가 너무나 재미있어서 후반의 지루함을 기억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많을지 모르지만, 다시 한 번 읽어보시면 아마 그 차이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 작품을 처음 읽고 가진 위화감은 이런 단절감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일단은 꽤 흥미로웠던 전반부의 경쾌함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짐으로써 항간 떠돌았던 표절론(한 야구광의 인터넷 게시물에서 야구 지식을 대량으로 차용했다는 점에서)을 되돌아보게 만들었고, 그것은 곧바로 후반부의 '심각함'이 의도적인 배치라기보다는 전반부의 경쾌함 자체가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었기에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과 손을 맞잡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저는 전반부는 유쾌한 낚싯밥에 불과하고 후반부의 '심각함'이야말로 어쩌면 박민규 문학의 본질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1) 서브컬처(세대 코드)에 대한 집요한 고착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개그, 그리고 2) 그런 것들 뒤에 숨겨진 문학적 야심(문학주의)이 함께 존재한다는 점에서 박민규 소설의 양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그만의 트레이트 마크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없습니다(인기가 가장 있지만요). 소위 박민규식 상상력은 이 둘이 결혼하여 낳은 장르 학살(또는 장르 혼합) 쪽이라 하겠는데,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이후 <지구영웅전설>, <핑퐁> 및 상당수의 단편들을 통해 박민규 문학의 주류로서 자리를 잡습니다(<더블>에 실린 단편들도 실은 절반 이상이 그에 해당됩니다).
정리하자면, 박민규 소설을 떠받치고 있는 것으로는 크게 '서브컬처', '문학주의', '장르 학살'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삼위일체의 형태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들어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또는 어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변화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이들 사이에는 어떤 위계(이를 테면, 성부, 성령, 성자이라는)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차치하고 박민규 작품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서브컬처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백민석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기본적으로 유아기(적 대상)에 대한 집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그가 도용하는 서브컬처라는 것도 서브컬처 일반과는 전혀 무관한, 이를테면 작가가 성인이 되기 이전(특히 유소년 시절)에 경험한 문화 체험이나 특정 사물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좋게 해석하더라도 그의 서브컬처에 대한 집착에는 기본적으로 퇴행적인 면이 존재합니다. 작품 속에서 똥이나 우유가 자주 등장하고 성기 장난을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삽입되어 있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박민규식 상상력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지구계'라는 발상도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블>에서는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주었어요'나 '축구도 잘해요' 등이 바로 그런 작품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박민규식 '지구계'를 라이트노벨의 '세카이계(世界界)'와 비교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라이트노벨은 "사회를 묘사하지 않는 소설이 과연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가능하다!"고 답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진 문제점을 자세히 검토하는 것은 우리의 논의를 크게 벗어납니다.
('세카이계'란 작은 관계(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문제가 구체적인 중간항(사회)을 상실한 채로 추상적인 대문제(세계의 위기, 세계의 종말)로 직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최종병기 그녀>나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과 같은 작품은 들 수 있는데, 이는 비단 몇몇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라이트노벨에 존재하는 세계관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바로 그런 의미에서 라이트노벨은 '근대소설 이후의 소설'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유사한 세계를 보여주는 박민규 소설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그의 소설은 과연 근대소설로 분류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 이후의 소설'로 분류해야 할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앞에서 내린 바 있는데, 박민규는 사회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아니 제거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다고 표현해야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근대 문학'이란 결국 그가 귀환할 곳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블>이 보여주는 다채로움에 대해 마냥 감탄만 하고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생이 없는 아이가 레고 블록을 가지고 자신만의 성채를 만들었다가 해체하는 행위(TV 만화영화 내용을 재현해 보았다가 다시 무너뜨리는 것)를 반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이런 파괴 행위에서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결국 가상세계에 불과하며, 엄마(문학주의)가 등장하면 이 모든 혼란이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장르 학살 자체를 심각하게 분석하고 여러 방면에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문학 연구자에게는 가치가 있는 일일지 모르지만(외국 이론가 한두 명만 등장시키면, 그럴듯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비평가가 할 짓은 못됩니다. 그리고 정확히 반대의 의미에서 '근처'나 '누런 강 배 한 척', '낮잠'도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들 작품이 가작인 것은 확실하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민규를 한국 문학의 희망으로 여긴다면(이는 그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선택된 것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의 소설들이 한국 문학의 딜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한국 문학의 유아 성애를 충족시켜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