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 프로젝트라?
얼마 전 친구의 초등학생 아들이 성기의 크기 때문에 심한 고민에 빠졌단 말을 들었는데 박현욱의 <동정 없는 세상>이나 미국 영화 <아메리칸 파이>처럼 남자 아이들의 성에 관한 이야기인가? 표지의 알록달록한 제목부터 흥미를 끄는 이 책은 나의 음흉한(?) 예상과는 달리 지금은 우중충하고 칙칙하게 살지만 언젠가 화려한 비상을 꿈꾸는 한 여학생의 성장담이다.
소설가를 꿈꾸는 '수선'은 어수선한 삼겹살집에서 일하는 틈틈이 책을 읽다, 주인에게 들켜 주방의 질척거리는 바닥에 책이 내팽개쳐지는 참사를 당한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헤밍웨이보다 존경하는 작가 이보험의 책, <변비의 최후>를 보물처럼 아끼며 소중히 간직해 왔던 터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식당을 박차고 나가지만 이내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온다. '종업원이 일하다 뛰쳐나가면 그만이지 머리채까지 잡으면서 끌고 올 이유가 뭐란 말인가' 하며 악덕 주인을 욕하고 있을 때 쯤, 주인이 바로 주인공 수선의 아버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작가의 유머 감각에 미소를 짓게 되는 대목이다.
외삼촌의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빚을 갚으려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최저 임금도 못 미치는 2만 원에 혹독하게 부려 먹는 아버지 밑에 사는 가정사도 칙칙하지만 수선의 학교생활도 그리 화려하진 않다. 수업은 지루하고 서울의 4년제 대학은 꿈도 못 꾸는 성적에 외모가 예쁜 것도 아니고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어서 선생님들의 관심 밖에 있는 평범한 학생이다. 소설 속 교실 풍경은 자꾸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언제부턴가 학교는 학원으로 변해 버렸다. 선생도 교과서 대신 서점에서 파는 문제집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문제집을 사지 않으면 수업을 들을 수 없고 대학에도 갈 수 없었다. 문제집이 왕이었다."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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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데기 프로젝트>(이제미 지음, 비룡소 펴냄). ⓒ비룡소 |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을 가르치며 교사로서 민망함을 느낀 것이 이 대목이었다. 대학 입시가 목표가 돼 버린 학교, 하지만 언제부턴가 전국 고등학생들의 염원이 되어 버린 서울의 4년제 대학에 갈 수 있는 학생은 한 반에 1~20% 정도이고 나머지 학생들에게 대학수학능력시험 공부는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는 척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교사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것처럼 말해야 하고 또 그렇게 믿어야만 학생들은 이 지루한 학교생활을 버틸 수 있다. 모두 '눈 가리고 아웅'이다.
수선의 이런 답답함을 해결해 준 것은 소설이었다. 우연히 게시판에서 대학에서 주최하는 백일장 공고를 보고 수업 시간에 몰래 쓴 소설이 우수상을 타게 된 것이다. 공부를 못하더라도 대학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을 하면 꿈에 그리던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들어갈 수도, 흠모해 마지않는 작가 이보험의 제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없는 시간을 쪼개 글쓰기에 매진한다. 문학 교사 허무식은 이런 수선을 위해 문학 코치까지 자처하며 도와준다.
성적이 좋지 않아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길이 있긴 하다. 소설 속의 수선처럼 글을 잘 쓰거나 발명품 대회에서 상을 받거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스펙'이란 걸 잔뜩 쌓아 수시 입학 원서를 쓸 때 자기 소개서에 쓸 수 있는 내용이 넘치거나, 얼굴이 초절정 꽃미녀라서 TV에 얼굴을 많이 알린 연예인이라면 수시 합격도 가능하다.
그러나 각종 스펙(가볍게 해외 봉사 정도?)을 쌓을 수 있는 넉넉한 가정에서 자라거나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학생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다수의 학생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아닌, 세상 사람들의 잣대로 보면 '루저'요 '잉여 인간'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풍부한 상상력과 그것을 글로 엮는 솜씨를 가진 수선은 평범한 학생들과는 다른 행운아다. 수선의 비범함은 소설의 중반으로 갈수록 더욱 드러난다.
"작가에게 없어선 안 될 재능이지. 일종의 연기력이야. 어떤 특정한 상활 속에 너 자신을 놓고 너라면 어떻게 할까 상상하는 능력을 말하는 거야. 대개는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인물을 부담스러워하거나 따로 노는 느낌이 많은데 넌 아주 자연스럽게 이 역할에 몰입하고 있어." (109쪽)
수선은 이런 능력으로 인터넷 카페의 모임에서 만난 한 남자의 꿈 이야기를 소설로 써 내고, 남자가 그 소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면서 새로운 미스터리가 시작된다. 왜 남자가 그토록 수선을 압박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소설의 흥미를 더하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퍼즐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음습한 기운은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고. '소설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언제 이 미스터리의 매듭을 지으려고 하나' 하는 쓸 데 없는 걱정까지 하게 한다.
어쨌든 삼겹살집에서 고기나 자르고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던 이 구질구질한 여학생의 번데기 프로젝트는 결론적으로 성공이다.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소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써서 각종 문학 공모에서 수상하며 문예 특기자로 대학을 입학했다." (앞날개 작가 소개)
수능 최저 등급의 난관을 통과해 대학에 진학하고 존경하는 선배 작가의 가르침을 받아 소설가로서 문학상까지 수상한 작가의 프로필을 보니 소설은 끝났지만 주인공 수선의 미래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은 상큼한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아! 어쩌란 말이냐! 나비가 되려고 죽은 듯 살고 있는 수천, 수만의 번데기들이 모두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나비가 되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나비만 가득 찬 세상 역시 있을 수 없다. 풍뎅이도, 개미도 벌도 심지어 모기에게도 존재의 이유는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것을 다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고 싶은 것이 없어도 좋고, 꿈이 없어도 좋고, 못하는 것이 많아도 좋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기만 하다면 우리의 본질은 언제나 꽤 괜찮은 것이라고."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중에서)
자! 이제 교실로 가서 나의 '찌질한' 청춘들을 더 많이 사랑해 줘야겠다. 나비가 못 되어도 괜찮다고 말해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