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한글 쓰는 것이 익숙지 않아 오후 나절이 되면 종종 거실에 앉아 노트 한 권에다 느릿느릿 성경 구절을 필사하시곤 한다. 그러다 손목이 아파올 즈음이 면 이따금 노래를 부르시곤 했는데, 성당에서 배워온 성가일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낯선 일본어로 들어본 적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시던 경우도 있었다.

마치 민요와 같은 가락이었는데, 할머니에게 무슨 노래인지를 묻자면 "어렸을 적 학교에서 불렀던 노래"라고만 하시는 것. 할머니가 어렸을 적은 아직 해방 전이었기에, 동요도 모조리 일본어였다. 두 세대가 차이가 나는 나로서는 겪은 바 없는 경험이었기에, 할머니의 노래에 공감할 수는 없으되 이해할 수는 있었다.

앞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한 것은 노동 가수 김성만이 최근 동명의 음반과 함께 낸 책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삶이보이는창 펴냄)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내게 남은 감정의 질감이랄 것에서, 할머니의 일본 노래를 듣고 받았던 느낌과 비슷한 종류의 애매함이 작게나마 감지되었던 탓이다.

이를테면 시차(視差)랄까? 김성만의 글을 읽으며, 나는 그가 위치한 자리와 내가 위치한 자리의 같음과 다름을 하염없이 생각했던 것이다.


▲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김성만 지음, 삶이보이는창 펴냄) ⓒ삶이보이는창
곧 만으로 스물다섯 살이 되는, 아직 다니던 대학을 마치질 못한 나와 이미 쉰 살이 넘어 내 아버지뻘인 노동자 출신 가수 김성만의 사이에서, 홍익대학교 앞에서 4인조 밴드로 음악 생활을 시작한 나와 공장에서 커팅 작업을 하다 한 손가락을 잃고 받은 산업 재해 보험금으로 기타를 사 음악 생활을 시작한 가수 김성만의 사이에서.

이는 평을 쓰는 나 자신이 음악가이자 음악과 정치가 맞붙는 지점에서 다음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문화운동가인 까닭에 더욱 민감하게 다가온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이를테면 김성만은 자신의 가장 유명한 투쟁가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만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적고 있다.

"투쟁의 노래는 투쟁 현장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순간 한 동지가 비정규직을 철폐하자고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바로 저거다. 우린 저렇게 구호를 외치면서 싸운다. 비정규직 투쟁 현장에서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만들었다. (…) 노래가 음반으로 나오고 많은 비정규직 투쟁에서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가 울려 퍼졌다. 그곳에서 만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내 손을 잡으며, '우리 노래를 만들어주어서 고마워요'라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우리 노래를 좀 더 많이 만들어주세요'라고 한다."

김성만은 이 일화를 언급하며 '투쟁가를 쓰는 것'을 그때 다시 시작했다 말하고 있다(그는 노동자 노래패 '다영글'에서의 활동을 접으며 한동안 투쟁가를 쓰지 않았다). 그로서도 큰 계기가 되었던 순간일 텐데 책에서 그는 그러한 순간들, 곧 동지들과 노래로 연대하고 울고 웃던 장면들을 여럿 소개한다.

그것들은 물론 그 자체로 의심할 여지없이 아름다운 장면들이리라. 그러나 내게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책 전반에서 그가 '자기 자신', 곧 김성만이라는 '창작자 개인'과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언제부턴가 노동가요가 공연용이 되었고 들려주기 위한 노래가 되었다. (…) 변혁의 길에서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기 위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젠 먹고살아야 하지 않느냐가 대세가 되어서 내게 항변할 때 어느 책에서 만났던 일제시대 노동운동가들의 그 처절한 투쟁을 말하지 못했다."

'변혁의 길에서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기 위해서 노래하는 것', 김성만에게 이는 근본이라 할 수 있다. 김성만에게 노동가요는 공연을 위한 것도, 들려주기 위한 것도 아닌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기 위해 불리는 것이다. 그가 쓴 노랫말들을 살펴도 '내면의 고백' 같은 어조는 발견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가 "내가 곡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흐르고 있었던 음과 이야기들과 만난 것이다"라 말할 때,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김성만의 세계에서 '나=개인'보다는 '노동자 민중'이 자명한 범주인 까닭이다. 여기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작가'란 애초에 성립되지 않게 된다.

이를 긍정적인 뉘앙스에서의 (전-근대가 아닌) '비-근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표제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어, '온몸'을 우리는 그렇게 이해해야한다.

그러나 정확히 그 지점에서, 우리의 물음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김성만이 쓴 의미에서의 '온몸'을 나, 그리고 우리의 세대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다시 한 세대만큼을 건너왔다. 1960년대의 유년과 1990년대의 유년이라는 경험은 분명 다르다.

내게 1987년의 6월 항쟁, 그리고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어디까지나 역사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공감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개인'보다는 오히려 '노동자·민중'의 이념에 괄호를 치는 것이 편한 우리 세대에서 노동가요, 혹은 예술의 정치/정치로서의 예술이란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소위 '87년 체제'라 불리던 큰 줄기의 흐름이 결국 교착상태로 빠져들었음과도 긴밀하게 관련된다. 그것이 노동가요이건, 노동자 민중이건, 좌파 정치이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전망을 내놓을 수 있을까?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에서 김성만의 글은 아름답다. 미려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투박해서 아름답다. '한미 FTA 반대 축구' 경기에서 골을 넣고서 "가끔은 이런 거 했으면 좋겠다"라 사심 없이 말하는 그가 아름답다. '5·18 광주 노동자 문화제'를 구경하다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다음날 미화 노동자들과 노래로 연대하다 '삑사리'를 내는 그가 인간적이다. 어느 노동자들의 작은 승리를 기록하면서 "이긴다. 이길 것이다. 이 골짜기를 타고 봄처럼 노동자의 투쟁이 싹이 터 피어날 것이다"라 적을 때, 그 확신이 좋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이 내게는 그 자체로서 주저(躊躇)이다. 노동자 민중에 대한 온전한 긍정 없이 김성만에 공감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분열적이다. 그렇기에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가 내게 불러일으키는 것은 노스탤지어도, 투박한 현장의 스케치로부터 오는 소소한 감동도 아니다. 그것은 잊혀진(혹은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었던) '노동자·민중'이라는 공백의 소환이다. 김성만의 자리와 우리가 위치한 자리 사이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그 공백일 것이다.

나는 그 공백을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가 메워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지평을 '여는' 역할에 더욱 적합하다. 책장을 덮은 감정이 왠지 묘한 것은, 아마 그 공백이 시리게 다가오는 탓일 게다. 하지만 그가 은연중에 요청하는 것은, 그것이 삶이건 사랑이건 "온몸으로 노래하라"는 것이다. 이는 '온몸'의 재 발명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무슨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을까? 아무런 실천 없이 무엇인가 도래하지는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F, 그 중에서도 소설은 한국에서 한 때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과학소설'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가는 중이다. SF는 과학이라는 학문 및 기술의 발달이라는 현상과 완전히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그 융성기가 영미 문화권에 일찍 찾아온 것이나 그 지역 사람들이 SF의 드넓은 가능성에 크게 문을 연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현재 영미 문화권의 SF 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네뷸러 상과 휴고 상이다. 전자는 미국과학소설가협회 회원들이 뽑으며 후자는 세계과학소설컨벤션 구성원의 투표로 결정이 된다. 네뷸러 상을 처음으로 수상한 작품이 나온 해는 1965년이다. 영미 문화권의 SF 황금기가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네뷸러 상을 받아 그 중요도나 작품성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명작이나 과학소설 작가가 상당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수상 여부가 과학소설의 질을 전부 결정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줄어들 리는 없다.

이에 미국과학소설가협회에서는 투표를 통해 네뷸러 상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나온 영미 문화권 SF 가운데 명작들을 뽑았다. 그 가운데 단편과 중편은 따로 모아 두툼한 책으로 엮었다. 이 책이 <SF 명예의 전당>(오멜라스 펴냄)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나왔다. SF의 정수는 단편이라고 단언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은데, 이 책을 통해서 1965년 이전의 영미 SF를 단숨에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배경 설명은 이쯤 해두자. 글의 감상법은 단 하나뿐이니까. 두 권으로 나온 <SF 명예의 전당>에는 총 26개의 단편 SF가 들어있다. 그 중에서도 모든 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수록작들을 몇 편 소개해 본다.


▲ <SF 명예의 전당 1 : 전설의 밤>(로버트 실버버그 엮음, 박상준·고호관·박병곤·지정훈 옮김, 오멜라스 펴냄). ⓒ오멜라스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전설의 밤'은 제목처럼 전설로 남겨도 부족하지 않을 SF다. 여기 지구에 사는 우리들은 많은 것을 당연시하며 산다. 공기나 물이야말로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 중에는 태양과 달과 낮과 밤과 별을 보며 호기심을 키우는 아이들이 있다.

나이가 들며 삶의 주기에 익숙해지는 바람에 대부분 시들해지긴 하지만. 그 주기의 지표가 다른 곳의 삶은 어떨까? 밤이 없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밤이 없으려면 과학적으로 어떤 조건이어야 할까? 그런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무얼까? 낮과 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리들과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다를까? '전설의 밤'은 이 질문들을 단숨에 해결해 준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주는 압도적인 인상은 읽는 이가 저도 모르게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만들 것이다.

영미 문화권의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라면 프레드릭 브라운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프레드릭 브라운은 반전과 유머를 주무기로 삼는 SF 단편을 다수 써낸 작가이다. 주관적인 의견으로는 황금기 시대 초기 작가 가운데 아시모프와 더불어 걸어 다니는 아이디어 은행이라고 부르고 싶다.

브라운이 쓴 '투기장'은 극적인 상황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단편의 진수이다. 종족의 운명을 온 몸에 담고 싸우는 두 생물. 그리고 초월적인 지성과 능력을 겸비한 투기장의 주인. 과학적인 설명보다는 긴장감과 사건의 결과를 강조하는 SF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떠올려봤을 상황이다. '투기장'은 거기에 원형적이고 교과서적인 예를 제공한다.

'무기 상점'은 작가만큼이나 독특한 작품이다. 앨프레드 엘튼 반 보그트는 인간의 현재나 미래를 문명사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기를 즐겨 한다. 이 작품에도 그런 특징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개인에게 무한한 힘을 제공할 수 있는 무기 상점의 출현. 이른바 전원적인 평화를 사랑하던 주인공.

이 둘이 충돌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렇게 물으면 많은 이들이 뻔한 결말을 예상할 것이다. 그리고 읽어가며 약간 당황할 것이다. 마지막에 약간의 설교가 나오는 것은 옛날 소설이니 그렇다고 해주자. 대신 예상 밖으로 튀어나가는 진행을 즐기면 된다. (작품 전체가 상징하는 바까지 음미한다면 금상첨화다.)

'헬렌 올로이'는, 어떤 작품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나 시각을 공격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라면 신이 나서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재미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로봇'의 최종 형태에게 바라는 그 무언가, 전형적이면서도 쉽게 지워버릴 수 없는 무언가를 압축해 놓은 작품이니까. 다 읽고 나서 그 무언가에 공감해 끄덕이게 되더라도 스스로 구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작고 검은 가방'과 '보로고브들은 밈지했네'는 다 같이 시간의 흐름에서 어긋난 물건의 이야기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일종의 시간 여행 이야기이다. 여행하는 게 사람이 아니기는 하지만. '작고 검은 가방'은 신기한 미래 기술을 만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보로고브들은 밈지했네'는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간다. 어린 아이란 어떤 존재인지, 어른들의 궤도에서 벗어난 아이는 어떻게 되는지를 다룬다. 만약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제대로 즐긴 독자라면 이 작품을 보고 옆구리 어딘가가 가려워질지도 모른다.

'표면 장력'은 감탄할 만한 단편이다. 과학소설의 관점으로 봐도 그렇고,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1952년이라는 점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전 우주로 퍼져나가며 문명의 씨앗을 퍼뜨리던 여러 우주선 가운데 하나가 어떤 행성에 불시착을 한다. 구조의 가능성은 없고, 싣고 왔던 씨앗조차 남아있지 않다.

있는 거라고는 대륙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땅덩이 하나와 사방에서 펼쳐진 바다뿐이다. 하지만 승무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민물 속의 생물에게 자신들의 유전자를 섞는다. 이윽고 그 생물들은 지능을 가지고는 문명을 발달시키며 자신들의 세계, 즉 물웅덩이의 한계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들에게 '표면 장력'은 죽음과 삶을 가를 정도로 단단하기 그지없는 장벽이다. 이 작품에는 창조자와 피조물, 탐험 욕구와 지적인 호기심, 작은 우주와 큰 우주, 희생과 미래 등 거의 모든 요소가 농축되어 있다. 단, 모든 이야기에 연애담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많이 실망할지도 모른다.

'차가운 방정식'은 우주 환경의 냉혹함과 여리고 순진한 생명을 극단적으로 대비한 수작이다. 이 작품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 국내 SF 팬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앨저넌에게 꽃다발을'은 앞서 언급한 '표면 장력'의 유일한 단점까지 보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장편의 형태로 여러 번 출간된 적이 있다. '표면 장력'이 과학적인 상상력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앨저넌에게 꽃다발을'은 사람의 본성과 인도주의와 안타까운 사랑을 종합 선물처럼 엮고 있다. 설사 중간쯤 읽으면서 결말이 예상된다 하더라도, 또는 현대 사회에 오염되어 심장이 돌덩이처럼 굳었다 해도 마지막 줄을 읽고 나면 최소한 코끝이 찌릿해지는 경험을 하리라 본다.

'90억 가지 신의 이름'과 '화성은 천국!'은 자극적인 단편을 좋아하는 독자께 추천할 만하다. 하나는 지구에서, 또 하나는 화성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엉뚱한 초기 상황이 두렵고 섬뜩한 결말로 치닫는 점에서 그렇다. 둘 다 더 자세하게 추천하고 싶지만, 내용을 폭로했다는 죄목으로 테러를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만약 '90억 가지 신의 이름'을 보고 이런 것도 SF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짓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작가의 명성보다는 작품의 재미 위주로 소개를 해보았다. 이처럼 다양한 SF들을 한 손에 쥐고 보기란 흔한 기회가 아니니 가급적 놓치지 않기를 권한다. 아, 한 가지 더.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SF 명예의 전당>은 완간된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결승전이라고 부를 만한 중편 모음이 남아있으니까. 부디 어서 책상 위에 펼쳐놓고 읽어볼 때가 오기를 바랄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야기의 힘, 이야기하는 힘

김영종의 책은 대부분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씌어져 있다. 옆에서 말하는 듯해 술술 읽혀 친근하다. 그렇다고, 그의 책이 쉽다는 것은 아니다. 만담하듯 의도적으로 쉽게 쓴 <헤이, 바보 예찬>(동아시아 펴냄) 같은 책도 있지만, 차분한 어조로 실크로드의 역사를 전복적으로 재구성한 <실크로드, 길 위의 역사와 사람들>(사계절 펴냄) 같은 책도 있다.

이야기는 문어투와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문어투의 글쓰기가 이성의 힘을 강조한다면, 이야기는 감성의 힘이 넘친다. 어떤 독자들은 김영종의 책에 '비호감'을 표명할 수 있다. 책이 엄격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기보다는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첨가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고, 달변으로 장황한 느낌을 주며,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구술성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김영종은 의도적으로 구어체로 이야기하듯 글을 쓴다. 그는 비서구적 방법론으로써 비위계적인 태도로 글을 쓰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가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공박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인정의 욕구'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고, 인간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포박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담화를 집요한 구술의 언어로 풀어낸 것이 <너희들의 유토피아>(사계절 펴냄)다. 그는 이 책에서 '노가리' '구라' '횡설수설' '야부리' '수다' '말놀이' '허풍' '황당무계' '잡담' '우스개'가 펼쳐 보이는 아수라장을 옹호한다. <너희들의 유토피아>에 수록된 글들도 '잡설'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된 것들이다. 이는 김영종이 글과 세계관을 연결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원시성에서 생명성으로


▲ <너희드의 유토피아>(김영종 지음, 김용철 그림, 사계절 펴냄). ⓒ사계절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자본주의적 일상을 비판하는 예술 비평을 모았고, 2부는 사회 비평적 태도로 한국 사회를 비판한다.

1부에서 김영종은 자신의 애니미즘 미학관에 비추어 '근대의 예술, 한국의 소비 미학'을 뒤흔든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두 축제를 비교하며, 근대의 제도적 평가가 신성을 어떻게 훼손하는가에 대해 논평한다. 이러한 견해는 한국의 예술 제도, 자기도취적 예술, 예술의 상품화와 같은 구체적 현실 비판으로 나아간다. 그는 애니미즘 미학이 갖고 있는 원시성을 옹호하며, 근대 제도 예술에 대한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힌다. 예술은 자아 바깥의 타자와 만났을 때라야, 속물주의(snobbism)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가 강조하는 것도 '원시 미술처럼 생명감'이 넘치는 활력 같은 것이다.

2부는 동시대의 사건들을 논평하면서, 자본주의 바깥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탐색하는 사회 비평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용산 참사와 근대적 합리성의 공모 관계를 밝히고, 진보가 근대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는데 기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유토피아의 환상에 대해 공격적으로 분석하고, 무엇보다 한국의 진보를 자처하는 운동권 엘리트들에게 분명한 불신 의사를 전달한다.

파우스트 만행의 심오성

'용산 참극과 파우스트'는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용산 참사'와 '나봇의 포도원', 그리고 <파우스트>를 병치한다. 이는 '뉴타운'의 이면에 존재하는 합리적 거래가 실제로는 영혼의 매매 행위와 같은 것임을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기 위해 포석이다.

양심적인 시민이라면, 용산 참사에 모두 분노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도시민들이 도심 재개발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김영종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일상성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는 순간 '합리적 정당성'이라는 테제에 갇히고 만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고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는 '용산 참사'에 대한 책임을 현 정권에게 물을 수 없다. 정치권력도 결코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이기도 한 철거민들에게 무죄를 선고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한 "우리는 모두 파우스트 편에 서 있다"는 것이 김영종의 주장이다.

이 책의 가치는 이러한 '근본주의적 태도'로 '바깥에서 객관화한 자본주의 세계'를 바라보게 한다는 데서 빛을 발한다. 김영종의 비판은 신랄하기에 통쾌하다. 그는 자신이 이렇듯 당당한 어조로 '합리주의적 세계관'과 '한국의 진보'를 비판할 수 있는 이유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바깥"에서 아웃사이더로서 세상을 대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다. 이러한 그의 위치 때문에 진보가 근대의 합리성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다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김영종이 이 책에서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감성이 갖고 있는 긍정적 힘을 거부하고, 오로지 이성에 의지한 채 이뤄지는 진보의 대안의 '생명성이 거세'된 것이다. 김영종은 감성의 영역의 해방시킬 수 있는 힘, 그것을 바로 격정적 파토스인 애니미즘 미학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애니미즘 예술은 무엇일까? 그것은 근대의 제도적 틀에 갇혀 있는 '인식의 예술'에 대비되는 것이다. 근원적 예술 체험과 연결되어 있는 원시 예술은 신과 교감하며, 생명성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원시 예술을 "사회 예술이자 순수 예술이자 초월 예술"이라고 규정한다.

<너희들의 유토피아>는 당당한 어조로 '원시 예술'의 힘을 이야기하고,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비판하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함정을 묘파한다. 길 바깥에서 길을 바라보는 자의 새로운 감각을 이 책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그것은 아웃사이더의 감각이고, 애니미즘 미학의 힘이며,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이다.

발화와 대화 사이

김영종의 <너희들의 유토피아>가 오직 통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김영종의 이야기가 귀에 속속 감겨 온다 하더라도, 그의 이야기는 대화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 부분은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그의 위치는 체제의 바깥인데, 그 체제의 바깥에 누구와 더불어 함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를 좀처럼 찾을 수 없다. 바깥에 있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결단하고, 감성에 자신을 내맡기며, 체제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것이면 되는가? 체제를 뒤흔들기 위해 바깥에서 저격수처럼 '잡설(독설)'을 쏟아내면 되는 것일까?

비판의 곤혹스러움은 반향(反響)만을 생각할 뿐, 더불어 '연대'할 수 있는 여지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는 애니미즘 미학의 근대 합리성의 메커니즘에 대항할 수 있는 도구로 제기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어떻게 감정적 교감을 이뤄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빠지면 '애니미즘 미학은 예술가 개인의 해방'만을 가능하게 하는 알리바이일 뿐이다.

<너희들의 유토피아>는 저격수가 자본주의 체제에 가하는 심각한 충격이기는 하지만, 테러리스트처럼 파괴적 효과만을 불러일으키는데 그치고 있다. <너희들의 유토피아>를 읽다보면, '화'가 난 자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부분도 많다.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의 힘이 살아 있던 <실크로드, 길 위의 역사와 사람들>에 비해 자기 세계에 닫혀 있는 듯한 양상이어서 아쉽다.

그런 의미에서 마쓰모토 하지메의 <가난뱅이의 역습>(꾸리에 펴냄)은 이 책과 대비되는 부분이 많은 듯하다. 마쓰모토 하지메는 보다 적극적으로 체제 바깥에서 사는 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미학적 차원'과 '담론의 측면'에서는 김영종의 견고함에 못 미칠지 모르지만, 자본주의 바깥의 다른 삶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에 있어서는 훨씬 구체적이다. 그 구체성은 자신의 위치를 비판적 지식인이 아닌, 민중과 더불어 호흡하는 생활인으로서 구체화했을 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몇 해 전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설문조사에서 통일이 되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으로 백두산과 개마고원이 꼽혔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그 기사를 읽으며 사뭇 놀라웠던 건, 지금의 초등학생 아이들을 통해 비추어진 '백두산'의 이미지가 한편으론 과거를 살아온 우리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두산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필자로서는 흔히 '한민족의 시원'이라거나 고고한 '백두대간의 정수리'라는 화려한 수사보다 '비행기는 높아, 높은 건 백두산'이라는 말이 훨씬 피부에 와 닿는다. 그저 엄청나게 높고 큰 백두산은 어릴 적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비행기처럼, 현실에서는 도저히 가볼 수 없는 또 다른 세계, 궁극의 이상과도 같은 유토피아가 아니었던가.

방학을 이용해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 건너 나라에까지 어학연수를 떠나는 아이들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지금, 그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 디즈니랜드나 대영박물관이 아니라 백두산과 개마고원이라는 결과가 순전히 그곳이 우리 민족의 혼이 서린 영산에서 나온 것일까.

혹시라도 백두산 그곳이 부모의 돈으로도 갈 수 없고, 인터넷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곳이기에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라면 답답한 생각이 먼저 든다. 천지의 괴물이나 화산 폭발에 쏠리는 세간의 관심처럼 의문투성이 백두산의 이미지란 내 가난이 만들어냈던 환상 속의 비행기와도 같이, 오랜 분단이 만들어낸 우리 인식의 세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씁쓸한 느낌마저 지울 수 없다.

한창 남북 관계가 훈훈하게 무르익던 시절, 산악계에서는 북 측의 금강산 내금강 개방에 이어서 백두산(장백산이 아닌) 관광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신빙성을 지닌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등산 잡지 기자로 일하며 내심 다른 이들보다 먼저 삼지연에서부터 백두산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신선한 겨레의 숨소리 살아 뛰는' 그곳에 올라 '만주 벌판 말을 달리던 투사들의 마음의 고향'을 만날 테고, 그래서 천지에 서서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를 고래고래 외치며 눈물을 절절 흘리는 상상을 한동안 해보았었다. 이제는 고작 책에서나 그 발자취를 더듬더듬 따라갈 뿐이지만.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백두산 여행기를 책으로 묶은 <백두산 등척기>(해냄 펴냄)의 민세 안재홍을 살펴보며 참으로 복잡한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에 의한 아홉 차례의 투옥과 해방 정국의 혼란, 한국전쟁과 납북으로 이어지는 안재홍의 삶은 몇 줄의 이력으로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정민 교수가 풀어 읽은 백두산 등척기>(안재홍 지음, 정민 풀어씀, 해냄 펴냄). ⓒ해냄
그래서 안재홍이 <백두산 등척기>에 담아낸 이야기는 '비행기'와 '백두산'과 같은 단순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오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한문학을 전공한 정민이 쉽게 풀어 읽은 백두산 이야기라지만 생경한 지명이 우선 시선을 가로막았다. 급기야 오래된 지리부도를 꺼내놓고 손으로 짚어가며, 80여 년 전 안재홍의 발걸음을 따라갈 수밖엔 없었다.

<백두산 등척기>는 당시 조선일보사 부사장이었던 안재홍이 1930년 7월 23일 밤 11시 경성역을 출발해 백두산 산행을 마치고 8월 7일 오후 5시 기차로 북청역을 떠나기까지 16일간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이후 1931년에 <조선일보>에 34회에 걸쳐 연재되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당시 언론사에서는 백두산뿐 아니라 금강산, 묘향산, 구월산, 지리산 등 남북의 명산을 찾아 오르는 기획을 자주 했었다.

언뜻 생각해보면 탐험이나 학술 조사를 내걸었던 그런 이벤트들이 언론인과 식자층들의 입장에선 식민지 치하에서 정치적 부담 없이 공중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한편, 호위군 수백 명과 함께 행진하듯 오르는 산과 으레 그 정상에서 벌인 신사 참배가 일제의 입장에서도 명분을 기대할 수 있는 행사였던 것 같다. 이러한 행사들은 훗날 노골적 친일을 내세운 연성회로 변절되어 가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지금은 갈 수 없는 그곳 풍경을 글로나마 접할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건가.

<백두산 등척기>는 이 시기 산행 기록을 남긴 다른 저자들, 민태원, 최남선, 이은상, 홍종인 등과 비교해볼 때 그 삶은 차치하고라도 또 다른 맛이 있다. 풀어쓴 이 정민은 안재홍의 글을 두고 "문예취가 풍부하나 수사의 과잉이 없고, 학술적이되 무미건조에 흐르지 않았다. 글이 그 사람과 꼭 같다"고 적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2200여 미터의 고지대이지만 평평한 등성이로 관목조차 거의 없다. 풀과 이끼가 두터운 곳에 한 조각 정계비가 서 있다. (…) 보기에는 대단치 않지만 이 한 조각 돌이 갖은 비바람, 219년의 슬픔과 근심, 부끄러움과 원한, 분노와 회한의 한복판에서 외로이 쇠망한 조선의 운명을 짊어지고 온 것임을 생각하면 실로 값싼 비분을 터뜨릴 겨를도 없다.

신라의 강역이 남쪽 귀퉁이에 치우치고 백두산의 거룩한 자취가 북쪽 변방에서 외떨어져서 고구려 이래로 왕성하던 국풍이 발호하는 중국화의 어설픈 새 문화에 휩싸이게 되면서 민족의 정열은 거의 질식하고 말았다. 이에 맞서 나아가려는 기백이 이미 막혀버린 과정은 지금이라도 또 한 번 객관적으로 자신을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눈길을 끄는 건, 저자가 이미 1919년 청년외교단 사건, 1928년 두 차례 <조선일보> 필화 사건, 1929년 신간회 광주 학생 사건 진상 보고 민중 대회 사건으로 네 차례나 투옥된 바 있는 요주의 인물이었음에도 무장 독립군들이 활동해 일제가 '마적이 출몰한다'고 했던 변방 백두산행에 참가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으레 이런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여행기 내내 행간에는 민족주의자의 시선이 슬쩍슬쩍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재홍이 말하고자 했던 건 어쩌면 백두산의 아름다움이나 자연의 웅장함, 고고하고도 따분한 역사가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만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한가한 일이 아니다. 높은 산에 오르고 한바다에 떠서 천지의 드높은 기운을 마시면서 웅장하고 아득한 기상을 기르는 것은 그대로 세상에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도시와 시골, 산과 들에서 백성과 만물이 살아 숨 쉬는 실제 상황을 폭넓게 보고, 고금에 변해온 자취를 살피는 것은 사회인에게 가장 으뜸 가는 책무이기도 하다.

'민중의 세상'을 이름(民世)으로 썼던 저자가 구두끈을 조여 매고 백두산으로 향했던 까닭은 서문의 이 한 문단에 모두 들어있는 것 같다. 지금은 이 땅 누구도 오를 수 없게 된 80여 년 전의 백두산행에서 우리가 다시 읽어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이라면 이 시대의 '케이블카 산 등척기'나 '4대강 등척기'가 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으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시골로 가게 만든 러미스

지금부터 9년 전, 우리나라에 작은 책 한 권이 출간되었다. 재생지를 쓴 탓도 있지만, 책이 하도 가벼워서 혹 떨어뜨리면 바람에 날릴 만큼 가벼운 책이었다. 이 책은 역자인 김종철의 말처럼 일부 "예민한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다수 대중들에게는 가볍게 간주되고 만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책의 무게와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본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 그 책은 결코 가벼운 책이 아니었다. 어떤 책인가?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김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라는 책이 그것이다. 저자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정치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인 더글러스 러미스였다. 러미스의 글들은 이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일부 <녹색평론>에 소개되기도 했으나 그의 저작이 국내에 단행본의 얼굴로 출간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 시인은 녹색평론사에서 펴낸 여러 중요한 책들 중, 굳이 딱 두 권만 꼽으라면 러미스의 이 책과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꼽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출판사에서 펴낸 책들 중에는 무위당 장일순의 책도 있고, 권정생의 책도 있고, 웬델 베리의 책도 있지만, 시인은 그렇게 두 권을 꼽았다.

(지금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는) <오래된 미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멋들어진 제목 때문에 너무 많이 알려지고 읽혔다는 점에서, 다른 한 권인 러미스의 책은 그 담긴 내용의 단순명쾌하지만 심오한 의미에 비해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데 대한 안타까움이 시인의 마음속에 어른거리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를테면 삼성경제연구소가 있다면 그 맞은편에 '녹색평론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그런 표현을 한두 번쯤 내비치기도 했던 나는 그 출판사의 도서 목록을 펼쳐놓고 "딱 두 권만 꼽는다면?"이라는 질문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시인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러미스의 책을 읽은 뒤 세월이 벌써 9년이나 지났다.

다른 이에게도 그랬을지 모르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러미스의 작은 책 한 권이 내게 준 영향은 작지 않았다. 내가 밤잠 안자고 열심히 4년여 기간 동안 투신했던 환경단체(풀꽃세상) 일을 깨끗이 접고, 비록 여전히 반쪽 생활이긴 하지만 시골로 직행하게 된 데에도 그 책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나 싶다. 나이 들어 한 사람이 어떤 결정을 할 때, 그 결정의 배경에 딱 한 권의 책만이 작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좀 흐르고 나면, 어떤 결정도 제 혼자 힘으로 내린 것은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사람의 생각이 어찌 혼자만의 생각일 수 있겠는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서평이라 하든 독후감이라 하든, 내가 쓴 책에 대한 이야기들 중 가장 많이 언급한 것도 바로 러미스의 책이었다. 하도 이 책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다 보니 나중에는 "경제 성장은 우리를 풍요롭게 할 것인가"라고, 제목을 마구 곡해하기도 했다. 원제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싶기는 하다.

가난이 행복의 필연적인 전제는 아니다


▲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더글러스 러미스·쓰지 신이치 지음, 김경인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9년 뒤, 같은 출판사에 의해 뜻밖에도 러미스의 두 번째 책을 만났다. 이번에 내가 만난 책은 '러미스의 평화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쓰지 신이치와 나눈 대담집,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이었다. 이번 책은 그의 글이 아니라 그가 한 말을 담고 있었다. 책을 손에 들고도 나는 바로 읽지 않고 며칠간 뜸을 들였다. 잠시 뜸을 들이는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그 뜸은 마치 식탁을 깨끗하게 치운 뒤 새 밥을 먹으려는 자세 같은 것이기도 했다.

러미스와 대담을 한 쓰지 신이치라면 일찍이 그가 쓴 <행복의 경제학>(서해문집 펴냄)에 대해 내가 다소 불편한 심정도 토로한 적이 있는 문화인류학자, 저명한 환경운동가가 아닌가. 이 사람도 대체로 러미스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텐데, 두 사람이 만나 무슨 새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야 피 터지게 자기주장을 하고, 그 다른 주장이 펼쳐지는 가운데 재미도 느끼고 얻을 것도 있을 텐데,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만나면 '공감의 확인' 외에 달리 새로운 이야기가 뭐 있을까. 책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면 그 정도였다.

쓰지 신이치의 책에 대해 내가 불편해 했던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그가 히말라야의 부탄을 여러 차례 다녔다고 하기에, 부탄에 들어가서 국왕도 만나고 여러 날 체류하자면 매일같이 200달러의 돈을 부탄 왕국에 꼬박꼬박 지불해야 했을 텐데, "가난이 불행의 절대조건이 아니다"고 설파하는 이가 참으로 먼 데까지 가서 참으로 많은 비용을 쓰는구나, 하는 감정 때문이었다.

한번 갔을 때 20여 일 체류했다면 일단 '부탄국립공원'-부탄 왕국을 나는 이렇게 부른다-입장료만 해도 4000달러, 그러기를 수년간 여러 차례 했다면 오가는 비행기 삯과 부탄에 이르기 전에 경유하는 데 드는 비용을 빼고도 한번 외유에 1만 달러 이상의 돈을 지니고 다닌 셈이 아니겠는가, 하는 계산, 그런 계산 끝에 일어나는 씁쓸한 감정 때문이었다.

그것은 골프 치러 비행기 타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사람과 같은 수준이 아니겠는가? 일본의 뛰어난 행복경제학 전도사 쓰지 신이치의 여행지와 여행 경비랑 나는 털끝만큼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지만, 나 역시 젊은 날부터 히말라야를 적잖이 헤맨 사람이었기에 드는 씁쓸함이었다.

전 세계에서 인도 네팔로 몰려드는 배낭 여행자들은 독특한 부탄 입장료와 높은 체류비 때문에 부탄을 그냥 지나치곤 한다. 부탄에 갈 수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그런 질문을 나는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거칠게 잘라 말하기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이 세상을 가난한 배낭족들보다 좀 더 망친 사람들이기 쉽다. 본의든 아니든 탄소 배출에 좀 더 기여(?)함으로써 지구 온난화에 박차를 가한 사람들이거나 그런 체제의 승자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왕국 바깥의 산업 사회에서 그들은 그 중 여유 있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여유 있는 부탄 입국자들은 악인이고, 그렇다고 돈이 없어 왕국에 진입하지 못하는 배낭족들은 무조건 선한 사람들이라는 어린애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부탄 왕국의 자폐적인 두려움과 실리가 어떤 의미로는 웃기고 영악하다는 이야기다. 인도에서 7년째 살고 있는 후배들한테 들었더니만,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칭송받는 부탄 왕가의 한 왕자는 인도 뉴델리에 유학을 와 있는데, 왕자의 사치는 이 세상의 다른 왕국의 왕자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수준이라고 한다.

2009년 10월 현재 200달러면 인도 돈으로 9600루피인데, 후배가 말했다.

"서민들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서민들의 한 달 월급은 대체로 1000루피에서 4000루피 정도입니다. 100달러를 넘게 받는 사람들은 아주 드문 경우지요. 게다가 가장 한 명이 벌어서 부양하는 가족은 4명에서 많게는 10명 정도입니다. 이 돈으로 집세 내고 식료품 사고 병원도 가고 아이들 학교도 보냅니다.

그러니 하루에 200달러면 얼마나 큰돈인지 잘 알 수 있지요. 그런 돈을 매일 매일 내야만(써야만) 갈 수 있는 부탄을 지상에 남아있는 마지막 천국같이 묘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저 또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최성각,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동녘 펴냄, 208~209쪽))

부탄 왕국의 태도를 '자폐적 두려움'이라 비판한 까닭은 부탄이 배낭 여행자들을 산업 사회의 움직이는 오염덩어리들로 간주하고 그 폐해를 막기 위해 높은 입국료와 체제비를 요구했다고 하기에 하는 소리였다.

쓰지 신이치는 이번 대담집에서도 부탄 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가 1970년대에 각국 수뇌들을 초대해 제창했던 GNH(국민총행복)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부탄 왕은 한 나라의 부의 지표로서 GNP(국민총생산)나 GDP(국내총생산)가 아니라 GNH(국민총행복)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실제 2008년 공포된 최초의 헌법에 GNH를 실제 국가 통치의 중심 개념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쓰지 신이치는 부탄 왕이 내건 국민총행복에 깊이 매료된 사람인데, 인도에 살고 있는 내 후배들은 "부탄 왕국의 온갖 궂은 일은 인도 비하르 지역에서 온 불가촉천민들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쓰지 신이치의 부탄에 대한 열광적 매혹이 계속 나를 불편하게 자극했던 까닭은 그가 주장하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가 외면한, 그가 아마도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표현하지 않았던 것들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쓰지 신이치는 내가 보기에는 자신의 행복경제학을 강화하기 위해 '이스텔린의 역설'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즉, "한 국가 내에서 부유층이 빈곤층에 비해 일반적으로 더 행복하지만 부유한 국가들의 국민들이 가난한 국가의 국민들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다"(매트 리들리, <이성적 낙관주의자>, 조현욱 옮김, 김영사 펴냄, 51쪽)는 역설 말이다.

나는 지금 뭔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이야기지만, 산업 사회에 속해 있으면서 산업 사회의 여러 난공불락의 문제들을 비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문제는 온 세상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만들 게 명약관화한 경제 성장 제일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가난을 너무 쉽게 예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난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다시 달리 말한다면, 경제 성장을 비판하고 다른 삶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자기주장의 함정과 낭만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함정에 대해서는 러미스도 이번 책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근대 사회에 대한 비판은 아주 중요하고 또 정곡을 찌르고 있고, 저 자신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거기에는 아주 큰 함정도 있어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와 노력을 이해하고, 그 위엄을 인정하면서 논의할 수 있는 형태로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50쪽)

내 주변에는 가난한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는 사실 '자발적 가난'이니 그런 말을 쉽게 입 밖에 못 낸다. 그 말이 꼭 전달되어야 하는 이들은 너무 멀리 있기도 하지만, 그 말의 본의가 거의 제대로 전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난이 곧 행복을 방해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일상에서 불행과 가난은 대개 샴쌍둥이처럼 동행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온 세상을 이토록 무섭게 뒤덮고 있는 경제 성장론, 발전론을 용기 있게 비판할 수 있을까? 비판이야 누구야 할 수 있되, 어떤 사상이라야 그 비판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시위에 참여한 뒤 느낀 벅찬 해방감

러미스는 좀 과장되게 말해서 나를 시골로 가게 영향을 끼친 이들 중의 하나이고, 쓰지 신이치는 그가 펼친 운동의 대의보다는 그 기질의 맹목성과 흥분으로 인해 나를 다소 웃긴 사람인데, 두 사람이 만나 나눈 이 대담집은 러미스의 첫 책처럼 나를 여러 날 고통스럽게 했다.

거의 대부분 깊이 공감하고 있는 이야기들이지만, 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을까? 이 책을 접할 수 있는 이들이 누구일까? 그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충분히 가난한 사람들은 거리에서 직장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이런 유의 책을 볼 여가가 없고, 이 책을 읽고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미 가난에서 벗어나 있기 십상이고, 정작 이런 책을 읽고 이 세계가 파국으로 치달리는 것을 선회하거나 돌이키는 데 총력을 쏟아야 할 힘센 권력자들, 금력자들은 이런 유의 담론들을 가볍게 묵살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러미스는 누구인가. 쓰지 신이치는 러미스를 미국과 일본의 교차 지점에 있는 이라고 말을 건네지만, 러미스는 그런 규정에는 대꾸를 안 해버리는 '미국인'이다. 러미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정치사상을 전공했고, 미군 해병대에 입대해 오키나와에서 근무했다. 일본과 그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러미스는 후에 다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나서, 일본 쓰다 대학교에서 정년을 맞이했으며, 지금은 일본인 처와 오키나와에서 살고 있다. 특기할 일은 그가 해병대 장교였다는 점이다. 그가 전쟁과 에콜로지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굳게 연결되어 있는 개념이라는 자각을 한 것도, 그래서 그가 자신의 평화론과 에콜로지를 간단히 통합시킬 수 있었던 것도 점령국 군인으로서의 그의 해병대 체험, 오키나와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젊은 날 러미스가 해병대에 입대한 까닭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해병대 모자가 특히 마음에 들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겁 많은 미국인이었다. 점령국의 해병대 장교이면서 그는 군 생활 내내 오키나와 현지인들을 내심 두려워했다고 기술한다. 1960년대 일본에서 안보 반대 투쟁이 한창일 대 러미스가 속해 있던 군대는 한국에서 군사 훈련 중이었다. 그는 지프차 8대를 지휘하던 지휘관이었는데, 지프차가 논에 빠졌고, 그것에 항의하던 한 시골 청년이 거칠게 항의를 할 때, 그는 항의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무서워서 가까이 가보지도 못했어요"(39쪽)라고 말하는, 겁 많은 미군 해병대 장교였다.

러미스가 어떤 인간인가를 이해하는 데에 이런 그의 고백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최소한 일본군은 다 죽여 없애야 한다는 무례한 점령군 장교는 아니었으며, 전 세계를 미국화해야 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있던 시건방진 미국 시민도 아니었다. 미국이 특히 일본에 한 짓에 대해 그는 잘 알고 있었으며, 한 사람의 미국인으로서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말자고 다짐(52쪽)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 애쓴, 섬세한 사람이었다.

러미스는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미국에 돌아가 학업을 계속한다. 1960년대였다.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지탱되는 '산업 문명의 끝'을 느낀 60년대 젊은이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자유 토론을 하면서 다른 문명을 모색했다. 가히 전 세계를 휩쓸던 비트 세대, 히피 세대 혹은 카운터 컬처의 시대였다.

그들은 다른 문명의 가능성을 꿈꾸며 제도권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은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제도권으로 귀환했지만 어떤 이들은 영원히 다시는 문명권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어느 날, 러미스는 어느 가게 앞에서 시위 중인 피켓라인을 통과해야 했다.

그는 "그냥 지나치기 미안해서 라인에 들어가 세 바퀴 정도 같이 돌다가 집으로"(60쪽) 돌아갔다. 운동의 한쪽에 비켜 서 있던 전직 군인 러미스의 생전 첫 시위 참여였다. 시위대와 함께 세 바퀴를 돌고 난 뒤, 그는 "형용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고, "별 세계"에 다녀온 느낌과 함께 "드디어 시작이구나"(60쪽) 하는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표현하기 힘든 공포 때문에 억제하고 있었던 몸과 마음의 분리로부터의 해방감이 그것이었다. 이후, 러미스는 반전운동가, 혹은 평화운동가로서의 생애로 진입한다. 그의 말대로, 그게 시작이었다.

모두 죽이고 굶겨야 한다는 사고방식

정치학도였던 러미스에게 가장 큰 관심은 언제나 '국가'였다. 국가의 기본적인 정의는 '국가는 군사력을 갖는다'인데, 러미스에게 '일본국 헌법 9조'는 바로 그것을 깨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흥미로웠다. 비록 패전 이후 강요된 헌법이었지만, '무력 행사를 영원히 포기'할 뿐 아니라 '육·해·공군 및 그 외의 어떤 전력(戰力)도 보유하지 않겠다'는 9조는 일찍이 근대국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내용이었다.

9조로 인해 일본의 경제 부흥이 가능했다는 설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 핏값을 달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전후 일본의 경제 대국화는 한반도에서 동족들끼리 몇 백만 명을 서로 죽였던 '이 땅의 한국전쟁'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던가. 한반도에 태어난 우리는 9조가 전후 일본에 끼친 영향에 대해 틀림없이 달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일본에는 9조와 관련해 호헌론자(護憲論者)들과 개헌론자(改憲論者)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있는 모양이다. 요컨대, 무기를 지녀 안전을 꾀하겠다는 개헌론과 무기를 버려 평화를 지키겠다는 호헌론이 그것이다. 어느 쪽을 택할지를 묻는 여론조사 결과는 반반이라고 한다(마사키 다카시, <나비문명>, 김경옥 옮김, 책세상 펴냄, 103쪽). 우리는 일본처럼 강요 헌법은 아니었지만, 건국 이후 지금까지, 더욱이 분단국인 우리는 국가가 군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으니 일본처럼 여론조사를 할 일도 없겠지만….

정치학도 러미스에게 일생 잊지 못할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다. 그가 오키나와의 해병대 장교로 근무할 때였다. 옮겨 일독해 볼만한 내용이라 생각한다.

"언젠가 기지 안에 있는 바에서 공군 장교와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그와 논쟁이 벌어졌어요. 제가 "히로시마에 폭탄을 투하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했더니, 그의 분노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진주만을 공격한 것도, 포로를 고문한 것도 다 일본군이 한 짓이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 이렇게나 많다며 목록을 줄줄 읊으면서 "그렇기 때문에 폭탄을 투하한 건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더군요. 저는 "일본 군대가 그런 짓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히로시마의 부녀자와 아이들은 무슨 죄가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 장교가 하는 말이, "그 여자들이 군대를 낳았다. 아이들은 자라서 분명 같은 짓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죽여도 된다"는 겁니다." (97쪽)

이 공군 장교의 말을 러미스는 '평생 잊지 못할 충격적인 일'이라고 회상한다. 할 말은 잊은 러미스는 이 세상에 "그런 사고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 장교 덕분에 반전과 비전, 혹은 평화에 대한 생각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나는 러미스와 논쟁을 벌였던 공군 장교의 말을 접하면서 "이 장교와 비슷한 사람이 최근에도 있었는데",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조선일보>의 주필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은 얼마 전, '북한에 식량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는 제목의 칼럼에서 "남쪽의 사람들은 이처럼 자기 의사 표시에 강하고 권력에 저항적인데, 북쪽의 형제들은 어째서 그들의 지배 세력에 저처럼 무기력하고 무저항적인가? 때로는 우리가 과연 같은 민족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라며, "지금 북한 주민은 가난해서 일어설 힘조차 없는 것이다"고 동정의 글을 전개하더니만, 결론은 "그러니, 지금 우리가 식량·물자 등 대북 지원을 하면 그 지원은 그대로 북한 주민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지원은 우선적으로 군부와 지배 계층으로 가고, 그래도 남으면 주민에게 갈 수도 있다는 것이 지원론자들의 주장이지만 우리의 지원 규모는 그렇게 무제한적일 수 없다"고 하면서, 한 탈북인사의 비장한 언급이 마음에 낳는다고 하면서 글을 맺었다(<조선일보> 2010년 10월 18일자).

김대중의 칼럼에 소개된 탈북 인사는 비장하게 "지금 북한에 식량을 주면 북에 남은 우리 아들, 딸 세대가 얼마간 연명하는 효과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북한 지배층을 더욱 살찌우고 주민의 가난을 연장시켜 그들의 지배를 영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아들세대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김정일 체제가 계속돼 손자 세대까지 굶어 죽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을 희생해서라도 내일을 살리자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요컨대 북의 붕괴를 재촉하려면 저항도 못하는 지금의 북녘 동포들이 불쌍하긴 하지만 그들이 설사 굻어죽더라도 '김 씨 왕조 체제'를 붕괴시키고 손자들 세대를 살리기 위해 쌀을 주지 말자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저 유명한 <조선일보>의 김대중이지만, 평생 글을 써온 언론인이 사람이 굶어죽더라도 '있는 쌀'을 주지 말자, 이런 사고방식을 이렇게 거침없이 표하다니, 경악했던 적이 있었다. 러미스에게 충격을 준 공군 장교도 아마 김대중과 같은 사고방식의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간디의 비폭력 평화 사상을 묵살한 인도

러미스는 자서전을 쓴 게 아니라 신이치와 대화를 나눴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자서전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피력하는 것보다 한결 듣기가 편했던 것은 왜였을까? 자서전을 쓸 때의 긴장감이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에서는 길항관계로 돌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자연스러운 일상적 대화로 인해 읽는 이들도 마치 그 대화에 참여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후일 러미스는 인도에 가는데, 놀러간 것이 아니었다. 인도에 간 까닭은 독립 인도가 어떻게 군대를 가진 나라가 되었는가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였고, 특히 비폭력 독립운동의 화신인 마하트마 간디가 독립된 새 나라에 품고 있었던 꿈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러미스의 전공이 바로 '국가'였고, 국가의 기본 정체성은 바로 군대를 가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독립한 인도는 왜 간디의 비폭력 사상을 외면했을까? 그때 인도의 국민회의는 어떤 논의를 거쳐 군대를 가지게 되었을까. 인도 헌법 연구는 자연히 간디에 대한 공부로 전개된다.

러미스가 만난 한 기초위원회의 위원은 "이것은 우리의 헌법이고 우리의 정부이며 우리의 국가다. 그러므로 (계엄령을 발동할) 이 조항을 남용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만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고 답한다. 독립과 동시에 인도는 파키스탄이 분리되면서 분쟁 중이었고, 카슈미르에서는 전쟁이 발발한 탓도 있지만, 인도는 영국 지배 아래에 있던 식민지 시대 군대를 그대로 인도 군대로 흡수했다.

군대를 반대했을 뿐 아니라 간디는 아예 70만 개의 마을이 모두 독립된 자치 정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세계의 주권국가는 총 57개. 여기에 간디는 70만 개의 나라를 더 보태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독립이라고 번역되는 '스와라지(촌락 공동체)'라는 말 속에 이미 자급자족이나 경제 자립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각각의 마을에 필요한 것은 각자 마을에서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그리고 몇 곳 촌락의 대표들이 모여 지역위원회(판차야트)를 만들어, 평등하게 연결되는 인도 전국의 국제연맹 같은 조직을 만들자, 그것이 독립된 인도에 대한 간디의 소망이었다. 그곳에는 충고를 하고 아이디어를 제공할 자격은 있지만 명령할 권리는 없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었다(116~117쪽). 간디가 꿈꾼 국가 조직은 군대를 갖는 것이 불가능한 형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티아그라하(비폭력 저항 운동)에 근거한 헌법은 평화헌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간디의 사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자신의 꿈이 실현되지 않자 초대 수상인 네루의 비공식 고문이긴 했지만 간디는 점차로 현실 권력과 거리를 두게 된다.

러미스는 간디의 평화헌법에 대한 기록을 델리의 헌책방을 뒤진 끝에 간신히 구입한다. 나 역시 오래 전 델리 코넷 플레이스 근처의 헌책방을 <암베드카르 평전>을 구하기 위해 여러 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러미스는 간디의 평화헌법 자료를 찾았고, 나는 시간차가 있었지만 군대와 계엄령 조항을 담은 오늘의 인도헌법을 기초한 암베드카르의 자료를 찾고 있었다. 간디는 인도의 근대화를 반대했고, 암베드카르는 근대화를 통해서 특히 불촉천민들의 카스트 해방을 꿈꾸었다. 같은 시기 두 영웅의 생각의 차이는 그토록 컸었던 것이다.

만년의 간디는 점점 비관적이 되어갔고, 나중에는 영향력마저 상실했다.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이제 죽어야겠구나"(120쪽), 러미스는 간디의 만년을 그렇게 추측한다.

간디와 네루의 불화

인도인들은 간디를 '마하트마'라는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놓고선 정작 성인의 평화 사상은 묵살했던 것이다. 정치학자 러미스는 '군대 없는 국가'가 탄생할 뻔한 인도가 간디의 사상을 외면한 데 대해 비애감을 느낀다. 당시 네루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었던 간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네루는 간디를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욱 나를 당황케 한 것은 옹(간디)께서 이 신문 기자와의 회견의 뒷부분에서 자민다(zamindari : 일종의 지주 제도)를 변호하고 있는 일이었다. 옹께서는 이 제도가 농촌과 국가 경제에 대해서 매우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자민다와 탈루카(talukas)를 오늘날 변호하는 자는 거의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이러한 옹의 말씀을 나를 몹시 놀라게 했다.

전 세계에 걸쳐 이와 같은 제도는 붕괴되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인도에서조차도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이 오래는 존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지주들 자신들도 그 토지에 대한 충분한 보상금만 받을 수가 있게 된다면 오히려 이 제도의 폐지를 환영할 것이다. 이 제도는 그 자체의 커다란 결함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침체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께서는 신탁(信託)이라는 언사를 쓰시면서 이 제도에 찬성하고 계셨다. 나는 또다시 옹의 견해가 나의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다고 보게 되어 앞으로 과연 언제까지 옹과 협력해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네루, <나의 사상적 자서전 : 정의의 도전>, 이극찬 옮김, 삼중당 펴냄(1964년), 386~387쪽)

간디와 네루의 균열은 시간이 갈수록 가속화되었다.

"옹께서는 놀랄 만한 정도로 인도를 잘 대표하여 이 오랜 역사를 가진 학대를 받아온 땅의 참된 정신을 나타내시게 되었다. 말하자면 옹은 곧 인도였으며 따라서 옹의 실패는 바로 인도의 실패였다. (…) 그러나 간디 옹의 위대함과 옹의 인도에 대한 공헌,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가 옹에게 힘입고 있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은혜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께서는 많은 사실에서 아주 절망적인 잘못을 저지르시는 일도 있으셨다. 옹께서는 결국 무엇을 지향하고 계시는 것일까. 오랜 세월에 걸쳐 옹과는 가장 친밀하게 교제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속에서 옹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하게 되어 있지 않다. (…) 1909년, 옹께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즉, "인도는 지난 반세기에 걸쳐서 배운 것들을 모조리 잊어버리지 않고서는 구제될 수가 없다. 철도, 전신, 병원, 변호사, 의사 등등을 모두 내버려야 한다. 이른바 상류 계급은 의식적으로, 종교적으로, 또는 신중하게 소박한 농민 생활이야말로 참된 행복을 부여하는 생활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터득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또한 "나는 기차를 타며 자동차를 이용할 때에는 언제는 자기의 정의의 관념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고도의 인위적이며 급속도의 동력을 사용하여 이 세계를 개조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을 기도하는 일이다"라고.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해로운 교리로서,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교리의 배후에는 옹의 고뇌와 금욕 생활에 대한 사랑과 찬미가 내포되고 있다. 옹에게 있어서는 진보와 문명은 인간의 욕망을 배가시킨다든가 그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신중하게 자발적으로 억제하는 데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참된 행복과 만족을 증진시키며 봉사의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전제가 일단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간디 옹의 그 밖의 사상도 이해하기 쉽게 될 뿐만 아니라, 옹의 활동도 더 한층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대부분은 그와 같은 전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후에 이르러 옹의 활동이 우리들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 불평을 털어놓게 된다. (같은 책, 409~411쪽)

우리에게도 평화 사상이 있었다

영국이 만들어준 "철도, 전신, 병원, 변호사, 의사 등등을 모두 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간디의 격렬한 근대 거부에 네루가 저항을 안 했을 리가 없다. 네루 역시 숱한 옥고를 치르고 한 나라를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거인이었지만 평범한 근대인이었던 그가 어떻게 간디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간디의 위대성은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간디는 러미스가 말하고 있듯이 70만 개의 자급자족적인 촌락 공화국의 연합체라는 자신의 꿈이 실현되는 데에 100년도 더 걸릴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간디가 몽상가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을 배가시키고 끝없이 진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네루가 어떻게 간디의 100년 프로젝트를 수용할 수 있었을까. 네루에게 간디의 자급자족은 곧 빈곤을 의미했다. 간디의 실패는 인도의 실패가 아니라 곧 인류의 실패가 되어버린 것이다.

간디의 좌절을 접하면 나는 우리에게도 간디처럼 '다른 국가'를 소망했던 이가 계셨다는 것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바로 '부국강병이 아니라 오로지 높은 문화의 힘'을 소원했던 백범 김구다.

신자유주의라는 해괴한 탐욕의 사상이 세계를 뒤덮고 있는 이때 그러나 러미스는 자신이 성격적으로 비관적인 사람이 되기 어렵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의 변화를 보다 높은 단계로의 이행으로서 생각하는 것, 그것이 곧 '진보'라고 하면서(164쪽) 러미스는 경제적인 풍요가 아니라 문화의 풍요, 상상력의 풍요, 창조성과 다양성의 풍요, 사람들과 사람들을 결합시키고 참가시킬 수 있는 문화와 자연이 있다는 의미에서의 건전한 풍요(178~179쪽)를 소망하고 그 실현을 믿는다. 근년에 세계를 덮었던 참으로 어이없는 금융 위기를 그는 오히려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러미스는 순진한 사람일까?

러미스와 쓰지 신이치의 대화 내용은 사실 조금도 새롭지 않다. 조금이라도 제정신을 가진 이들이라면 바로 이해할 수 있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에는 왜 이렇게도 소박하고 명쾌한 꿈들이 자리 잡을 데가 지팡이 하나 꽂을 만큼도 없을까.

소설가 조세희의 말마따나 '정신만 빼고 다 있는' 여기 이곳, 한국 사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