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그 중에서도 소설은 한국에서 한 때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과학소설'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가는 중이다. SF는 과학이라는 학문 및 기술의 발달이라는 현상과 완전히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그 융성기가 영미 문화권에 일찍 찾아온 것이나 그 지역 사람들이 SF의 드넓은 가능성에 크게 문을 연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현재 영미 문화권의 SF 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네뷸러 상과 휴고 상이다. 전자는 미국과학소설가협회 회원들이 뽑으며 후자는 세계과학소설컨벤션 구성원의 투표로 결정이 된다. 네뷸러 상을 처음으로 수상한 작품이 나온 해는 1965년이다. 영미 문화권의 SF 황금기가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네뷸러 상을 받아 그 중요도나 작품성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명작이나 과학소설 작가가 상당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수상 여부가 과학소설의 질을 전부 결정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줄어들 리는 없다.

이에 미국과학소설가협회에서는 투표를 통해 네뷸러 상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나온 영미 문화권 SF 가운데 명작들을 뽑았다. 그 가운데 단편과 중편은 따로 모아 두툼한 책으로 엮었다. 이 책이 <SF 명예의 전당>(오멜라스 펴냄)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나왔다. SF의 정수는 단편이라고 단언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은데, 이 책을 통해서 1965년 이전의 영미 SF를 단숨에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배경 설명은 이쯤 해두자. 글의 감상법은 단 하나뿐이니까. 두 권으로 나온 <SF 명예의 전당>에는 총 26개의 단편 SF가 들어있다. 그 중에서도 모든 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수록작들을 몇 편 소개해 본다.


▲ <SF 명예의 전당 1 : 전설의 밤>(로버트 실버버그 엮음, 박상준·고호관·박병곤·지정훈 옮김, 오멜라스 펴냄). ⓒ오멜라스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전설의 밤'은 제목처럼 전설로 남겨도 부족하지 않을 SF다. 여기 지구에 사는 우리들은 많은 것을 당연시하며 산다. 공기나 물이야말로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 중에는 태양과 달과 낮과 밤과 별을 보며 호기심을 키우는 아이들이 있다.

나이가 들며 삶의 주기에 익숙해지는 바람에 대부분 시들해지긴 하지만. 그 주기의 지표가 다른 곳의 삶은 어떨까? 밤이 없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밤이 없으려면 과학적으로 어떤 조건이어야 할까? 그런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무얼까? 낮과 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리들과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다를까? '전설의 밤'은 이 질문들을 단숨에 해결해 준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주는 압도적인 인상은 읽는 이가 저도 모르게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만들 것이다.

영미 문화권의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라면 프레드릭 브라운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프레드릭 브라운은 반전과 유머를 주무기로 삼는 SF 단편을 다수 써낸 작가이다. 주관적인 의견으로는 황금기 시대 초기 작가 가운데 아시모프와 더불어 걸어 다니는 아이디어 은행이라고 부르고 싶다.

브라운이 쓴 '투기장'은 극적인 상황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단편의 진수이다. 종족의 운명을 온 몸에 담고 싸우는 두 생물. 그리고 초월적인 지성과 능력을 겸비한 투기장의 주인. 과학적인 설명보다는 긴장감과 사건의 결과를 강조하는 SF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떠올려봤을 상황이다. '투기장'은 거기에 원형적이고 교과서적인 예를 제공한다.

'무기 상점'은 작가만큼이나 독특한 작품이다. 앨프레드 엘튼 반 보그트는 인간의 현재나 미래를 문명사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기를 즐겨 한다. 이 작품에도 그런 특징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개인에게 무한한 힘을 제공할 수 있는 무기 상점의 출현. 이른바 전원적인 평화를 사랑하던 주인공.

이 둘이 충돌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렇게 물으면 많은 이들이 뻔한 결말을 예상할 것이다. 그리고 읽어가며 약간 당황할 것이다. 마지막에 약간의 설교가 나오는 것은 옛날 소설이니 그렇다고 해주자. 대신 예상 밖으로 튀어나가는 진행을 즐기면 된다. (작품 전체가 상징하는 바까지 음미한다면 금상첨화다.)

'헬렌 올로이'는, 어떤 작품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나 시각을 공격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라면 신이 나서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재미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로봇'의 최종 형태에게 바라는 그 무언가, 전형적이면서도 쉽게 지워버릴 수 없는 무언가를 압축해 놓은 작품이니까. 다 읽고 나서 그 무언가에 공감해 끄덕이게 되더라도 스스로 구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작고 검은 가방'과 '보로고브들은 밈지했네'는 다 같이 시간의 흐름에서 어긋난 물건의 이야기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일종의 시간 여행 이야기이다. 여행하는 게 사람이 아니기는 하지만. '작고 검은 가방'은 신기한 미래 기술을 만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보로고브들은 밈지했네'는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간다. 어린 아이란 어떤 존재인지, 어른들의 궤도에서 벗어난 아이는 어떻게 되는지를 다룬다. 만약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제대로 즐긴 독자라면 이 작품을 보고 옆구리 어딘가가 가려워질지도 모른다.

'표면 장력'은 감탄할 만한 단편이다. 과학소설의 관점으로 봐도 그렇고,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1952년이라는 점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전 우주로 퍼져나가며 문명의 씨앗을 퍼뜨리던 여러 우주선 가운데 하나가 어떤 행성에 불시착을 한다. 구조의 가능성은 없고, 싣고 왔던 씨앗조차 남아있지 않다.

있는 거라고는 대륙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땅덩이 하나와 사방에서 펼쳐진 바다뿐이다. 하지만 승무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민물 속의 생물에게 자신들의 유전자를 섞는다. 이윽고 그 생물들은 지능을 가지고는 문명을 발달시키며 자신들의 세계, 즉 물웅덩이의 한계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들에게 '표면 장력'은 죽음과 삶을 가를 정도로 단단하기 그지없는 장벽이다. 이 작품에는 창조자와 피조물, 탐험 욕구와 지적인 호기심, 작은 우주와 큰 우주, 희생과 미래 등 거의 모든 요소가 농축되어 있다. 단, 모든 이야기에 연애담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많이 실망할지도 모른다.

'차가운 방정식'은 우주 환경의 냉혹함과 여리고 순진한 생명을 극단적으로 대비한 수작이다. 이 작품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 국내 SF 팬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앨저넌에게 꽃다발을'은 앞서 언급한 '표면 장력'의 유일한 단점까지 보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장편의 형태로 여러 번 출간된 적이 있다. '표면 장력'이 과학적인 상상력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앨저넌에게 꽃다발을'은 사람의 본성과 인도주의와 안타까운 사랑을 종합 선물처럼 엮고 있다. 설사 중간쯤 읽으면서 결말이 예상된다 하더라도, 또는 현대 사회에 오염되어 심장이 돌덩이처럼 굳었다 해도 마지막 줄을 읽고 나면 최소한 코끝이 찌릿해지는 경험을 하리라 본다.

'90억 가지 신의 이름'과 '화성은 천국!'은 자극적인 단편을 좋아하는 독자께 추천할 만하다. 하나는 지구에서, 또 하나는 화성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엉뚱한 초기 상황이 두렵고 섬뜩한 결말로 치닫는 점에서 그렇다. 둘 다 더 자세하게 추천하고 싶지만, 내용을 폭로했다는 죄목으로 테러를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만약 '90억 가지 신의 이름'을 보고 이런 것도 SF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짓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작가의 명성보다는 작품의 재미 위주로 소개를 해보았다. 이처럼 다양한 SF들을 한 손에 쥐고 보기란 흔한 기회가 아니니 가급적 놓치지 않기를 권한다. 아, 한 가지 더.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SF 명예의 전당>은 완간된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결승전이라고 부를 만한 중편 모음이 남아있으니까. 부디 어서 책상 위에 펼쳐놓고 읽어볼 때가 오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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