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한글 쓰는 것이 익숙지 않아 오후 나절이 되면 종종 거실에 앉아 노트 한 권에다 느릿느릿 성경 구절을 필사하시곤 한다. 그러다 손목이 아파올 즈음이 면 이따금 노래를 부르시곤 했는데, 성당에서 배워온 성가일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낯선 일본어로 들어본 적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시던 경우도 있었다.

마치 민요와 같은 가락이었는데, 할머니에게 무슨 노래인지를 묻자면 "어렸을 적 학교에서 불렀던 노래"라고만 하시는 것. 할머니가 어렸을 적은 아직 해방 전이었기에, 동요도 모조리 일본어였다. 두 세대가 차이가 나는 나로서는 겪은 바 없는 경험이었기에, 할머니의 노래에 공감할 수는 없으되 이해할 수는 있었다.

앞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한 것은 노동 가수 김성만이 최근 동명의 음반과 함께 낸 책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삶이보이는창 펴냄)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내게 남은 감정의 질감이랄 것에서, 할머니의 일본 노래를 듣고 받았던 느낌과 비슷한 종류의 애매함이 작게나마 감지되었던 탓이다.

이를테면 시차(視差)랄까? 김성만의 글을 읽으며, 나는 그가 위치한 자리와 내가 위치한 자리의 같음과 다름을 하염없이 생각했던 것이다.


▲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김성만 지음, 삶이보이는창 펴냄) ⓒ삶이보이는창
곧 만으로 스물다섯 살이 되는, 아직 다니던 대학을 마치질 못한 나와 이미 쉰 살이 넘어 내 아버지뻘인 노동자 출신 가수 김성만의 사이에서, 홍익대학교 앞에서 4인조 밴드로 음악 생활을 시작한 나와 공장에서 커팅 작업을 하다 한 손가락을 잃고 받은 산업 재해 보험금으로 기타를 사 음악 생활을 시작한 가수 김성만의 사이에서.

이는 평을 쓰는 나 자신이 음악가이자 음악과 정치가 맞붙는 지점에서 다음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문화운동가인 까닭에 더욱 민감하게 다가온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이를테면 김성만은 자신의 가장 유명한 투쟁가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만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적고 있다.

"투쟁의 노래는 투쟁 현장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순간 한 동지가 비정규직을 철폐하자고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바로 저거다. 우린 저렇게 구호를 외치면서 싸운다. 비정규직 투쟁 현장에서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만들었다. (…) 노래가 음반으로 나오고 많은 비정규직 투쟁에서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가 울려 퍼졌다. 그곳에서 만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내 손을 잡으며, '우리 노래를 만들어주어서 고마워요'라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우리 노래를 좀 더 많이 만들어주세요'라고 한다."

김성만은 이 일화를 언급하며 '투쟁가를 쓰는 것'을 그때 다시 시작했다 말하고 있다(그는 노동자 노래패 '다영글'에서의 활동을 접으며 한동안 투쟁가를 쓰지 않았다). 그로서도 큰 계기가 되었던 순간일 텐데 책에서 그는 그러한 순간들, 곧 동지들과 노래로 연대하고 울고 웃던 장면들을 여럿 소개한다.

그것들은 물론 그 자체로 의심할 여지없이 아름다운 장면들이리라. 그러나 내게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책 전반에서 그가 '자기 자신', 곧 김성만이라는 '창작자 개인'과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언제부턴가 노동가요가 공연용이 되었고 들려주기 위한 노래가 되었다. (…) 변혁의 길에서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기 위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젠 먹고살아야 하지 않느냐가 대세가 되어서 내게 항변할 때 어느 책에서 만났던 일제시대 노동운동가들의 그 처절한 투쟁을 말하지 못했다."

'변혁의 길에서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기 위해서 노래하는 것', 김성만에게 이는 근본이라 할 수 있다. 김성만에게 노동가요는 공연을 위한 것도, 들려주기 위한 것도 아닌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기 위해 불리는 것이다. 그가 쓴 노랫말들을 살펴도 '내면의 고백' 같은 어조는 발견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가 "내가 곡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흐르고 있었던 음과 이야기들과 만난 것이다"라 말할 때,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김성만의 세계에서 '나=개인'보다는 '노동자 민중'이 자명한 범주인 까닭이다. 여기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작가'란 애초에 성립되지 않게 된다.

이를 긍정적인 뉘앙스에서의 (전-근대가 아닌) '비-근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표제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어, '온몸'을 우리는 그렇게 이해해야한다.

그러나 정확히 그 지점에서, 우리의 물음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김성만이 쓴 의미에서의 '온몸'을 나, 그리고 우리의 세대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다시 한 세대만큼을 건너왔다. 1960년대의 유년과 1990년대의 유년이라는 경험은 분명 다르다.

내게 1987년의 6월 항쟁, 그리고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어디까지나 역사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공감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개인'보다는 오히려 '노동자·민중'의 이념에 괄호를 치는 것이 편한 우리 세대에서 노동가요, 혹은 예술의 정치/정치로서의 예술이란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소위 '87년 체제'라 불리던 큰 줄기의 흐름이 결국 교착상태로 빠져들었음과도 긴밀하게 관련된다. 그것이 노동가요이건, 노동자 민중이건, 좌파 정치이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전망을 내놓을 수 있을까?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에서 김성만의 글은 아름답다. 미려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투박해서 아름답다. '한미 FTA 반대 축구' 경기에서 골을 넣고서 "가끔은 이런 거 했으면 좋겠다"라 사심 없이 말하는 그가 아름답다. '5·18 광주 노동자 문화제'를 구경하다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다음날 미화 노동자들과 노래로 연대하다 '삑사리'를 내는 그가 인간적이다. 어느 노동자들의 작은 승리를 기록하면서 "이긴다. 이길 것이다. 이 골짜기를 타고 봄처럼 노동자의 투쟁이 싹이 터 피어날 것이다"라 적을 때, 그 확신이 좋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이 내게는 그 자체로서 주저(躊躇)이다. 노동자 민중에 대한 온전한 긍정 없이 김성만에 공감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분열적이다. 그렇기에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가 내게 불러일으키는 것은 노스탤지어도, 투박한 현장의 스케치로부터 오는 소소한 감동도 아니다. 그것은 잊혀진(혹은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었던) '노동자·민중'이라는 공백의 소환이다. 김성만의 자리와 우리가 위치한 자리 사이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그 공백일 것이다.

나는 그 공백을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가 메워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지평을 '여는' 역할에 더욱 적합하다. 책장을 덮은 감정이 왠지 묘한 것은, 아마 그 공백이 시리게 다가오는 탓일 게다. 하지만 그가 은연중에 요청하는 것은, 그것이 삶이건 사랑이건 "온몸으로 노래하라"는 것이다. 이는 '온몸'의 재 발명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무슨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을까? 아무런 실천 없이 무엇인가 도래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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