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설문조사에서 통일이 되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으로 백두산과 개마고원이 꼽혔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그 기사를 읽으며 사뭇 놀라웠던 건, 지금의 초등학생 아이들을 통해 비추어진 '백두산'의 이미지가 한편으론 과거를 살아온 우리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두산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필자로서는 흔히 '한민족의 시원'이라거나 고고한 '백두대간의 정수리'라는 화려한 수사보다 '비행기는 높아, 높은 건 백두산'이라는 말이 훨씬 피부에 와 닿는다. 그저 엄청나게 높고 큰 백두산은 어릴 적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비행기처럼, 현실에서는 도저히 가볼 수 없는 또 다른 세계, 궁극의 이상과도 같은 유토피아가 아니었던가.

방학을 이용해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 건너 나라에까지 어학연수를 떠나는 아이들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지금, 그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 디즈니랜드나 대영박물관이 아니라 백두산과 개마고원이라는 결과가 순전히 그곳이 우리 민족의 혼이 서린 영산에서 나온 것일까.

혹시라도 백두산 그곳이 부모의 돈으로도 갈 수 없고, 인터넷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곳이기에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라면 답답한 생각이 먼저 든다. 천지의 괴물이나 화산 폭발에 쏠리는 세간의 관심처럼 의문투성이 백두산의 이미지란 내 가난이 만들어냈던 환상 속의 비행기와도 같이, 오랜 분단이 만들어낸 우리 인식의 세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씁쓸한 느낌마저 지울 수 없다.

한창 남북 관계가 훈훈하게 무르익던 시절, 산악계에서는 북 측의 금강산 내금강 개방에 이어서 백두산(장백산이 아닌) 관광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신빙성을 지닌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등산 잡지 기자로 일하며 내심 다른 이들보다 먼저 삼지연에서부터 백두산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신선한 겨레의 숨소리 살아 뛰는' 그곳에 올라 '만주 벌판 말을 달리던 투사들의 마음의 고향'을 만날 테고, 그래서 천지에 서서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를 고래고래 외치며 눈물을 절절 흘리는 상상을 한동안 해보았었다. 이제는 고작 책에서나 그 발자취를 더듬더듬 따라갈 뿐이지만.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백두산 여행기를 책으로 묶은 <백두산 등척기>(해냄 펴냄)의 민세 안재홍을 살펴보며 참으로 복잡한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에 의한 아홉 차례의 투옥과 해방 정국의 혼란, 한국전쟁과 납북으로 이어지는 안재홍의 삶은 몇 줄의 이력으로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정민 교수가 풀어 읽은 백두산 등척기>(안재홍 지음, 정민 풀어씀, 해냄 펴냄). ⓒ해냄
그래서 안재홍이 <백두산 등척기>에 담아낸 이야기는 '비행기'와 '백두산'과 같은 단순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오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한문학을 전공한 정민이 쉽게 풀어 읽은 백두산 이야기라지만 생경한 지명이 우선 시선을 가로막았다. 급기야 오래된 지리부도를 꺼내놓고 손으로 짚어가며, 80여 년 전 안재홍의 발걸음을 따라갈 수밖엔 없었다.

<백두산 등척기>는 당시 조선일보사 부사장이었던 안재홍이 1930년 7월 23일 밤 11시 경성역을 출발해 백두산 산행을 마치고 8월 7일 오후 5시 기차로 북청역을 떠나기까지 16일간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이후 1931년에 <조선일보>에 34회에 걸쳐 연재되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당시 언론사에서는 백두산뿐 아니라 금강산, 묘향산, 구월산, 지리산 등 남북의 명산을 찾아 오르는 기획을 자주 했었다.

언뜻 생각해보면 탐험이나 학술 조사를 내걸었던 그런 이벤트들이 언론인과 식자층들의 입장에선 식민지 치하에서 정치적 부담 없이 공중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한편, 호위군 수백 명과 함께 행진하듯 오르는 산과 으레 그 정상에서 벌인 신사 참배가 일제의 입장에서도 명분을 기대할 수 있는 행사였던 것 같다. 이러한 행사들은 훗날 노골적 친일을 내세운 연성회로 변절되어 가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지금은 갈 수 없는 그곳 풍경을 글로나마 접할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건가.

<백두산 등척기>는 이 시기 산행 기록을 남긴 다른 저자들, 민태원, 최남선, 이은상, 홍종인 등과 비교해볼 때 그 삶은 차치하고라도 또 다른 맛이 있다. 풀어쓴 이 정민은 안재홍의 글을 두고 "문예취가 풍부하나 수사의 과잉이 없고, 학술적이되 무미건조에 흐르지 않았다. 글이 그 사람과 꼭 같다"고 적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2200여 미터의 고지대이지만 평평한 등성이로 관목조차 거의 없다. 풀과 이끼가 두터운 곳에 한 조각 정계비가 서 있다. (…) 보기에는 대단치 않지만 이 한 조각 돌이 갖은 비바람, 219년의 슬픔과 근심, 부끄러움과 원한, 분노와 회한의 한복판에서 외로이 쇠망한 조선의 운명을 짊어지고 온 것임을 생각하면 실로 값싼 비분을 터뜨릴 겨를도 없다.

신라의 강역이 남쪽 귀퉁이에 치우치고 백두산의 거룩한 자취가 북쪽 변방에서 외떨어져서 고구려 이래로 왕성하던 국풍이 발호하는 중국화의 어설픈 새 문화에 휩싸이게 되면서 민족의 정열은 거의 질식하고 말았다. 이에 맞서 나아가려는 기백이 이미 막혀버린 과정은 지금이라도 또 한 번 객관적으로 자신을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눈길을 끄는 건, 저자가 이미 1919년 청년외교단 사건, 1928년 두 차례 <조선일보> 필화 사건, 1929년 신간회 광주 학생 사건 진상 보고 민중 대회 사건으로 네 차례나 투옥된 바 있는 요주의 인물이었음에도 무장 독립군들이 활동해 일제가 '마적이 출몰한다'고 했던 변방 백두산행에 참가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으레 이런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여행기 내내 행간에는 민족주의자의 시선이 슬쩍슬쩍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재홍이 말하고자 했던 건 어쩌면 백두산의 아름다움이나 자연의 웅장함, 고고하고도 따분한 역사가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만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한가한 일이 아니다. 높은 산에 오르고 한바다에 떠서 천지의 드높은 기운을 마시면서 웅장하고 아득한 기상을 기르는 것은 그대로 세상에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도시와 시골, 산과 들에서 백성과 만물이 살아 숨 쉬는 실제 상황을 폭넓게 보고, 고금에 변해온 자취를 살피는 것은 사회인에게 가장 으뜸 가는 책무이기도 하다.

'민중의 세상'을 이름(民世)으로 썼던 저자가 구두끈을 조여 매고 백두산으로 향했던 까닭은 서문의 이 한 문단에 모두 들어있는 것 같다. 지금은 이 땅 누구도 오를 수 없게 된 80여 년 전의 백두산행에서 우리가 다시 읽어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이라면 이 시대의 '케이블카 산 등척기'나 '4대강 등척기'가 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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