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그라네의 <중국 사유>(유병태 옮김, 한길사 펴냄)가 최근에 번역되었다. 먼저 이 책을 본 소감 두 가지부터 말해보자.

하나는 병사가 땅위에서 총칼을 가지고 한 치의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적과 다투는 각개전투가 아니라 전투기를 이용해서 적지에다 정밀 타격을 하여 적의 예기를 꺾고서 전투에 나서는 공중전을 연상시킨다. 다른 하나는 외국 서적 중에 늦게 쓰인 책이 먼저 번역되고 일찍 쓰인 책이 늦게 번역되는 것을 보면서 뒤바뀐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바람을 품어본다.

마르셀 그라네(1884~1940)는 일반 사람에게 낯설지 몰라도 적어도 구미에서 동양학을 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학자들 중의 한 명이다.

그라네는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1985년/국역 1996년)의 벤자민 슈워츠(1916~1999년), <도의 논쟁자들>(1989년/국역 2001년)의 앤거스 그레이엄(1919~1991년), 자크 제르네(1921~)의 <몽골 침략 전의 중국인의 일상생활>(1959년/국역 1995년)보다 선배이지만 그의 주저가 늦게 번역되었다. 거꾸로 되었더라면 세 사람의 책을 읽기에 훨씬 수월했을 텐데 말이다. 이 책의 번역으로 인해 그라네와 활동 시기가 겹치는 앙리 마스페로(1883~1945년)의 <고대 중국>(1925년/국역 1995년) 등을 함께 읽을 수 있게 되어서 무척 다행스럽다.

중국의 다양한 사상의 차이를 알고 싶거나 사상가들이 최상의 진리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는 것을 기대한다면 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낫다. 또 서양 사람이 쓴 만큼 동서양 비교 철학을 기대한다면 역시 이 책을 들추지 않는 편이 좋다. 그렇지 않고 책을 본다면 "이게 아니잖아!"라는 말을 하기 십상이다.

▲ <중국 사유>(마르셀 그라네 지음, 유병태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이 책은 기획 의도가 문명사에 있는 만큼 두 가지 기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학술사나 사상사를 쓴다면 당연히 작은 차이도 의미를 부여해서 크게 말해야 한다. <중국 사유>는 그게 아닌 만큼 작은 차이에 현미경을 들이대지 않고 커다란 틀에 망원경을 대고서 같은 점을 훑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작은 차이를 무시한다고 투덜거려도 소용이 없다. 너무 불만을 갖지는 말자.

한국에서 전라도·경상도의 차이를 목청껏 외쳐도 외국 나가면 똑같은 한국 사람이고, 동아시아에서 역사와 영토 문제로 한·중·일 세 나라가 으르렁거려도 외국 나가면 별 차이가 없는 엇비슷한 아시아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가!

잠깐 이 책 출생의 뒷이야기를 알아보자. <중국 사유>는 총서 <인류의 발전>(전4권) 중 네 번째 책이다. 앞의 세 권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 문명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예외적으로 유럽의 외부로서 중국 문명을 다루고 있다. 문명을 다루면서 제목은 왜 '사유'로 했을까?

이 책에서 말하는 '사유'는 중국 사람들이 고유한 방식으로 정신 활동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전제하는 서양 사람과 구별되는 특징으로서 전통의 의미에 가깝다. 즉 사유는 개별 주체가 진리를 찾아가는 길도 세계를 새롭게 조직하는 인식도 아니라 집단적 자아, 즉 중국인이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밟아가야 하는 지도 또는 공통 지반이다.

그라네는 이 지도의 거점으로 1장에서 언어와 문자로 드러나는 사유의 표현을 다루고, 2장에서 시간과 공간, 음양, 수(數), 도(道) 등의 주개념에 대한 오해를 벗겨내고, 3장에서 대우주, 소우주의 세계 체계를 다루고, 마지막 4장에서 전국 시대에서 한제국의 초기에 이르는 다양한 학파를 스케치하고 있다.

책이 촘촘하고 방대하여 내용을 일일이 소개할 길이 없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문명사의 관점에서 본 '중국 사유'의 독특성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잊기 전에 먼저 이 책의 미덕부터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책이 쓰일 당시 세계 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자존심이 많이 깎였지만 유럽은 근대 문명을 열어서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회의하지 않았다. 그 연장선에서 유럽인은 비유럽 지역의 사람살이와 문명을 모두 유럽의 기준으로 재단하면서, 함량 미달만큼이나 신비적이니 신화적이니 비논리적이니 하는 차가운 평가를 내렸다(44, 97쪽). 더 나아가 원시적 사고니 주술적 사고니 하는 말들을 여과 없이 내뱉었다.

오늘날은 이를 두고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그렇게 낯설지 않고 또 문화 상대주의의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다. 그라네는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창하는 흐름 속에서도 중국 내부의 시각으로 중국을 들여다보자고 주장한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비유럽의 문명을 유럽으로 환원하지 않아야 한다. 아울러 왜 이것이 없느냐라는 무의미한 비교 연구를 해서도 안 된다. 또 중국의 사유를 서양 철학의 용어로 번역해서 읽는 관성도 반성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사람은 자신이 한 말'들'의 일관성을 지키려고 하고 뭔가 약속하면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중국 사람만이 아니라 좁게는 동아시아 넓게는 세계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철학에서 유독 언행일치, 즉 말과 행동이 일치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그리하여 말과 행동이 다를 경우 공적 임무를 맡기에 부적당하거나 사람답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 인식의 밑바탕에는 단순히 "말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좋다"를 넘어서서 "말은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고가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말은 행동과 구별해서 독립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행동으로 드러나야만 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행동으로 드러날 수 없는 말, 행동과 무관한 말은 순수한 지적 사고이지만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라네는 중국의 이러한 언어관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언어는 무엇보다도 행동을 끌어내는 데 목적이 있다." "중국 단어는 관념을 가리키기 위한 기호와는 무관하며, 추상성과 일반성이 최대한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하는 개념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53쪽)

이로써 중국인은 이론적 사고와 순수 지식보다는 실천적 사고와 효용성에 중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철학을 많이 알거나 적게 알거나 '음양'이 중국을 넘어서 동아시인들의 공통 언어이자 사유 체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라네는 이를 "중국 철학은 음양 개념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단정했다(127쪽). 그는 나아가 "주석자나 서구의 연구자들은 중국의 상징들, 예컨대 음양을 서구 철학자들의 확정된 언어에서 빌려온 용어들로 섣불리 규정지으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127쪽). 그러한 실례로 음양을 '힘' 또는 '실체'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들 수 있다.

그라네는 기존의 음양 이해가 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역경> '계사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에 주목했다.

"한 때(쪽)는 음, 한 때(쪽)는 양, 이것이 곧 도이다." (一陰一陽之謂道)

훗날 성리학자들은 이 구절에 많은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평심으로 쳐다보면 실체나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변이, 주기적 변화, 상호 융통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실례는 "우선은 빛, 다음은 어둠! 또는 이쪽은 빛, 저쪽은 어둠!"의 일명일회(一明一晦)만이 아니라 청탁 등 수많은 예시를 찾을 수 있다.

'계사전'을 통해서 그는 중국의 "세계에는 상호교대와 상보적인 두 양상의 공조에 따른 총체적인 순환 질서(도(道), 변(變), 통(通))에 부응하지 않는 어떠한 현상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138쪽). 이 결론은 통상적인 사상사에서 도달하는 마지막 귀결이다. 하지만 그라네는 장기 지속과 생활사를 강조하는 아날학파의 세례를 받은 만큼 이 결론을 현상의 종합에 그치지 않고 다시 성축제의 생활양식과 연결시킨다.

고대 중국의 남성과 여성은 성별과 직능의 차이로 인해 경합 관계의 단체처럼 양립했다. 각 집단은 서로 뒤섞이지 않는 시공간을 나누어서 일을 분담했다. 예컨대 여성은 겨울에 베를 짜면서 노동을 하는 반면에 남성은 농사가 재개되기까지 휴식을 취했다. "봄이면 사람들은 마을의 출입문을 열고, 농부들은 여름 농사를 위해 들판으로 떠났다." 이때 "양은 문이 열린 모습을 불러오고 생식과 생산을 그리고 발산하는 힘을 환기시킨다." "겨울이면 마을의 출입문은 닫힌다. 겨울은 닫힌 문을 상징으로 하는 음의 계절이다." (150쪽)

이를 통해서 그라네는 음양을 자연철학의 힘이나 철학의 실체로 보는 해석을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음양은 "사회 조직의 두 구성체 간에 분할된 역할 또는 속성 그 자체이다." (155쪽) 더 나아가 중국 사유는 음양을 초월하거나 추상화하지 않고 실체화하지도 않는다.

전적으로 효능성을 추구하는 중국인의 사유는 조응과 대립의 논리 속에 형성된 상징 세계를 떠나지 않으므로 행동과 인식은 상징 세계를 작동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상징 세계를 작동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서로 당기거나 밀어내는 일련의 한 쌍의 상징을 알아야 한다"(155쪽)는 것이고 그 한 쌍이 바로 음과 양인 것이다.

이 이외에도 중국 사유에서 수는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양(量)의 개념으로 고려되지 않았다(160쪽). 그 결과 수는 상징적 가치로 쓰이었지만 균질적 단위로 나누는 사고로 진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국 사유>의 결론에 해당되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질서, 총체, 효능성 이 세 가지 개념은 서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이루며 중국인의 사유를 관장한다. 중국인은 자연을 나누어 구분 짓는 데 유념하지 않았다. 각 실재는 모두 본래 총체적이며, 우주 속의 모든 것은 곧 우주와 같다." (342쪽)

이 책은 폭넓은 분야를 다루는 방대한 성과를 한국어로 옮긴 노작이다. 번역어를 보면 통상적인 학계의 관행을 벗어나는 경우나 오류가 많아서 편안한 책읽기를 방해하는 곳이 눈에 띈다. 프랑스 말을 한국어로 옮기기는 했지만 사실과 다르거나 너무 주관적이어서 불편했다.

책의 앞부분을 뒤적여서 몇 가지를 찾아보았다. 잘못의 사례를 든다면 <장자>의 '설검편'이 '자객편'(25쪽), 제후의 죽음을 나타내는 훙(薨)이―발음이 고인데―훙(薧)(58쪽), 문헌의 신뢰성과 확실성이 진정성(authenticity)(69쪽), <회남자>의 편명은 훈(訓)인데 장(74쪽), <초사>에 수록된 시가로 예혼(禮魂)이 없는데도 제시하고(79쪽), 은대의 창시가 성탕(成湯)이 승탕(勝湯)(100쪽) 등이 있다. 어색한 사례를 든다면 집수(26쪽), 집성(集性)적(37쪽), 묘사조동사(55쪽), 환술가(幻術家)(70쪽), 악학가(樂學家)(128) 등이 있다.

최근 중국은 세계 경제에 일본을 제치고 G2 국가가 되었다. 오늘날의 중국은 이 책에 다룬 한제국 초기를 넘어서 청제국의 황제 체제가 끝나고 다시 사회주의 혁명을 거쳐서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다.

아날학파의 장기 지속에 따른다면 혁명을 통해 구체제의 종식과 신중국의 건설이 일어났더라도 변하지 않는 심층이 있다. 이 심층이 있는지 없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이 책의 출간을 기회로 그라네의 <중국 고대의 축제와 가요>를 비롯해서 동양학에 대한 프랑스어권의 성과를 일별했으면 좋겠다. 뭔가 빠진 듯하지만 내버려두었던 인식의 그물망을 얼마간 메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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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해외로 진출을 시작한 이후 세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생각은 크게 바뀌었다. 고대 이래 유럽인들이 알고 있던 세계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좁은 지역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대서양이라는 먼 바다로 나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의 전모를 파악하게 됨으로써 이 세계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지식이나 세계관을 크게 확장시켰고 뒤에 유럽 문화가 급성장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새로 접하게 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불행히도 유럽에 비해 문화 수준이 상당히 낮은 곳이었다. 따라서 그 지역 사람들이나 문화를 유럽인이나 그 문화와 동등하게 볼 수는 없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인종적인 면에서 열등하며 문화적으로도 미개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메리카의 식민지배는 이런 생각이 지배자인 유럽인들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도록 했다.

유럽의 근대 학문은 17, 18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유럽의 우월이라는 이런 생각들을 지적인 작업으로 전환시켰다. 그래서 철학, 역사학, 지리학, 언어학, 인류학, 고고학, 생물학 등 당시의 모든 학문이 모두 그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두 인종주의적이며 유럽중심주의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서양 학문의 유럽중심주의적 성격은 1980년대부터 비판받기 시작했다. 1978년에 나온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그 점에서 큰 자극을 주었다. 그 후 각 학문 분야에서 이런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고 그 성과도 점차 나타나고 있으나 아직은 문제 제기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낙 뿌리가 깊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극복은 쉽지 않다.

한국의 현실은 더 어둡다. 한국 학문은 해방 이후 압도적으로 미국 학문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그런 경향은 2000년대 이후 더 심화되었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미국 학문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보는 경향이 커졌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영어 만능주의 풍조가 심화되고 대학에서도 미국 학문에 대한 의존이 날로 커지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비판에는 원천적인 한계가 있다. 또 미국 학문 위에 서 있는 학계의 기득권 세력이 그에 대한 어떤 도전도 용납하려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그래도 2000년대에 들어와 서양사 분야에서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안목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아직 만족스럽지는 못하나 서양 역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들을 비판하고 바른 역사학을 해야 한다는데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또 학회 차원에서 여러 차례 학술 대회가 열린 바도 있다.

그러나 과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학문 분야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소리는 별로 들은 바 없다. 최근에 한림대학교 김영명(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쓴 책에 그와 관련한 소회가 실려 있다. 김 교수는 한국적 정치학을 정립하려고 애쓰는 분인데 정치학이 수입 학문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동의하기는 하나 그건 말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런 작업을 전혀 하지 않으려 하고 또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에 대해 거의 적대적인 태도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기득권의 침해를 두려워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정치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 경제학은 미국의 주류 경제학을 그대로 따라왔다. 그래서 극소수의 경제학자를 제외하고는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며 세계화를 대세로 내세웠다. 나는 미국이 이끈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가 오늘날과 같이 파국으로 빠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그들이 학생들에게 어떤 설명을 하고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는데 이것은 한국 학문의 상황이 너무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의협심과 용기를 가진 젊은 학자들이 더욱 분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우리 학문을 건설하지 못하면 한국은 언제나 미국 같은 서양 나라들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대륙의 발명>(크리스티앙 그라탈루 지음, 이대희·류지석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
이런 문맥에서 크리스티앙 그라탈루의 <대륙의 발명>(이대희·류지석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은 시의적절하다. 지리학 분야에서 나타나는 유럽중심주의를 잘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하고 일반화된 대륙이라는 개념의 형성 과정에서 유럽중심주의가 어떻게 관철되었는가를 밝히고 그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지도가 그의 주된 탐구 수단이다. 그는 중세 이후 서양의 지도를 살피면서 지도가 실제의 지리적인 모습을 담은 구체적인 그림이기는 하나 그 내면에는 당시 사람들의 정신적인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고 본다. 미리 가지고 있던 세계에 대한 관념이 지도를 통해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기는 하나 보통은 그냥 모르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매우 중요하다.

서양 중세 시대의 지도를 보면 그것은 분명하다. 중세 시대의 세계 지도는 예루살렘을 그 중심에 두고 있고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셈, 야벳, 함이라고 불리는 세 아들에게 각각 분배된 땅으로 나뉘어 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가 그것이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 때문이다.

그러나 15세기부터는 이런 신학적인 표상을 점점 벗어난다. 유럽인들이 바다를 통해 비유럽지역으로 진출하며 지리 지식이 크게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실용적인 지리 지식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새롭게 그려진 지구 전도들에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것은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6세기 후반 이후 새로운 세계 지도들은 구체인 지구 표면을 평면 지도로 옮기는 과정에서 태평양의 한가운데를 잘라서 펼쳐 놓았다. 그러니 그 반대편인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계 지도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유럽으로 넘어갔다.

이는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하고 전 세계에서 왕성한 무역 활동을 한 유럽인들의 자신감의 발로이기는 하다. 그러나 유럽이 세계 지도의 중심에 한번 자리하게 되자 그것은 유럽인들에게 유럽이 본래적으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불어 넣었다.

16세기에 메르카토르가 발전시켰고 지금도 우리가 많이 보는 메르카토르도법의 세계 지도에서 고위도의 면적이 넓게 그려지며 유럽이 실제 면적보다 훨씬 크게 보이게 된 것도 비슷한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결국 유럽은 세계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18세기에 와서는 이런 생각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는 인종주의가 이론적으로 확립된 시대였다. 또 한 편에서는 유럽인들의 정체성이 분명해진 시대였고 그것은 계몽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유럽의 차별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중세 시대에 사용되던 기독교 세계라는 생각이 문명으로서의 유럽이라는 생각으로 대치된 것이다. 그리하여 정체되어 있는 아시아와 역사가 없는 사회인 아프리카·아메리카는 유럽보다 열등한 인종들이 사는 야만스런 곳으로 생각되었다. 이 시기의 지도들에 그려진 삽화들에서 그것은 분명하다. 네 대륙은 보통 여성으로 표현되었는데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는 모두 유럽에게 굴종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사이에도 차별은 있다. 어떤 그림에서는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여성은 아시아에 비해 초라하게, 또 반나체로 그려지고 아메리카는 완전한 나체로 그려지고 있다. 야만의 정도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륙 사이의 서열화가 완성되었다.

또 각 대륙의 지리적 구분도 자연스런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와 유럽,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경계 구분에도 문제는 있으나 가장 문제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이다. 이는 19세기 초에는 우랄산맥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러시아인들이 가능한 한 많은 러시아 영토를 유럽에 편입시키기 위해 제안한 것이다.

이런 유럽중심적인 세계관은 유럽이 실제로 세계의 중심이었었던 19세기 말에 제국주의 시대에 와서는 다른 대륙 사람들에게 강요되었다. 그것은 1884년에 경도 0도인 본초자오선이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자오선으로 결정된 데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니 세계 지도의 중심이 당연히 유럽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보는 세계 지도는 과학의 중립성을 표방하고 있기는 하나 지금까지도 서양인들의 이런 내밀한 계획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 점에서 지도라는 그림 안쪽에 숨어 있는 그 생각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지도라는 무미건조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뚜렷한 문제의식과 다방면에 걸친, 그리고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저자의 풍부한 지식을 통해 독자들에게 지리학 훨씬 이상의 인문 지식을 선물하고 있다.

더구나 지도를 포함한 많은 그림들은 글의 이해를 잘 돕는다. 번역도 좋은 편이다. 전문적인 서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일반 대중의 교양 서적으로는 훌륭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한번 읽으면 세계를 보는 안목이 많이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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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우석훈·박권일이 <88만 원 세대>(레디앙 펴냄)를 내기 전까지 20대는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부모, 삼촌 세대가 피땀 흘려 일군 자본주의의 열매를 따 먹는 '지질한 대학생'으로 불리거나, 한국 자본주의 맨 밑바닥 노동을 책임지는 '만만한 알바' 혹은 '철없는 인턴'으로만 존재했다.

그런 20대를 세상이 '88만 원 세대'라고 명명하자, 비로소 그들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마치 예전에 없었던 20대가 갑자기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지식인, 기자들이 한동안 '88만 원 세대'를 입에 올렸으나 대다수 20대의 삶과는 무관했다. 간혹 몇몇 20대들이 나서서 자기 세대를 대변해 말하기 시작했으나 반향은 미미했다.

지금도 20대는 여전히 '지질한 대학생', '만만한 알바', '철없는 인턴'일 뿐이다. 이렇게 3년이 흐른 시점에서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이 "고군분투하는" 20대의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담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를 펴냈다. 그가 만난 이른바 '주변부' 대학생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엄기호 연구위원은 이미 앞서 <닥쳐라 세계화>(당대 펴냄),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낮은산 펴냄) 등의 책을 통해서 세기 초의 자본주의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을 벼랑 끝에서 떠미는 모습을 구체적인 개개인의 삶에 바탕을 두고 정치하게 분석했다. 이랬던 그의 시선이 또 다른 '희생양'인 20대로 향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그러나 이 책은 20대를 분석하지 않는다. 이 책은 대신에 20대에게 귀를 기울였다. 이 책은 "그들이 어떤 언어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들과 함께 나누었던 지적 대화의 기록"이다. 그렇게 2년에 걸친 대화를 모아 놓은 이 책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좌파든 우파든 20대가 문제라고 하는 이야기, 혹은 우리 사회가 20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며 그들의 처지를 걱정하는 이야기 안에서 20대들을 대하는 자기 자신은 누구인가, 자신은 무엇을 함께할 수 있고 무엇을 함께할 수 없는가에 대한 성찰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20대와 함께 자신이 우리 시대에 대해서 어떤 새로운 언어와 삶, 그리고 기획을 생산했는지에 대한 이야기 또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20대는 이들에게 기획의 대상이지 파트너가 아닌 것이다." (19쪽)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추상의 20대'가 아니라 기성세대의 아들딸, 조카, 동생인 ○○○, 직장의 후배인 ○○○, 가게의 직원인 ○○○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들려주는데 있다. 그들은 이른바 명문대를 나와서 대기업에 취직한 '엄친아'·'엄친딸'도 아니고, 유창한 외국어로 무장한 'G세대(G(Global/Green) generation)'도 아니다.

그렇다면, 기성세대와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엄기호 연구위원과 그와 또 다른 '지적 대화'를 나누는 중인 덕성여자대학교 윤희정(22) 학생이 먼저 자신의 고민을 쏟아냈다. 좀 더 진솔한 얘기를 끌어내고자 진행자(강양구)가 종종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다음은 지난 29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의 한 카페에서 있었던 대담의 전문이다.


▲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오른쪽)·윤희정 덕성여자대학교 학생(미술사학과). ⓒ프레시안(손문상)

비난 받는 20대!

프레시안 : 책 얘기부터 시작하자.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나?

엄기호 : 언제부턴가 주로 지금은 '486'이 된 '386세대'를 중심으로 '요즘 20대는 한심하다' 이런 불평이 많아졌다. 그 때 우석훈·박권일 씨가 <88만 원 세대>를 펴내면서 처음으로 20대의 사정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고 나서 폭발적으로 '대학생·20대 담론'이 늘어났다.

그러나 <88만 원 세대> 이후의 담론은 주로 이 세대를 어떻게 규정하고 명명할지에 초점을 맞췄다. 지식인이 20대의 삶을 자신이 선호하는 이론에 꿰맞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 따르면 20대는 이렇다' 이런 식이었다. 20대들이 사는 이야기를 듣고 해석하는 게 아니고.

더구나 그렇게 20대 담론을 말하는 주체는 세대를 불문하고, 심지어 20대들까지도 주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었다. 이 점이 많이 불편했다. 명문대 학생이 아니라 한 번도 주목 받지 못한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은 어떤 삶을 살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보고 듣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이렇게 <88만 원 세대>와 '20대 담론'이 얘기되고 있을 때, 대학에서 20대 친구들을 상대로 강의를 시작했다. 또 그 대학은 이른바 서울의 명문대라고 불리는 곳이 아니었고. 이렇게 그들과 2년간 지내면서 나눴던 지적 대화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프레시안 : 이 자리에는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20대인 윤희정 씨가 함께했다. 이 책을 읽고 어땠나?

윤희정 : 한마디로 '위안이 되는 책'이다. 그 동안 20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부당하다' 이런 반감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은 첫머리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너흰 괜찮아!" 기성세대의 시각으로 20대를 재단하기보다는 20대의 삶을 해석하면서 지은이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어서 호감이 갔다.

다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답답함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어쨌든 이 책에서 20대의 생생한 목소리로 알 수 있는 팍팍한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한다. 우리, 아니 나는 이른바 '스카이(SKY :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이 부유하지도 않다. 이런 내가, 우리가 이런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이 책도 침묵하더라.


ⓒ프레시안(손문상)

수동적인 20대?

"나는, 혹은 우리는 인생의 모범 답안을 끊임없이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회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삶이라는 모범 답안. (…) 모범 답안에 매료된 우리는 공부를 잘하고, 꽤 멋진 꿈이 있고, 연애도 잘하는, 그 외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건설적인 욕망은 다 이뤄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으면 남는 것은 바닥을 치는 자존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우리를, 나를 이렇게 몰아세워왔다." (지은)

프레시안 : 중요한 지적이다. 이 책을 읽는 이라면 누구나 '20대가 힘들구나, 그들을 이해하자'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은 <88만 원 세대> 이후에 나온 20대를 소재로 한 책 중에서 가장 성공한 시도다. 20대와 대화를 시도하는 첫걸음을 뗀 이 책을 계기로 앞으로 20대 담론의 지형이 바뀔 것 같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아쉬움도 들었다. 20대의 암담한 현실을 누가 극복할 것인가? 20대를 대신해 나서줄 사람은 없다. 그들 앞에 닥친 문제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런 힘을 기르려면 우선 20대 자신이 치열한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20대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엄기호 :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성찰하는 힘은 자신의 삶을 긍정할 때 나올 수 있다. 지금 20대를 둘러싼 현실은 어떤가? 팍팍한 현실은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목소리 높이는 비판은 그들을 '쓸모 없는 인생'이라고 딱지를 붙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선 20대가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그들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나면, 자기성찰의 계기는 스스로 마련하리라고 생각한다. 20대가 그렇듯이 인간은 누구나 고군분투하면서 사는 존재다. 이렇게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긍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딱 그 지점에 서 있다.

윤희정 : 동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20대 친구들도 자신의 삶을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자신과 세상을 성찰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 책의 앞머리에 나오는 '김예슬 선언'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고개를 갸우뚱했으니까.


ⓒ프레시안(손문상)

잉여가 된 20대!

"김예슬. 나도 고대 다녔으면 너처럼 할 수 있겠다 하고 생각했어요. 덕성여대 '길혜미 선언문'. 아무도 관심 안 가져줬을 것 같아요. 김예슬 명문대 중퇴가 길혜미 보통대 졸업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니…." (혜미)

"김예슬 씨에게 묻습니다. 대학은 인간으로서, 사람으로서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습니다. (…) 당신은 썩어버린 작은 사회에서도 배우지 못한다고 인간으로 살지 못한다고 나왔습니다. 더 썩은, 작은 사회를 이렇게 만든 큰 사회에서도 인간으로서 살지 못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궁금합니다." (진아)

프레시안 : 기왕에 얘기가 나왔으니 김예슬 선언 얘기를 더 해보면….

윤희정 : 당연히 관심이 있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고. 그런데 알고 보니 김예슬 씨는 '고려대'라는 타이틀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김예슬은 고려대 학생이기 때문에 저렇게 자퇴 선언을 할 수 있었지 않을까? 책에 나온 한 친구의 말대로 그런 타이틀을 가지지 못한 내가 그런 자퇴 선언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김예슬 선언에 대다수 20대의 반응이 냉소적이었던 것은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더구나 김예슬 씨는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그럴듯한 <김예슬 선언>(느린걸음 펴냄) 책을 펴냈다. 또 미리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유명한 시민단체에 취업했다. 그것들이 또 언론에 보도되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씁쓸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했다. 사실 고려대 학생에게 사람들이 거는 기대가 있지 않나? 또래인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록 나는 '스카이' 타이틀이 없지만, 나를 포함한 다른 대학생도 잇따라 김예슬 씨와 같은 선언을 했다면 그것이 한국의 '학벌'을 해체하는 불씨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도 들었다.


ⓒ프레시안(손문상)
엄기호 : 나도 처음 자퇴 선언이 나왔을 때는 '김예슬이 훌륭하다' 이런 식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덕성여대 학생들에게 김예슬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의외로 반응이 싸해서 충격을 받았다. 학생과 대화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왜 이들이 그렇게 싸한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다.

덕성여대 학생들에게 이 주제로 글을 써보라고 했더니, 김예슬 씨와 동류의식을 가지기에는 이들은 이미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진학하는 대학이 명문대인지 지방대인지에 따라서 교사와 부모로부터 이미 다른 존재 취급을 받았으니까.

덕성여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김예슬 씨가 자퇴 선언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그가 명문대 학생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고자 대학을 떠난다는 선언조차도 엘리트 학생이 독점하는 세상….

사실 <88만 원 세대>가 출간되고 나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수업을 하면서 그 책 얘기를 했더니 한 학생이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1997년 외환 위기 이전에도 88만 원 세대였어요!" 그렇다면, 그 책에서 말하는 외환 위기 이후에 지위가 추락했다는 '88만 원 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어차피 공업고등학교, 상업고등학교, 지방대학교를 나온 20대들은 1997년 외환 위기 이전부터 비정규직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88만 원 세대 담론에 내가 설 자리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이 자신의 삶을 삭제된 것, 잉여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이런 20대들에게 김예슬 씨와 연대해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질타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오히려 이들이 김예슬 선언을 계기로 자기가 선 자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게 일단 순서가 아닐까? 자신의 삶, 자신의 역사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그들의 이후 행보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20대의 그 이후 행보는 대개 '냉소'로 나타난다. 책은 20대에게 '냉소적', '허무적'이라고 딱지를 붙이기 전에 '냉소의 힘'에 주목하자,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냉소적이기 '때문에' 혹은 냉소적임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 있다고. 과연 그런가? 자기가 선 자리를 파악하고 나서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엄기호 : 한 20대 친구가 이런 얘기를 했다. "냉소하지만 투표하러 가는 20대와, 냉소한다고 말하면서도 투표하지 않는 20대는 구분해 달라!" 그 얘기를 듣고서 책에서도 그 둘을 구분해 놓았고, 또 냉소의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프레시안(손문상)
윤희정 : 냉소의 힘…. 알고 냉소하는 것과 모르고 냉소하는 것은 다르다. 내 경험을 얘기하자면, 나는 정치에 냉소적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정치에 관해서 알고 냉소하는가, 모르고 냉소하는가?' 솔직히 나는 정치에 무지하다. 평범한 대학생들이 그렇듯이 내 앞에 놓인 일들 신경 쓰기도 바빠서 현실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런 무지는 죄인가, 아닌가? 그것은 죄이다. 책에서 얘기한 '냉소의 힘'이 의미가 있으려면 이런 점을 분명히 해야 하지 않을까?

프레시안 : 글쎄…. 냉소하면서도 투표장에 가는 20대나, 혹은 희정 씨처럼 '무지는 죄'라고 생각하는 20대가 현실에서는 소수이다.

엄기호 : 똑같이 냉소하면서도 그렇게 다른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양쪽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방금 언급된 '무지'이다. 많은 20대 친구들은 "다 안다"고 말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때문에 투표할 필요성을 못 느껴요!" 그들이 과연 '세상의 본질'을 알까? 아니다. 그들은 세상이 '진짜로'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20대의 무지를 지적할 때 어떤 방법이 효과적일까? "너희는 무지해! 세상에 관심을 가져!" 이렇게 호통을 쳐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안이 나는 '르포'라고 생각한다. 많은 20대가 기성세대가 주입한 아주 상투적인 언어로 세상을 설명한다. 이들은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꼼꼼히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에게 세상이 진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생히 보여줘야 한다. 나는 그것을 바로 르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대들이 <PD수첩>과 같은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것도, 그 프로그램이 "세상이 실제로 돌아가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를 포장하는 허구의 신화는 세상이 돌아가는 메커니즘이 폭로될 때 박살날 수 있다.

1980년대에 사회과학이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했다면, 지금은 르포와 같은 인류학적인 작업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한국 사회의 실체를 폭로한다. 20대 친구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적인) 글을 쓰도록 권유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기 안의 신화를 발견하면 이를 부정할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무관심한 20대?

"기성세대는 20대에게 아무 것도 제대로 가르쳐준 적 없다. 사유하는 방식도, 혹은 '혁명 그 너머'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도, 맹목적이게도 자신들의 '뜨거웠던 추억'만을 알려주고 그것이 민주주의 모든 것인 듯 이야기할 뿐이다." (혜교)

프레시안 : 구체적인 얘기를 해보자. 198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486(386)세대'는 20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는 모습을 개탄한다.

윤희정 : 얼마 전 수업 시간에 친구들과 독일의 데니스 간젤 감독의 <디 벨레(Die Welle)>(2008년)를 보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파시즘의 최면에 걸리는 과정을 보여준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기성세대가 얘기하는 것처럼 '독재'와 '민주주의'는 반대일까?

우리는 독재하면 흔히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의 악행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런 독재자가 힘을 얻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독재야말로 민주주의가 만드는 것이 아닌가?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486세대는 자신의 경험에 갇혀 민주주의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엄기호 : 놀라운 통찰이다. 486세대에게 민주주의와 독재는 언제나 대립 쌍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을 놓고 "반민주", "독재" 이렇게 욕하는 기성세대를 보면서 20대는 어리둥절하다. "민주주의 원칙대로 투표를 해서 뽑아놓고서 왜 '독재자'라고 욕하지?" 그런 20대에게 486세대는 이렇게 질타한다. "20대가 투표를 안 해서 이명박이 뽑혔잖아!"

과연 그럴까? 20대는 비웃는다. "아니, 20대가 투표를 하면 이명박을 안 뽑는다고 누가 그래?" 20대는 자기도 모르게 '민주주의의 그늘'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486세대가 펀드, 부동산 투자 등으로 '부자 아빠' 되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20대는 민주주의의 약점을 꿰뚫어본 것이다.

윤희정 : 사실 그렇다. 한국에서 '정치' 하면 뭐가 떠오르나? 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후레시맨'이 떠오른다. 망치를 든 후레시맨, 지팡이를 든 후레시맨, 의장을 보호하는 후레시맨…. 그런 후레시맨을 정치인으로 뽑은 게 바로 486세대의 민주주의 아닌가? 그런 후레시맨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게 그렇게 욕을 먹을 일인가?

엄기호 : 정치를 이렇게 희화화시킨 기성세대가 반성해야 한다. 특히 정당, 언론은 뼈아픈 성찰을 해야 한다. 언론이 '폭로 저널리즘'으로 정치를 우습게 만들더니, 아니나 다를까 요즘에는 보수, 진보 정당을 가리지 않고 그런 세태를 답습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의 위상이 어떻게 되었나?

한국에서 정치는 기피 대상 1호가 되었다. 비전과 실력을 갖춘 건강한 이들이 정치를 해야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정작 이런 이들이 '반정치' 선언을 해야 '도덕적'이라고 칭송을 받는다. 도덕에 편집증적인 강박을 가진 한국 사회에서 반정치적일수록, 비정치적일수록 도덕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인기와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황당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질타를 받는 20대 중에서 누군가가 정치를 하려고 하면 "어릴 때부터 권력에 눈이 멀어서!" 이런 따가운 시선을 버텨야 한다. 정작 486세대들은 기성 정당에 들어가 후레시맨이 되었으면서 말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윤희정 : 정치는 다 저래!

엄기호 : 독일의 발터 벤야민이 파시즘을 '정치의 미학화'라고 표현했다. 한국에서는 '정치의 도덕화'가 진행 중이다. '도덕의 정치화'를 꾀해야 할 좌파마저도 이런 흐름에 편승하고, 아까 얘기했듯이 언론은 이런 상황을 계속 부추기고. 이런 토양에서 강자가 약자를, 다수가 소수를 착취하고 괴롭히는 가장 반도덕적인 일이 도덕의 이름으로 자행될 수 있다.


ⓒ프레시안(손문상)

돈독 오른 20대?

"우리가 원하는 자유란 무엇인가? (…) 아버지를 통해 본 아버지 세대의 자유란 민주주의와 직결된다. (…) 우리는 이미 민주화가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 우리에게 자유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이다." (지은)

프레시안 : 이렇게 20대와 기성세대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다면 양자가 소통을 할 수 있는 계기는 무엇일까?

엄기호 : 기성세대는 이렇게 민주주의의 그늘을 간파한 20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민주주의 하면 '정치적 민주주의'를 의미했다. 이 책에서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기성세대에게 민주주의가 정치적 민주주의라면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경제적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이런 사실은 20대와 잠깐만 대화를 나눠보면 알 수 있다. 얼마 전 외교통상부에서 유명환 장관의 딸을 특채한 일이 논란이 되었다. 20대의 반응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광장 개방을 둘러싸고 서울시와 시민단체가 대립하는 것을 놓고서는 "집회는 다른 데서 하면 되지" 하고 시큰둥하던 친구들이 엄청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윤희정 : 20대가 스펙(specification)과 학점에 목매고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남편, 더 좋은 차 타령을 하는 것은 맞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 꼭 20대가 아니라 486세대를 포함한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다수가 똑같지 않은가? 왜 20대만 그렇게 살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잘 살아보겠다는데….

우리가 일확천금을 바라는 게 아니다. 아니, 이미 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재벌 2세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이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라도 맞춰야지 내 목소리를 들어줄 것 아닌가? 정치적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경제적인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한국 사회의 '우리' 안에 들어가야 하니까.

엄기호 : 바로 이 지점에서 20대와 486세대가 만날 수 있다. 방금 지적한 것처럼 20대의 소망은 아주 소박하다. 남들과 비교했을 때, 보조라도 맞춰보겠다고 저렇게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20대는 지금 평범한 '서민'이 되려고 저렇게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대는 서민이 희망인 세대다!

20대가 돈만 밝힌다고 하는데 큰 착각이다. 도대체 그 돈만 밝히는 20대는 어디 사는 누구인지 묻고 싶다. 당장 1000원이 아쉬운 친구들이 무슨 돈을 밝히겠나. 내가 아는 20대 대다수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아르바이트 고생담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한국 자본주의는 '알바'를 착취해서 굴러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실제로 한국 사회 서비스 산업의 바닥 노동이야말로 20대의 몫이 아닌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 20대 친구는 자신의 꿈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적당히 벌어서 결혼도 하고, 여유가 생기면 남도 도우며 살고 싶어요!" 이들은 이렇게 소시민으로 살아가려고 정말로 절박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1970~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의 소망이 뭐였나? 정치권력의 횡포로부터 소시민의 삶을 방어해야 한다, 이것 아니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세대 모두 서민의 삶을 방어해야 한다, 방어하고 싶다는 공통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 세대가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프레시안(손문상)

지질한 20대?

공부 잘하는 이 아이들이야말로 힘 센 아이들, 잘사는 아이들과 함께 삼위일체가 되어 반에서 가장 덜떨어진 아이를 괴롭힌다. (…) 급격한 변화이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약자가 아니라 덜떨어진 존재로 인식된다. 맞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식으로 폭력은 정당화된다. (115쪽)

프레시안 : 그렇게 한국 자본주의의 맨 밑바닥에서 소시민의 삶을 방어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20대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지질한 모습을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윤희정 :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이니까! 20대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그런 경향은 학교를 다닐 때보다 취업하고 나서 기성세대와 접하면서 더 심해진다. 그런 '폭력의 대물림'이야말로 20대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병들었다는 직접적인 증거 아닐까?

엄기호 : 정확한 지적이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모습이 어찌 20대만의 문제인가? 나는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을 '항구(恒久)한 전쟁 상태'로 규정하고 싶다. '경쟁'과 '전쟁'은 다르다. 경쟁에서는 내가 살아남는 게 목표지만, 전쟁에서는 남을 죽이는 게 목표이기 때문이다.

지금 20대는 어렸을 때부터 경쟁이 아닌 전쟁 수행을 강요받아온 세대다. 그러다 보니, 그들 중 상당수는 타자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공격적이다. 예를 들자면, 인터넷에서 열다섯 살짜리 중학생과 성관계를 한 30대 여교사의 신상을 기어이 추적해 밝히는 20대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전쟁 수행을 하면서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즐기는 이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공격적인 이들이 과연 '지질한' 속칭 '찌질이'들일까? 아니다. 그런 이들의 상당수는 탈락자가 아니다.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와 같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날고 긴다는 20대들이 상당한 기득권을 소유한 이들이라는 징후를 포착했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석사 학위 논문 중 이길호 씨의 <우리는 디씨 :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증여, 전쟁, 권력>(2010년)이 있다. 디시인사이드와 같은 인터넷 사이트의 공격적인 '사이버 마초'들에게는 '왜 전쟁을 하는가' 이런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항상 전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누구를 공격할 것인가?'

인간의 진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속물, 동물, 괴물. '사이버 마초'와 같은 20대는 괴물로 진화하는 전형적인 예이다.


ⓒ프레시안(손문상)

'관계 기피증' 환자, 20대!

"어째서인지 내 '불꽃같은 열정'은 삽질에만 발현된다. (…) 나, 그리고 내 친한 친구 두 명은 우리 과에서 '잉여'로 통한다. 뭘 하는지 셋 다 새벽 4시가 넘어도 잠을 안 자는 일이 허다하다. 가끔 서로에게 왜 안 자느냐고 물으면 뜬금없이 자기가 좋아했던 옛날 시트콤이나 드라마를 정주행하느라 바쁘다, 인디 영화를 구했는데 너무 취향이라서 보고 있다는 둥 잉여스러운 대답을 한다." (혜연)

프레시안 : 항구한 전쟁 상태, 도덕의 정치화…. 그대로 되면 끔찍한 일이 뻔히 예상되는 이런 상황에서 20대의 역할은 뭘까? 괴물이 되더라도 순응해서 살아남는 것일까? 아니면…. 이 책을 보면서 답답했다. "힘들다" 되뇌는 그 친구들 중 누구도 '관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못하니까.

그들을 욕하는 486세대를 보라. 그들은 모든 것을 관계를 통해서 해결한다. 그 관계의 힘은 '민주화'나 '노무현'이라는 공동체의 성과로도 나타나고, 때로는 '패거리'나 '(아파트) 부녀회'와 같은 이기적인 결과로도 나타난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문제를, 자기의 욕구를 관계를 통해서 해결한다.

윤희정 : 확실히 20대가 관계에 대한 지향성이 부족하다. 글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 20대는 486세대와는 다르게 한 번도 관계의 문화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고작 하는 게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미니홈피' 1촌을 맺는 일이었으니까. 이러다 보니 관계를 맺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말이다.

엄기호 : 이번 책을 마무리하면서 나 역시 똑같은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래서 지금은 20대 친구들에게 '관계의 경험'을 묻고 있다. '살아오면서 참스승이 있었나?',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이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와 몰려다녔나?', '누가 내게 기쁨을 주었나?' 이런 20대의 관계를 화두로 다음 책을 준비해볼 생각이다.

아무튼 이렇게 관계를 가지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대라고 왜 관계가 없겠나? 삶 자체가 관계인데. 그런데 이들은 그런 관계의 경험을 '삽질' 그러니까 쓸 데 없는 짓으로 여긴다. 밤새 친구와 대화를 나눈 일도, 밤새 친구와 술자리를 가진 일도 이들에게는 모두 삽질이다.

프레시안 : 관계를 통해서 성취한 경험이 없기 때문일까?

엄기호 : 동감한다. 486세대만 하더라도 관계 맺음을 기본적으로 생산적이라고 생각했다. 밤새 술을 마시는 일도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관계 맺기의 하나로 생각했으니까. 그들에게 관계는 청춘의 상징, 열정의 징표였다. 그런데 20대는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삽질이라고 여기니 답답할 수밖에….

그래서 요즘에는 20대 친구를 만날 때마다 '증여', '선물' 같은 인류학의 개념을 들려준다. 예를 들자면, 밤새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또 술을 마시면서 그러니까 그들의 말대로라면 삽질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증여를 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의 '사기'를 돋우는 이런 말에 그들은 열광한다.

"그래, 나는 삽질이 아니라 열정을 분출 중이었어!"


ⓒ프레시안(손문상)

희망은 없다? 있다!

프레시안 : 이 책은 대단히 낙관적이다. 하지만 오늘의 얘기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 사회를 이 지경으로 이끈 기성세대(486세대)와, 앞 세대와는 또 다를 미래세대 사이에서 20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엄기호 : 한 번 더 강조하자면, 20대는 지금 이 사회에 순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비루하고 찌질하게 구는 것도 다 순응의 과정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순응한들 이 체제는 그들의 순응을 감당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낙관한다. 이들이 순응을 배신하는 사회와 맞닥뜨렸을 때, 폭발적인 파괴력이 나올 것이다.

프레시안 : 아니다. 굉장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폭발이 나타날 수도 있다. 역사를 살피면, 행복을 향한 개인의 욕구를 사회가 수용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폭발은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이었다. 나는 20대 친구들이 그런 폭발을 긍정적인 방향이 아니라, 부정적인 방향으로 표출하는 역할을 맡을 것 같아서 두렵다.

엄기호 : 솔직히 말하면, 나도 겁난다. 유럽이나 남아메리카의 역사가 보여주고 경고하는 대로 자생적 파시즘으로 폭발할 수도 있다. 젊은 세대들이 아무리 순응하려고 노력해도 체제가 이를 감당할 수 없을 때, 그들의 영혼을 누가 사로잡느냐에 따라서 나치와 같은 파시즘이 도래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자, 그러면 기성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두렵고, 걱정만 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한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가? 20대들 보고서 '너희들끼리 알아서 잘 해봐!' 이렇게 얘기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지금 20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20대의 몫'이 아니라 '기성세대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성세대는 '자기들끼리만 신난 세대'다. 대학에도 진보적인 교수, 강사는 많다. 그런 진보적인 교수, 강사들이 20대 학생과 수업하면서 과연 얼마나 치열하게 고군분투하는가? 혹시 수업은 대충하고 각자가 속한 시민단체에 가서 '20대를 걱정하는' 시늉만 하면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실은 후자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비난하는가? 사람은 약하다. 한 사람이 '정치화'하려면 수많은 장치가 필요하다. 486세대는 한 번 자신의 20대의 경험을 돌이켜보라. 학회, 동아리, 교지, 신문, 유인물, 현수막 등…. 이 모든 정치화의 장치의 수혜를 486세대는 듬뿍 받았다. 그리고 이런 장치를 계기로 수많은 관계가 만들어졌고.

그런데 이런 장치의 절대 숫자가 줄었는데 20대 보고 "너희는 왜?" 하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 질타다. 나는 20대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교수, 강사, 시민운동가, 기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누구를 만나는가?' 그러다 보니, 20대는 다른 사람에게서 감동을 찾는다. 20대에게 배우고 싶은 '고수'를 물었더니 '무릎팍 도사'가 인정한 안철수, 한비야 씨 등을 꼽더라.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그러고 보면 이 책은 20대가 아니라 그들과 소통해야 할 30대, 40대, 50대가 읽어야 될 책이다. 희정 씨는 오늘 대화를 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윤희정 : 20대는 어른들 잣대로 평가를 받는데 무뎌졌다. 어른들은 늘 예전과 지금을 비교하니까. "우리는…, 너희는…" 이렇게. 그럴 때마다 난감하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른데 그것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는가. 20대가 말문을 닫는 것은 수긍해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20대가 생각 없이 사는 것은 생각을 하는 순간 앞뒤가 꽉 막힌 현실 앞에서 할 말을 잃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이 기성세대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됐으면 좋겠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 혹은 오늘의 대화를 들으면서 "역시 20대는…" 하고 혀를 차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 이해가 안 되면 그냥 그 자리에서 지켜봐 달라. "요즘 20대는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구나." 그렇게 거기 서 있으면 우리가 한 발 다가갈 수 있으니까.

엄기호 : 제목을 "이것이 청춘인가"가 아니라 "이것이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로 지은 것도 이 책이 기성세대를 염두에 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것이 청춘이 아니라고 말하는 기성세대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20대와 관계를 맺을 486세대들이 이 책을 꼭 읽기를 바란다.

프랑스에 갔을 때 1968년 5월 혁명을 경험한 '68세대' 교수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20대 학생을 비아냥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생각 없는 것들!" 심지어 내가 그들과 만나려고 하니 이렇게 막았다. "저들이랑은 말이 안 통할 걸. 우리랑 얘기합시다!" 한국과 똑같은 모습이다.

순간 분통이 터져서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당신들이 이러니, 프랑스에서 유럽에서 진보의 기운이 쇠하는 게 아니냐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하자. 한국 사회는 결코 순응의 힘을 담아낼 수 없다. 폭발이 어떻게 표출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낙관하고 싶다. 오늘도 책이 아니라 20대와 씨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모두, 내 인생에 대해 좀 더 상상하고 좀 더 관심 갖되, 날 동정하진 마세요!"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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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나는 반대한다>(느린걸음 펴냄)의 저자 김정욱의 강연을 들었다. 우리 전통 사회에서는 산림에서 흘러온 물이 마을을 지나 하천에 흘러갈 때까지 밭과 논에서 이용한 뒤에는 다시 마을 숲을 지나 흐르도록 했다고 한다. 아무데나 오물을 버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늘 그렇게 강과 내에 마실 물이 흐르도록 했다.

비슷한 시기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창밖으로 오물을 내버리는 일이 흔했다. 물에서 병이 옮을까봐 목욕도 꺼렸다. 오염된 물을 마실 수 없어서 물 대신 술을 빚어 마셔야 했다.

술을 즐기는 부모님, 대학 다니던 때의 치열한 음주 문화 덕일 것이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의 친구와 자리를 할 때마다 참 아쉽다. 친구이되 술친구는 못하는 아쉬움. 그러나 어쩌랴. 그들의 몸에서는 아세트알데히드 분해 효소가 만들어지지 않으니, 술이 그대로 독약, 또는 발암물질이 되는 것을.

이에 비해 유럽인들은 아세트알데히드 분해 효소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거의 없단다. 유전적인 차이이다. 언젠가 좀 억울해서 친구에게 "왜 우리만 술 못 마시는 사람이 많은 거야?" 하니,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란다. 우리나라는 술 못 마시는 사람이 많은 덕에 알코올 중독자 비율이 그만큼 낮다는 것이다. 오호, 그렇군.

강연을 같이 들은 친구들과 술 한 잔을 했다. 가슴을 누르는 그 날 강연의 주제는 조금 밀어두고, 그 날의 깨달음에 관한 사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이 왜 그렇게 다들 술을 잘 먹나 했는데, 오늘 탁 깨달음이 오더라고. 중국에 간 유럽인들이 중국 사람들이 엄청 깨끗하다고 했다지? 우리 조상들은 중국 사람들 더럽다고 했는데. 유럽인들이 얼마나 더러웠다는 얘기야! 병 걸릴까 무서워서 물을 못 마시니 술만 마셔야 했고. 그러니 술 못 마시는 유전자가 남아날 수 있었겠어? 나 이거 주제로 연구해야 할까봐."


▲ <1만 년의 폭발 : 문명은 어떻게 인류 진화를 가속화시켰는가>(그레고리 코크란·헨리 하펜딩 지음, 김명주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그러다가 친구들에게 혼이 났다. 그거 연구한 사람 이미 많을 테니 정신 차리라고. <1만 년의 폭발>(그레고리 코크란·헨리 하펜딩 지음, 김명주 옮김, 글항아리 펴냄)을 읽으면서 친구들 말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뇌에서 발생하는 열의 처리 문제, 체내에 염분을 보존하는 유전적 특성과 고혈압의 관계, 락토스(젖당) 내성을 갖게 된 북유럽 인들이 다른 동물에게 흡혈귀가 아닌 흡유귀(吸乳鬼)가 된 일, 자외선이 부족한 지역에서 비타민D를 합성하기 위해 짙은 색 피부를 버린 것.

농경의 역사가 길지 않은 이들은 서양식 식단을 접할 때 제2형 당뇨병이 특히 더 잘 발생하고 알코올에 의한 피해를 받기 쉬우며 태아 알코올 증후군 발생률도 높다는 것, 디스트로핀 유전자와 관련해서 높은 지능을 위해 근력을 희생했을 가능성, 피임과 낙태약으로 너무 인기가 있어서 멸종한 실피움, 문명이 상업 활동을 위한 마음 모형에 필요한 지능을 선택했을 가능성.

시인들의 조울증, 좋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매우 낮은데도 심장병 징후를 나타내지 않는 이탈리아의 어느 가계, 결혼과 무역, 식민지, 전쟁, 강제 이주 등에 의한 유전자 이동, 미생물 지원군을 등에 업고 아스텍 제국을 쑥대밭을 만든 코르테스, 유럽 유대인들의 높은 지능과 테이-삭스병과 같은 유전병의 관계 등 저자들이 이 책에서 든 사례들은 매우 광범하고 다양하다.

저자들이 말하는 '1만 년의 폭발'은 농경과 문명에서 기인한 인류 진화의 폭발이다.

기린 한 마리를 썩기 전에 다 먹으려고 해보라. 아내와 자식들이 돕는다 해도 불가능하다. 고기를 나눠먹는 데 드는 실질적인 비용은 0이다. 수렵·채집인들은 이기적이지 않다.

반면 농부들은 이기적이어야 한다. 최소한 그들은 씨곡이나 씨가축을 남에게 줄 여유가 없었다. 또, 재산이 생기면서 게으름이 줄었을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 저축을 할 수 있었다 (…) 이것은 수렵·채집인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들은 부를 축적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빈둥거리며 놀았다. 이야기하고 잡담하고 노래했다. 그들은 게을렀고 그들에게는 그게 맞는 일이었다.

게으름은 생물학적으로 합리적인 것이었다 (…) 결국 농부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점점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여기서 다시, 먹을 게 충분히 있는데도 일하고 싶어 하는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선택이 일어났을 것이다.

(…) 이 모든 농경 친화적인 행동들은 처음에는 틀림없이 인간의 기질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개미처럼 부지런한 행동을 유발하는 대립유전자들의 빈도가 증가했을 것이고, 결국 몇 천 년 후에는 이기적이고 열심히 일하고 자제심이 있는 사람들이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보다 훨씬 흔해졌다. 배짱이보다 개미처럼 행동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평균적인 삶의 척도를 높여주지는 않았다. 세상은 맬서스의 덫에 걸려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비교적 최근에 농부가 된 집단들, 혹은 아예 농부가 되지 않은 집단들은 새로운 사회적 기술적 발전들을 숙달하는 속도가 느리다 (…)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러한 경우이고, 현재 남아메리카에 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에 대한 불만의 물결이 일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난 내가 못 그래서 그런지, 자기 생각을 방약무인하게 털어놓은 글을 좋아한다. 그런 글을 읽을 때면 꼭 겉으로 웃지는 않아도, 속으로 뇌로는 웃는다. 그것도 자주. 이 책도, 과학자들이면 대개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할 네안데르탈인 유전자의 유입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을 보아도 그런 쪽인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는 동안 웃음이 나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례가 많은데도 좀 무서웠다.

그들은 왜 이렇게 제국주의의 침탈이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어떻게 아이큐에 관해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연구한 수많은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그렇게 간단히 치워 버리는 걸까? 게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만일 이러한 차이들의 근본 원인이 (…) 생물학적 변화들이라면 (…) 농경의 경험이 일천한 사람들의 느린 현대화 문제에 대한 기존의 해결책들은 매우 문제가 많은 것이다. 오히려 근본적인 생물학적 원인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방법들이 매우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한 방법들은 세계 지배 전망을 충분히 바꿀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세상은 분명 지금보다 활기를 띨 것이다.

(…) 현재 인간 개체군들 대부분에서 과학은 존재하지 않거나 그 존재가 심히 미약하기 때문이다 (…) 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나 이슬람 세계에 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인종과 민족의 생물학적 평등은 필연이 아니다 (…) 역사의 실험들이 내놓은 결과의 일부는 인간의 수명과 인지 능력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우리의 더 야심찬 시도들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과학 연구자들이 진화의 정체나 '심적 동일성' 같은 일련의 도그마들을 떨쳐버릴 때가 되었다. 세상을 얻기 위해서는 더 이상 잃을 시간이 없다.

저자들로 대표되는 '그들'이 오랜 농경 문화를 갖지 않은 모든 문화권을 얼마나 철저히 대상화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생물학 제국주의가 아니라고?

나도 인간을 이해하는 데 과학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우리에게는 좀 더 많은 과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과학엔 역시 많은 얼굴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책의 첫머리에 인종 차별주의에 매우 민감하여 '같은 몸과 마음', '인간다움을 향한 인간의 진화'와 같은 수사적 표현을 한 굴드와 르원틴을 인용한 것은 비겁했다고 본다. 그들이 다윈의 '느린 진화' 이론에 반기를 든 '진화 폭발'과 단속평형설의 거두임에랴.

인류는 '농경'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리고 살아낸 이래, 지난 150년 동안 '산업사회'라는 또 다른 새로운 환경을 지나왔다. 이제 사람들은 지식사회, 정보화 사회를 말한다. 책을 읽고 인간에 관해, 인간의 환경에 관해, 인간의 본성에 관해 생각이 많아졌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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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이유선이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존 듀이(1859~1952년)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그의 교육관과 관련한 것들"이고 역자가 <철학의 재구성>(아카넷 펴냄)을 번역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점에 관련되어 있다.

역자는 "어떤 전문적이고 사변적인 철학보다 우리에게 실천적인 지혜를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 듀이의 철학을 재구성하고자 하며, 이렇게 듀이의 "철학이 오늘날의 상황에서 적절히 재구성될 때 우리는 철학이 가진 현실적인 힘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본다. 역자의 궁극적인 의도는 한국에서의 철학의 재구성이며, 그러한 의도의 실현을 위해 그는 듀이의 철학을 재구성하려 하며, 그러한 재구성을 위해 이 책, <철학의 재구성>을 번역한 것이다.

독자는 이 책의 내용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물론 이것이 없다면 여타의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겠지만-보다는 듀이가 철학의 재구성①을 시도하게 된 시대적, 학문적 배경과 그러한 배경에 직면하여 그가 새롭게 구축하는 학문 방법론, 학문 영역의 재범주화 및 과제 설정의 방식을 눈여겨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역자의 지적처럼 "전통적인 종교적, 도덕적, 형이상학적 가치관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야기한 새로운 가치관을 중재하기 위해서" 듀이가 시도한 방법과 그 내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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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의 재구성>(존 듀이 지음, 이유선 옮김, 아카넷 펴냄). ⓒ아카넷
이 책은 출간(1919년) 25년 후에 쓰인 서문②에 이어서 당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이 이루어 낸 성과와 방법론에 대한 반성을 담은 다섯 개 장, 그리고 그러한 반성을 바탕으로 논리학, 도덕, 사회 철학의 재구성을 적극적으로 논의하는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에서 듀이는 책 제목에 관하여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철학의 재구성(Reconstruction of Philosophy)이라는 제목이 철학 내부의 재구성(Reconstruction in Philosophy)이라는 제목보다 더 적합하다."③ 철학 '내부의' 재구성은 철학이 외부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재구성이라면 철학'의' 재구성은 "언제나 진행되고 있으면서 때때로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위기와 전환점을 만들기도 하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변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듀이는 자신의 시대가 변화의 국면에 처해있고 그에 따라 철학은 그에 상응하여 다시 구축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듀이의 관점은 철학의 기원에 관한 그의 시각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각각의 철학의 과제, 문제, 주제들은 주어진 형태의 철학이 발생하는 공동체 내의 스트레스와 긴장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목격한 이 "변화"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듀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재구성을 시도하려 할 때 "재구성에 대한 요청은 재구성이 일어나야 하는 배경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관심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듀이는 "지난 수백 년간 이루어진 '과학 혁명', '산업 혁명', '정치 혁명'에 대한 논의에서 드러나듯이, 과거의 시스템"과는 달라진 세계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세계는 달라졌는데, "이전의 시스템은 자신의 학설이 형성된 시기의 자연 세계에 대한 전(前) 과학적 관점, 산업에 대한 전(前) 기술적 상태, 그리고 전(前) 민주주의적 정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면 이 학설은 반드시 재구성되어야 한다.

여기서 듀이가 설정하고 있는 일종의 대립 구도가 명료해지는데, 그것은 '전(前) 과학적, 전(前) 산업적, 전(前) 민주주의적 상태'와 '과학적, 산업적, 민주주의적 상태'의 대립이며, 이제 사람들은 이러한 대립 구도를 해소하고 시대에 합당한 철학을 새롭게 구축해야 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듀이가 되풀이해서 지적하는 것은 과학의 성과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법과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또한 그 성과에 기반을 두어야만 한다. 이는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상당한 정도로 삶의 물리적인 조건과 생리학적인 조건을 변혁시킨 관찰과 실험과 반성적 추론이라는 위대하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방법"을 철학에 전면적으로 도입하여야 함을 의미하며, 이를 토대로 "전체론적인 철학 체계"④를 구축해야 할 것이거니와, 특히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주제와 관련된 어떤 탐구에 대해서도, 물리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를 오늘날의 수준에 이르게 한 것과 같은 종류의 방법(관찰, 가설로서의 이론, 그리고 실험적 테스트라는 방법)을 도입"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듀이의 이러한 시도를 한마디로 과학적 방법에 근거한 철학 전 영역의 재구축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먼저 "몇 세기 전 근대 과학이 등장하기 이전에 확립되었던 모든 제도를 교란시키는 문제"들을 고찰하고 과학이 낳아놓은 인간 조건의 변화와 그에 상응하는 철학적 숙고를 수행한다.

그런 다음 "도덕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에 만들어진 근본적인 분리를 설명해주는 문화적 조건의 반영"으로서의 근대적 이분법을 근원적으로 반성하고 새로운 도덕 철학과 사회 철학의 구축으로까지 나아간다.

3

철학은 영원불변하는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른 시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항상 스스로를 재구성해야 하는 학문이다. 이처럼 철학의 본질을 현실의 삶에서 찾는다면 시대의 요청에 맞지 않는 낡은 물음들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 된다. 불변의 진리는 있을 수 없고 시대의 "이야기"가 철학을 만들어내므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철학이 등장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러한 이야기를 이해고 등장의 시점을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우리는 "철학사를 고립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문명과 문화의 발달에 있어서의 한 장으로 연구"해야 하며, "철학의 이야기를 인류학, 원시적인 삶, 종교, 문학, 사회 제도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연관"짓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지성사적 탐구만이 시대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철학의 등장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바탕을 두고 듀이는 전통적인 논리학을 비판하여 그것을 새로운 학문 방법론으로 재구성하며, 근대 과학의 발전 이후 철학자들이 몰두해온 "품위 없는 유물론으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일"에 매달리기 보다는 오히려 "과학 발전의 원이 마무리될" 수 있게 하라고 촉구하기도 한다.

듀이의 시도들은 경험 개념의 재규정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주지하듯이 근대 철학은 경험과 이성을 대립 구도 속에서 파악하며 경험은 일반성과 규칙성을 낳아놓을 수 없는, 진리의 완전한 산출 근거로서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듀이에 따르면 "경험의 참된 '재료'는 행위, 습관, 적극적인 작용,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겪는 것의 연관 등의 적응 과정, 즉 감각에 의해 움직이는 협동 작용으로 인식된다. 경험은 그 자체 안에 연관과 조직화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경험은 "우리를 과거로부터 해방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과거의 실패를 딛고 더 나은 미래를 (…) 만들기 위한 도구"(역자 해제)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의 5장까지는 재구성이 요구된 상황과 재구성의 방법 등이 서술되고 그에 이어서 6장부터 듀이는 철학이 "하고자 하기만 하면, 이런 부정적인(소극적인) 일보다 나은 어떤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이는 것", 즉 철학의 적극적 과제를 제시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논리적 재구성', '도덕적 개념에 있어서의 재구성', '사회 철학에 영향을 주는 재구성'이다.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영원불변한 도덕 법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명백한 행위에 앞서 판단과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황의 상세한 구조를 관찰하고, 그 다양한 요소들을 분석하고, 모호한 것을 명확하게 하고, 더 눈에 띄는 생생한 특징들을 좀 낮춰서 보고, 스스로 드러나는 다양한 행위 양식들의 결과들을 추적하고, 채택으로 이어지는 예상되거나 가정된 결과가 실제 결과와 일치할 때까지는 이러한 결정을 가설적이고 잠정적인 것으로 보는 일이 필요하다."

재규정된 경험 개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탐구를 수행해나간다면 우리의 도덕적 판단과 행위는 끊임없는 시행착오 속에서 스스로 수정해 나가는 일종의 '실천적 지혜'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 철학의 재구성도 "제도, 개성, 국가, 자유, 법, 질서, 진보 등등에 관한 일반 개념의 정련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의 재구성에 관련된 방법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거니와 이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새롭게 정립된 경험 개념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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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늘날 고전으로 간주하여 읽는 사회 철학 텍스트들, 이를테면 플라톤의 <국가>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은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에 깊숙이 파고들지 않았던 소박한 시대에 산출된 것들이다. 그 텍스트들이 복잡다기한 인간의 내면을 치밀하게 탐구하고 있다고는 하나, 현대 사회의 삶 속에서 다면으로 분리된 인간의 자아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며, 여러 측면에서 파악해야만 하는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전범으로서는 충분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역자의 지적처럼 "철학이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 유리됨으로써 대중적인 경멸의 대상이 되거나 근거 없는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오늘날"에 듀이의 시도는 하나의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한국에서 어떤 방식으로 듀이의 재구성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앞서 지적된 여러 가지 논점들을 충실히 소화하는 것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나 그에 앞서는 일종의 선결 과제는 없는가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겠는데, 여기서 우리는 듀이의 강연이 행해졌던 1919년의 일본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듀이는 1919년 2월 일본에 도착하여 1919년 4월까지 체류하였으며, 1919년 2월 25일부터 3월 21일까지 도쿄제국대학에서 '철학의 재구성'에 관하여 강연하였다.⑤ 일본에서는 왜 듀이를 초청하였는가? 그의 강연을 통해서 일본의 지식인과 대중들이 얻고자하였던 것은 무엇이며, 과연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무엇을 성취하였는가?

우리는 후자의 물음에 대해서는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없고 전자의 물음에 대해서는 당시의 일본이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대정(大正) democracy)의 시대였다는 것, 그 분위기가 듀이의 철학에 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서구적인 시도를 해보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할 뿐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19년 1월에 파리평화회의가 시작되었으며, 1918년 일본에서는 최초의 정당 내각이 성립함으로써 이 시대가 열렸다.

이때 전 세계적으로는 군주제에 대한 불신이 번져가고 있었고, 일본 국내에서는 천황제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이 증가하고 있었으며, 사회 정치 제도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이 늘어나면서 국가를 개혁하려는 요구도 등장하였다. 또 군주가 친히 다스린다는 관념이 약화되면서 메이지(明治) 천황 이후 새롭게 확립되어 온 천황제 자체에 대한 회의도 강해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본격적인 근대 민주주의 국가로의 발전을 다양한 통로로 모색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10년 정도 지속되었을 뿐이다. 다이쇼 천황의 사망에 이어서 1928년에 히로히토가 쇼와(昭和)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분위기는 경색되었고,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일본제국은 본격적으로 천황제 파시즘의 길로 나아갔다.

이러한 경과를 보면서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하나의 사상이 현실에서 관철되려면 그 사상의 수입과 번역-일본은 '번역 대국'이다!-, 철저한 학습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관철을 수행하기 위해 정치적, 학문적 자유가 온전히 구현되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21세기 한국에서 관조적 형이상학이 아닌 실천적 철학이 재구성되고 실현되기 위한 조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①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기존의 것을 다시 짜맞추는 재구성보다는 새롭게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세워 올리는 재구축이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② 이 서문은 1948년에 작성된 것인데, 역자에 따르면 "원래의 원고들에 담겨있는 참신하고 독특한 그의 생각들을, 서구의 문명사 전반을 조망하는 더 큰 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돕는 중요한 글"이다.

③ 역자는 듀이의 이러한 지적을 근거로 한국어판 제목을 원제를 따르지 않고 '철학의 재구성'이라 하였음을 역주에서 밝히고 있다. 덧붙이자면 역자의 충실하고 풍부한 역주는 이 책을 읽는 데 큰 도움이 된다.

④ 이는 역자가 듀이의 학문 체계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술어인데 명료한 설명이 더 필요할 듯도 하다.

⑤ 그가 93세를 살기는 했으나 이 해는 60세 되던 해이므로 '철학의 재구성'은 그의 원숙한 사상을 펼쳐보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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