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 해외로 진출을 시작한 이후 세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생각은 크게 바뀌었다. 고대 이래 유럽인들이 알고 있던 세계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좁은 지역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대서양이라는 먼 바다로 나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의 전모를 파악하게 됨으로써 이 세계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지식이나 세계관을 크게 확장시켰고 뒤에 유럽 문화가 급성장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새로 접하게 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불행히도 유럽에 비해 문화 수준이 상당히 낮은 곳이었다. 따라서 그 지역 사람들이나 문화를 유럽인이나 그 문화와 동등하게 볼 수는 없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인종적인 면에서 열등하며 문화적으로도 미개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메리카의 식민지배는 이런 생각이 지배자인 유럽인들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도록 했다.
유럽의 근대 학문은 17, 18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유럽의 우월이라는 이런 생각들을 지적인 작업으로 전환시켰다. 그래서 철학, 역사학, 지리학, 언어학, 인류학, 고고학, 생물학 등 당시의 모든 학문이 모두 그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두 인종주의적이며 유럽중심주의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서양 학문의 유럽중심주의적 성격은 1980년대부터 비판받기 시작했다. 1978년에 나온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그 점에서 큰 자극을 주었다. 그 후 각 학문 분야에서 이런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고 그 성과도 점차 나타나고 있으나 아직은 문제 제기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낙 뿌리가 깊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극복은 쉽지 않다.
한국의 현실은 더 어둡다. 한국 학문은 해방 이후 압도적으로 미국 학문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그런 경향은 2000년대 이후 더 심화되었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미국 학문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보는 경향이 커졌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영어 만능주의 풍조가 심화되고 대학에서도 미국 학문에 대한 의존이 날로 커지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비판에는 원천적인 한계가 있다. 또 미국 학문 위에 서 있는 학계의 기득권 세력이 그에 대한 어떤 도전도 용납하려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그래도 2000년대에 들어와 서양사 분야에서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안목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아직 만족스럽지는 못하나 서양 역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들을 비판하고 바른 역사학을 해야 한다는데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또 학회 차원에서 여러 차례 학술 대회가 열린 바도 있다.
그러나 과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학문 분야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소리는 별로 들은 바 없다. 최근에 한림대학교 김영명(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쓴 책에 그와 관련한 소회가 실려 있다. 김 교수는 한국적 정치학을 정립하려고 애쓰는 분인데 정치학이 수입 학문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동의하기는 하나 그건 말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런 작업을 전혀 하지 않으려 하고 또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에 대해 거의 적대적인 태도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기득권의 침해를 두려워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정치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 경제학은 미국의 주류 경제학을 그대로 따라왔다. 그래서 극소수의 경제학자를 제외하고는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며 세계화를 대세로 내세웠다. 나는 미국이 이끈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가 오늘날과 같이 파국으로 빠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그들이 학생들에게 어떤 설명을 하고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는데 이것은 한국 학문의 상황이 너무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의협심과 용기를 가진 젊은 학자들이 더욱 분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우리 학문을 건설하지 못하면 한국은 언제나 미국 같은 서양 나라들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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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의 발명>(크리스티앙 그라탈루 지음, 이대희·류지석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 |
이런 문맥에서 크리스티앙 그라탈루의 <대륙의 발명>(이대희·류지석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은 시의적절하다. 지리학 분야에서 나타나는 유럽중심주의를 잘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하고 일반화된 대륙이라는 개념의 형성 과정에서 유럽중심주의가 어떻게 관철되었는가를 밝히고 그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지도가 그의 주된 탐구 수단이다. 그는 중세 이후 서양의 지도를 살피면서 지도가 실제의 지리적인 모습을 담은 구체적인 그림이기는 하나 그 내면에는 당시 사람들의 정신적인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고 본다. 미리 가지고 있던 세계에 대한 관념이 지도를 통해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기는 하나 보통은 그냥 모르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매우 중요하다.
서양 중세 시대의 지도를 보면 그것은 분명하다. 중세 시대의 세계 지도는 예루살렘을 그 중심에 두고 있고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셈, 야벳, 함이라고 불리는 세 아들에게 각각 분배된 땅으로 나뉘어 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가 그것이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 때문이다.
그러나 15세기부터는 이런 신학적인 표상을 점점 벗어난다. 유럽인들이 바다를 통해 비유럽지역으로 진출하며 지리 지식이 크게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실용적인 지리 지식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새롭게 그려진 지구 전도들에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것은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6세기 후반 이후 새로운 세계 지도들은 구체인 지구 표면을 평면 지도로 옮기는 과정에서 태평양의 한가운데를 잘라서 펼쳐 놓았다. 그러니 그 반대편인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계 지도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유럽으로 넘어갔다.
이는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하고 전 세계에서 왕성한 무역 활동을 한 유럽인들의 자신감의 발로이기는 하다. 그러나 유럽이 세계 지도의 중심에 한번 자리하게 되자 그것은 유럽인들에게 유럽이 본래적으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불어 넣었다.
16세기에 메르카토르가 발전시켰고 지금도 우리가 많이 보는 메르카토르도법의 세계 지도에서 고위도의 면적이 넓게 그려지며 유럽이 실제 면적보다 훨씬 크게 보이게 된 것도 비슷한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결국 유럽은 세계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18세기에 와서는 이런 생각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는 인종주의가 이론적으로 확립된 시대였다. 또 한 편에서는 유럽인들의 정체성이 분명해진 시대였고 그것은 계몽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유럽의 차별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중세 시대에 사용되던 기독교 세계라는 생각이 문명으로서의 유럽이라는 생각으로 대치된 것이다. 그리하여 정체되어 있는 아시아와 역사가 없는 사회인 아프리카·아메리카는 유럽보다 열등한 인종들이 사는 야만스런 곳으로 생각되었다. 이 시기의 지도들에 그려진 삽화들에서 그것은 분명하다. 네 대륙은 보통 여성으로 표현되었는데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는 모두 유럽에게 굴종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사이에도 차별은 있다. 어떤 그림에서는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여성은 아시아에 비해 초라하게, 또 반나체로 그려지고 아메리카는 완전한 나체로 그려지고 있다. 야만의 정도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륙 사이의 서열화가 완성되었다.
또 각 대륙의 지리적 구분도 자연스런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와 유럽,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경계 구분에도 문제는 있으나 가장 문제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이다. 이는 19세기 초에는 우랄산맥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러시아인들이 가능한 한 많은 러시아 영토를 유럽에 편입시키기 위해 제안한 것이다.
이런 유럽중심적인 세계관은 유럽이 실제로 세계의 중심이었었던 19세기 말에 제국주의 시대에 와서는 다른 대륙 사람들에게 강요되었다. 그것은 1884년에 경도 0도인 본초자오선이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자오선으로 결정된 데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니 세계 지도의 중심이 당연히 유럽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보는 세계 지도는 과학의 중립성을 표방하고 있기는 하나 지금까지도 서양인들의 이런 내밀한 계획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 점에서 지도라는 그림 안쪽에 숨어 있는 그 생각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지도라는 무미건조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뚜렷한 문제의식과 다방면에 걸친, 그리고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저자의 풍부한 지식을 통해 독자들에게 지리학 훨씬 이상의 인문 지식을 선물하고 있다.
더구나 지도를 포함한 많은 그림들은 글의 이해를 잘 돕는다. 번역도 좋은 편이다. 전문적인 서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일반 대중의 교양 서적으로는 훌륭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한번 읽으면 세계를 보는 안목이 많이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