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우석훈·박권일이 <88만 원 세대>(레디앙 펴냄)를 내기 전까지 20대는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부모, 삼촌 세대가 피땀 흘려 일군 자본주의의 열매를 따 먹는 '지질한 대학생'으로 불리거나, 한국 자본주의 맨 밑바닥 노동을 책임지는 '만만한 알바' 혹은 '철없는 인턴'으로만 존재했다.
그런 20대를 세상이 '88만 원 세대'라고 명명하자, 비로소 그들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마치 예전에 없었던 20대가 갑자기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지식인, 기자들이 한동안 '88만 원 세대'를 입에 올렸으나 대다수 20대의 삶과는 무관했다. 간혹 몇몇 20대들이 나서서 자기 세대를 대변해 말하기 시작했으나 반향은 미미했다.
지금도 20대는 여전히 '지질한 대학생', '만만한 알바', '철없는 인턴'일 뿐이다. 이렇게 3년이 흐른 시점에서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이 "고군분투하는" 20대의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담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를 펴냈다. 그가 만난 이른바 '주변부' 대학생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엄기호 연구위원은 이미 앞서 <닥쳐라 세계화>(당대 펴냄),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낮은산 펴냄) 등의 책을 통해서 세기 초의 자본주의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을 벼랑 끝에서 떠미는 모습을 구체적인 개개인의 삶에 바탕을 두고 정치하게 분석했다. 이랬던 그의 시선이 또 다른 '희생양'인 20대로 향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
그러나 이 책은 20대를 분석하지 않는다. 이 책은 대신에 20대에게 귀를 기울였다. 이 책은 "그들이 어떤 언어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들과 함께 나누었던 지적 대화의 기록"이다. 그렇게 2년에 걸친 대화를 모아 놓은 이 책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좌파든 우파든 20대가 문제라고 하는 이야기, 혹은 우리 사회가 20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며 그들의 처지를 걱정하는 이야기 안에서 20대들을 대하는 자기 자신은 누구인가, 자신은 무엇을 함께할 수 있고 무엇을 함께할 수 없는가에 대한 성찰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20대와 함께 자신이 우리 시대에 대해서 어떤 새로운 언어와 삶, 그리고 기획을 생산했는지에 대한 이야기 또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20대는 이들에게 기획의 대상이지 파트너가 아닌 것이다." (19쪽)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추상의 20대'가 아니라 기성세대의 아들딸, 조카, 동생인 ○○○, 직장의 후배인 ○○○, 가게의 직원인 ○○○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들려주는데 있다. 그들은 이른바 명문대를 나와서 대기업에 취직한 '엄친아'·'엄친딸'도 아니고, 유창한 외국어로 무장한 'G세대(G(Global/Green) generation)'도 아니다.
그렇다면, 기성세대와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엄기호 연구위원과 그와 또 다른 '지적 대화'를 나누는 중인 덕성여자대학교 윤희정(22) 학생이 먼저 자신의 고민을 쏟아냈다. 좀 더 진솔한 얘기를 끌어내고자 진행자(강양구)가 종종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다음은 지난 29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의 한 카페에서 있었던 대담의 전문이다.
|
▲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오른쪽)·윤희정 덕성여자대학교 학생(미술사학과). ⓒ프레시안(손문상) |
비난 받는 20대!
프레시안 : 책 얘기부터 시작하자.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나?
엄기호 : 언제부턴가 주로 지금은 '486'이 된 '386세대'를 중심으로 '요즘 20대는 한심하다' 이런 불평이 많아졌다. 그 때 우석훈·박권일 씨가 <88만 원 세대>를 펴내면서 처음으로 20대의 사정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고 나서 폭발적으로 '대학생·20대 담론'이 늘어났다.
그러나 <88만 원 세대> 이후의 담론은 주로 이 세대를 어떻게 규정하고 명명할지에 초점을 맞췄다. 지식인이 20대의 삶을 자신이 선호하는 이론에 꿰맞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 따르면 20대는 이렇다' 이런 식이었다. 20대들이 사는 이야기를 듣고 해석하는 게 아니고.
더구나 그렇게 20대 담론을 말하는 주체는 세대를 불문하고, 심지어 20대들까지도 주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었다. 이 점이 많이 불편했다. 명문대 학생이 아니라 한 번도 주목 받지 못한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은 어떤 삶을 살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보고 듣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이렇게 <88만 원 세대>와 '20대 담론'이 얘기되고 있을 때, 대학에서 20대 친구들을 상대로 강의를 시작했다. 또 그 대학은 이른바 서울의 명문대라고 불리는 곳이 아니었고. 이렇게 그들과 2년간 지내면서 나눴던 지적 대화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프레시안 : 이 자리에는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20대인 윤희정 씨가 함께했다. 이 책을 읽고 어땠나?
윤희정 : 한마디로 '위안이 되는 책'이다. 그 동안 20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부당하다' 이런 반감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은 첫머리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너흰 괜찮아!" 기성세대의 시각으로 20대를 재단하기보다는 20대의 삶을 해석하면서 지은이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어서 호감이 갔다.
다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답답함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어쨌든 이 책에서 20대의 생생한 목소리로 알 수 있는 팍팍한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한다. 우리, 아니 나는 이른바 '스카이(SKY :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이 부유하지도 않다. 이런 내가, 우리가 이런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이 책도 침묵하더라.
|
ⓒ프레시안(손문상) |
수동적인 20대?
"나는, 혹은 우리는 인생의 모범 답안을 끊임없이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회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삶이라는 모범 답안. (…) 모범 답안에 매료된 우리는 공부를 잘하고, 꽤 멋진 꿈이 있고, 연애도 잘하는, 그 외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건설적인 욕망은 다 이뤄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으면 남는 것은 바닥을 치는 자존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우리를, 나를 이렇게 몰아세워왔다." (지은)
프레시안 : 중요한 지적이다. 이 책을 읽는 이라면 누구나 '20대가 힘들구나, 그들을 이해하자'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은 <88만 원 세대> 이후에 나온 20대를 소재로 한 책 중에서 가장 성공한 시도다. 20대와 대화를 시도하는 첫걸음을 뗀 이 책을 계기로 앞으로 20대 담론의 지형이 바뀔 것 같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아쉬움도 들었다. 20대의 암담한 현실을 누가 극복할 것인가? 20대를 대신해 나서줄 사람은 없다. 그들 앞에 닥친 문제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런 힘을 기르려면 우선 20대 자신이 치열한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20대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엄기호 :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성찰하는 힘은 자신의 삶을 긍정할 때 나올 수 있다. 지금 20대를 둘러싼 현실은 어떤가? 팍팍한 현실은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목소리 높이는 비판은 그들을 '쓸모 없는 인생'이라고 딱지를 붙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선 20대가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그들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나면, 자기성찰의 계기는 스스로 마련하리라고 생각한다. 20대가 그렇듯이 인간은 누구나 고군분투하면서 사는 존재다. 이렇게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긍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딱 그 지점에 서 있다.
윤희정 : 동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20대 친구들도 자신의 삶을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자신과 세상을 성찰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 책의 앞머리에 나오는 '김예슬 선언'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고개를 갸우뚱했으니까.
|
ⓒ프레시안(손문상) |
잉여가 된 20대!
"김예슬. 나도 고대 다녔으면 너처럼 할 수 있겠다 하고 생각했어요. 덕성여대 '길혜미 선언문'. 아무도 관심 안 가져줬을 것 같아요. 김예슬 명문대 중퇴가 길혜미 보통대 졸업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니…." (혜미)
"김예슬 씨에게 묻습니다. 대학은 인간으로서, 사람으로서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습니다. (…) 당신은 썩어버린 작은 사회에서도 배우지 못한다고 인간으로 살지 못한다고 나왔습니다. 더 썩은, 작은 사회를 이렇게 만든 큰 사회에서도 인간으로서 살지 못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궁금합니다." (진아)
프레시안 : 기왕에 얘기가 나왔으니 김예슬 선언 얘기를 더 해보면….
윤희정 : 당연히 관심이 있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고. 그런데 알고 보니 김예슬 씨는 '고려대'라는 타이틀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김예슬은 고려대 학생이기 때문에 저렇게 자퇴 선언을 할 수 있었지 않을까? 책에 나온 한 친구의 말대로 그런 타이틀을 가지지 못한 내가 그런 자퇴 선언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김예슬 선언에 대다수 20대의 반응이 냉소적이었던 것은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더구나 김예슬 씨는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그럴듯한 <김예슬 선언>(느린걸음 펴냄) 책을 펴냈다. 또 미리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유명한 시민단체에 취업했다. 그것들이 또 언론에 보도되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씁쓸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했다. 사실 고려대 학생에게 사람들이 거는 기대가 있지 않나? 또래인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록 나는 '스카이' 타이틀이 없지만, 나를 포함한 다른 대학생도 잇따라 김예슬 씨와 같은 선언을 했다면 그것이 한국의 '학벌'을 해체하는 불씨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도 들었다.
|
ⓒ프레시안(손문상) |
엄기호 : 나도 처음 자퇴 선언이 나왔을 때는 '김예슬이 훌륭하다' 이런 식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덕성여대 학생들에게 김예슬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의외로 반응이 싸해서 충격을 받았다. 학생과 대화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왜 이들이 그렇게 싸한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다.
덕성여대 학생들에게 이 주제로 글을 써보라고 했더니, 김예슬 씨와 동류의식을 가지기에는 이들은 이미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진학하는 대학이 명문대인지 지방대인지에 따라서 교사와 부모로부터 이미 다른 존재 취급을 받았으니까.
덕성여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김예슬 씨가 자퇴 선언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그가 명문대 학생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고자 대학을 떠난다는 선언조차도 엘리트 학생이 독점하는 세상….
사실 <88만 원 세대>가 출간되고 나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수업을 하면서 그 책 얘기를 했더니 한 학생이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1997년 외환 위기 이전에도 88만 원 세대였어요!" 그렇다면, 그 책에서 말하는 외환 위기 이후에 지위가 추락했다는 '88만 원 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어차피 공업고등학교, 상업고등학교, 지방대학교를 나온 20대들은 1997년 외환 위기 이전부터 비정규직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88만 원 세대 담론에 내가 설 자리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이 자신의 삶을 삭제된 것, 잉여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이런 20대들에게 김예슬 씨와 연대해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질타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오히려 이들이 김예슬 선언을 계기로 자기가 선 자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게 일단 순서가 아닐까? 자신의 삶, 자신의 역사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그들의 이후 행보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20대의 그 이후 행보는 대개 '냉소'로 나타난다. 책은 20대에게 '냉소적', '허무적'이라고 딱지를 붙이기 전에 '냉소의 힘'에 주목하자,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냉소적이기 '때문에' 혹은 냉소적임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 있다고. 과연 그런가? 자기가 선 자리를 파악하고 나서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엄기호 : 한 20대 친구가 이런 얘기를 했다. "냉소하지만 투표하러 가는 20대와, 냉소한다고 말하면서도 투표하지 않는 20대는 구분해 달라!" 그 얘기를 듣고서 책에서도 그 둘을 구분해 놓았고, 또 냉소의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
ⓒ프레시안(손문상) |
윤희정 : 냉소의 힘…. 알고 냉소하는 것과 모르고 냉소하는 것은 다르다. 내 경험을 얘기하자면, 나는 정치에 냉소적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정치에 관해서 알고 냉소하는가, 모르고 냉소하는가?' 솔직히 나는 정치에 무지하다. 평범한 대학생들이 그렇듯이 내 앞에 놓인 일들 신경 쓰기도 바빠서 현실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런 무지는 죄인가, 아닌가? 그것은 죄이다. 책에서 얘기한 '냉소의 힘'이 의미가 있으려면 이런 점을 분명히 해야 하지 않을까?
프레시안 : 글쎄…. 냉소하면서도 투표장에 가는 20대나, 혹은 희정 씨처럼 '무지는 죄'라고 생각하는 20대가 현실에서는 소수이다.
엄기호 : 똑같이 냉소하면서도 그렇게 다른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양쪽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방금 언급된 '무지'이다. 많은 20대 친구들은 "다 안다"고 말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때문에 투표할 필요성을 못 느껴요!" 그들이 과연 '세상의 본질'을 알까? 아니다. 그들은 세상이 '진짜로'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20대의 무지를 지적할 때 어떤 방법이 효과적일까? "너희는 무지해! 세상에 관심을 가져!" 이렇게 호통을 쳐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안이 나는 '르포'라고 생각한다. 많은 20대가 기성세대가 주입한 아주 상투적인 언어로 세상을 설명한다. 이들은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꼼꼼히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에게 세상이 진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생히 보여줘야 한다. 나는 그것을 바로 르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대들이 <PD수첩>과 같은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것도, 그 프로그램이 "세상이 실제로 돌아가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를 포장하는 허구의 신화는 세상이 돌아가는 메커니즘이 폭로될 때 박살날 수 있다.
1980년대에 사회과학이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했다면, 지금은 르포와 같은 인류학적인 작업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한국 사회의 실체를 폭로한다. 20대 친구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적인) 글을 쓰도록 권유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기 안의 신화를 발견하면 이를 부정할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무관심한 20대?
"기성세대는 20대에게 아무 것도 제대로 가르쳐준 적 없다. 사유하는 방식도, 혹은 '혁명 그 너머'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도, 맹목적이게도 자신들의 '뜨거웠던 추억'만을 알려주고 그것이 민주주의 모든 것인 듯 이야기할 뿐이다." (혜교)
프레시안 : 구체적인 얘기를 해보자. 198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486(386)세대'는 20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는 모습을 개탄한다.
윤희정 : 얼마 전 수업 시간에 친구들과 독일의 데니스 간젤 감독의 <디 벨레(Die Welle)>(2008년)를 보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파시즘의 최면에 걸리는 과정을 보여준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기성세대가 얘기하는 것처럼 '독재'와 '민주주의'는 반대일까?
우리는 독재하면 흔히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의 악행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런 독재자가 힘을 얻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독재야말로 민주주의가 만드는 것이 아닌가?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486세대는 자신의 경험에 갇혀 민주주의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엄기호 : 놀라운 통찰이다. 486세대에게 민주주의와 독재는 언제나 대립 쌍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을 놓고 "반민주", "독재" 이렇게 욕하는 기성세대를 보면서 20대는 어리둥절하다. "민주주의 원칙대로 투표를 해서 뽑아놓고서 왜 '독재자'라고 욕하지?" 그런 20대에게 486세대는 이렇게 질타한다. "20대가 투표를 안 해서 이명박이 뽑혔잖아!"
과연 그럴까? 20대는 비웃는다. "아니, 20대가 투표를 하면 이명박을 안 뽑는다고 누가 그래?" 20대는 자기도 모르게 '민주주의의 그늘'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486세대가 펀드, 부동산 투자 등으로 '부자 아빠' 되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20대는 민주주의의 약점을 꿰뚫어본 것이다.
윤희정 : 사실 그렇다. 한국에서 '정치' 하면 뭐가 떠오르나? 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후레시맨'이 떠오른다. 망치를 든 후레시맨, 지팡이를 든 후레시맨, 의장을 보호하는 후레시맨…. 그런 후레시맨을 정치인으로 뽑은 게 바로 486세대의 민주주의 아닌가? 그런 후레시맨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게 그렇게 욕을 먹을 일인가?
엄기호 : 정치를 이렇게 희화화시킨 기성세대가 반성해야 한다. 특히 정당, 언론은 뼈아픈 성찰을 해야 한다. 언론이 '폭로 저널리즘'으로 정치를 우습게 만들더니, 아니나 다를까 요즘에는 보수, 진보 정당을 가리지 않고 그런 세태를 답습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의 위상이 어떻게 되었나?
한국에서 정치는 기피 대상 1호가 되었다. 비전과 실력을 갖춘 건강한 이들이 정치를 해야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정작 이런 이들이 '반정치' 선언을 해야 '도덕적'이라고 칭송을 받는다. 도덕에 편집증적인 강박을 가진 한국 사회에서 반정치적일수록, 비정치적일수록 도덕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인기와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황당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질타를 받는 20대 중에서 누군가가 정치를 하려고 하면 "어릴 때부터 권력에 눈이 멀어서!" 이런 따가운 시선을 버텨야 한다. 정작 486세대들은 기성 정당에 들어가 후레시맨이 되었으면서 말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윤희정 :
정치는 다 저래!
엄기호 : 독일의 발터 벤야민이 파시즘을 '정치의 미학화'라고 표현했다. 한국에서는 '정치의 도덕화'가 진행 중이다. '도덕의 정치화'를 꾀해야 할 좌파마저도 이런 흐름에 편승하고, 아까 얘기했듯이 언론은 이런 상황을 계속 부추기고. 이런 토양에서 강자가 약자를, 다수가 소수를 착취하고 괴롭히는 가장 반도덕적인 일이 도덕의 이름으로 자행될 수 있다.
|
ⓒ프레시안(손문상) |
돈독 오른 20대?
"우리가 원하는 자유란 무엇인가? (…) 아버지를 통해 본 아버지 세대의 자유란 민주주의와 직결된다. (…) 우리는 이미 민주화가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 우리에게 자유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이다." (지은)
프레시안 : 이렇게 20대와 기성세대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다면 양자가 소통을 할 수 있는 계기는 무엇일까?
엄기호 : 기성세대는 이렇게 민주주의의 그늘을 간파한 20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민주주의 하면 '정치적 민주주의'를 의미했다. 이 책에서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기성세대에게 민주주의가 정치적 민주주의라면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경제적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이런 사실은 20대와 잠깐만 대화를 나눠보면 알 수 있다. 얼마 전 외교통상부에서 유명환 장관의 딸을 특채한 일이 논란이 되었다. 20대의 반응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광장 개방을 둘러싸고 서울시와 시민단체가 대립하는 것을 놓고서는 "집회는 다른 데서 하면 되지" 하고 시큰둥하던 친구들이 엄청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윤희정 : 20대가 스펙(specification)과 학점에 목매고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남편, 더 좋은 차 타령을 하는 것은 맞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 꼭 20대가 아니라 486세대를 포함한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다수가 똑같지 않은가? 왜 20대만 그렇게 살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잘 살아보겠다는데….
우리가 일확천금을 바라는 게 아니다. 아니, 이미 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재벌 2세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이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라도 맞춰야지 내 목소리를 들어줄 것 아닌가? 정치적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경제적인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한국 사회의 '우리' 안에 들어가야 하니까.
엄기호 : 바로 이 지점에서 20대와 486세대가 만날 수 있다. 방금 지적한 것처럼 20대의 소망은 아주 소박하다. 남들과 비교했을 때, 보조라도 맞춰보겠다고 저렇게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20대는 지금 평범한 '서민'이 되려고 저렇게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대는 서민이 희망인 세대다!
20대가 돈만 밝힌다고 하는데 큰 착각이다. 도대체 그 돈만 밝히는 20대는 어디 사는 누구인지 묻고 싶다. 당장 1000원이 아쉬운 친구들이 무슨 돈을 밝히겠나. 내가 아는 20대 대다수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아르바이트 고생담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한국 자본주의는 '알바'를 착취해서 굴러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실제로 한국 사회 서비스 산업의 바닥 노동이야말로 20대의 몫이 아닌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 20대 친구는 자신의 꿈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적당히 벌어서 결혼도 하고, 여유가 생기면 남도 도우며 살고 싶어요!" 이들은 이렇게 소시민으로 살아가려고 정말로 절박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1970~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의 소망이 뭐였나? 정치권력의 횡포로부터 소시민의 삶을 방어해야 한다, 이것 아니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세대 모두 서민의 삶을 방어해야 한다, 방어하고 싶다는 공통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 세대가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
ⓒ프레시안(손문상) |
지질한 20대?
공부 잘하는 이 아이들이야말로 힘 센 아이들, 잘사는 아이들과 함께 삼위일체가 되어 반에서 가장 덜떨어진 아이를 괴롭힌다. (…) 급격한 변화이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약자가 아니라 덜떨어진 존재로 인식된다. 맞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식으로 폭력은 정당화된다. (115쪽)
프레시안 : 그렇게 한국 자본주의의 맨 밑바닥에서 소시민의 삶을 방어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20대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지질한 모습을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윤희정 :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이니까! 20대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그런 경향은 학교를 다닐 때보다 취업하고 나서 기성세대와 접하면서 더 심해진다. 그런 '폭력의 대물림'이야말로 20대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병들었다는 직접적인 증거 아닐까?
엄기호 : 정확한 지적이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모습이 어찌 20대만의 문제인가? 나는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을 '항구(恒久)한 전쟁 상태'로 규정하고 싶다. '경쟁'과 '전쟁'은 다르다. 경쟁에서는 내가 살아남는 게 목표지만, 전쟁에서는 남을 죽이는 게 목표이기 때문이다.
지금 20대는 어렸을 때부터 경쟁이 아닌 전쟁 수행을 강요받아온 세대다. 그러다 보니, 그들 중 상당수는 타자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공격적이다. 예를 들자면, 인터넷에서 열다섯 살짜리 중학생과 성관계를 한 30대 여교사의 신상을 기어이 추적해 밝히는 20대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전쟁 수행을 하면서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즐기는 이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공격적인 이들이 과연 '지질한' 속칭 '찌질이'들일까? 아니다. 그런 이들의 상당수는 탈락자가 아니다.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와 같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날고 긴다는 20대들이 상당한 기득권을 소유한 이들이라는 징후를 포착했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석사 학위 논문 중 이길호 씨의 <우리는 디씨 :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증여, 전쟁, 권력>(2010년)이 있다. 디시인사이드와 같은 인터넷 사이트의 공격적인 '사이버 마초'들에게는 '왜 전쟁을 하는가' 이런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항상 전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누구를 공격할 것인가?'
인간의 진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속물, 동물, 괴물. '사이버 마초'와 같은 20대는 괴물로 진화하는 전형적인 예이다.
|
ⓒ프레시안(손문상) |
'관계 기피증' 환자, 20대!
"어째서인지 내 '불꽃같은 열정'은 삽질에만 발현된다. (…) 나, 그리고 내 친한 친구 두 명은 우리 과에서 '잉여'로 통한다. 뭘 하는지 셋 다 새벽 4시가 넘어도 잠을 안 자는 일이 허다하다. 가끔 서로에게 왜 안 자느냐고 물으면 뜬금없이 자기가 좋아했던 옛날 시트콤이나 드라마를 정주행하느라 바쁘다, 인디 영화를 구했는데 너무 취향이라서 보고 있다는 둥 잉여스러운 대답을 한다." (혜연)
프레시안 : 항구한 전쟁 상태, 도덕의 정치화…. 그대로 되면 끔찍한 일이 뻔히 예상되는 이런 상황에서 20대의 역할은 뭘까? 괴물이 되더라도 순응해서 살아남는 것일까? 아니면…. 이 책을 보면서 답답했다. "힘들다" 되뇌는 그 친구들 중 누구도 '관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못하니까.
그들을 욕하는 486세대를 보라. 그들은 모든 것을 관계를 통해서 해결한다. 그 관계의 힘은 '민주화'나 '노무현'이라는 공동체의 성과로도 나타나고, 때로는 '패거리'나 '(아파트) 부녀회'와 같은 이기적인 결과로도 나타난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문제를, 자기의 욕구를 관계를 통해서 해결한다.
윤희정 : 확실히 20대가 관계에 대한 지향성이 부족하다. 글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 20대는 486세대와는 다르게 한 번도 관계의 문화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고작 하는 게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미니홈피' 1촌을 맺는 일이었으니까. 이러다 보니 관계를 맺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말이다.
엄기호 : 이번 책을 마무리하면서 나 역시 똑같은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래서 지금은 20대 친구들에게 '관계의 경험'을 묻고 있다. '살아오면서 참스승이 있었나?',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이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와 몰려다녔나?', '누가 내게 기쁨을 주었나?' 이런 20대의 관계를 화두로 다음 책을 준비해볼 생각이다.
아무튼 이렇게 관계를 가지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대라고 왜 관계가 없겠나? 삶 자체가 관계인데. 그런데 이들은 그런 관계의 경험을 '삽질' 그러니까 쓸 데 없는 짓으로 여긴다. 밤새 친구와 대화를 나눈 일도, 밤새 친구와 술자리를 가진 일도 이들에게는 모두 삽질이다.
프레시안 : 관계를 통해서 성취한 경험이 없기 때문일까?
엄기호 : 동감한다. 486세대만 하더라도 관계 맺음을 기본적으로 생산적이라고 생각했다. 밤새 술을 마시는 일도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관계 맺기의 하나로 생각했으니까. 그들에게 관계는 청춘의 상징, 열정의 징표였다. 그런데 20대는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삽질이라고 여기니 답답할 수밖에….
그래서 요즘에는 20대 친구를 만날 때마다 '증여', '선물' 같은 인류학의 개념을 들려준다. 예를 들자면, 밤새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또 술을 마시면서 그러니까 그들의 말대로라면 삽질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증여를 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의 '사기'를 돋우는 이런 말에 그들은 열광한다.
"그래, 나는 삽질이 아니라 열정을 분출 중이었어!"
|
ⓒ프레시안(손문상) |
희망은 없다? 있다!
프레시안 : 이 책은 대단히 낙관적이다. 하지만 오늘의 얘기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 사회를 이 지경으로 이끈 기성세대(486세대)와, 앞 세대와는 또 다를 미래세대 사이에서 20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엄기호 : 한 번 더 강조하자면, 20대는 지금 이 사회에 순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비루하고 찌질하게 구는 것도 다 순응의 과정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순응한들 이 체제는 그들의 순응을 감당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낙관한다. 이들이 순응을 배신하는 사회와 맞닥뜨렸을 때, 폭발적인 파괴력이 나올 것이다.
프레시안 : 아니다. 굉장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폭발이 나타날 수도 있다. 역사를 살피면, 행복을 향한 개인의 욕구를 사회가 수용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폭발은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이었다. 나는 20대 친구들이 그런 폭발을 긍정적인 방향이 아니라, 부정적인 방향으로 표출하는 역할을 맡을 것 같아서 두렵다.
엄기호 : 솔직히 말하면, 나도 겁난다. 유럽이나 남아메리카의 역사가 보여주고 경고하는 대로 자생적 파시즘으로 폭발할 수도 있다. 젊은 세대들이 아무리 순응하려고 노력해도 체제가 이를 감당할 수 없을 때, 그들의 영혼을 누가 사로잡느냐에 따라서 나치와 같은 파시즘이 도래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자, 그러면 기성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두렵고, 걱정만 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한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가? 20대들 보고서 '너희들끼리 알아서 잘 해봐!' 이렇게 얘기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지금 20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20대의 몫'이 아니라 '기성세대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성세대는 '자기들끼리만 신난 세대'다. 대학에도 진보적인 교수, 강사는 많다. 그런 진보적인 교수, 강사들이 20대 학생과 수업하면서 과연 얼마나 치열하게 고군분투하는가? 혹시 수업은 대충하고 각자가 속한 시민단체에 가서 '20대를 걱정하는' 시늉만 하면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실은 후자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비난하는가? 사람은 약하다. 한 사람이 '정치화'하려면 수많은 장치가 필요하다. 486세대는 한 번 자신의 20대의 경험을 돌이켜보라. 학회, 동아리, 교지, 신문, 유인물, 현수막 등…. 이 모든 정치화의 장치의 수혜를 486세대는 듬뿍 받았다. 그리고 이런 장치를 계기로 수많은 관계가 만들어졌고.
그런데 이런 장치의 절대 숫자가 줄었는데 20대 보고 "너희는 왜?" 하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 질타다. 나는 20대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교수, 강사, 시민운동가, 기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누구를 만나는가?' 그러다 보니, 20대는 다른 사람에게서 감동을 찾는다. 20대에게 배우고 싶은 '고수'를 물었더니 '무릎팍 도사'가 인정한 안철수, 한비야 씨 등을 꼽더라.
|
ⓒ프레시안(손문상) |
프레시안 : 그러고 보면 이 책은 20대가 아니라 그들과 소통해야 할 30대, 40대, 50대가 읽어야 될 책이다. 희정 씨는 오늘 대화를 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윤희정 : 20대는 어른들 잣대로 평가를 받는데 무뎌졌다. 어른들은 늘 예전과 지금을 비교하니까. "우리는…, 너희는…" 이렇게. 그럴 때마다 난감하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른데 그것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는가. 20대가 말문을 닫는 것은 수긍해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20대가 생각 없이 사는 것은 생각을 하는 순간 앞뒤가 꽉 막힌 현실 앞에서 할 말을 잃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이 기성세대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됐으면 좋겠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 혹은 오늘의 대화를 들으면서 "역시 20대는…" 하고 혀를 차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 이해가 안 되면 그냥 그 자리에서 지켜봐 달라. "요즘 20대는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구나." 그렇게 거기 서 있으면 우리가 한 발 다가갈 수 있으니까.
엄기호 : 제목을 "이것이 청춘인가"가 아니라 "이것이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로 지은 것도 이 책이 기성세대를 염두에 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것이 청춘이 아니라고 말하는 기성세대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20대와 관계를 맺을 486세대들이 이 책을 꼭 읽기를 바란다.
프랑스에 갔을 때 1968년 5월 혁명을 경험한 '68세대' 교수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20대 학생을 비아냥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생각 없는 것들!" 심지어 내가 그들과 만나려고 하니 이렇게 막았다. "저들이랑은 말이 안 통할 걸. 우리랑 얘기합시다!" 한국과 똑같은 모습이다.
순간 분통이 터져서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당신들이 이러니, 프랑스에서 유럽에서 진보의 기운이 쇠하는 게 아니냐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하자. 한국 사회는 결코 순응의 힘을 담아낼 수 없다. 폭발이 어떻게 표출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낙관하고 싶다. 오늘도 책이 아니라 20대와 씨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모두, 내 인생에 대해 좀 더 상상하고 좀 더 관심 갖되, 날 동정하진 마세요!" (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