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호킹이 돌아왔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외치며 그가 돌아왔다고 여기저기서 호들갑이다.

호킹의 내공이 세긴 센 모양이다. <위대한 설계>(전대호 옮김, 까치 펴냄)가 만만하게 읽히는 책이 아님에도 나오자마자 '아마존(amazon.com)'에서는 베스트셀러 1위가 되었고 국내에서도 출간되자마자 화제를 몰고 왔다. 이 책을 통해서 호킹이 '가장 많이 팔렸으면서도 가장 읽히지 않는 책'의 저자라는 오명까지 떨쳐버릴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신의 존재'를 결정적인 한방으로 날려버린 든든한 무신론자 동지를 얻었다고 의기양양한 것 같다. 한편, 또 다른 사람은 신에 대한 호킹의 경박하고 불경한 태도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투다. 혹자는 호킹이 우주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위대한 설계>는 그 많은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간의 역사>의 변주곡이고 후일담인 것 같다. 사실 그는 늘 그곳에 그렇게 있었다.


▲<위대한 설계>(스티븐 호킹·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전대호 옮김, 까치 펴냄). ⓒ까치
호킹은 <시간의 역사>에서 이미 "우주는 어디서 왔을까? 우주는 어떻게, 어떤 원인으로 시작되었을까?" 같은 근원적인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서 "오늘날까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우주가 '무엇'인가를 기술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 데 너무 골몰해서 '왜' 우주가 존재하는가를 물을 틈이 없었다"는 점을 고백했었다. 또 "한편, '왜(이유)'를 묻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철학자들)은 과학적 이론의 발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따라오지를 못했다"고 부연하면서 우주의 기원에 대한 규명 작업은 이미 철학자의 손을 떠났고 과학자의 몫이 되었음을 분명히 했었다.

호킹은 이런 맥락에서 우주의 기원과 진화와 미래가 '어떻게' 또 '왜' 그러한지에 대한 현대 과학적 해답을 제시하는 작업을 <시간의 역사>를 통해서 시도했다. 칼 세이건은 이 책의 서문에서 그를 대신해서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끝이 없고 시간적으로도 시작과 종말이 없는 우주, 그래서 조물주가 할 일이 없는 우주라는 결론이다"라고 적고 있다. 신의 존재에 대한 단호한 태도는 이때 이미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교황과 호킹 사이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81년 바티칸에서 현대 우주론에 관한 학회가 열렸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학자들 앞에서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항상 자연과학자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우주의 근원에 관한 궁극적 미해결점을 안고 있다. 우리 종교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질문이 요구하는 것은 물리학이나 천문학적 지식이 아니라 이를 초월한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진리라 믿는다."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것은 과학자들의 몫으로 내어 주겠지만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종교가들이 알아서 고민할 터이니 (아니면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 입을 다물라는 주문이었다. 호킹도 이 학회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교황을 알현하고 나오면서 이렇게 받아쳤다.

"나는 내가 방금 학회에서 했던 강연의 제목이 우주에는 시초나 창조의 시기가 없었을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음을 교황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고 기뻐했습니다."

이런 호킹이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와 함께 <위대한 설계>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더 정교하고 더 적극적이고 더 구체적이다. <시간의 역사>의 위대한 변주가 시작된 것이다.

"왜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을까? 왜 우리가 존재할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오래된 같은 질문이 시작된다. 호킹은 '철학자는 죽었다'면서 우주의 양자역학적 본성을 바탕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연주를 시작한다.

양자역학적 본성은 필연적으로 불확정성 원리를 수반한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하나가 정확하게 결정되면 다른 하나는 필연적으로 덜 정확하게 결정될 수밖에 없다. 공간이 비어 있다는 것은 장의 값과 그 변화율이 둘 다 정확히 0이 된다는 뜻인데,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빈 공간은 없다. 다만 양자역학적인 무(無)는 가상의 입자 쌍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양자요동을 치는 진공이라는 최소에너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양자요동에 의해서 양자역학적인 무(無)의 상태로부터 무수히 많은 미세한 우주들이 창조되고 소멸될 것이다. 이들 미세 우주들 중 일부는 임계점을 넘어서 각자 다른 자연 법칙을 갖는 어느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연 발생적으로 탄생한 수많은 '어느' 우주들 중 하나는 급팽창을 겪고 별과 은하를 만들어 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양자요동의 자식인 것이다.

파인만의 대안 역사 개념을 도입하면 우주는 하나의 역사만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역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호킹은 이로부터 이렇게 일갈한다.

"파인만 합에 기여하는 역사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이 측정되느냐에 의해서 존재한다. 역사가 우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을 통해서 역사를 창조한다."

호킹은 변주의 완성을 위해서 '끈 이론'에 바탕을 둔 일종의 네트워크 이론인 'M 이론'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시간의 역사>의 변주의 결론을 내린다.

"자발적 창조야말로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는 이유,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발적 창조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우주의 운행을 시작하기 위해서 신에 호소할 필요는 없다."

결국 호킹의 견해를 따르자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는 우주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된다. 마치 에셔의 '그림을 그리는 손'에서 서로를 그리는 두 손처럼.

<위대한 설계>를 통해서 호킹의 명확하고 개연성 있는 논리 전개 솜씨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왜'라는 논의를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오는데 거의 성공한 것 같다. 이 책은 과학이 현재 알려져 있는 과학적 인식 체계를 통해서 '왜'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지를 우아하고 명쾌하게 보여주는 책이었고,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미덕에 기인한다.

또 <위대한 설계>는 왜 이런 종류의 책을 여러 이론을 조망하듯이 아우를 수 있는 호킹이 써야만 하는가를 보여준 책이기도 하다. 그의 우아한 형식미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철학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호킹의 이런 시도가 얼마나 설득력 있고 공유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명쾌한 논리 전개에도 불구하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관건은 결국 그의 제안이 관측적으로 얼마나 증명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일종의 '통일 이론'의 강력한 후보로 내세운 M 이론에 대한 좀 더 명쾌한 관측적 결론이 필요할 것 같다.

무엇보다 <위대한 설계>는 호킹의 멋진 시도에도 불구하고 주제 면에서나 내용 전개 면에서나 여전히 전작인 <시간의 역사>의 담론을 답습하고 있고 좀 까칠하게 보면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아직은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좀 더 세밀하고 친절한 후일담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만큼 호킹이 집요하게 이 문제에 매달린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쉽지만 그의 전혀 새로운 책을 만나는 기쁨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설계>는 현재 시점에서 여전히 호킹의 청사진이고 <시간의 역사>의 변주곡이며 후일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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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가 2006년 미국 금융 체제와 자산 시장의 구조를 분석하여 서브프라임 시장 붕괴를 필두로 한 전면적인 금융 붕괴(meltdown)의 가능성을 경고했을 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구적 금융 체제의 일대 파란을 예고하는 루비니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선정성'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을 테지만, 경제학자들에게는 그의 논리와 주장이 너무나 이단적인 것으로 보였다. 요컨대, 당시 학계의 어느 저명한 경제학자가 말했듯이, "루비니의 주장에는 그를 뒷받침할 수리 모델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수리 모델에 기초하여 분석을 행하는 "경제학자"는 대학 교수만이 아니다. 수리 모델은 각국 중앙은행과 경제 관련 부처에서도 정책 입안과 결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으며, 금융 기관에서 장기적 시장 추세를 가늠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소위 '전략가들(strategists)' 또한 수리 모델에 기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루비니의 '선정적'인 주장은 상당 부분 적확하게 현실화되고 말았다.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 얼굴이 시커멓게 된 쪽은 그 수리 모델이라는 신탁(神託)의 권위를 업고 루비니를 박해하던 이들이었다. 이후 루비니는 일거에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의 블로그는 인터넷에서 가장 뜨거운 지점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가 내놓는 논평과 견해는 지구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수리 모델 대신 루비니가 가지고 있었던 무기는 무엇이었을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지구적 자산 시장의 상호 연관 그리고 이를 감싸는 금융 체제 전반의 돈의 흐름을 꼬장꼬장하게 기록하고 따지는 것이었다. 루비니의 업적에 대해 조금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그의 주장은 사실상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과 같은 기상천외의 독창성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성실한 관찰자의 꼼꼼한 현실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이 점을 보게 되면, 가뜩이나 얼굴이 시커멓게 된 이들에게 더욱 더 큰 모멸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아인슈타인에게 뉴턴을 넘는 최고의 천재라는 추앙을 바치게 되면 나머지 범상한 이론물리학자들은 심한 망신만은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큰 혁신을 이룬 이가 알고 보니 천재라기보다는 정직하고 꼼꼼한 모범생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면 나머지 경제학자들은 불성실한 학생이거나 전혀 비현실적인 수리 모델이라는 것을 내걸고 "혹세무민"을 일삼다가 경제를 파멸로 이끈 자들이거나 혹은 둘 다라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 <위기 경제학>(누리엘 루비니·스티븐 미흠 지음, 허익준 옮김, 청림출판 펴냄). ⓒ청림출판
 
이번에 국내에 소개된 <위기 경제학>(허익준 옮김, 청림출판 펴냄)에서 루비니는 '자신의 주장이 경기 예측에 능한 뛰어난 분석가의 주장이 아니라, 지난 몇 십 년간 맹목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현대 경제학의 사고를 벗어나기만 하면 누구의 눈에도 적나라하게 들어올 수밖에 없는 절박한 현실의 파악'이라고 주장한다.

즉, (금융) 시장과 (금융) 자본주의는 그 스스로의 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완벽한 체제라는 맹신을 버리고 대신 그것들이 위기의 메커니즘을 본질적으로 내포하는 체제라는 관점에 서기만 한다면, 그러한 맹신의 그늘 아래에서 자산 시장과 금융 체제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당연한 것인 양 정당화되면서 자행되어 왔고 그것이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사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가가 투명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루비니가 워낙 지구적 유명 인사가 되었는지라, 그가 발표하는 논평과 견해는 단편적인 명제나 어구로 파편화되어 유통되며,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내놓는 비관적 전망과 경고를 그저 말 만들어 이목끌기를 좋아하는 호사가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의 견해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이 책을 읽은 분들은 그의 주장이 '위기의 경제학(Crisis Economics)'이라는 대안적인 전통에 입각한 일관된 논리에서 도출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위기 경제학>은 대단히 평이하게 쓰였다. 어디에도 논리의 비약이나 난해한 원리나 법칙에 호소하는 법이 없다. 쏟아지는 각종 정책과 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끈기 있게 찾아가며 따라가는 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며 그의 주장 또한 선명하고 명쾌하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소개하는 대신, 그가 말하는 '위기의 경제학'의 계보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 속에서 그의 주장이 차지하는 위치를 일별해보고자 한다.

처음에는 국가 재정의 금고를 불리는 방법에 대한 연구에 불과했던 정치경제학은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간 사회 아니 우주를 관통하는 영구불변의 자연법적 질서를 찾아내는 학문으로 심화(혹은 변질)되었다.

중농주의자에서 아담 스미스를 거쳐 고전파 경제학에서 완성된 이러한 논리를 보면, 시장 경제는 스스로의 완벽한 균형과 안정성을 갖춘 독자적 질서이며 따라서 인간 사회를 여기에 맞추기만 하면 경제의 균형과 번영은 물론 사회 전체의 평화와 진보가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장의 완벽성이라는 "자연법"에 대한 신앙은 이후 오늘날까지 300년이 흐르도록 무너지기는커녕 갈수록 더 강화되어왔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내재한 법칙이 이러한 완벽한 조화가 아니라 위기라고 주장하는 '위기의 경제학'은 이미 19세기부터 존재했었다. 19세기의 "위기의 경제학자들"은 주로 시장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실물" 영역에서 찾고자 했다. 이 모순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최초의 "위기의 경제학자"라는 영예는 아마도 시스몽디(Simonde de Sismondi)에게 돌아갈 것이다.

시장주의자들이 신봉하던 "수요와 공급은 반드시 일치하게 되어 있다"는 이른바 '세이의 법칙(Say's Law)'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고, 자본주의의 소득 분배 구조상 유효 수요가 필연적으로 부족하게 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위기와 공황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그의 주장은 20세기 초 홉슨(J. A. Hobson)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도래할 필연성을 수요보다는 생산의 조직에서 찾고자 했다. 자본 축적이 계속되면서 기계류 및 자본 장비가 과도하게 투입되면 노동자로부터의 잉여 가치 수취의 비율이 줄어들면서 이윤율이 필연적으로 저하하고 투자와 축적이 둔화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오면서 이렇게 "실물" 부문에서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의 원인을 찾으려는 위기의 경제학은 퇴조를 맞게 된다. 첫째, 총수요 관리 정책을 앞세운 국가의 경제 개입은 물론 소비 욕망과 유효 수요를 스스로 창출해낼 만큼 대기업의 권력이 확장되면서 과소 소비의 문제는 상당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또 자본주의의 산업 구조는 물론 자본 구조에 있어서도 일방적으로 생산 장비만을 거대한 규모로 축적한다는 단선적인 논리가 사라지게 되면서 이윤율이 필연적으로 저하하게 되는지는 최소한 끝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대신 20세기 위기의 경제학은 "실물"이 아닌 "금융" 부문에서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찾기 시작한다. 20세기 들어 거대한 규모로 벌어진 자본 시장의 발전, 공고하고 잘 짜인 금융 체제의 성립 등이 나타나자 금융은 더 이상 예전에 생각하는 것처럼 "실물" 영역의 생산과 분배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위치를 훨씬 뛰어넘어서 오히려 생산과 분배와 소비 전체를 조직하는 핵심적 계기를 틀어쥐고 있는 영역이라는 인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케인스는 이 점을 가장 투철하게 인식했던 이들 중 하나이다. 그는 비슷한 통찰에 도달했지만 그래도 금융 부문의 균형은 결국 실물 부문의 균형에 종속되게 되어 있다는 동시대인들의 낙관론에 맞서서, 그렇게 핵심적 계기를 틀어쥔 금융의 영역이 투자자와 금리 생활자의 심리학처럼 생산의 합리성과는 전혀 동떨어진 원리들로 좌우되는 영역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 금융 부문의 작동은 생산과 분배의 합리적 작동을 저절로 보장하기는커녕, 그냥 두었다가는 필연적으로 후자를 무력화시키고 심지어 파괴하기까지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고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케인스가 죽은 후 특히 미국에서 '사생아 케인스 경제학'이 풍미하게 되면서, 그의 주장은 국가가 적절히 개입하기만 하면 오히려 시장 경제를 더 완벽한 작동을 보장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미묘하게 방향이 바뀌었고, 케인스의 '위기의 경제학'은 되레 자본주의라는 엔진을 운전하는 매뉴얼로 변질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케인스의 본래 논지에 충실하여 금융 부문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적 위기의 경향성을 찾아나가는 작업을 이은 이가 민스키 (Hyman Misky)이다.

민스키는 슘페터의 신용 화폐론과 은행 이론에 근거하면서도 현실에 존재하는 자본주의적 영리 기업과 은행의 행태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일종의 "제도주의적 전환"을 통하여, 자본주의의 금융 시장은 필연적으로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금융 위기가 생겨날 경우 부채 디플레이션의 형태로 만성적인 공황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자본주의 영리 기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과도한 부채에 의존하는 폰지(Ponzi) 상태가 될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에 불과한 은행은 이를 부추기면서 결국 경제 전체를 과도한 부채 상태로 몰고 가는 원동력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융 부문의 필연적 불안정성"이라는 20세기 후반의 '위기의 경제학'은 주류 경제학 이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류 이론에 의하면, 시장은 필연적으로 자기 균형에 도달하게 되어 있으며 모든 생산 요소의 소유자들은 각자가 생산에 기여한 바에 따라 소득을 분배받게 되어 있고, 자산 가격은 이 과정의 결과로서 결정되게 되어 있는 것이지 독자적으로 운동하거나 자기들끼리의 독자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이 벌어지지 않게끔 이자율만 안정적으로 유지해주면 금융은 (일시적인 "일탈"을 제외하면) 이러한 메커니즘이 더 빨리 효율적으로 벌어지게 해주는 윤활유가 될 뿐 그 이상의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몇 가지 규칙과 투명성 그리고 중앙은행의 건전한 이자율 유지만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금융에 최대한의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 시장의 자기 조정을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본다.


▲ 누리엘 루비니. ⓒ뉴시스

루비니는 이러한 '위기의 경제학'의 계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다. 그리고 그는 케인스나 민스키가 연구했던 방향으로 나아간다. 방금 말했듯이 하나의 종교적 신앙처럼 변한 금융 체제의 완전성이라는 교조 아래에서 지난 몇 십 년간 미국의 실제 금융 제도와 금융 기관들이 어떻게 변화했고 그 속에서 민스키 등이 지적한 과도한 레버리지와 자산 가격 거품의 악순환 고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찬찬히 성실하게 기술한다.

또 이러한 미국 금융 체제의 '타락'이 지구화의 물결을 타고 어떻게 전 지구의 많은 나라들의 금융 체제를 차례로 '오염'시켰는지도 함께 기술한다. 그리고 그 결과인 자산 가격의 '거품'과 그 붕괴의 필연성이 설명되며, 그것을 무원칙적으로 방만하게 탈규제된 금융 기관과 제도가 어떻게 부추겼는지 그리고 막상 사태가 나타났을 때 그 기관과 제도가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차분하게 적어 나간다.

여기에서 그가 연구의 방법으로 삼았던 각종 자산 시장의 상호 연관 그리고 이를 둘러싼 금융 제도 및 기관의 행태의 추적이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 설명력에 있어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될 경우, 어째서 이것이 루비니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그가 부활을 호소하고 있는 '위기의 경제학' 전통 전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인지, 그리고 또 이것이 현대의 주류 경제학의 무능과 독선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반증의 방식으로 입증하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처한 지구적 금융 위기 그리고 그 여파로서 "실물" 경제에도 막 닥쳐오고 있다고 그가 말하는 지구적 디플레이션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고 예방할 수 있을까? 이 해법의 문제에서 그는 통념적인 케인스주의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주장을 펼친다. 무엇보다도 '금융 시장의 완전성'에 대한 맹신을 버리고 대신 '위기의 경제학'의 입장에 서서 무책임한 지구적 부채 팽창과 자산 가격 거품을 가져온 현존하는 금융 제도와 기관들을 철저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과 청산의 고통을 지연시키기 위해 국가가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등의 행태는 도덕적 해이와 유해 자산으로 꽉 찬 '좀비 은행'만 만들어 낼 위험이 크다. 오히려 이러한 위기야말로 슘페터가 말하는 "창조적 파괴"가 벌어질 자연스럽고도 좋은 기회로 받아들여, 청산되어야 할 기관들이 과감하게 청산되도록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대신 다시 금융 체제가 이러한 혼탁을 만들어내는 일이 없도록 견실하고도 투명한 원칙에서 금융 체제를 재건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제안하는 방향이다.

나는 여기에서 지금까지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보였던 루비니의 모습이 흔들리고 있다고 느낀다. 정말로 그는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을까? 그가 비판한 지난 몇 십 년간의 금융 체제를 만들어낸 현실의 힘들은 어디로 간단 말인가? 과연 이 위기를 통하여 이 힘들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민스키의 경우 상당한 아이러니와 냉소를 섞어서 그런 식의 은행 청산이 벌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보지 않았는가?

대은행의 청산이 가져올 혼란을 두려워한 국가가 반드시 공적 자금을 투입하게 되어 있고 이 때문에 대은행은 '대마불사'의 신화를 믿고 더욱 의기양양하면서 디플레이션 공황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것은 민스키가 예견했을 뿐만 아니라 2009년 이래 이미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현실이 되지 않았는가?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그의 분석에 아주 중요한 열쇳말 하나가 빠져 있다는 점으로, 그것은 "권력"이다. 사실 이는 루비니 뿐만 아니라 그가 제시하고 있는 '위기의 경제학'의 전통에 편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금융 체제가 그와 같은 불안정하고 모순된 모습을 띠는 원인에 대해서, 자꾸 금융가들의 탐욕과 규제 및 정책 입안자의 무지 및 근시안만이 지적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이를 지적하는 견해로 사회 여론을 계몽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아마도 이 책이 출간된 것도 그러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금융 체제가 그러한 모습을 띠게 되는 필연성이 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자본주의의 "권력" 체제에 있는 것이라면? 과연 그러한 계몽의 노력이 이 앞에서도 효과를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이제부터의 상황 전개에 대한 설명력도 계속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앞에서 말한 케인스 이래의 '위기의 경제학'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또 다른 전통 하나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으로부터 시작되는 전통이다. 비록 <유한계급론>의 저자로만 자꾸 왜소화되어 왔지만, 그의 진정한 주저라고 할 <영리 기업의 이론(The Theory of Business Enterprise)>의 7장에는 기업들의 "금전적(pecuniary) 자본 축적"의 논리가 어떻게 해서 일방적인 자산 시장의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가 그리고 금융 체제의 유동성 공급이 어떻게 이것과 결합되며 그 결과 현실의 경기 변동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일관된 논리가 개진되어 있다.

베블런이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는 열쇳말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탐욕과 무지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독점하고 지배하려는 영리 기업 부문 전체의 "권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도 단순히 건전하고 투명한 금융 체제의 재건이나 부실 기관의 청산과 같은 차원을 넘어서 금융 부문이 사회 전체에 대해 누리는 부당한 권력의 구조 자체를 개혁할 것을 지향하고 있다.

물론 이 글은 베블런의 대안적 전통을 설명하는 글이 아니니 여기서 펜을 멈추어야 하겠다. 하지만 루비니의 주장과 견해가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합리적이고 건전한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것이 과연 이미 상당히 진행되어 버린 현재의 지구적 금융 위기 상황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라는 찜찜함은 내게 계속 남는다. 베블런의 저서 <영리 기업의 이론>은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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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은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법 위에 서서 노동자의 단결권을 막았다. 보험 고객의 돈을 함부로 유용했다. 특정 작업장에서 불치병에 걸리는 노동자가 늘어났지만 침묵했다. 최근 한반도 북쪽에서 시도한 경영의 '3대 세습'을 하고자 불법, 편법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모든 잘못의 중심에 이건희 회장 일가가 있다. 총수 일가와 그의 가신은 회사의 멱통을 움켜쥐고 공금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세습을 위해 사회 곳곳에 뿌린 돈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했고, 회사에 손실을 입혔으며, 그로 인해 주주의 수익률을 떨어뜨렸다. 삼성은 분명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지만,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산개해서 쏟아졌다. 하지만 울림은 작았다. 수십만 부 판매 부수의 주류 언론이 침묵한 탓이 컸다. 그러나 각개약진의 목소리는 총수 일가가 삼성그룹에 미친 손실을 추정하고, 정치·법조·행정 권력 등에 흩어진 돈을 추산했다. 또 삼성 노동자들의 피폐한 삶을 조명했으며, 심지어 삼성 불매 운동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 <굿바이 삼성 : 이건희, 그리고 죽은 정의의 사회와 작별하기>(김상봉 외 14인 지음, 꾸리에 펴냄). ⓒ꾸리에
그리고 이런 시도는 어느새 '삼성'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전반을 돌아보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굿바이 삼성>(꾸리에 펴냄)은 이 목소리를 하나로 묶은 책이다. 김상봉, 홍윤기, 조국, 김용철, 우석훈 등의 지식인의 <프레시안> 기고한 글들이 빼곡히 수록됐다. 이 책에 실린 글 한편, 한편이 우리 시대 가장 '강자'에 대한 불온한 생각들이다.

돌아보면 이들의 주장도 반향은 없었다. 삼성 불매 운동은 '운동'이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의 미풍으로 끝났다. 이를 둘러싼 토론도 불붙지 않았다. 삼성 내에서 이 회장 일가의 힘은 더욱 강해졌고, 권력 승계 작업도 다시금 가동될 것이다. 삼성전자도 탄탄한 실적을 내면서 한국의 무력 수지에 일조를 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의 반응도 여전하다. 그들은 이 회장 일가를 비판하는 이 책에 실린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적의를 품는다. 많은 20대는 지금도 삼성그룹에 들어가고자 뉴스에 귀를 닫고, 전공 서적을 뒤적인다. 정치권력, 사법 권력이 이 회장 일가의 잘못을 파헤치고자 들고 일어날 가능성도 없다.

그러기에 "이 책은 후대 사람에게 삼성으로 상징되는 욕망의 주술에 모두 다 걸려든 건 아니라는 증거물"이라는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의 설명마저 초라하게 느껴진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삼성으로 대표되는 자본 권력은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이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 더욱더 고착화될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이 공포의 근원은 삼성이 무너져 자신이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삼성이 무너지면 나라가 망한다'는 믿음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삼성이 무너져도 변하는 건 없다는 사실, 이것이이야말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진실 아닐까?

삼성의 오늘을 비판하는 많은 사람은 "삼성이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회장 일가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 이렇게 삼성 비판에 나섰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 삼성이 미치는 순기능은 결코 적지 않은 현실에서, 많은 국민이 좋든 싫은 삼성 제품의 소비자인 현실에서 이들의 말은 논리적으로 맞다.

그러나 삼성의 비판자들이 이 말을 할 때마다, 이 말은 변명처럼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이런 설명에는 삼성을 상대로는 개인의 "좋다" "싫다" 이런 감정조차 마음대로 드러낼 수 없는 현재의 무기력한 상황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굿바이 삼성"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제목과 달리 우리 시대 초라한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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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대한 상식, 없어도 불편할 건 없잖아? <뚱딴지가 아니다>(차병직 지음, 우리교육 펴냄, 이하 <뚱딴지>)의 책장을 덮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 책은 법을 모르면 불편해질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 단지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법과 관련된 일화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책은 말한다. '민법', '표준시에 관한 법률', '연호에 관한 법률', '먹는 물 관리법', '수도법', 도시 가스 사업법', '액화 가스의 안전 관리 및 사업법', '품질 경영 및 공산품 안전 관리법', '관세법 제51조의 규정에 의한 싱가포르·중국 및 일본산 알칼리 망간 건전지에 대한 덤핑 방지 관세 부과에 관한 규칙'… 이름도 긴 이 무수한 법들이 모두 우리 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우리의 생활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소위 말하는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은 없는 거라고.

<뚱딴지>는 열네 살 기현이와 변호사인 이모 사이의 물음과 대답을 통해 이런 얘기들을 풀어나가고 있다. 기현이는 사람들이 왜 질서를 원하는지, 정의를 꿈꾸는지 그리고 자유롭기 위해 다른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시쳇말로 '쌩뚱맞게' 궁금하다. 그러나 이모는 그것이 쌩뚱맞지 않다며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그러니 제목도 "뚱딴지가 아니다"다.


▲ <뚱딴지가 아니다>(차병직 지음, 우리교육 펴냄). ⓒ우리교육
중학교에 근무하는 필자 역시 기현이 또래의 제자들로부터 가끔 '뚱딴지' 같은 질문을 받았는데,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이 책은 일단 그 질문들부터 '뚱딴지가 아니'라면서, 명확한 논리의 답변을 제공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이 '사람들이 질서를 원하는 이유는?'(2장)과 같은 질문을 풀어나가는 방식을 보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습관적으로 '질서를 잘 지켜야한다'고 말한다. 어른들이야 그게 '좋은 것'이라 단정 짓지만 학생들에겐 의문투성이다. 왜 질서가 좋은 걸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걸까? 질서 지키기를 말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안 지키는 사람들을 보며 의문이 커졌을 수도 있겠다.

그런 학생들에게 질서를 이해시키는 방법으로 <뚱딴지>는 아주 쉽고 가까운 예를 든다. 가령 사진이다. 우리는 사물이 패턴을 갖고 조화롭게 어우러진 사진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건 사물들이 질서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사진을 통해 질서와 아름다움을 설명하면서 책은 이렇게 나아간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들이 자연의 질서처럼 일정한 순서가 있다. 세상 만물들이 질서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하여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예측할 수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그 세상과 친숙해지고 세상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 불규칙하고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런 일이 지나치게 자주 일어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고 책은 얘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질서를 위해 자유를 제한하기도 하며, 다만 제한할 때는 언제나 공평하게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쉽고 논리적이며 명료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정의'의 문제로 옮겨간다. 공평한 게 뭘까? 정의로운 건 뭐지? '이름은 완전하고 형체는 불분명한 것?'(3장)에서 이 문제가 다뤄진다.

매일 학교에 나간 학생이 개근상을 받아야 하고 노력한 사람이 시험에 합격하는 등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일'들이 그렇게 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실망한다. 그런 일이 반복되고 고쳐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사람들의 실망은 절망으로, 포기로 이어진다. 정의가 세워져야만 하는 이유다.

맹자는 "나는 생명을 원하고, 또 정의를 바란다. 둘 중에서 꼭 하나만 택하라고 한다면, 생명을 버리고 정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고, 칸트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야 한다"고 했다. 책은 이렇게나 중요한 정의를 세우기 법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정의롭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와 같은 질문도 함께 던진다.

책은 4장 '자유롭기 위해 자유를 제한한다고?'에서 자유의 문제를 거론한다. 자유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남에게 얽매이거나 구속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하나는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자유란 자신 마음대로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는 없으므로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만 허용되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법제도는 사람들의 자유를 조금씩 제한하면서 사회 전체의 '안정된 자유'를 추구한다.

물론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은 정의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이 강한 순서대로 많은 양의 자유를 누리게 되니까 말이다. 힘의 논리만이 적용되는 곳에서의 자유는 불안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누군가 더 센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힘의 순서는 뒤바뀌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누구나 더 많은 자유를 원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밖에도 '함께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5장) '발견한 걸까, 만든 걸까?'(6장) '약속한 만큼 보호받는다?'(7장) 등의 챕터를 통해, <뚱딴지>는 살면서 눈에 보이지 않아 상관없다고 여겼던 법 문제들에 대해 알기 쉽게 말해주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법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법이 왜 중요한지와 그 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니 조금 허망하다. 우리 사회가 열네 살짜리 기현이보다 법에 대한 관심이 없어 보여서다.

올해 후반기 국정 핵심 목표는 '공정 사회'란다. 그런데 곧바로 총리 후보의 위장 전입 사실이 드러났고 고위 공무원들의 자녀 특채 비리가 줄줄이 캐어 올려졌다. 공정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요소인 법조차 무시하는 행태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바르지 못했나를 생각해 본다.

진짜 공정 사회를 누려야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법에 대해 근원적인 생각을 스스로 해보길 권유하고 싶다. <뚱딴지>는 그 길라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에게 구체적으로 와 닿을 현실 사례에 대한 아쉬움은, 저자의 다음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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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의 과학 상식으로는 출산의 과정을, 정자 속에 아주 작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수태되어 어머니의 뱃속에서 그대로 크기만 자라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홍경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를 우연히라도 몇 장 들춰본 독자일 가능성이 크다. 소설의 서두가 바로 이 극미인(極微人) 상태의 주인공, 트리스트럼 샌디의 진술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이 소설은 한참동안이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주인공이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다소 모순적인 상황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등단 이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펴낸 윤성희의 장편 소설 <구경꾼들>(문학동네 펴냄) 역시 '아직 없는 주인공'의 서술로 시작한다. '나'의 부모님이 될 예정인 남녀는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고, 지금 모텔에 앉아 있으며, '아버지'는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와 식구들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에둘러 청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청혼에 망설이던 '어머니'를 부추김으로써("좋다고 말해요, 어서", 12쪽) '나'는 주인공이 될 물리적 전제 조건에 스스로 개입하는 모순적인 서술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자연스럽게 <트리스트럼 샌디>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존의 소설 읽기와는 다른 마음가짐을 환기시킨다.


▲ <구경꾼들>(윤성희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우리는 이야기, 좁혀 말한다면 소설이라는 것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세계를 해석하려는 작가와 그것을 온몸으로 체현하는 주인공의 욕망이 발현된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나 그것을 닮은 소설 역시 세계에 대한 의문과 갈등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구성되어 왔다. 물론 소설은 그 해답을 여전히 구하지 못한 채 험난한 과정들을 거치고 있는 중이지만, 그럴 때조차 우리들은 소설 속 주인공의 행보에 눈을 떼지 못한다. 즉,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을 구심으로 하는 이야기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구경꾼들>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트리스트럼 샌디>가 그랬던 것처럼 주인공의 자리를 비워둠으로써 원심력을 갖게 되고, 필연적으로 모든 것들에 주인공의 자리를 열어두게 된다. 이것을 '구경꾼의 서사'라고 부르자. 이 소설이 독자들을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분노하게 만들다가 결국은 아름답다고 느끼게끔 만드는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름다움이란 절대적 미를 표출하는 사건 그 자체에서도 오지만, 그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그 사건을 둘러싼 상황들의 결합에서 오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기적은 항상 그 일상들의 연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존재하는 법이다.

이를테면 <구경꾼들>은 이런 식이다.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아파트 상가의 공중 화장실에서 성추행을 당할 뻔한 어린 여자아이를 구했으나 결국 그 과정에서 의식불명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실 이 사건은 수많은 상황들의 우연적 결합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대충만 정리하자면 먼저, 할아버지는 아파트 경비 일자리를 부탁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갑자기 그 화장실을 이용하게 되었다. 피아노 학원을 다녀오던 여자 아이는 상가를 지나치지 않아도 되지만 상가 복도에 그려진 낙서를 보려고 일부러 간 길이었다. 그 낙서는 1년 반 전에 이층의 태권도장을 다니던 취업 준비생 청년이 담뱃불로 그린 것이다.

조금만 더 이 장면을 살펴보면 결국 중환자실에 입원한 주인공의 할아버지 이야기는 옆 침대에서 역시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청년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병문안을 온 그 친구들이 할아버지 사고의 전말을 알게 되고 자신들의 블로그를 통해 널리 알리게 되면서 병원의 환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쾌유를 빌게 되고…….

실상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건들은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이 중층적으로 결합되어 발생하지만,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온전히 표현해내는 것은 윤성희의 소설만이 갖는 특징이자 매력이다. 때로 그녀의 소설이 다소 비현실적이거나 엉뚱한 사건을 유발시킬 때조차 우리가 현실의 범위 안에서 그것들을 수긍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 역시 이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앞서 말한 대로 윤성희의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들은 우리의 현실 속에 작은 기적을 예비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할아버지나, 아니면 의식을 잃은 청년이 깨어나는 기적을 만나게 될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이 기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예상대로 이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을 따르는 서사는 우연들을 숨기거나 때로 과장하지만, 윤성희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구경꾼의 서사는 수많은 사건들이 겹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그저 어떤 작은 우연들도 놓치지 않는 이야기 방식일 뿐 별다른 기적을 준비하지 않는다. (물론 작가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로 기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장편 소설들이 출간 이전에 인터넷에 연재되면서 그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분명히 일정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지면이 필요할 것이고, 여기서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만을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따라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것도 수없이 많이. 끊임없이 부딪치는 삶의 사건들로 이어지는 그 어딘가 쯤에서. (독자들에게 이 기적을 꼭 확인해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이제 소설의 주인공-으로 잠시 부를 수 있는 '나'는 "'문득'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문득'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만들어내기 시작"(145~146쪽)하면서 이 새로운 형태의 기적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된다. 복수(複數)의 존재,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 수많은 이야기들의 목격자, "구경꾼들"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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