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가 2006년 미국 금융 체제와 자산 시장의 구조를 분석하여 서브프라임 시장 붕괴를 필두로 한 전면적인 금융 붕괴(meltdown)의 가능성을 경고했을 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구적 금융 체제의 일대 파란을 예고하는 루비니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선정성'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을 테지만, 경제학자들에게는 그의 논리와 주장이 너무나 이단적인 것으로 보였다. 요컨대, 당시 학계의 어느 저명한 경제학자가 말했듯이, "루비니의 주장에는 그를 뒷받침할 수리 모델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수리 모델에 기초하여 분석을 행하는 "경제학자"는 대학 교수만이 아니다. 수리 모델은 각국 중앙은행과 경제 관련 부처에서도 정책 입안과 결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으며, 금융 기관에서 장기적 시장 추세를 가늠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소위 '전략가들(strategists)' 또한 수리 모델에 기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루비니의 '선정적'인 주장은 상당 부분 적확하게 현실화되고 말았다.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 얼굴이 시커멓게 된 쪽은 그 수리 모델이라는 신탁(神託)의 권위를 업고 루비니를 박해하던 이들이었다. 이후 루비니는 일거에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의 블로그는 인터넷에서 가장 뜨거운 지점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가 내놓는 논평과 견해는 지구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수리 모델 대신 루비니가 가지고 있었던 무기는 무엇이었을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지구적 자산 시장의 상호 연관 그리고 이를 감싸는 금융 체제 전반의 돈의 흐름을 꼬장꼬장하게 기록하고 따지는 것이었다. 루비니의 업적에 대해 조금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그의 주장은 사실상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과 같은 기상천외의 독창성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성실한 관찰자의 꼼꼼한 현실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이 점을 보게 되면, 가뜩이나 얼굴이 시커멓게 된 이들에게 더욱 더 큰 모멸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아인슈타인에게 뉴턴을 넘는 최고의 천재라는 추앙을 바치게 되면 나머지 범상한 이론물리학자들은 심한 망신만은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큰 혁신을 이룬 이가 알고 보니 천재라기보다는 정직하고 꼼꼼한 모범생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면 나머지 경제학자들은 불성실한 학생이거나 전혀 비현실적인 수리 모델이라는 것을 내걸고 "혹세무민"을 일삼다가 경제를 파멸로 이끈 자들이거나 혹은 둘 다라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 <위기 경제학>(누리엘 루비니·스티븐 미흠 지음, 허익준 옮김, 청림출판 펴냄). ⓒ청림출판
 
이번에 국내에 소개된 <위기 경제학>(허익준 옮김, 청림출판 펴냄)에서 루비니는 '자신의 주장이 경기 예측에 능한 뛰어난 분석가의 주장이 아니라, 지난 몇 십 년간 맹목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현대 경제학의 사고를 벗어나기만 하면 누구의 눈에도 적나라하게 들어올 수밖에 없는 절박한 현실의 파악'이라고 주장한다.

즉, (금융) 시장과 (금융) 자본주의는 그 스스로의 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완벽한 체제라는 맹신을 버리고 대신 그것들이 위기의 메커니즘을 본질적으로 내포하는 체제라는 관점에 서기만 한다면, 그러한 맹신의 그늘 아래에서 자산 시장과 금융 체제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당연한 것인 양 정당화되면서 자행되어 왔고 그것이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사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가가 투명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루비니가 워낙 지구적 유명 인사가 되었는지라, 그가 발표하는 논평과 견해는 단편적인 명제나 어구로 파편화되어 유통되며,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내놓는 비관적 전망과 경고를 그저 말 만들어 이목끌기를 좋아하는 호사가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의 견해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이 책을 읽은 분들은 그의 주장이 '위기의 경제학(Crisis Economics)'이라는 대안적인 전통에 입각한 일관된 논리에서 도출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위기 경제학>은 대단히 평이하게 쓰였다. 어디에도 논리의 비약이나 난해한 원리나 법칙에 호소하는 법이 없다. 쏟아지는 각종 정책과 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끈기 있게 찾아가며 따라가는 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며 그의 주장 또한 선명하고 명쾌하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소개하는 대신, 그가 말하는 '위기의 경제학'의 계보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 속에서 그의 주장이 차지하는 위치를 일별해보고자 한다.

처음에는 국가 재정의 금고를 불리는 방법에 대한 연구에 불과했던 정치경제학은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간 사회 아니 우주를 관통하는 영구불변의 자연법적 질서를 찾아내는 학문으로 심화(혹은 변질)되었다.

중농주의자에서 아담 스미스를 거쳐 고전파 경제학에서 완성된 이러한 논리를 보면, 시장 경제는 스스로의 완벽한 균형과 안정성을 갖춘 독자적 질서이며 따라서 인간 사회를 여기에 맞추기만 하면 경제의 균형과 번영은 물론 사회 전체의 평화와 진보가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장의 완벽성이라는 "자연법"에 대한 신앙은 이후 오늘날까지 300년이 흐르도록 무너지기는커녕 갈수록 더 강화되어왔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내재한 법칙이 이러한 완벽한 조화가 아니라 위기라고 주장하는 '위기의 경제학'은 이미 19세기부터 존재했었다. 19세기의 "위기의 경제학자들"은 주로 시장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실물" 영역에서 찾고자 했다. 이 모순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최초의 "위기의 경제학자"라는 영예는 아마도 시스몽디(Simonde de Sismondi)에게 돌아갈 것이다.

시장주의자들이 신봉하던 "수요와 공급은 반드시 일치하게 되어 있다"는 이른바 '세이의 법칙(Say's Law)'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고, 자본주의의 소득 분배 구조상 유효 수요가 필연적으로 부족하게 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위기와 공황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그의 주장은 20세기 초 홉슨(J. A. Hobson)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도래할 필연성을 수요보다는 생산의 조직에서 찾고자 했다. 자본 축적이 계속되면서 기계류 및 자본 장비가 과도하게 투입되면 노동자로부터의 잉여 가치 수취의 비율이 줄어들면서 이윤율이 필연적으로 저하하고 투자와 축적이 둔화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오면서 이렇게 "실물" 부문에서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의 원인을 찾으려는 위기의 경제학은 퇴조를 맞게 된다. 첫째, 총수요 관리 정책을 앞세운 국가의 경제 개입은 물론 소비 욕망과 유효 수요를 스스로 창출해낼 만큼 대기업의 권력이 확장되면서 과소 소비의 문제는 상당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또 자본주의의 산업 구조는 물론 자본 구조에 있어서도 일방적으로 생산 장비만을 거대한 규모로 축적한다는 단선적인 논리가 사라지게 되면서 이윤율이 필연적으로 저하하게 되는지는 최소한 끝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대신 20세기 위기의 경제학은 "실물"이 아닌 "금융" 부문에서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찾기 시작한다. 20세기 들어 거대한 규모로 벌어진 자본 시장의 발전, 공고하고 잘 짜인 금융 체제의 성립 등이 나타나자 금융은 더 이상 예전에 생각하는 것처럼 "실물" 영역의 생산과 분배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위치를 훨씬 뛰어넘어서 오히려 생산과 분배와 소비 전체를 조직하는 핵심적 계기를 틀어쥐고 있는 영역이라는 인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케인스는 이 점을 가장 투철하게 인식했던 이들 중 하나이다. 그는 비슷한 통찰에 도달했지만 그래도 금융 부문의 균형은 결국 실물 부문의 균형에 종속되게 되어 있다는 동시대인들의 낙관론에 맞서서, 그렇게 핵심적 계기를 틀어쥔 금융의 영역이 투자자와 금리 생활자의 심리학처럼 생산의 합리성과는 전혀 동떨어진 원리들로 좌우되는 영역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 금융 부문의 작동은 생산과 분배의 합리적 작동을 저절로 보장하기는커녕, 그냥 두었다가는 필연적으로 후자를 무력화시키고 심지어 파괴하기까지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고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케인스가 죽은 후 특히 미국에서 '사생아 케인스 경제학'이 풍미하게 되면서, 그의 주장은 국가가 적절히 개입하기만 하면 오히려 시장 경제를 더 완벽한 작동을 보장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미묘하게 방향이 바뀌었고, 케인스의 '위기의 경제학'은 되레 자본주의라는 엔진을 운전하는 매뉴얼로 변질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케인스의 본래 논지에 충실하여 금융 부문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적 위기의 경향성을 찾아나가는 작업을 이은 이가 민스키 (Hyman Misky)이다.

민스키는 슘페터의 신용 화폐론과 은행 이론에 근거하면서도 현실에 존재하는 자본주의적 영리 기업과 은행의 행태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일종의 "제도주의적 전환"을 통하여, 자본주의의 금융 시장은 필연적으로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금융 위기가 생겨날 경우 부채 디플레이션의 형태로 만성적인 공황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자본주의 영리 기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과도한 부채에 의존하는 폰지(Ponzi) 상태가 될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에 불과한 은행은 이를 부추기면서 결국 경제 전체를 과도한 부채 상태로 몰고 가는 원동력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융 부문의 필연적 불안정성"이라는 20세기 후반의 '위기의 경제학'은 주류 경제학 이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류 이론에 의하면, 시장은 필연적으로 자기 균형에 도달하게 되어 있으며 모든 생산 요소의 소유자들은 각자가 생산에 기여한 바에 따라 소득을 분배받게 되어 있고, 자산 가격은 이 과정의 결과로서 결정되게 되어 있는 것이지 독자적으로 운동하거나 자기들끼리의 독자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이 벌어지지 않게끔 이자율만 안정적으로 유지해주면 금융은 (일시적인 "일탈"을 제외하면) 이러한 메커니즘이 더 빨리 효율적으로 벌어지게 해주는 윤활유가 될 뿐 그 이상의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몇 가지 규칙과 투명성 그리고 중앙은행의 건전한 이자율 유지만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금융에 최대한의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 시장의 자기 조정을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본다.


▲ 누리엘 루비니. ⓒ뉴시스

루비니는 이러한 '위기의 경제학'의 계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다. 그리고 그는 케인스나 민스키가 연구했던 방향으로 나아간다. 방금 말했듯이 하나의 종교적 신앙처럼 변한 금융 체제의 완전성이라는 교조 아래에서 지난 몇 십 년간 미국의 실제 금융 제도와 금융 기관들이 어떻게 변화했고 그 속에서 민스키 등이 지적한 과도한 레버리지와 자산 가격 거품의 악순환 고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찬찬히 성실하게 기술한다.

또 이러한 미국 금융 체제의 '타락'이 지구화의 물결을 타고 어떻게 전 지구의 많은 나라들의 금융 체제를 차례로 '오염'시켰는지도 함께 기술한다. 그리고 그 결과인 자산 가격의 '거품'과 그 붕괴의 필연성이 설명되며, 그것을 무원칙적으로 방만하게 탈규제된 금융 기관과 제도가 어떻게 부추겼는지 그리고 막상 사태가 나타났을 때 그 기관과 제도가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차분하게 적어 나간다.

여기에서 그가 연구의 방법으로 삼았던 각종 자산 시장의 상호 연관 그리고 이를 둘러싼 금융 제도 및 기관의 행태의 추적이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 설명력에 있어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될 경우, 어째서 이것이 루비니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그가 부활을 호소하고 있는 '위기의 경제학' 전통 전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인지, 그리고 또 이것이 현대의 주류 경제학의 무능과 독선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반증의 방식으로 입증하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처한 지구적 금융 위기 그리고 그 여파로서 "실물" 경제에도 막 닥쳐오고 있다고 그가 말하는 지구적 디플레이션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고 예방할 수 있을까? 이 해법의 문제에서 그는 통념적인 케인스주의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주장을 펼친다. 무엇보다도 '금융 시장의 완전성'에 대한 맹신을 버리고 대신 '위기의 경제학'의 입장에 서서 무책임한 지구적 부채 팽창과 자산 가격 거품을 가져온 현존하는 금융 제도와 기관들을 철저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과 청산의 고통을 지연시키기 위해 국가가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등의 행태는 도덕적 해이와 유해 자산으로 꽉 찬 '좀비 은행'만 만들어 낼 위험이 크다. 오히려 이러한 위기야말로 슘페터가 말하는 "창조적 파괴"가 벌어질 자연스럽고도 좋은 기회로 받아들여, 청산되어야 할 기관들이 과감하게 청산되도록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대신 다시 금융 체제가 이러한 혼탁을 만들어내는 일이 없도록 견실하고도 투명한 원칙에서 금융 체제를 재건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제안하는 방향이다.

나는 여기에서 지금까지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보였던 루비니의 모습이 흔들리고 있다고 느낀다. 정말로 그는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을까? 그가 비판한 지난 몇 십 년간의 금융 체제를 만들어낸 현실의 힘들은 어디로 간단 말인가? 과연 이 위기를 통하여 이 힘들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민스키의 경우 상당한 아이러니와 냉소를 섞어서 그런 식의 은행 청산이 벌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보지 않았는가?

대은행의 청산이 가져올 혼란을 두려워한 국가가 반드시 공적 자금을 투입하게 되어 있고 이 때문에 대은행은 '대마불사'의 신화를 믿고 더욱 의기양양하면서 디플레이션 공황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것은 민스키가 예견했을 뿐만 아니라 2009년 이래 이미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현실이 되지 않았는가?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그의 분석에 아주 중요한 열쇳말 하나가 빠져 있다는 점으로, 그것은 "권력"이다. 사실 이는 루비니 뿐만 아니라 그가 제시하고 있는 '위기의 경제학'의 전통에 편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금융 체제가 그와 같은 불안정하고 모순된 모습을 띠는 원인에 대해서, 자꾸 금융가들의 탐욕과 규제 및 정책 입안자의 무지 및 근시안만이 지적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이를 지적하는 견해로 사회 여론을 계몽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아마도 이 책이 출간된 것도 그러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금융 체제가 그러한 모습을 띠게 되는 필연성이 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자본주의의 "권력" 체제에 있는 것이라면? 과연 그러한 계몽의 노력이 이 앞에서도 효과를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이제부터의 상황 전개에 대한 설명력도 계속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앞에서 말한 케인스 이래의 '위기의 경제학'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또 다른 전통 하나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으로부터 시작되는 전통이다. 비록 <유한계급론>의 저자로만 자꾸 왜소화되어 왔지만, 그의 진정한 주저라고 할 <영리 기업의 이론(The Theory of Business Enterprise)>의 7장에는 기업들의 "금전적(pecuniary) 자본 축적"의 논리가 어떻게 해서 일방적인 자산 시장의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가 그리고 금융 체제의 유동성 공급이 어떻게 이것과 결합되며 그 결과 현실의 경기 변동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일관된 논리가 개진되어 있다.

베블런이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는 열쇳말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탐욕과 무지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독점하고 지배하려는 영리 기업 부문 전체의 "권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도 단순히 건전하고 투명한 금융 체제의 재건이나 부실 기관의 청산과 같은 차원을 넘어서 금융 부문이 사회 전체에 대해 누리는 부당한 권력의 구조 자체를 개혁할 것을 지향하고 있다.

물론 이 글은 베블런의 대안적 전통을 설명하는 글이 아니니 여기서 펜을 멈추어야 하겠다. 하지만 루비니의 주장과 견해가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합리적이고 건전한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것이 과연 이미 상당히 진행되어 버린 현재의 지구적 금융 위기 상황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라는 찜찜함은 내게 계속 남는다. 베블런의 저서 <영리 기업의 이론>은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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