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의 과학 상식으로는 출산의 과정을, 정자 속에 아주 작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수태되어 어머니의 뱃속에서 그대로 크기만 자라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홍경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를 우연히라도 몇 장 들춰본 독자일 가능성이 크다. 소설의 서두가 바로 이 극미인(極微人) 상태의 주인공, 트리스트럼 샌디의 진술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이 소설은 한참동안이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주인공이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다소 모순적인 상황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등단 이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펴낸 윤성희의 장편 소설 <구경꾼들>(문학동네 펴냄) 역시 '아직 없는 주인공'의 서술로 시작한다. '나'의 부모님이 될 예정인 남녀는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고, 지금 모텔에 앉아 있으며, '아버지'는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와 식구들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에둘러 청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청혼에 망설이던 '어머니'를 부추김으로써("좋다고 말해요, 어서", 12쪽) '나'는 주인공이 될 물리적 전제 조건에 스스로 개입하는 모순적인 서술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자연스럽게 <트리스트럼 샌디>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존의 소설 읽기와는 다른 마음가짐을 환기시킨다.


▲ <구경꾼들>(윤성희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우리는 이야기, 좁혀 말한다면 소설이라는 것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세계를 해석하려는 작가와 그것을 온몸으로 체현하는 주인공의 욕망이 발현된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나 그것을 닮은 소설 역시 세계에 대한 의문과 갈등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구성되어 왔다. 물론 소설은 그 해답을 여전히 구하지 못한 채 험난한 과정들을 거치고 있는 중이지만, 그럴 때조차 우리들은 소설 속 주인공의 행보에 눈을 떼지 못한다. 즉,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을 구심으로 하는 이야기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구경꾼들>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트리스트럼 샌디>가 그랬던 것처럼 주인공의 자리를 비워둠으로써 원심력을 갖게 되고, 필연적으로 모든 것들에 주인공의 자리를 열어두게 된다. 이것을 '구경꾼의 서사'라고 부르자. 이 소설이 독자들을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분노하게 만들다가 결국은 아름답다고 느끼게끔 만드는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름다움이란 절대적 미를 표출하는 사건 그 자체에서도 오지만, 그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그 사건을 둘러싼 상황들의 결합에서 오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기적은 항상 그 일상들의 연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존재하는 법이다.

이를테면 <구경꾼들>은 이런 식이다.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아파트 상가의 공중 화장실에서 성추행을 당할 뻔한 어린 여자아이를 구했으나 결국 그 과정에서 의식불명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실 이 사건은 수많은 상황들의 우연적 결합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대충만 정리하자면 먼저, 할아버지는 아파트 경비 일자리를 부탁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갑자기 그 화장실을 이용하게 되었다. 피아노 학원을 다녀오던 여자 아이는 상가를 지나치지 않아도 되지만 상가 복도에 그려진 낙서를 보려고 일부러 간 길이었다. 그 낙서는 1년 반 전에 이층의 태권도장을 다니던 취업 준비생 청년이 담뱃불로 그린 것이다.

조금만 더 이 장면을 살펴보면 결국 중환자실에 입원한 주인공의 할아버지 이야기는 옆 침대에서 역시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청년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병문안을 온 그 친구들이 할아버지 사고의 전말을 알게 되고 자신들의 블로그를 통해 널리 알리게 되면서 병원의 환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쾌유를 빌게 되고…….

실상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건들은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이 중층적으로 결합되어 발생하지만,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온전히 표현해내는 것은 윤성희의 소설만이 갖는 특징이자 매력이다. 때로 그녀의 소설이 다소 비현실적이거나 엉뚱한 사건을 유발시킬 때조차 우리가 현실의 범위 안에서 그것들을 수긍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 역시 이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앞서 말한 대로 윤성희의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들은 우리의 현실 속에 작은 기적을 예비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할아버지나, 아니면 의식을 잃은 청년이 깨어나는 기적을 만나게 될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이 기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예상대로 이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을 따르는 서사는 우연들을 숨기거나 때로 과장하지만, 윤성희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구경꾼의 서사는 수많은 사건들이 겹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그저 어떤 작은 우연들도 놓치지 않는 이야기 방식일 뿐 별다른 기적을 준비하지 않는다. (물론 작가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로 기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장편 소설들이 출간 이전에 인터넷에 연재되면서 그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분명히 일정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지면이 필요할 것이고, 여기서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만을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따라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것도 수없이 많이. 끊임없이 부딪치는 삶의 사건들로 이어지는 그 어딘가 쯤에서. (독자들에게 이 기적을 꼭 확인해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이제 소설의 주인공-으로 잠시 부를 수 있는 '나'는 "'문득'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문득'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만들어내기 시작"(145~146쪽)하면서 이 새로운 형태의 기적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된다. 복수(複數)의 존재,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 수많은 이야기들의 목격자, "구경꾼들"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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