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알다시피, 역사는 집단적 자의식의 산물이며, 자기 자신에게서 배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 번역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이 한 손에 다 꼽힌다는 것, 그나마 책을 낸 저자로 보자면 1970~80년대 선구적 업적을 남긴 김병철(<한국 근대 번역 문학사 연구>, <한국 근대 서양 문학 이입사 연구>, <한국 근대 서양 문학 번역 논저 연표>)과 지금 이야기하는 김욱동(<번역과 한국의 근대>, <근대의 세 번역가>) 단 두 사람 외에 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나라에서 번역과 관련된 집단은 자의식도 없고, 자신의 경험에서 배울 생각도 없다는 뜻일까? 두 연구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만큼, 그들의 저변의 황량함 또한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상을 개탄하는 소리야 지금 말고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고, 이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왜 이런 개탄할 만한 현상이 나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이런 현상을 바꿀 방법의 제시일 것이다.


▲ <번역과 한국의 근대>(김욱동 지음, 소명출판 펴냄). ⓒ소명출판
바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가장 먼저 펼쳐보아야 할 책이 김욱동의 <번역과 한국의 근대>(소명출판 펴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방금 제기한 문제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번역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형성되던 시기에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던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또 100년 전에 벌어진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약간의 변주를 거쳐 재연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간접 조명으로 지금 우리의 자리를 비추어준다.

자의식이 형성되려면 자신이 주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하고, 여기에는 주체적 행동이나 사고가 전제된다. 따라서 번역 관련자들의 자의식이 형성되려면 먼저 번역이 주체적 행동이라는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 번역의 역사에 관한 연구가 이렇게 빈곤하다는 것은 번역이 주체의 행위라는 자각이 빈약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혹시 번역 자체가 근본적으로 주체적 행위일 수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번역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번역자 독단으로 하기 힘든 행위라는 것이 너무 빤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주체적인 번역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 번역의 외적인 측면, 예를 들어 번역할 텍스트의 선정에서는 주체적인 면을 드러낸다 해도, 과연 번역 작업 내부에서 주체적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자못 복잡해 보이는 이 문제는 설사 머릿속에서 어떤 답을 만들어낸다 해도, 실제 현장에서 이루어진 경험과 결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실증적 연구에 바탕을 둔 <번역과 한국의 근대>는 단지 근대 초기의 번역 작업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성취를 넘어서서, 우리의 현재의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면들을 보여준다.

실제로 <번역과 한국의 근대>의 접근 방법 자체, 즉 "왜" "누가" "무엇"을 "어떻게" 번역했느냐고 묻는 방식 자체가 주체의 문제를 탐사하는 한 방식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런 방법론은 저자의 말대로 김병철의 기존의 업적을 체계적인 방식으로 재정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도 굳이 주체의 행위를 캐묻는 "육하원칙"의 방법을 택한 것은 저자가 밝힌 대로 리디어 류의 "번역한 근대"라는 개념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류의 <통언어적 실천>에 나오는 이 개념은 중국의 근대화 작업이 "유럽의 문헌이나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문헌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룩할 수 없었다"는 맥락에서 제시된 것이다. 김욱동은 중국 근대화의 일부 주체들이 근대화의 한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번역을 끌어안은 사정을 염두에 둔 이 개념을 이용하여 우리의 근대의 번역을 조명해 보려 했다.

이렇게 번역과 근대화가 직결되면, 우리의 주체적 번역의 문제도 곧바로 주체적 근대화의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즉 번역과 주체와 근대의 문제가 동일 평면에 놓이게 된 것이며, 이것은 현재에도 번역과 관련하여 우리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절실한 문제이기에, 저자의 방법론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각성의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방법론에 입각하여 실증적으로 전개되는―김병철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또 때때로 그를 교정하면서―핵심 논지는 분명하다. 19세기 말 중국에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가 있었듯이 이 땅에도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주장하는 개화파가 있었으며, 이들은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번역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이들의 직간접적 영향 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심지어 홍난파, 박헌영처럼 지금은 번역과 연결시켜 생각하기 힘든 사람들까지도―그들 나름으로 근대화라는 뚜렷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계몽을 위한 번역을 했다. 그러나 번역자들의 시야와 능력의 한계 때문에 우리의 번역은 서양의 직접 번역이 아니라, 대부분 중국과 일본을 통한 중역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번역할 대상을 중국이나 일본에서 선정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번역의 사대주의"와 다름이 없다. 특히 일본 근대화를 모범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일본에서 번역되었다는 것이 서양 문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인 것처럼 생각했다. 그 결과 한국의 근대는 "번역한 근대"보다 못한 "중역한 근대"가 된 것이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서양을 직접 만나지 못한 사실, 다시 말해서 일본을 통하여 서양을 간접적으로 만난 사실이 한국 근대사가 안고 있는 비극이다."

비유적인 의미에서든 실질적인 의미에서든 "중역"이 우리의 근대를 지배했고, 주체적 번역과 주체적 근대화가 동시에 좌절했다는 저자의 결론은 우리나라에서 번역과 관련된 집단이 유아기에 입은 정신적 외상의 한 면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서 이 외상 때문에 자의식과 주체성의 형성에 장애가 생기고, 유아기 자체를 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저자의 결론을 곧 현재에 대한 진단이기도 하다.

<번역과 한국의 근대>가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조망하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근대와 번역과 주체를 한 상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앞서도 했거니와, 이제 상 위에 올라온 것들을 더 적극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은 저자의 어깨 위에 올라서는―저자가 김병철의 어깨 위에 올라섰듯이―연구자들의 과제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열어준 시야 덕분에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된 문제들(중역이 아니라 직접 번역을 했다면, 다시 말해서 서양과 직접 만났다면 과연 우리의 근대가 많이 달라졌을까? 그러면 주체적인 번역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이 되었을까? 그렇게 서구화되는 것이 곧 진정한 근대로 가는 길일까? 근대화의 주체는 개화파 외에는 찾을 수 없으며, 번역은 그들의 문명 수입과 계몽의 도구 외에 다른 자리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을 앞에 놓고 근대나 근대화와 관련하여 다른 분야에서 쌓인 성과를 바탕으로 번역의 정치학을 고민하는 작업이 먼저 눈앞에 떠오른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연구 방향은 번역 작품 내에서 주체의 문제를 더 치밀하게 규명해 나가는 것이 될 듯하다. 저자는 번역에 대한 자의식을 조금씩 갖기 시작하던 외국 문학 연구자들의 논쟁과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어떻게 번역하였는가"에서 이 문제를 풀어나갈 단초들을 제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번역 작업 내에서의 주체적 번역 방법론을 검토해 보고 또 그에 입각한 번역 비평의 기준을 세워, 번역의 역사와 더불어 번역 자체의 공과를 더 적극적으로 따져보는 것도 중요한 일일 듯하다. 즉 적극적인 번역 비평이 결합된 번역사 기술이 기대되는 것이다.

이런 작업들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 번역의 자기 학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며, 번역의 안과 밖에서 주체적 번역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길도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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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위대함을 나는 얼마 전 경험했다. 학교에 샤워실이 있는데, 거기 배수구가 막혀 물이 빠지지 않아 사용할 수 없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개념 없이 라면 찌꺼기를 버리지 맙시다"라는 쪽지를 샤워실 옆 탈의실 벽에 붙였다. 그 후 신기하게 배구수가 막히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

샤워실에 갈 때마다 그 쪽지를 보면서, '개념'이 뭐기에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지를 생각한다. 한때 속물근성으로 꽉 찬 '된장녀'와 대비되는 말로 '개념녀'라는 말이 유행했다. 말 그대로 개념 있는 여자가 '개념녀'다. 그렇다면 도대체 개념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유하며 타자와 소통하면서 살기 때문에, 언어가 만든 '존재의 집'에 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언어 중의 언어가 개념이다. 위의 일화에서처럼 라면 찌꺼기를 샤워실 하수구에 버리면 발생하는 문제를 종합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개념이라는 언어에서 나온다. 개념은 '존재의 집'을 형성하는 골격에 해당한다.

인간 역사에서 농업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 이래로 가장 많이 변화한 시대가 근대다. 근대란 그야말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있다"를 실현시킨 시대다. 이렇게 근대가 고대나 중세와 질적으로 달라진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주체임을 자각한 시대기 때문이다.

코젤렉의 '개념사'

어떻게 해서 인간이 그 같은 자각을 했으며, 그럼으로써 인간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 같은 근대 역사를 여러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는데, 독일의 역사가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2006년)은 개념이라는 창을 통해 근대의 특징과 본질을 해명할 목적으로 '개념사'를 창시했다.

코젤렉 개념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역사' 개념에 대한 연구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서구에서는 1780년경부터 역사 개념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그 이전 서구에서 역사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역사' 또는 '무엇의 역사'처럼 과거의 범위나 탐구의 대상과 연관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story)'의 의미로, 주로 복수의 형태로 사용됐다.

그러다가 대략 1789년 프랑스혁명을 기점으로 모든 개별적인 '역사들'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으로서 집합 단수 '역사' 개념이 나타났다. 집합 단수 '역사' 개념은 어느 한 시대의 특정 과거가 아니라, 그림(Grimm)이 1897년 편찬한 사전에서 정의했듯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총괄 개념"으로서 거대 담론이 되었다.

전통 시대 절대적 가치와 의미로부터 해방된 근대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이성의 태양 아래 놓고 비판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칸트가 선언했듯이 "감히 알려고 하라"를 모토로 계몽의 기획을 세웠다. 계몽사상가들은 이 기획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백과사전>을 편찬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전통적 가치 체계가 규정한 사물의 질서를 해체하여 인식의 나무를 재구성함으로써 인류 역사의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했다.

이 같은 열망의 총화(總和)가 집합 단수 '역사' 개념이다. 구체제와의 단절이 화두가 되면서 '삶의 스승'으로서 전통적 역사 담론은 의미를 상실했다. 예컨대 구체제 하에서 주권이 없었던 제3신분을 프랑스를 대표하는 민족으로 재정의한 시에예스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은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집합 단수 '역사'는 과거를 완결된 실재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통해 그 의미가 드러나는 거대 담론 역사의 일부로 만들었다. 거대 담론 역사가 함축하는 전체로서 역사는 부분으로서 과거의 미완성을 비판하는 준거가 되어 근대를 혁명의 시대로 만들었다.

변화하는 '개념', 만들어진 '근대'

만드는 역사의 시대로서 근대를 처음 연 사람은 서구인이다. 개념사적으로 말하면, 한국 근대는 일본이 번역한 서구 근대를 이중 번역하는 방식으로 형성됐다. 철학, 사회, 문명, 진보 등의 개념이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한국 근대의 형성 과정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같은 이중의 번역이 어떤 맥락에서 일어났는지를 개념사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유럽에서는 대략 1750년부터 1850년까지의 시기에 개념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를 나눌 수 있는 단절이 일어난 이 시기를 코젤렉은 '말안장 시대'라고 명명하고, 그 같은 변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119개의 기본 개념을 사전으로 편찬했다(<역사적 기본 개념 : 독일 정치·사회 언어 역사 사전(Geschichtliche Grundbegriffe : Historisches Lexikon zur politisch-sozialen Sprache in Deutschland)>).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은 이 기본 개념 가운데 특히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5개 항목 '문명과 문화', '진보', '제국주의', '전쟁', '평화'를 선정하여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푸른역사 펴냄) 5권의 책으로 번역 출간했다. 코젤렉 개념사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책들은 앞으로 한국 근대에 대한 개념사적 연구에서 초석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을 우리말로 번역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과연 실현 가능한 기획인지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5권을 보면서 내 회의가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정말 어려운 작업의 시작을 연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 출간된 책들을 보면서 119개 기본 개념 가운데 5개를 우선 선정한 기준이 뭔지가 궁금했다. 내가 아는 한, 코젤렉 개념사의 시작과 끝은 '역사'와 '근대'다. 이 두 개념이 코젤렉 개념사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전의 양면이다.


▲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전5권,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안삼환·황선애·황승환·권선형·한상희 옮김, 푸른역사 펴냄). ⓒ푸른역사

한국의 '개념사' 연구를 위하여

결국 문제는 그들의 근대가 아니라 우리의 근대를 해명하는 개념사 연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나는 한국적 개념사 연구의 이정표가 된다고 생각하는 네 항목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서구 개념사와 다르게 우리의 개념사 연구는 비교사적 문제의식을 갖고 해야 한다. 우리의 근대가 그들의 근대를 번역하는 것으로 형성됐지만, 번역이란 결국 단어가 아니라 의미의 번역이기 때문이다. 역사 개념을 예로 들어 보자. 전통 시대 서구에서는 역사를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의미하는 복수로 사용했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에서는 역사를 사마천 이래로 천명(天命)의 반영으로 여김으로써, 왕조의 정통성 문제와 직결시켰다.

동아시아에서 역사는 왕과 신하 모두의 삶을 규제하는 '숨은 신'으로 작동했다. 역사의 심판이라는 관념이 서구에서는 근대 이후에나 생겨났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전통 시대부터 있었다. 요컨대 이 같은 전통 시대 역사관과의 연속성과 단절 속에서 오늘의 한국인들은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집합 단수 '역사' 개념을 사용한다.

둘째, 한국에서 서구의 '모던(modern)'이 근대와 현대로 나눠져 번역되는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모던의 분화는 한국의 근대가 자생적이지 못하고 외부의 충격으로 두 단계로 전유됐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근대', 미국과 소련에 의한 '냉전적 현대' 모두가 우리의 모던이다.

한국의 개념사는 문명의 도전과 응전에 의한 문명 교류사의 관점에서 연구돼야 한다. 근대적 삶의 병리학은 진보 개념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나듯이 미래의 목표가 현재적 삶을 구속함으로써 "빨리 빨리"라는 가속도의 시간성을 내면화하는 것에서 발생했다. 코젤렉이 근대 역사 개념의 특징을 '지나간 미래'라고 규정했듯이,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시대를 언제나 위기며 과도기로 여기며 쫓기는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이 같은 병리학적 현상은 '돌진적 근대화'를 이룩한 한국에서 특히 심각하게 나타난다.

셋째, 서구 근대를 번역하여 형성된 동아시아 근대성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기본 개념이 바로 '동아시아'다. 동아시아란 경험 공간과 기대 지평의 융합으로 형성된 대표적 '운동 개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동아시아를 개념이 아닌 담론으로 접근한다. 개념 분석과 담론 분석의 구분이 필요하다. 담론 분석은 문장을 통해서 드러나는 논증의 체계를 연구한다면, 개념 분석은 단어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관념과 의미에 집중한다.

동아시아는 공산주의처럼 아직 없는 현실을 만들 목적으로 발명한 허구다. 동아시아 개념은 서구 근대의 도전을 응전하는 과정에서 경험 공간과 기대 지평의 융합으로 만든 '상상의 지리'다. 이 개념이 내재하는 '탈아입구'와 같은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을 드러내는 것이 담론 분석이다. 따라서 탈근대에서 동아시아 개념을 재사용하기 위해서는 담론 분석이 아니라 개념사 연구를 해야 한다.

넷째, 한국의 근대로의 이행은 남북한 두 국가가 존재하듯이 두 가지 길로 실현됐다. 최근 남북한 용어의 차이를 비교 연구하는 성과가 발표됐다. 민주주의, 부르주아, 사변, 소행, 상속 등에서 의미의 차이는 바로 근대화 방식과 체제의 차이를 반영한다. 개념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일 뿐 아니라 현실이 나갈 길을 비추는 등불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개념의 분단부터 극복해야 한다.

개념사를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연구도 많고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이 이번에 번역 출간한 5권의 책은 그 시작이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장대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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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빅뱅에서 9·11까지 150억 년의 역사를, 30여 년의 작업 끝에 다섯 권의 만화로 압축해낸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이희재 옮김, 궁리 펴냄)가 지난 7월 완간되었다.

<프레시안>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고닉의 이메일 인터뷰를 싣는다. 이 인터뷰는 지난 7월 이 책을 펴낸 출판사 궁리의 변효현 팀장이 진행한 것이다. <편집자>

하버드의 수학도, 만화를 만나다

- 한국 독자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그리고 곧 제 책의 독자가 되실 여러분! 자칭 '많이 배운' 만화가 래리 고닉입니다. 30여 년 동안 늘 새로운 주제를 배우면서 논픽션 만화를 집필해왔습니다. 현재 예술가인 아내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고요. 장성한 두 딸이 있습니다.

- 이력이 독특합니다. 하버드 대학교 수학과를 우수하게 졸업한 뒤, 대학원에서 수학과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 과정을 밟다가 홀연 그만두고 만화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만화가가 되기로 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극적인 사건은 아니라도 어떤 사연이 있었을 듯합니다. 또 이런 독특한 이력이 만화가로서의 작업 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도 궁금합니다.


▲ 래리 고닉. ⓒ궁리
네, 말씀하신 것처럼 대학과 대학원에서 수학을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무언가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남는 시간에 몇몇 작은 만화들을 그려보곤 했습니다. 1970년에 친구인 스티브 애틀러스가 내게 자신이 쓴 원고를 보여주며 함께 만화책을 만들자고 제의해왔습니다. (이 책은 1971년 <Blood From a Stone, A Cartoon Guide to Tax Reform>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주제가 따분한 편이라 내용을 효과적이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데 만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스티브가 남미에 살았을 때 봐왔던 멕시코 만화가 리우스의 책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리우스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만화를 그려온 작가였습니다. 단순히 이야기를 쓰거나 풍자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우 정확하면서도 재미있게 또한 소신 있게, 현 사회의 이슈 및 경제와 정치를 논평한 사람이죠. 리우스의 책들은(예를 들면 <Cuba for Beginners>) 아직까지도 출간되고 있습니다.

스티브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께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진정으로 눈뜨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문 만화가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두 쪽 만화 작업을 하자마자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는 걸 알았답니다. 그렇게 긴 이야기를 그림에 간결하게 담아내는 것에 매료되어, 인생의 진로를 전문 만화가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40년 넘게 만화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독특하다고 보신 제 학문적 배경은 만화의 주제를 선택하고 깊이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 첫 책을 출간하기까지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물론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역사 만화'라는 분야는 미개척지였기에 내 작업은 새로운 시도였거든요. 출판사에서도 그것을 생소하게 여겼고, 독자들도 어떻게 받아들일지 잘 모르더군요.

신문 연재로 선보이는 게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다 기회가 닿아, 1978년 샌프란시스코의 언더그라운드 출판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시리즈의 시초 격인 역사 만화 아홉 권을 펴냈습니다. (각 권의 분량을 48쪽으로 정했는데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책들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사이 나는 과학 만화인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유전학> 작업도 시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과학 만화 시리즈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이 시리즈는 뉴욕의 하퍼콜린스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마침내 1980년에 역사 만화 시리즈가 매우 유능한 편집자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대통령 케네디의 미망인이었던 재클린 오나시스였습니다. 그녀는 나의 책이 더블데이 출판사에서 나오도록 힘썼습니다. 책 홍보도 그녀가 관리했죠.

결국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내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나는 재클린을 만나기 전까지 한낱 고군분투하는 만화가에 지나지 않았답니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 만화가로서의 삶이 안정될 수 있었습니다.

무명 만화가, 재클린 오나시스의 눈에 들다

- 말씀을 들어보니, 재클린 오나시스가 선생님의 운명을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재클린 오나시스와는 처음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그녀가 역사 만화를 펴내는 데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고, 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합니다. 함께 작업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디렉터로 있던 지인 칼 카츠가 재클린(재키) 오나시스에게 내 책을 소개한 일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오나시스 여사'에 대해 말하더군요. 내 책을 흥미롭게 보고, 더블데이 출판사에서 펴내려 노력한다고요. 그러면서 그가 "그녀에게 연락해보면 어때요?"라며 내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심장이 뛰었어요. 연락해야겠다고 확신하기까지 한 시간 정도 고민하며 서성거렸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답니다. 비서가 내 메시지를 전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 할 때 그녀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재키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답니다.

계약이 거의 확정된 가운데, 한번은 직접 재키를 만나러 뉴욕에 간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이(1988년 11월 22일) 케네디가 암살되고 25번째 추도식이 있던 날이더군요.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했고, 특별히 그것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재키는 만화 편집 작업도 물론이지만, 만화가로서의 내 경력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관련해서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답니다. 더블데이에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첫 권이 출간되자, 오나시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고민 상담 칼럼니스트 앤 랜더스에게 책을 보내 홍보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랜더스의 칼럼에서 제 책이 극찬을 받으며 소개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달라지게 했습니다. 내 전화통은 불이 났고, 제 책은 서점에서 동이 났습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마치 로켓을 타고 달리는 것 같았답니다.

그런데 그 얼마 후에, 랜더스가 재키에게 난감한 편지를 보내옵니다. 텍사스의 한 독자가 제 책에서 성경의 주제를 다룬 여러 부분에 격렬히 항의해온 일 때문이었습니다. 독자가 '불쾌하다'고 한 쪽들도 함께 동봉되었죠. 그와 관련해 랜더스가 말했습니다. "재키, 내게 무슨 책을 추천한 거죠?" 정황상, 랜더스는 제 책을 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조수에게 건네받은 것이지 않을까.

나는 황당했습니다. '6개월 전에만 해도 고군분투하는 만화가였던 내가……지금은 재키 오나시스와 앤 랜더스 사이에서 싸움을 붙이고 있다니. 대체 무슨 일인거지?'

나는 재키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앤 랜더스는 단지 그 독자들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라서 그러는 것뿐이에요. 제가 알아서 잘 해결할게요."

그리고 재키는 더블데이의 종교 전문 편집자 토머스 카힐에게 자료를 보냈습니다. 카힐은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100% 나를 비호할 수 있는 자세한 답변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비록 랜더스가 자신의 칼럼에 제 책 소개를 멈추긴 했지만요.

이 사건은 나에게 두 가지 면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첫째, 문제를 진단하는 재키의 재빠른 판단력. 둘째, 프로젝트에 대한 그녀의 신념은 물론, 모든 방법으로 기꺼이 나를 도와주는 자세, 그리고 상황을 조정해가는 탁월한 능력까지.

(몇 년 뒤 어느 날, 나는 재키로부터 더블데이 출판사를 그만두고 다른 출판사로 옮길까 고민 중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도 그녀를 따라 출판사를 옮겨 책을 내는 것이 가능할지 물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오, 래리, 내가 들어본 중 가장 멋진 일이에요!" 그 말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내가 이런 과찬을 들어도 될는지…….')

"재클린 오나시스는 처음 원고를 본 순간부터 이 생소한 기획을 총괄하면서 열정, 유머, 정력과 결단력, 설득력으로 이 책의 탄생을 지원했다. 어느 분야나 그렇지만 출판계에서도 편집자와 갈등 없이 일한다는 것은 보기 드문 행운이다. 하물며 나처럼 확고부동하고 무조건적인 후원을 받은 경우는 드물다. 그녀에게 무한한 감사를." (<Cartoon History of the Universe Ⅱ>의 '감사의 글')"

- 그렇게 시작된 세계사 만화 작업을, 30여 년 만에 드디어 마무리하셨습니다. 긴 마라톤을 완주한 느낌일 것 같은데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맞습니다. 마라톤이란 말이 제격이죠. 만화 작업이 지루한 일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답니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었는데, 바로 재키 오나시스가 연락해올 때였답니다……. 어떤 작업을 마친 다음에 떠오르는 가장 큰 고민은 '다음엔 무슨 작업을 하지'란 것입니다. 세계사 시리즈를 마무리했을 때엔 공허감에 중심을 잃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만, 그것도 곧 사그라지더군요. 또 다른 새 만화책의 집필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던 덕이죠.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세계사를 말하다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전5권, 래리 고닉 지음, 이희재 옮김, 궁리 펴냄). ⓒ궁리
- 특히 이번에 출간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5>의 경우, 300여 년의 근현대사가 한 권에 담겨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의 양과 범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복잡한 세계사를 한 권의 만화책에 훌륭하게 담아내셨는데요. 특별히 염두에 둔 부분이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5>의 경우 지금보다 50쪽 정도 분량이 많았어야 했는데…….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역사는 많은 부분 '편집' 단계에서 뺄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사는 내가 이미 <만화 미국사(Cartoon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쓴 적이 있어서, 아쉬움이 덜했지만요.

내가 특별히 주목한 에피소드는 노예제의 국제적 폐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영국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들에 의해 일정 부분 유지되었고, 강요된 노예 무역이요. 이건 지적·정치적·경제적 요인이 함께 만들어낸 흥미로운 이야기예요. 한쪽에서는 단순히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보는 고매한 사람들이 일부 있었습니다. 다른 쪽에는, 노예제는 불공평한 경쟁이라고 생각했던 거대 산업에 지배받는 사람들이 있었고요.

경제적 측면을 생각하는 부류도 있었는데, 이들은 노예제가 경제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며―이를테면 임금 노동보다 덜 생산적이라고―자본가의 혐오감을 합리화한 측면이 있지요. 그리고 대영제국이 있습니다. 영국은 공해상에서 타국의 노예선을 감시하는 일이 영국의 우월한 해군력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탁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에 적대적인 '계몽된' 이들은 노예제가 자연권에 반한다고 보았고요. 일부 폐지론 운동에 가담한 종교 지지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사실, 이게 마지막은 아니에요. 이 이야기가 보통 복잡한 게 아니거든요), 이런 질문이 남게 됩니다. 곧 영국은 어떻게 고수익이 남는 '노예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을까. 답은 증기력으로 돌아가는 공장이 '경제 기적'을 일으켰다는 데 일정 부분 있겠네요……. 그런데 이게 이야기의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측면에는 인도로부터 약탈한 막대한 부가 있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중국과의 아편 무역이 정말로 잘 굴러갔거든요.

노예 폐지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자유로운 생각들은 결국 근대 세계를 만들어낸 다른 유사한 사상들로 이어졌습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특히 그러했죠. 둘은 산업은 좋고 노예제는 나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성장을 외치는 신화가 한계점에 다다른 걸 보고 있습니다. 또 민족성과 종교에 기반을 둔 강력한(혹은 잠재적 영향력이 있는) 정치적 충격으로의 회귀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게 모든 사람을 어디로 이끌까요? 글쎄요, 나는 역사가이지 예언가가 아니랍니다.

- 혹자는 당신의 역사 만화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세계사라는 평을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당신의 '공정한' 역사관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극찬인걸요. 나는 언제나 각 당사자의 시선으로 어떤 사건이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점이 유머의 원천이 되기도 해요. 국제 관계에서 (혹은 인간관계에서), 한쪽은 다른 쪽을 완벽하게 오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건 실제로 놀라움을 낳을 수 있어요. 이 책에 없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몇 년 전 대통령 부시가 아라크에 방문했을 때, 어떤 사람이 부시한테 신발을 던졌어요. 물론 누구라도 자기에게 뭔가 던지면 기분이 나쁘겠죠. 그런데 어쨌든 그건 신발일 뿐이었어요. 부시 입장에선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죠. 하지만 부시가 모르는 게 있는데, 전 지구의 관점에서 볼 때, 신발은 50가지도 넘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사람들은 아무한테나 자신의 발을 만지게 하지도 않고요. 심지어 다른 사람을 발바닥으로 가리키지도 않죠. 아라크의 입장에서 보면, 신발을 던진다는 건 부시한테 냄새나는 수채통을 던지는 것과 다름 아니에요. 이건 극단적인 모욕을 의미하는 겁니다. 어쩌면 부시에겐 모르는 게 약일지도 모르죠.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예를 들어보죠. 나는 한국 독자들에게 내 만화에 한국의 역사가 많지 않다는 불만 섞인 메일을 몇 번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내 대답은 이랬죠. 당신이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역사를 전 세계적인 상호 작용의 이야기로 봅니다. 그래서 세계에 있는 모든 곳의 역사를 담는 게 불필요할 때가 있어요.

이른바, 역사에는 수천 마일 떨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생각을 압박하는 '주요 행위자'란 게 존재합니다. 한국은, 지정학적인 이유로, 다른 많은 곳보다 이러한 분기점에 덜 얽혀 있습니다. 이건 여러분이 가진 행운이기도 하지요!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5>에서 남북한의 긴장 관계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셨습니다. 덧붙여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냉전의 종식을 보고 싶습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을 이 냉전과 함께 살아왔거든요.

역사 만화, 과학 만화 제대로 즐기는 방법

- 역사 만화 시리즈와 과학 만화 시리즈가 하버드 대학교, 예일 대학교 등의 대학교를 비롯해 고등학교 및 기타 교육기관에서 추천되거나 부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선생님의 홈페이지에는 80여 곳 정도가 등재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책들의 어떤 특장점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하시는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특히 이 책들을 수업시간에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조언해주십시오.

아마도 역사 만화 시리즈와 과학 만화 시리즈가 효과적인 교육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과학은 단순히 글로 설명하는 것보다 시각적인 이미지로 설명하는 게 효과적입니다. 과학만화는 초보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는 불필요한 정보를 생략하고 핵심만 보여줍니다.

그리고 추측하건대, 역사 만화가 여러 학교에서 추천받는 것은 그만큼 나와 비슷한 역사관을 가진 선생님들이 많다는 사실의 방증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역사적 사건들 사이의 관계를 더 명확하게 그려 보여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나 내 설명과 의견을 싫어하는 선생님들도 있답니다.

내가 실제로 선생님들에게 알려줄 팁은 없답니다. 오히려 제가 선생님들에게 여러 활용법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학생들과 함께하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단지, 한 가지 정도 말한다면, 가능할 때마다 부록에 있는 참고 문헌들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특히 역사 만화 시리즈는 그런 면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학생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뭔가 더 읽기를 원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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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인이 자주 드나드는 안국동 한식당 '낭만'에서 막 나오려는 참에 용태 형이 불러 세운다. "민웅아, 여기 와서 술 한 잔 받아야지." 언제 봐도 늘 정겹다.

여기서 내가 "용태 형"이라고 하는 이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전 회장 김용태다. 그날은 2010년 7월 29일부터 8월 9일까지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렸던 <현실과 발언> 30주년 전시회의 거의 마지막 날이었다. 임옥상의 부름에 이끌려 찾아 나선 전시회장에서 분명 그를 봤는데 정작 뒤풀이 자리에서는 어디 있나 했다.

그 옆자리에 출판사 현실문화의 대표 김수기가 앉아 있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용태 형이 다시 입을 연다. "아까 나 주려던 그 책, 이 친구 줘." 덥석 받아든 보따리 뭉치에는 <오윤 전집>(현실문화 펴냄) 세 권이 묵직하게 들어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은 내 손에 난데없이 들어오게 되었다.

첫 권은 "세상 사람, 동네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그에 대한 글 모음, 그가 쓴 글, 그가 한 말의 기록들이 있는 620쪽의 책이고, 두 번째 권은 "칼을 쥔 도깨비"라는 제목이 붙은 그의 작품집, 세 번째는 "3115, 날것 그대로의 오윤"이라는 제목의 그의 스케치가 고스란히 담긴 자료집이다. 그날로 읽기 시작한 오윤 1권은 나를 그의 세계로 정신없이 빨려들게 했다.

오윤의 작품도 그 안에 우뚝 자리한 <현실과 발언> 전시회는 1979년 겨울, 유신 체제의 종말과 함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예술적 발언을 모색했던 이들이 준비하고 그 다음 해 1980년, 모두가 전두환 정권의 폭력 앞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을 때 정말 감히 겁도 없이 민중 예술의 장을 연 작업이었다.

그 일이 벌써 30년이 지났다. 인사아트센터 현관에는 화엄경을 한글 서체로 풀어 만든 임옥상의 청동 부처 조각이 걸린 채 범상치 않은 기를 뿜고 있었고, 6층 전체에 걸쳐 <현실과 발언>의 역사와 작품들이 한 시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현실과 발언>을 이끌었던 이들의 작품은 물론이고 민중 미술 1세대인 주재환, 손장섭, 김건희, 김정헌, 민정기, 안규철, 성완경, 김대식, 윤범모, 심정수 등이 작가와의 대화에서 등장했다. <녹색평론>의 김종철, 사학자이자 이제는 겸재박물관 관장이 된 이석우 등도 모습을 보였다.

오윤의 아들 둘도 함께 했다. 그렇게 모인 광경을 보니 <현실과 발언> 30주년 기념 전시회는 지난 세월의 자취가 아니라 일그러지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한 현재 진행형의 목소리였고 아직도 여전히 할 일이 있다는 일깨움을 주는 현장이 되었다.


▲ <오윤 전집>(전3권, 현실문화 펴냄). ⓒ현실문화

문제적 인간 오윤

오윤은 바로 이 <현실과 발언>이 있기 10년 전인 1969년, 그의 예술적 기의 힘을 알아본 김지하의 지지와 격려 속에서 "현실 동인 선언"을 하면서 기존 미술계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발걸음을 내보인 이였다.

그때 이미 그는 우리의 춤과 굿거리, 추사를 비롯한 옛 글의 힘과 민중 속에서 질퍽하게 녹아나 있는 아픔과 갈망의 노래를 어떻게 하면 형상화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뇌했던 이른바 "문제적 인간"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시대 민중 예술의 표준이 될 경계선을 그은 존재가 되었다. 오윤에게, 저 불끈 힘이 솟아오르는 판화의 빚을 지지 않은 1980년대 이후의 운동이 과연 어디 있던가?

<오윤 전집>의 1권에는 그가 맺은 인간관계, 벗들의 모습, 그의 삶, 그의 미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종합적으로 엮어져 있다. 그래서 인간 오윤과 함께 그의 작품이 끼친 미술사적 의의가 파노라마처럼 섬세하게 펼쳐진다. 오윤과 동갑내기인 김용태, 그리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김정헌이 오윤이 몸이 아파 진도에서 요양하며 지낼 때 찾아가 홍주를 마시던 이야기와 함께, 그의 개인전을 여느라 이 두 사람이 수고했던 일화를 처음 접하면서 한 예술가의 인연이 어디까지 닿아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였는가를 대면하게 된다.

조선의 옛 예술 정신과 멕시코 민중 예술의 세계를 소개한 그의 선배 김지하로부터 판화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진화시켜나간 그의 후배 이철수에 이르기까지 그가 살아 만나 이루어냈던 세계 속에 담겨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놀랍도록 깊고 다채롭다. 그의 아버지가 소설가 오영수라는 사실도 오늘의 세대에게는 어느새 낯선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그의 외가 쪽은 더욱이 동래 학춤의 명인 가문이라는 사실도 오윤의 피 속에 흐르는 문학성과 춤꾼 기질 그리고 무엇보다도 술판의 좌중을 쥐고 흔들었다는 놀이꾼으로서의 폭발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알게 한다.

생명의 기력을 불러들이는 굿거리


▲ 오윤의 <자화상>(목판, 1974년). ⓒ현실문화
오윤은 그의 작업을 통해 이렇게 고뇌했다.

"미술이 어떻게 언어의 기능을 회복하는가 하는 것이 오랜 나의 숙제였다. 따라서 미술사에서, 수많은 미술 운동들 속에서 이런 해답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말없는 벙어리가 되었었다."

그랬던 그가 엄청난 에너지로 쏟아낸 작품들은 고개를 숙인 듯했다가 번쩍 치켜들면서 사악한 것을 베어내고 슬픔을 속으로 삭이며 둥실 둥실 춤추면서 앞으로 어깨 걸고 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현재화하는데 성공한다. 그건 사물과 사람에 대한 피상적 관찰을 넘어서서 그 안에서 웅성거리며 결국 뿜어내지는 기운(氣運)을 포착해낸 이에게만 가능한 작업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힘의 근원을 근육의 구조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석굴암의 금강역사처럼 기(氣)의 표현으로도 가능한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삶의 꿈틀거림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면적 정신세계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일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오윤에게 예술은 숨겨진 생명의 가락을 찾고 그 가락이 기로 드러나 누구에게도 분명한 진실을 말하는 순간을 미술 속의 이야기처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윤의 작품을 단지 저항적 민중 예술이라는 틀 안에서만 보는 것은 그의 예술적 지평의 크기를 축소시키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이런 말을 토해낼 수 있었다.

"운다는 게 뭡니까? 예술에 있어서 진짜 만남만이 울 수 있는 겁니다. 감동당해 본 적도 없고 감동하기도 싫고, 만날 데는 한 군데 밖에 없어요. 예술이 살아남는 길은 하나 밖에 없어요. 마치 무당이 신 내림을 받을 때처럼, 문제하고 만나든 대상하고 만나든, 어떤 사물하고 만나든, 진정함이라고 하는 것 그것 하나 믿고 싶다는 겁니다."

이리하여 그의 결론은 굿으로 간다.

"전 지금도 예술이 제대로 굿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생명의 진정성을 현실 속에 불러들이는 신들린 동작이 오늘의 미술 속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윤이 살아생전에 춤사위에 대해 그리도 관심을 쏟았던 이유는 그의 외가 쪽 학춤의 흐름도 있겠거니와,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구치고 꿈틀거렸던 생명의 기력을 신내림처럼 판화에 쏟아내고 싶은 원초적 갈망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그의 삶과 발언을 통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꽉 찬 긴장 속에서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이 휘몰아치는 칼의 번뜩임을 잡아낸 <칼노래>라든가 춤추는 군중의 힘을 보여준 <춘무인 춘무의>, 그리고 역사의 비극을 더는 반복할 수 없다는 <원귀도>같은 비장한 작품만이 아니라 <남녁땅 뱃노래>와 <도깨비>같은 경우를 보면 오윤이 짚어낸 삶의 영토가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 알 수 있다.


▲ 오윤의 <대지5>(목판, 1983년). ⓒ현실문화

책 표지와 오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오윤의 판화가 대중들의 시선에 놓이게 된 것은 책 표지에서였다. 오늘날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목회자로 수고하고 있는 한윤수가 1970년대 중반에 출판사 청년사를 차려 그의 작품을 선보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은 지금 돌아봐도 감동스럽다.

<암태도 소작 쟁의>의 삽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한 이단아의 등장쯤으로 여길 만한 사건이 미술사 전반에 걸친 충격과 그 이후의 미술사적 사건으로 이어지는 고리에 출판과 미술이 하나로 결합시키는 애씀이 있다는 것은 두고두고 성찰해볼 일이다.

미술이 대중의 일상 속에 존재하도록 하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오윤의 예술 철학과 한 시대의 고뇌를 담아내려한 출판 운동이 만난 지점에서 태어난 이 작업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 그건 미술과 사유, 그리고 언어가 하나가 되어 한 시대의 메시지로 작동할 수 있는 성취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놓치지 않고 미술 평론가 최열은 오윤과 추사 김정희의 예술적 맥락을 하나로 연결시키면서 역사의 한 대목을 속박시켰던 포승줄을 풀고 생명의 기운을 펼쳐낸 점을 주목하도록 한다. 이는 최열이 고암 이응로와 오윤을 하나로 묶어 해제하려한 노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이건 결국 하나의 맥박이다. 그래서 칼을 부리는 솜씨가 빼어났다는 그의 목판화는 맥이 힘차게 뛰는 인상을 강렬히 남긴다. 오윤이 쓰다 말았다는 소설의 첫 구절은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리던 산맥이 섬진강에 부딪혀 멈칫하고 선 곳에서는…" 그렇게 그는 맥박이 흐르는 길과 그 진로에 관심이 높았고 그건 사물이나 사람이나 역사나 춤이나 그 어디에도 다 적용이 되는 시선이었다.

이런 점에서 오윤이 오래 살지 못해 그의 기량을 충분히 다 보여주지 못했고 그의 생각이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는지도 입증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지만 그의 작품들은 그 이후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할 지 이미 다 말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 오윤의 <칼노래>(목판, 채색, 1985년). ⓒ현실문화

생명의 혁명적 춤사위

그렇지 않아도 오윤의 작품 속에 깃든 굿의 힘, 무당 같은 신 내림의 경지에 대한 갈망은 김정헌의 증언 내지는 평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테라코타의 조각) 얼굴을 보면 표정이 (판화에도 그런 것들이 나오는데) 눈 꼬리가 탁 올라붙었어요. 무당기가 있는 사람들을 거의 정형화시킨 거죠."

오윤이 찾고 싶었던 얼굴은 바로 그렇게 이 세상의 아픈 이들의 심정을 자기 마음처럼 절절히 알고, 그 사연을 신 내린 혼으로 자기 사연처럼 풀어내서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는 이라고 하겠다. 그런 모습, 그런 기운이 아니고서는 죽음의 기운이 판을 치는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없다고 여긴 탓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오윤에 대해 증언하고 평론한 이들의 이름은 여기 일일이 다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만큼 그는 살아생전에 주변 누구에게나 관심을 받는 매력적인 인간이었고 그의 생각과 그의 작품은 새로운 화두를 만들어내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현실과 발언>의 젊은 일꾼이었고 이제는 60대 중반에 접어든 성완경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래서 절실하게 다가온다.

"오윤은 마치 부릅뜬 노인의 눈 같기도 하고, 저 깊은 곳으로부터 끌어올려 진 한 같기도 한 시선으로 우리의 일상적 삶의 몰골과 역사의 한 많은 뼈마디를 훑어내면서 우리를 어머니의 체취에, 그 정직하고 절대적인 가난에 닿도록 한다. 다시 말해 오윤 예술의 생명은 비로 그가 맥을 잡을 주는, 맥을 짚고 그 책을 살려내는 화가라는 점에 있다는 말이다.

(…) 그것은 인간의 잃어져가는 모습과 잊혀가는 삶의 도상에 우리를 대면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다. (…) 사라져 가는 기억의 재생이요, 맥의 재생이며 이 점에서 아주 소중한 '도상의 구비 문학'이다."

그래서 오윤은 탈을 만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탈은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이 아니야. 한번 얼굴에 대고 고개를 움직이며 놀아봐. 살아있는지 죽어 있는지 보게." 70년대 탈춤 세대의 문을 연 채희완의 증언도 오윤의 삶을 조명하는데 한 몫을 한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오윤의 예술은 모든 잊혀져가고 잃어버리고 죽어가는 것들의 생환에 그 초점이 모아진다. 누워있던 것이 일어서고 멈췄던 것이 다시 춤을 추고 숙였던 고개가 번쩍 하고 치켜든다. 이건 "생명의 혁명적 춤사위"다. 비로 오윤의 작품이 온전한 평가를 할 만큼 많지 않고 고인에 대한 미화 의식으로 인해 과도한 칭찬을 받을 경우가 있다 해도 바로 이 미술 속에 생명의 혁명적 춤사위를 이야기로 박아놓은 것만큼은 빼어난 예술적 성취다. 그건 오늘날의 예술에서도 계속 진행되어야 할 의식이다.

그런 이유에서 <오윤 전집>의 발간은 오늘의 자리에서 더욱 깊이 새겨지는 감격이다. 민중 예술이라는 것이 메시지에 몰두한 나머지 예술적 성취가 약하다는 비아냥거림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힘겹게 여겨지는 시대에, 오윤의 미술사적 생환은 예언적이다. 그건, 우리가 들어야 할 칼과 붓, 우리가 추어야 할 춤, 우리가 남겨야 할 목소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일깨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과 발언>이 30주년 기념 전시회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발언하는 현실"을 만들어내는 길을 뚫어내는 계기로 만드는 거다.

지금은 우리은행으로 바뀐 상업은행의 종로 5가 지점에는 오윤이 작업한 테라코타가 남아 있다고 한다. 아직 보지 못했다. 꼭 가서 봐야겠다. 오윤의 벗 용태 형, 고맙수. 이런 책이 내 손에 굴러들어오게 해줘서 말이요.

오윤의 판화를 뚫어지게 쳐다보면, 어느새 내 안에 역동하는 기운이 스멀스멀하고 일어선다. 오윤의 판화는 그런 기운이 찍힌 신 내린 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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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흔히 '스페인독감'이라고 부르는 전염병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지난 100년간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은 이 독감은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4000만~1억 명의 목숨을 앗았다.

한반도는 어땠을까? 조선총독부의 통계 연감을 보면, 이 스페인독감으로 당시 국내 인구 759만 명의 약 38%인 288만4000명이 감염돼 14만 명이 사망했다. 당시 통계의 부정확성을 감안하면 실제 사망자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이 사망자 수를 지금의 남한 인구로 환산하면 약 50만 명이다.

이런 100년 전의 전염병 유행을 언급하면 사람들은 코웃음부터 친다. "의학이 얼마나 발전했는데, 다시 그럴 일이 있겠어?"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다.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A'가 유행했을 때, 취재 도중에 만난 한 과학자는 이런 얘기를 했었다. 그의 솔직한 얘기를 들어 보자.

"1918년과 현재를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것은 두 가지입니다. 인플루엔자를 치료할 수 있는 약, 인플루엔자를 예방할 수 있는 백신, 이 두 가지가 있어요. 그런데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늘 변이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미리' 준비하는 게 쉽지 않아요. 결국, 우리는 1918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전염병의 공격에 노출돼 있는 것입니다."

풀러 토리와 로버트 욜켄의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 : 동물, 인간, 질병>(이음 펴냄)은 이 과학자의 얘기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책이다. 전염병과 그 원인인 박테리아, 바이러스, 원생동물 등 병원체의 관계를 놓고, 과학과 역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은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따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니 피서용 책으로도 맞춤이다.

전염병을 이해하는 세 가지 열쇳말


▲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풀러 토리·로버트 욜켄 지음, 박종윤 옮김, 이음 펴냄). ⓒ이음
이 책을 읽는 내내 세 가지 열쇳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평형', '관계', '변화'. 기왕에 인플루엔자 얘기가 나왔으니, 조류 독감 얘기를 하면서 살펴보자.

원래 조류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오리를 비롯한 물새의 몸속에서 자리를 잡고 수백만 년 동안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바이러스와 물새 사이에 일종의 '평형'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는 사람이 오리를 가축으로 키우면서 깨진다. 바이러스가 물새가 아닌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특히 중국 남부에서 이 관계는 커다란 '변화'를 야기한다. 중국 남부에서는 전통적으로 오리를 닭, 돼지 등과 같이 키우고 그 똥오줌을 연못에 떨어뜨려서 어류를 양식하는 관행이 있었다. 물론 그 물은 오리, 돼지 심지어 사람도 마신다. 이런 상황에서 오리 몸속에 있었던 바이러스는 쉽게 돼지,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특히 돼지는 이 바이러스에게 변화를 위한 최적의 장소를 제공한다. 여러 가지 종류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동시에 감염될 수 있는 돼지 몸속에서 바이러스는 서로 유전자를 바꿔가면서 새로운 변종으로 재탄생한다. 그 변종 바이러스 중 일부가 바로 인간을 공격하는 능력을 획득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최근에 더욱더 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닭, 오리 수천 마리를 집단 사육하는 기업 농장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최상의 놀이터다. 결국 1997년에 이 바이러스는 (돼지 없이) 닭에서 사람으로 직접 옮아가는 능력을 획득했다. 이 바이러스가 다시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아가는 능력까지 얻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바이러스가 아니라 '괴물'이다.

인간이 초래한 전염병 재앙

조류 독감의 예에서도 살폈듯이, 이 책은 전염병의 대부분이(!) 인간의 자업자득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평형' 상태를 깨면서 전례 없는 '관계'를 맺고, 결국 병원체의 치명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장본인이 대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얼른 감이 안 온다면 기후 변화나 슬럼 확산을 생각해보자.

인간 활동의 명백한 결과인 지구 온난화는 기후 변화를 초래한다. 책에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기후 변화로 북반구가 따뜻해질 가능성이 크다. 따뜻한 기후는 말라리아, 댕기열, 황열과 같은 전염병의 병원체를 옮기는 모기의 서식지를 넓힌다. 이런 모기는 열대 우림의 웅덩이가 아니라 도시의 하수구에서 각종 병원체와 함께 사람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꾀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 자리를 잡은 수천만 명이 모여 사는 거대 도시는 전염병 병원체의 또 다른 놀이터다.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거대 도시에서 예외 없이 볼 수 있는 거대 슬럼은 전염병 병원체의 시각에서 보자면 에덴동산이다. 만약 이런 슬럼에서 똬리를 틀던 병원체가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 책에서 간단히 언급한 이런 시각("열대 지방의 거대 도시는 앞으로 출현할 전염병의 부화기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을 자세히 살펴보려면 마이크 데이비스의 탁월한 책 <슬럼, 지구를 뒤덮다(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와 <조류 독감>(정병선 옮김, 돌베개 펴냄)을 함께 읽어보자.

장담하건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이런 말을 내뱉을 것이다. "인류가 운이 좋았구나!" 왜냐하면, 21세기 들어서 2004년(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2009년(신종 플루) 두 차례 유행한 전염병이 모두 거대 슬럼을 비켜갔거나(사스), 맹독성이 약해서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기(신종 플루) 때문이다.

용도 폐기되는 인간?

보론을 덧붙인 손한경은 "(박테리아, 바이러스, 원생동물과 같은) 미생물을 지구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동등한 주체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이 책의 핵심 주장을 한 번 더 강조한다. 이 책의 저자나 손한경이 남다른 생태주의적 감수성을 가져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앞에서 봤듯이, 미생물(병원체)과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존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사실상 미생물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잠시 주인 행세를 했던 인간이 용도 폐기되는 상황이 올 수 있는 것이다. 글머리에 언급한 그 과학자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오싹하다.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2012년의 어느 시점에 인류가 큰 재앙을 맞이하리라는 예언이 있잖아요. 나는 그런 종말론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사람이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 재앙이 온다면 그것은 바로 전염병일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많은 과학자들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가까운 시점에 대변이를 일으키리라고 확신합니다. 어쩌면 2012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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