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알다시피, 역사는 집단적 자의식의 산물이며, 자기 자신에게서 배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 번역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이 한 손에 다 꼽힌다는 것, 그나마 책을 낸 저자로 보자면 1970~80년대 선구적 업적을 남긴 김병철(<한국 근대 번역 문학사 연구>, <한국 근대 서양 문학 이입사 연구>, <한국 근대 서양 문학 번역 논저 연표>)과 지금 이야기하는 김욱동(<번역과 한국의 근대>, <근대의 세 번역가>) 단 두 사람 외에 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나라에서 번역과 관련된 집단은 자의식도 없고, 자신의 경험에서 배울 생각도 없다는 뜻일까? 두 연구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만큼, 그들의 저변의 황량함 또한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상을 개탄하는 소리야 지금 말고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고, 이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왜 이런 개탄할 만한 현상이 나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이런 현상을 바꿀 방법의 제시일 것이다.


▲ <번역과 한국의 근대>(김욱동 지음, 소명출판 펴냄). ⓒ소명출판
바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가장 먼저 펼쳐보아야 할 책이 김욱동의 <번역과 한국의 근대>(소명출판 펴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방금 제기한 문제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번역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형성되던 시기에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던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또 100년 전에 벌어진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약간의 변주를 거쳐 재연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간접 조명으로 지금 우리의 자리를 비추어준다.

자의식이 형성되려면 자신이 주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하고, 여기에는 주체적 행동이나 사고가 전제된다. 따라서 번역 관련자들의 자의식이 형성되려면 먼저 번역이 주체적 행동이라는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 번역의 역사에 관한 연구가 이렇게 빈곤하다는 것은 번역이 주체의 행위라는 자각이 빈약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혹시 번역 자체가 근본적으로 주체적 행위일 수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번역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번역자 독단으로 하기 힘든 행위라는 것이 너무 빤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주체적인 번역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 번역의 외적인 측면, 예를 들어 번역할 텍스트의 선정에서는 주체적인 면을 드러낸다 해도, 과연 번역 작업 내부에서 주체적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자못 복잡해 보이는 이 문제는 설사 머릿속에서 어떤 답을 만들어낸다 해도, 실제 현장에서 이루어진 경험과 결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실증적 연구에 바탕을 둔 <번역과 한국의 근대>는 단지 근대 초기의 번역 작업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성취를 넘어서서, 우리의 현재의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면들을 보여준다.

실제로 <번역과 한국의 근대>의 접근 방법 자체, 즉 "왜" "누가" "무엇"을 "어떻게" 번역했느냐고 묻는 방식 자체가 주체의 문제를 탐사하는 한 방식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런 방법론은 저자의 말대로 김병철의 기존의 업적을 체계적인 방식으로 재정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도 굳이 주체의 행위를 캐묻는 "육하원칙"의 방법을 택한 것은 저자가 밝힌 대로 리디어 류의 "번역한 근대"라는 개념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류의 <통언어적 실천>에 나오는 이 개념은 중국의 근대화 작업이 "유럽의 문헌이나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문헌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룩할 수 없었다"는 맥락에서 제시된 것이다. 김욱동은 중국 근대화의 일부 주체들이 근대화의 한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번역을 끌어안은 사정을 염두에 둔 이 개념을 이용하여 우리의 근대의 번역을 조명해 보려 했다.

이렇게 번역과 근대화가 직결되면, 우리의 주체적 번역의 문제도 곧바로 주체적 근대화의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즉 번역과 주체와 근대의 문제가 동일 평면에 놓이게 된 것이며, 이것은 현재에도 번역과 관련하여 우리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절실한 문제이기에, 저자의 방법론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각성의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방법론에 입각하여 실증적으로 전개되는―김병철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또 때때로 그를 교정하면서―핵심 논지는 분명하다. 19세기 말 중국에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가 있었듯이 이 땅에도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주장하는 개화파가 있었으며, 이들은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번역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이들의 직간접적 영향 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심지어 홍난파, 박헌영처럼 지금은 번역과 연결시켜 생각하기 힘든 사람들까지도―그들 나름으로 근대화라는 뚜렷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계몽을 위한 번역을 했다. 그러나 번역자들의 시야와 능력의 한계 때문에 우리의 번역은 서양의 직접 번역이 아니라, 대부분 중국과 일본을 통한 중역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번역할 대상을 중국이나 일본에서 선정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번역의 사대주의"와 다름이 없다. 특히 일본 근대화를 모범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일본에서 번역되었다는 것이 서양 문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인 것처럼 생각했다. 그 결과 한국의 근대는 "번역한 근대"보다 못한 "중역한 근대"가 된 것이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서양을 직접 만나지 못한 사실, 다시 말해서 일본을 통하여 서양을 간접적으로 만난 사실이 한국 근대사가 안고 있는 비극이다."

비유적인 의미에서든 실질적인 의미에서든 "중역"이 우리의 근대를 지배했고, 주체적 번역과 주체적 근대화가 동시에 좌절했다는 저자의 결론은 우리나라에서 번역과 관련된 집단이 유아기에 입은 정신적 외상의 한 면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서 이 외상 때문에 자의식과 주체성의 형성에 장애가 생기고, 유아기 자체를 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저자의 결론을 곧 현재에 대한 진단이기도 하다.

<번역과 한국의 근대>가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조망하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근대와 번역과 주체를 한 상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앞서도 했거니와, 이제 상 위에 올라온 것들을 더 적극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은 저자의 어깨 위에 올라서는―저자가 김병철의 어깨 위에 올라섰듯이―연구자들의 과제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열어준 시야 덕분에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된 문제들(중역이 아니라 직접 번역을 했다면, 다시 말해서 서양과 직접 만났다면 과연 우리의 근대가 많이 달라졌을까? 그러면 주체적인 번역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이 되었을까? 그렇게 서구화되는 것이 곧 진정한 근대로 가는 길일까? 근대화의 주체는 개화파 외에는 찾을 수 없으며, 번역은 그들의 문명 수입과 계몽의 도구 외에 다른 자리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을 앞에 놓고 근대나 근대화와 관련하여 다른 분야에서 쌓인 성과를 바탕으로 번역의 정치학을 고민하는 작업이 먼저 눈앞에 떠오른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연구 방향은 번역 작품 내에서 주체의 문제를 더 치밀하게 규명해 나가는 것이 될 듯하다. 저자는 번역에 대한 자의식을 조금씩 갖기 시작하던 외국 문학 연구자들의 논쟁과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어떻게 번역하였는가"에서 이 문제를 풀어나갈 단초들을 제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번역 작업 내에서의 주체적 번역 방법론을 검토해 보고 또 그에 입각한 번역 비평의 기준을 세워, 번역의 역사와 더불어 번역 자체의 공과를 더 적극적으로 따져보는 것도 중요한 일일 듯하다. 즉 적극적인 번역 비평이 결합된 번역사 기술이 기대되는 것이다.

이런 작업들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 번역의 자기 학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며, 번역의 안과 밖에서 주체적 번역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길도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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