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위대함을 나는 얼마 전 경험했다. 학교에 샤워실이 있는데, 거기 배수구가 막혀 물이 빠지지 않아 사용할 수 없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개념 없이 라면 찌꺼기를 버리지 맙시다"라는 쪽지를 샤워실 옆 탈의실 벽에 붙였다. 그 후 신기하게 배구수가 막히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

샤워실에 갈 때마다 그 쪽지를 보면서, '개념'이 뭐기에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지를 생각한다. 한때 속물근성으로 꽉 찬 '된장녀'와 대비되는 말로 '개념녀'라는 말이 유행했다. 말 그대로 개념 있는 여자가 '개념녀'다. 그렇다면 도대체 개념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유하며 타자와 소통하면서 살기 때문에, 언어가 만든 '존재의 집'에 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언어 중의 언어가 개념이다. 위의 일화에서처럼 라면 찌꺼기를 샤워실 하수구에 버리면 발생하는 문제를 종합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개념이라는 언어에서 나온다. 개념은 '존재의 집'을 형성하는 골격에 해당한다.

인간 역사에서 농업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 이래로 가장 많이 변화한 시대가 근대다. 근대란 그야말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있다"를 실현시킨 시대다. 이렇게 근대가 고대나 중세와 질적으로 달라진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주체임을 자각한 시대기 때문이다.

코젤렉의 '개념사'

어떻게 해서 인간이 그 같은 자각을 했으며, 그럼으로써 인간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 같은 근대 역사를 여러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는데, 독일의 역사가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2006년)은 개념이라는 창을 통해 근대의 특징과 본질을 해명할 목적으로 '개념사'를 창시했다.

코젤렉 개념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역사' 개념에 대한 연구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서구에서는 1780년경부터 역사 개념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그 이전 서구에서 역사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역사' 또는 '무엇의 역사'처럼 과거의 범위나 탐구의 대상과 연관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story)'의 의미로, 주로 복수의 형태로 사용됐다.

그러다가 대략 1789년 프랑스혁명을 기점으로 모든 개별적인 '역사들'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으로서 집합 단수 '역사' 개념이 나타났다. 집합 단수 '역사' 개념은 어느 한 시대의 특정 과거가 아니라, 그림(Grimm)이 1897년 편찬한 사전에서 정의했듯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총괄 개념"으로서 거대 담론이 되었다.

전통 시대 절대적 가치와 의미로부터 해방된 근대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이성의 태양 아래 놓고 비판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칸트가 선언했듯이 "감히 알려고 하라"를 모토로 계몽의 기획을 세웠다. 계몽사상가들은 이 기획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백과사전>을 편찬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전통적 가치 체계가 규정한 사물의 질서를 해체하여 인식의 나무를 재구성함으로써 인류 역사의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했다.

이 같은 열망의 총화(總和)가 집합 단수 '역사' 개념이다. 구체제와의 단절이 화두가 되면서 '삶의 스승'으로서 전통적 역사 담론은 의미를 상실했다. 예컨대 구체제 하에서 주권이 없었던 제3신분을 프랑스를 대표하는 민족으로 재정의한 시에예스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은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집합 단수 '역사'는 과거를 완결된 실재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통해 그 의미가 드러나는 거대 담론 역사의 일부로 만들었다. 거대 담론 역사가 함축하는 전체로서 역사는 부분으로서 과거의 미완성을 비판하는 준거가 되어 근대를 혁명의 시대로 만들었다.

변화하는 '개념', 만들어진 '근대'

만드는 역사의 시대로서 근대를 처음 연 사람은 서구인이다. 개념사적으로 말하면, 한국 근대는 일본이 번역한 서구 근대를 이중 번역하는 방식으로 형성됐다. 철학, 사회, 문명, 진보 등의 개념이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한국 근대의 형성 과정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같은 이중의 번역이 어떤 맥락에서 일어났는지를 개념사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유럽에서는 대략 1750년부터 1850년까지의 시기에 개념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를 나눌 수 있는 단절이 일어난 이 시기를 코젤렉은 '말안장 시대'라고 명명하고, 그 같은 변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119개의 기본 개념을 사전으로 편찬했다(<역사적 기본 개념 : 독일 정치·사회 언어 역사 사전(Geschichtliche Grundbegriffe : Historisches Lexikon zur politisch-sozialen Sprache in Deutschland)>).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은 이 기본 개념 가운데 특히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5개 항목 '문명과 문화', '진보', '제국주의', '전쟁', '평화'를 선정하여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푸른역사 펴냄) 5권의 책으로 번역 출간했다. 코젤렉 개념사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책들은 앞으로 한국 근대에 대한 개념사적 연구에서 초석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을 우리말로 번역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과연 실현 가능한 기획인지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5권을 보면서 내 회의가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정말 어려운 작업의 시작을 연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 출간된 책들을 보면서 119개 기본 개념 가운데 5개를 우선 선정한 기준이 뭔지가 궁금했다. 내가 아는 한, 코젤렉 개념사의 시작과 끝은 '역사'와 '근대'다. 이 두 개념이 코젤렉 개념사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전의 양면이다.


▲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전5권,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안삼환·황선애·황승환·권선형·한상희 옮김, 푸른역사 펴냄). ⓒ푸른역사

한국의 '개념사' 연구를 위하여

결국 문제는 그들의 근대가 아니라 우리의 근대를 해명하는 개념사 연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나는 한국적 개념사 연구의 이정표가 된다고 생각하는 네 항목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서구 개념사와 다르게 우리의 개념사 연구는 비교사적 문제의식을 갖고 해야 한다. 우리의 근대가 그들의 근대를 번역하는 것으로 형성됐지만, 번역이란 결국 단어가 아니라 의미의 번역이기 때문이다. 역사 개념을 예로 들어 보자. 전통 시대 서구에서는 역사를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의미하는 복수로 사용했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에서는 역사를 사마천 이래로 천명(天命)의 반영으로 여김으로써, 왕조의 정통성 문제와 직결시켰다.

동아시아에서 역사는 왕과 신하 모두의 삶을 규제하는 '숨은 신'으로 작동했다. 역사의 심판이라는 관념이 서구에서는 근대 이후에나 생겨났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전통 시대부터 있었다. 요컨대 이 같은 전통 시대 역사관과의 연속성과 단절 속에서 오늘의 한국인들은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집합 단수 '역사' 개념을 사용한다.

둘째, 한국에서 서구의 '모던(modern)'이 근대와 현대로 나눠져 번역되는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모던의 분화는 한국의 근대가 자생적이지 못하고 외부의 충격으로 두 단계로 전유됐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근대', 미국과 소련에 의한 '냉전적 현대' 모두가 우리의 모던이다.

한국의 개념사는 문명의 도전과 응전에 의한 문명 교류사의 관점에서 연구돼야 한다. 근대적 삶의 병리학은 진보 개념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나듯이 미래의 목표가 현재적 삶을 구속함으로써 "빨리 빨리"라는 가속도의 시간성을 내면화하는 것에서 발생했다. 코젤렉이 근대 역사 개념의 특징을 '지나간 미래'라고 규정했듯이,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시대를 언제나 위기며 과도기로 여기며 쫓기는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이 같은 병리학적 현상은 '돌진적 근대화'를 이룩한 한국에서 특히 심각하게 나타난다.

셋째, 서구 근대를 번역하여 형성된 동아시아 근대성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기본 개념이 바로 '동아시아'다. 동아시아란 경험 공간과 기대 지평의 융합으로 형성된 대표적 '운동 개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동아시아를 개념이 아닌 담론으로 접근한다. 개념 분석과 담론 분석의 구분이 필요하다. 담론 분석은 문장을 통해서 드러나는 논증의 체계를 연구한다면, 개념 분석은 단어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관념과 의미에 집중한다.

동아시아는 공산주의처럼 아직 없는 현실을 만들 목적으로 발명한 허구다. 동아시아 개념은 서구 근대의 도전을 응전하는 과정에서 경험 공간과 기대 지평의 융합으로 만든 '상상의 지리'다. 이 개념이 내재하는 '탈아입구'와 같은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을 드러내는 것이 담론 분석이다. 따라서 탈근대에서 동아시아 개념을 재사용하기 위해서는 담론 분석이 아니라 개념사 연구를 해야 한다.

넷째, 한국의 근대로의 이행은 남북한 두 국가가 존재하듯이 두 가지 길로 실현됐다. 최근 남북한 용어의 차이를 비교 연구하는 성과가 발표됐다. 민주주의, 부르주아, 사변, 소행, 상속 등에서 의미의 차이는 바로 근대화 방식과 체제의 차이를 반영한다. 개념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일 뿐 아니라 현실이 나갈 길을 비추는 등불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개념의 분단부터 극복해야 한다.

개념사를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연구도 많고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이 이번에 번역 출간한 5권의 책은 그 시작이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장대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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