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이장과 대학 교수.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 <이끼>를 봐도 마을 이장은 산전수전 다 겪어 이문에 밝은 동네 어른이고, 교수는 현실에서 약간 물러나 세계를 조망하는 이미지를 갖는다. 더군다나 그 교수의 전공이 경영학이고, 동네에서는 농사꾼이며, 아파트 건설에 반대하는 이장이라면 고개가 더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다.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 교수' 겸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신안1리 전 이장'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런 '갸우뚱함'을 안고 시작됐다. '생태'와 '환경'을 외치는 목소리는 꾸준히 커져왔다. 하지만 이를 경영의 관점에서 볼 경우 인본주의를 외치며 실제로는 자본주의에 충실한 기업들의 허울 좋은 구호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는 기업의 성과를 위한 학문을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움에 어떻게 적용했을까?


ⓒ프레시안(최형락)

시골 마을의 콘크리트

7월 26일 푹푹 찌는 날씨 속에 조치원역에 내렸다. 택시를 타고 5분여를 달리니 주위의 회색 건물이 사라지고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철길 세 개를 건너 신안1리에 도착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처음 마주한 풍경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마을을 둘러싼 야산이 무색할 정도로 높게 지은 아파트다.

지난 2007년 첫 삽을 떴지만 약 1100여 세대 중 15채만 분양되면서 지난해 하반기 공사가 중단됐다. 뼈대에 콘크리트만 굳힌 채 시간이 멈춰버린 구조물의 텅 빈 유리창에는 아직 창틀에서 벗겨지지 않은 파란색 비닐들이 버려진 공사장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강 교수가 지난 5월에 쓴 <나부터 마을혁명>(산지니 펴냄)에는 마을 유지와 토건 세력, 관료가 영합해 개발 이익을 위해 전원 마을 한 복판에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마을 주민과 함께 이에 저항하던 그는 이장이라는 직함을 갖게 됐다. 마을에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오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풀뿌리 운동에 대한 그의 확신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됐다.

단지를 두른 펜스를 따라 오르막길을 5분 정도 오르니 벙거지 모자를 쓴 강수돌 교수가 보였다. 그를 따라 아파트 단지 맞은편 샛길로 들어섰다. 샛길을 오르는 중간에 고인 샘물로 얼굴을 씻으니 더위가 조금 가셨다. 산 중턱에 그가 직접 지은 흙집이 보였다.

최근에 낸 책 <이장이 된 교수, 전원일기를 쓰다>(지성사 펴냄)와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생각의나무 펴냄)에서 경제의 양적 성장을 넘어 인간의 삶의 질과 생태와의 조화를 꿈꾸는 그는 개발·교육·노동 등 사회 현안에도 목소리를 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흙집에 앉아 그와 나눈 이야기들은 콘크리트 빌딩 숲에 갇혀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들이 음미할 가치가 있다.

자본주의가 만든 사회적 DNA

-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생태나 환경에 주목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프레시안(최형락)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받았던 일차적인 느낌은 '이건 내가 배우고 싶었던 공부가 아닌데'라는 것이었다. 그 느낌의 뿌리를 파고보니 결국 이 학문이 추구하는 합리성이라는 건 결국 생산의 효율성이었다. 투입은 가급적 줄이고 산출은 늘리는 과정에서 사람과 자연이 망가지고 심지어 영혼까지 상처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돈벌이 경영에서 오는 뒤틀림 현상인 것이다. 경영학은 기업 단위의 분석을 많이 하는데 주로 경영자 입장에서 관리·정책 지침을 만드는데 치우쳐 있다. 그런 방법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노동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삶의 경영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돈의 경영 패러다임에서 보면 전혀 말도 안되는 이야길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 생태와 삶의 질을 외치는 목소리는 꾸준히 늘어왔다. 기업들도 제각기 나름의 '인간 중심 경영'을 표방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했을 때 따르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워낙 돈의 패러다임에 오래 젖어있다 보니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평소에 자주 쓰는 말인데 '사회적 DNA'가 그렇게 변해버린 상태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해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경쟁의 바다'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10년 전과 비교해서 현재가 조금 더 쾌적해지고 행복해졌는지, 아니면 가면 갈수록 경쟁이 격렬해지면서 피폐해지는지 성찰해야 한다. 우리가 늪에 빠졌는지 해방의 길로 가고 있는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받아들인 경쟁 패러다임이 점점 늪에 빠져들고 있다. 이 물결을 원천적으로 부정해서 진공 상태로 살아갈 순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직접적인 타격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을 쳐야한다. 다른 패러다임의 실현이 가능하다면 해내야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소위 '대안 언론'도 경쟁의 물결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진 않지만 그 자체가 답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무자비한 광고 자본에 빠져들지 않으려 애쓰는 것 아닌가?"

"풍요가 해방을 억압한다"

강 교수가 말하는 '다른 패러다임'의 정체는 뭘까? 현재 인류가 구축한 풍요로움을 이제는 배분하는 데 신경 써야한다는 것일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풍요라는 말은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 지금까지 진보적인 이론 입장에서는 물질적인 풍요가 전제될 때 사회 관계의 해방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물질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또는 물질적인 풍요가 지나쳐 오히려 억압받는 것 같다.

일례로 지금 현재 첨단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위치 추적 기술이 노동 현장을 감시하는데 사용된다. 물적 진보, 과학 진보가 이루어지는 커다란 맥락이 자유나 해방보다는 명령과 순종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론에서 말하는 물질적인 풍요는 현실의 풍요와는 질이 다르다. 지금까지 진행된 물질적 풍요의 규정은 결국 자본이나 권력이 정했다.

주거나 먹을거리 등 생존의 문제로부터 해방되면 여유로운 문화 생활이 가능해지고,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개성을 살리는 창의적인 생활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더욱 더 빨리 인간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기술,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추출해나가는 기술이 주도적으로 발전했다. 돈 되는 고급 아파트는 넘칠 정도로 많이 짓지만 빈민을 위한 임대주택은 몇 채 짓지 않는다."

인류가 구축한 풍요가 정당한 과정을 통하지 않았다고 해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평한 분배를 통해 이익을 나누고 바람직한 성장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이번에도 강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풍요가 아니다. 빈곤 문제의 해결은-가난이라는 용어가 부담스럽다면-모두가 검소하게 사는 식으로 되어야 할 것 같다. 이미 마하트마 간디부터 시작해 많은 이들이 설파한 것처럼 전 세계가 미국의 중산층 수준으로 생활하려면 지구가 5개 있어도 부족하다.

현재도 이미 석유처럼 재생 불가능한 자원이 고갈되고 있다. 지구촌 사람들이 남의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전쟁하는 모습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검소해져야 된다. 일부터 찌들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소박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가난함이 가르쳐주는 것이 많다. 두려워할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한다. 가난을 풍요로 해결하려는 것은 인류의 미래가 아니다."

- 이야기하고 있는 '검소함'은 결국 '자기 통제'가 필요하다는 뜻인가.

"오히려 자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필요에 충실하게 감응하는 상태, 그게 자율이고 책임이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흙집 거실에는 30년 전에나 나왔을 구형 선풍기가 덜덜거리는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파이의 원천은 생태"

- 그런 '검소함'이 생태나 환경이라는 대안으로 나타난다는 건데, 사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와 닿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사회적 DNA' 때문인가? 일례로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그게 환경과 생태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정부가 표방하는 일련의 정책 방향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을 때도 있다.

"환경과 생태 문제는 경제나 정치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4대강 사업을 예로 들었는데 1차적 우려는 식수 오염이다. 식수 오염은 바로 경제적인 문제이면서 생태적인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식수가 오염되면 물을 사다 먹는 방법밖에 없다. 이미 생수 사업이 시작된 지 20년 가까이 됐다.

<살림의 경제학>(인물과사상사 펴냄)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주류 경제학의 성장 패러다임은 파이의 크기만 문제 삼고 있다. 파이의 크기만 무한정 키우면 저절로 나눠진다고 했지만 지난 수십 년의 경험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파이의 성장이나 분배냐는 차원에서조차도 파이의 원천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없다. 결국은 생태다. 성장은 경제적 문제이고 분배는 사회적 문제인데 생태는 이 두 가지를 다 아우를 수 있다. 파이를 아무리 키우고 공정히 나눠도 각 조각이 자연 훼손과 오염을 전제로 한다면 행복해질 수 없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사회·문화·교육 측면에서 얼마나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가가 핵심 문제다. 그 답이 '노(no)'라면 갈 길이 아닌 것이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측만 문제인 건 아니다. 샛강에 들어가는 온갖 오염물질들은 가정과 공장에서 나온다. 교육은 백년지대계지만 강물은 수천년지대계 아니겠나. 잘못된 것을 고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4대강 사업처럼 진행할 건 아니다. 오염의 원천을 없애고 이미 오염된 것을 조심스런 형태로 정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현재의 4대강 사업은 말 그대로 '사업'의 일종이지 '살리기' 운동은 아니다."

- 다시 한 번 검소함으로 돌아가서 현대인들은-'사회적 DNA'에 따르면-이미 소비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데 익숙하다. 검소함으로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무엇이 있나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이 표현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집 <월든>에 나오는 표현인데 이만큼 중요한 게 없다. 책이나 대화, 사색 또는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 정체성, 삶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들어가 보는 여행. 이런 게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무엇이 자신을 만족시킬지 몰라 일시적인 소비로 채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만남이다. 다른 이와의 만남. 소모임이나 풀뿌리 모임은 사회 변화에 중요한 요소다. 종교적으로 수양, 마음의 공부를 강조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사회 변화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는 어떤 모습의 삶, 자본 권력이 일방적으로 만들어주는 미래상이 아니라 참다운 인간상, 이웃과 자연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풀뿌리 모임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읽었던 책, 보았던 영화, 자기가 체험한 경험과 여행 등 모든 것을 포함해 이웃과 나누고 공감해야 한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배우다 한 차원 고양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삶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소비를 통해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거나 자아실현을 한다는 착각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다른 패러다임의 다른 인간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실천력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잔업을 더 해서 번 돈으로 대형 마트에 가서 구운 소금을 사는 것보단 그 시간에 가족들과 모여 소금을 솥에 구워서 먹어보는 것이다.

멜라닌, 환경 호르몬, 아토피 등 식량 위기에 관련된 사안들을 보면 현재 우리가 먹는 건 독약에 가깝다. 경쟁 시스템 못지않게 이런 데에 무감하면 파멸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발을 빼는 게 필요하다. 자신이 견디기 어려운 현실의 고통을 정직하게 바라보기만 해도 대안을 고민하게 된다. 또한 한발 앞서 실천하는 사람들과 결합하면 그런 구조에 반복적으로 휘말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강 교수는 5년 동안 이장을 맡아오면서 아파트 반대 싸움만 해오지 않았다. 마을 주민, 인근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골목 축제를 기획했다. 마을 아이들을 모아 글쓰기 교실도 진행했다. 마을에 도서관을 꾸며 문화 교양 강좌도 열었다. 단순한 즐거움이나 배움을 넘어, 함께 어울려 소통하기 위해서다.


ⓒ프레시안(최형락)

한 가지 궁금증이 남는다. 최근 펴낸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를 보면 외모나 말투에서 풍기는 느긋함보다는 날선 비판이 강하다. 한편으론 발을 빼고, 한 쪽 발은 담그는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그의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밑바탕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 크게 보면 대학 선생인 나 자신도 노동하는 형태가 다를 뿐 마찬가지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생산직 노동자의 경우 노동조합 대의원들이 서로 물량을 더 끌어오려고 경쟁하는 것이다. 또한 돈만 된다면 잔업, 철야 특근을 마다하지 않는 풍조도 있다. 임금 단체 협상 과정에서만 명시적으로 시급이나 복지에서 더 나은 대우를 쟁취하는 듯 하지만, 결국 노동의 굴레 속으로 더욱 빠져들게 되는 꼴이다. 노동권을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굴레로부터 벗어날 권리까지도 포함해야 자유·해방이 가능하다.

궁극적으로 노동 시간을 줄여야 하고 노동을 하는 관계가 자기과 세상을 죽이는 관계 속에서 편성되어선 안 된다. 자아실현 과정이 노동이 되어야 하고 인간적인 유대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관계가 노동 현장에 구현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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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역시 하나의 담론 체계이기 때문에, 작가가 어떤 의제를 독자에게 제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 설정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황석영이 '강남 형성사'에 대해 쓰고 싶었고, 또 그것을 실제로 써냈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촉수가 매우 민감하게 발달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의 강남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나 행정구역이 아니다. 그것은 압축 성장의 근대화가 만들어낸 뒤틀린 욕망의 표상 공간이자, 여타 지역의 거주민으로 하여금 강남적 삶의 방식을 끝없이 모방하고 선망하게 만드는 한국판 궁정 질서다. 그러니 세칭 '강남 공화국'이라는 표현은 현실에 대한 심각한 오인을 낳는다. 강남이라는 표상 공간을 형성하고 지탱시키며,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남에 대한 경쟁적이며 모방적인 삶의 투쟁으로 이끄는 힘과 의례와 역학은 사실상 민주주의와 무관하다.

서구의 근대를 추동해냈던 부르주아들이 궁정의 삶을 경멸하면서도 그것을 분열증적으로 모방해왔듯이, 황석영의 <강남몽>(창비 펴냄)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은 제 각각의 욕망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강남적 삶의 질서 속에 용해된다. 그러나 모방에서도 승자와 패자는 남는 법이며, 선택과 배제의 질서 역시 끈질기게 관철되는 법이다. 어떤 자들에게 강남의 형성과 성장 과정은 '황금광 시대'로 비치겠지만, 또 어떤 자들에게는 '악마의 맷돌'로 경험될 것이다.


▲ <강남몽>(황석영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강남몽>은 상대적으로 '황금광 시대'의 열정으로 충만해 있는 인물군상에 포커스를 집중하고 있다. 1장의 주인공인 박선녀는 "인맥과 금맥은 물처럼 바뀌는 것"이라는 세속적 성공 신화를 룸살롱과 나이트클럽과 같은 밤 문화의 교차로에서 체득하며, 부와 권력을 잔뜩 쥐고 있는 남성들 사이를 오가면서 복부인으로 승승장구한다. 2장의 주인공인 김진은 일제 말기 관동군 밀정으로 출발하여 해방 후에는 미군의 정보 요원으로, 이후에는 건설 업체 회장으로 변신을 거듭하는데, '권력의 교차로'에서 인맥과 비자금으로 정보의 흐름을 장악함으로써 기업가로서의 성공 신화를 창출하는 인물이다.

3장의 주인공인 심남수는 어떠한가. 박기섭과의 우연한 만남 끝에 기획 부동산업에 뛰어드는 인물인데 "길 가는 데 땅이 있고 땅은 돈이 된다"는 박기섭의 신념을 확대 재생산하는 인물이다. 공무원 및 관료들과의 유착과 로비를 통해서 강남 개발 계획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헐값에 원주민의 토지를 매입, 이를 '떼기' 등의 방식으로 호가를 높인 후에 되파는 방식으로 부동산 투기 및 거액의 매매 이익을 취득한다. 이러한 사업 수완 때문에 청와대의 정치 비자금을 형성하는 매개자 노릇도 하게 된다.

4장의 주인공인 홍양태나 강은촌과 같은 조폭들 역시 강남에 건설되는 호텔을 근간으로 한 유흥업소의 각종 이권을 독점하기 위한 기업형 조폭의 욕망을 실현해나가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윤무혁과 같은 중앙정보부 요원을 매개로 정치 폭력의 수행을 통해 일시적으로 밤의 대통령으로 성공 신화를 이루는 듯하지만, 결국엔 비정한 정치의 희생양이 되는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게 황금광 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환기시키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5장에서의 임정아와 그 주변 인물이다. 이들은 1970년대의 평범한 민중들이 그렇듯 이촌향도의 대열을 따라 희망을 품고 상경하지만, '광주 대단지 사건'과 같은 도시 빈민의 헐벗은 삶의 질서 속에서 거듭 절망적인 상황에 봉착하게 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가여울 정도의 순정한 인간애와 삶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지만, 희망의 실현은 멀고 아득하다.

<강남몽>의 시작과 끝은 실제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수미상관의 구조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 소설에서 제시되는 시간적 배경은 일제 말기에서 시작되어 1995년까지의 한국현대사의 거의 전시간대를 포괄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대사의 주요한 사건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쉴 새 없이 스쳐간다. 일제 말기와 해방, 10월 항쟁과 제주 4·3 항쟁, 김구 암살, 4·19 혁명과 5.16 쿠데타, 광주 대단지 사건, 박정희 암살과 신군부의 대두 등의 사건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이 소설 속에서, 인과적 연계를 갖고 나타나지 않고 다만 등장인물의 가열한 욕망의 부침을 보조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기제로서 활용된다. 작가가 가장 공들여 묘사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김진, 김창수, 이희철과 같은 일제 당시 일본군이나 경찰에서 친일 인사로 활동하다가, 해방 이후 변신을 거듭해 기업가나 권력의 실세로 등장하여 권력과 자본의 합종연횡을 연출하고 있는 인물이다(주인공도 아니면서 이례적으로 장황하게 박정희를 강직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자못 기묘해 보인다). 중반부를 넘어갈수록 윤무혁과 같은 중앙정보원 및 국가정보원 인사가 자주 등장하여, 권력과 자본의 치밀한 관리 및 이권거래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강남몽>은 한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게 만드는 이야기의 매력이 있다. 물론 이는 황석영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역량 탓이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권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에 대한 묘사나 성공과 몰락에 대한 드라마틱한 압축적 구성이 일종의 영웅 신화의 구조, 더 정확히 말하면 소영웅들의 인생 극장 식으로 병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갓 헛꿈에 불과할지라도 가히 '황금광 시대'를 연상시키는 등장인물의, 강남을 매개로 한 성공에 대한 가열한 열망과 절망은 시종일관 치밀한 책략을 통해 가동되고 있는데, 그것이 대중 독서의 차원에서 무협지와 같은 강렬한 흡인력을 끌어내는 것은 분명하다. 권모술수의 현실주의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독자들이 오늘의 강남을 형성시킨 한국적 압축 성장에 대한 입체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이해에 도달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반대로 대중적 차원에서는 결국 한국에서의 부와 권력, 그리고 폭력의 신성동맹이란 그저 힘 있는 세력들 간의 이해관계의 간통이나 유착에 불과한 것이고, 힘없는 대다수 서민들이란 소설의 끝에서 발가벗겨져 구조되는 임정아처럼 그저 언젠간 나아지겠지 하는 선량하지만 결국 막연한 희망으로 살아갈 뿐 아닌가라는, 별다른 의식의 충격 없는 일상적 냉소주의의 확인이나 감정의 휘발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등장인물의 인생의 부침이 대개 '우연'에 의해 출발한다는 것 역시 좋은 소설적 설정은 아니다. 소설의 묘사를 따르면 "쭉쭉빵빵 꽃"핀 몸매밖에는 없었던 여상 출신 박선녀는 우연히 모델로 발탁되고 또 새끼마담이 되고, 또 김진을 만나고, 또 심남수를 만나 부동산 투기에 눈뜬다. 김진은 어떠한가. 유년시절 우연한 계기로 김창수를 만나 밀정이 되고 특무기관에 차출되더니, 해방이 되어서는 서울 거리에서 다시 우연히 이희철을 만나 미군 특무기관원이 된 후 승승장구한다. 심남수는 또 어떤가. 군대 제대 후 취직 시험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군대 시절의 동료를 만나 만취해 통행 금지를 어겨 유치장에 갇히는데, 거기서 부동산 업자 박기섭과 "운명적으로" 만나 인생역전이 시작된다. 기자를 꿈꾸던 청년의 변신치고는 너무 돌연하다.

작가 역시 이러한 소설 구조상의 문제를 알고 있는 때문인지 '몽자류 소설' 등의 전통소설 양식을 거론하며 "서서히 몰락해가는 상류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현실 세계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를 드러낸다"는 시각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강남몽>에 등장하는 가령 김진 류의 권력 해바라기형 인물은 현실 속에서 결코 몰락하지 않았다. 반대로 1997년 이후의 '거대한 전환'을 겪으면서 오히려 집단적으로 몰락하고 있는 사람들은 임정아와 같은 '하류가족'이라는 명백한 사실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강남 형성기에 단단히 한몫을 챙겼던 김진 류의 세력들이야말로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 이후에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강남 형성기를 일종의 성공 신화로, 황금광 시대로, 불패 신화로 생각하고 있는 편에서야 그것을 '강남몽'으로 인식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다수의 독자에게 그것은 이제는 도착의 형태로 굳어진 '헛꿈'이다. 소설 <강남몽>은 이런 '헛꿈'에 고통 받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보다는, 도착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진실로 그것을 물신의 꿈 혹은 유토피아의 실현으로 생각했던 뒤틀린 인간들의 사회생태학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옛 표현을 떠올리면, 부르주아적 리얼리즘의 고착화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 소설에는 진실로 '강남'의 너머에서, 오늘의 한국인이 꾸어야 될 '진짜 꿈'의 비전과 설계도가 생략되어 있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대중들로 하여금 '헛꿈'을 꾸게 만드는 현실의 세목은 부지기수로 널려 있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선망과 공포의 복합 감정으로 대중들의 내면은 구조화되어 있다.

작가를 포함하여 어떤 독자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벌거벗겨져 생환되는 임정아의 모습에서 희망이나 감동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나는 그녀에게서 무방비의 상태로 세계의 거대한 폭력에 가감 없이 노출된 이 시대의 선량한 호모 사케르가 자꾸 연상되어 착잡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졌지만, 그 사건 이후 자본의 욕망은 오히려 더 팽팽해져졌다. 그래서 나는 <강남몽>을 '지지할 수 없는 문제작'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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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 시(視)는 흡착성이 뛰어나서 제 앞에 다른 말과 붙어서 잘 쓰인다. 합성어를 쭉 훑어보면 시가 중·앙과 어울려 존중의 맥락으로 쓰이는 단어보다 경·냉·멸·천과 어울려 비하의 맥락으로 쓰이는 단어가 훨씬 많다. 우리가 서로 인정하며 살기기보다는 인정받지 못해서 고통 받으면 살아온 역사를 어휘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오죽했으면 후자를 아우르는 무시(無視)는 있지만 전자를 아우르는 유시(有視)는 없다. 무시라는 말은 우리가 잘 쓰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뜻이 심각하다. 뻔히 사람을 앞에 두고도 못 본척하거나 엄연히 일을 했는데도 깔아뭉갤 정도로 존재를 무존재로, 또는 건강한 사람을 병든 사람으로 만드는 인격 살인의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맹자는 동양 철학도 개념적 사유가 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훗날 널리 쓰인 철학 개념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들어본 인의, 성선, 사단, 양지, 민본, 왕도와 패도 등을 동양 철학의 대표적인 개념으로 알고 있지만 이들 모두 맹자가 조금 손보아서 내놓았거나 새롭게 만든 것이다.

이 말은 맹자의 것이라기보다 동양 철학의 것으로 더 알려져 있다. 또 '공자왈 맹자왈'이라고 해서 맹자를 공자와 같은 등급으로 쳐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 뜻이 영 아니다. 이 말은 책상물림의 공리공담을 가리키니 시대의 아픔을 누구보다 아파했던 맹자가 들으면 기절초풍하고도 남을 일이다.


▲ <맹자 : 바른 정치가 인간을 바로 세운다>(장현근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왜 이렇게 서두를 시작할까? 맹자도 '우리'처럼 철학사와 한국의 인문학 풍토에서 무시에 가까운 대접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약간 다혈질에다 언변이 뛰어났던 맹자가 살았더라면 제 스스로 인정 투쟁이라도 했겠지만 죽었으니 다른 사람의 손길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근래에 나온 장현근의 <맹자 : 바른 정치가 인간을 바로 세운다>(한길사 펴냄)는 맹자의 그런 억울함을 풀어줄 만한 책으로 볼 만하다.

이 책의 얼개를 간략하게 더듬어보자. 먼저 맹자의 삶과 시대를 전식으로 내놓는다. 이어서 10가지 반찬을 만들어서 각각을 요령 있게 풀이하고 있다. 예컨대 공자의 사상을 인의로 압축하고서 그것을 힘의 정치를 반대하다로 여기고, 당시 사상계를 휩쓸던 개인주의자 양주와 국가공리주의자 묵적의 주장을, 맹자의 말을 빌어서 군주를 인정하지 않고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짐승으로 안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후식으로 맹자의 후예들이 맹자를 높이 받들었던 이야기와 참고할 만한 자료를 내놓고 있다.

지은이는 왜 이처럼 풍성한 맹자 밥상을 차리려고 했을까? 서너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맹자> 원문을 통해 맹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살펴보고, 맹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유가 사상의 원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통 시대 동아시아 국가들이 추구한 왕도의 진수를 이해하려고 한다. 아울러 현대 정치의 병폐에 대응한 유용한 방안과 대안의 단서를 제공하려고 한다.

책의 구성을 보면 먼저 배경 설명을 하고 다음으로 원문 번역을 제시하고서 마지막으로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책에서는 지은이보다는 맹자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그 결과 맹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겠다는 전략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요령 없이 <맹자>를 끝까지 읽겠다며 첫 장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실패한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읽기 전략은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배경과 번역 그리고 해설로 이어지는 10가지의 반찬을 쭉 훑어 내린다면 유가 사상의 원리라든지 왕도의 진수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지은이가 해설과 이해를 방점을 둔 탓에 10가지 반찬을 어떻게 골라먹고 떠먹는지에 대한 안내가 약하다. 이 원인으로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10가지 반찬의 논리적 연관성이랄까 유기적 상호관계랄까 이에 대한 배려가 약하다. 반찬이 다 좋은 줄은 알겠지만 그것이 우리 몸에 들어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해설을 넘어선 지도의 제시가 있었으면 좋은데 없다.

예컨대 맹자의 사상을 첫째 규범의 근원과 근거, 둘째 인간의 자각과 지각, 셋째 개인적 노력과 넷째 사회적 실천으로 나누어보자. 첫째는 천명·인의·성선이, 둘째는 사단·양심, 셋째가 양기·지언·군자, 넷째가 의전·왕도·권도 등이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구분을 따른다면 사람은 도덕적 인간이 되어서 도덕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천명과 동일선상에 있는 성선으로서 인의를 존중하고, 자신의 의식에 현전하는 사단(도덕의 싹)과 양심을 자각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같은 사람도 때에 따라 다르므로 기(氣)를 기르고 말의 의미를 구분하는 등 노력을 하고 그 노력의 결실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도록 하기 위해서 정의로운 전쟁을 사양하지 않고 상황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왕도를 현실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개념적 지도를 그리게 되면 맹자의 사상은 입구와 출구가 다 갖추어지지 않을까 싶다.

다음으로 현대 정치의 병폐에 대안 제시는 만족스럽지 않다. 이 부분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예컨대 힘의 정치를 반대하는 인의를 보자. 지은이는 <맹자>가 각각 인의와 이익을 대변하는 맹자와 양혜왕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에 주목을 하고 있다. 아울러 맹자는 모든 것에 이익을 앞세운 정치가 파멸적인 경쟁으로 치닫는 것을 힘주어 경고하고 있다. 여기까지 읽으면 우리는 맹자와 양혜왕을, 현실의 인물과 현안으로 대입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의료보험 민영화, 4대강, 자유무역협정, 해외 파병 등을 떠올 수 있다. 맹자의 과거와 우리의 오늘날을 한 줄로 꿰매는 생각 보따리를 떠올리는 것은 철저하게 읽는 사람의 몫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은이가 책으로서 <맹자>나 인물로서 맹자로부터 객관적인 거리를 두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객관적 거리는 나와 맹자를 나누어보려는 인식의 준비 자세이다. 준비 동작을 하지 않으면 나는 맹자와 자꾸 닮아져서 하나가 되는 것을 과제로 설정하게 되지 맹자의 장단점을 나누어서 보려는 시도를 하기 어렵게 된다. 그 결과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이 놓지 않은 실수를 하지 않았나싶다. 이런 주문이 이해와 해석에 목적을 설정한 지은이에게 엉뚱하게 해석과 비판을 하지 않았느냐고 트집으로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비판적 책 읽기를 위해서 사족을 하나둘 그려보고자 한다. 하나는 들어가는 말의 제목을 성인이 아닌 맹자를 만나자라고 해놓고 그곳과 후식에 해당되는 부분에서 전통적인 평가를 받아들여 맹자를 버금 성인(아성)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모순으로 보인다. 그리고 너무 맹자를 인간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서 그런지 성인으로서 맹자 이미지를 너무 급하게 지우려고 하고 있다.

지은이가 동양 사상의 성인이 초월적인 존재로 보면 서양의 신과 비슷하지만 현실의 삶 속에서 탁월한 성취로 보면 신과 다르다고 본다. 차라리 성인을 신과 대비시키기보다는 동양 사상에서 맹자 이래로 누차 강조해온 성인과 범인(보통 사람)의 소통성에 주목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이익을 넘어서 인의의 길로 들어서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 맹자이기도 하지만 성인 맹자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기성을 유보하고 호혜성 나아가 공동선을 말하고 그곳에 나아가려면 이해에 갇힌 자연인을 부분적으로나마 넘어서는 것이고 그것이 양혜왕을 질타하는 맹자의 목소리에 가까우리라 생각된다.

다음으로 지은이는 인간 맹자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제자백가만이 아니라 명청 시대 사상가 심지어 현대 연구자의 성과를 끌어들이기도 있다. 아쉽게도 현대 연구자는 국적을 나누기는 좀 뭣하지만 본인을 제외하고서는 대만 출신 연구자에 집중되어있다. 꼭 연구의 민족주의를 내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각을 위해서도 백민정의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이혜경의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 등 <맹자> 연구 단행본 정도는 비평이 아니면 소개라도 해주었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무시 받았던 맹자의 누명을 해원해주었다면 오늘날 고군부투한 동업자의 신원 운동도 그에 못지않게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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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그 중의 한 명이지만, 교육 문제를 다루는 글들은 대개 통탄과 비분강개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통탄은 경우에 따라 적실한 감동이 있기도 할 것이고, 그래서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겠지만, 대개는 마음 아픈 사람 마음 한 번 더 아프게 하고 표표히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한국 교육을 칭찬하는 사람은 버락 오바마 한 사람 뿐인 것 같고, 좌파건 우파건, 교사건 학생이건 학부모건 어느 누구도 지금처럼 놔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참으로 기묘한 것은 누구나 저주를 퍼붓는 이 극악한 체제가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 탄탄하다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화할 조짐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프랑켄슈타인이 된 아이들


▲ <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김종휘 지음, 양철북 펴냄). ⓒ양철북
이런 와중에서 만난 김종휘의 책 <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양철북 펴냄)를 꽤 반갑게 읽었다. 김종휘는 문화평론가이면서 서울시 대안교육센터인 '하자 작업장'에서 오랫동안 10대들과 부대끼며 '노리단'이라는 한국 최초의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적 기업을 일구어낸 경험을 바탕으로 청년들의 사회 경제적 삶에 대한 대안을 논하고 있다.

김종휘가 바라보는 오늘날 청년들의 현실은 '불효자는 놉니다'는 말 하나로 집약될 것 같다. '건국 이래 가장 높은 학력을 가졌지만, 건국 이래 가장 일상화된 불안에 사로잡혀, 건국 이래 가장 많이 놀고 있는' 바로 그 청년들 말이다. 이렇게 살아봤자 청년들은 '좀비'가 될 뿐이다.

그래서 김종휘는 외친다. "이제야말로 청년들이 손을 잡고 제대로 한판 놀아봄으로써 인생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이다. 동감한다. 죽음의 트라이앵글(수능-내신-논술)을 돌파해서 대학을 가 봤자 스펙 5종 세트(학벌-학점-토익-연수-자격증)가 기다리고, 그 정글을 헤쳐 대학을 졸업해봤자 기다리는 것은 청년 실업이거나, (맥도날드 점원처럼 규격화되고 기계적인 단순 노동으로 채워지는) '맥잡'뿐이니깐. 그래도 공교육 학교 선생 노릇하며 근 10년간 한숨만 쉬면서 살아온 나 같은 인간에 비하면 김종휘는 꽤 자신만만하다. 그는 확실히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본 것 같다.

김종휘는 우선 아이들의 '정보적 신체'에 주목한다. 예컨대, 물건이 고장 나면, 농경 사회의 신체를 가진 이들은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았고, 산업 사회의 신체를 가진 이들은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지만, 정보적 신체를 가진 오늘날 청년들은 개인 미디어를 통해 연결된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비슷한 문제를 겪어본 타인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2004년 당시 어느 포털 사이트에 개설된 280만 개의 카페 중에 10대가 개설하였거나 운영자인 카페가 100만 개를 넘었다고 한다. 하긴, 아이들이 아이폰을 쓰는 모습을 옆에서 볼라치면 참 놀랍기 그지없다. 물론 나는 이런 식의 '정보화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과 찬탄과 바탕을 둔 이러저러한 규정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지만, 어쨌든 이런 아이들을 30년, 40년 전과 똑같은 교실에 가둬놓고 정석 문제나 풀게 하고, 야간 자율 학습 빠졌다고, 머리 안 깎는다고 야단치고 속박하는 것은 그야말로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종휘는 오늘날 아이들이 '프랑켄슈타인' 같다고 말한다. 부모 자신이 가진 온갖 욕망의 조각을 아이에게 덕지덕지 갖다 붙여 조잡하게 꿰매어 놓으니 그야말로 프랑켄슈타인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에게 '미래의 주인공'이라고, '누가 뭐라든 너를 응원한다'고, '네 맘대로 할 자유를 주겠다'고 속삭인다.

물론 이 모든 속삭임은 '좋은 대학을 가야한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고. 이러니 아이들은 스스로 감각의 문을 닫고 어른들의 물음에는 '몰라요, 그냥요, 싫어요'라는 한 단어짜리 답변만 주억거리고는 자신들만의 세계로 숨고 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경험을 돌려주라

김종휘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경험 세계'가 아이들의 성장 코스에서 깨끗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자기 힘으로 직접 크고 작은 일상사를 진행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촛불을 들고 세상 앞으로 나올 만큼 성숙한 판단력을 갖고 있으나, 늘 관리당해 왔고, 거기에 복종하고 자발적으로 순종해온 기억이 압도적이었을 뿐 '날 것 그대로의 세계'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안에 사로잡힌 존재가 되어 외부의 작은 충격으로도 인생이 유리잔처럼 금이 가고 깨져버'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종휘는 이 책 곳곳에서 아이에게 '경험을 돌려주라'고 수없이 외친다.

십대들을 정답과 모범으로 짜여 있는 교실에만 있게 하지 말고 우연한 일들의 연속인 현실에서 직접 문제들과 만나게 하고, 그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주라. 그러면 십대 스스로 생명력을 발휘하며 살아있는 이야기를 만들게 될 것이다. (60쪽)

그는 이 책에서 아이들이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수많은 실험을 들려준다. 그 자신이 기획하고 참여한 노리단의 예가 있다. 다섯 명의 30대 공연 전문가와 다섯 명의 10대가 만나 시작한 놀이패 '노리단'에서 10대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성장하여 지금 20대의 공연 전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노리단은 공연, 조형, 교육, 미디어 분야에서 무려 66명이 함께 일하는 유망한 청년 사회적 기업이 되어 있다.

3년 동안 오직 여행을 통해 직접 다리품을 팔아 세상을 만나고, 그 속에서 가슴 뻐근한 만남과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을 키워나가는 여행 학교 '로드 스콜라', 20대 지적 장애 청년을 가장 잘 웃고 인사성 밝은 요리사로 키워내는 사회적 기업 '오르가니제이션 요리' 이야기, 그리고 이 실험의 모델이 된 영국의 세계적인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의 요리사 양성 프로젝트 '피프틴 레스토랑', 그리고 소년원에 가게 될 소년 범죄자 두 사람을 소년원 대신 한 명의 지혜로운 노인 봉사자와 짝을 지어 2000킬로미터를 함께 걷게 함으로써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화시켜내는 프랑스 '쇠이유 협회'의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다.

이런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김종휘는 무척 신이 나는 것 같고, 실제로 이런 대목들이 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가장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는다. 이들을 통해 김종휘가 주장하는 핵심은 '집 나가서 개고생을 해야 사람이 된다'는 믿음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동기는, 다른 존재를 진정으로 만나 겪어보지 못한 세계를 접했을 때, 그 순간의 충격과 감정의 동료로써 빚어지는 법이다. 나와 다른 그와 몸으로 부대끼면서 같이 몸고생을 해 보는 경험이다. 여기서의 몸고생을 노동이라는 말로 달리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144쪽)

지적하고 싶은 몇 대목

이 책은 오늘날 지옥같은 교육 현실에 고통받는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자신감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몇 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김종휘는 이 책에서 여러 번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직접 '사회 경제적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는데, 나는 이런 발상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건 결국 '돈' 얘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직접 사회 경제적 활동을 하면서 돈을 버는 체험을 통한 자립과 성취감만큼이나 고려되어야 할 것은 '돈'의 압도적인 장악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종휘는 놀고, 일하면서 직접 돈을 벌어 자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놀고, 일하며, 자립하는 모든 원체험을 근원적으로 구속하는 힘을 가진 것이 또한 '돈'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또 하나, 김종휘는 이 책에서 청년의 '비물질, 초월적인 욕구'에 바탕을 둔 대안을 역설하고 있다. 물론 '잘 노는 것'이 오늘날 교육 현실에서 가지는 전복적인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한 중요한 것은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삶'의 기초이다. 예컨대, 오늘날 청년 세대가 10년 뒤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닥칠 가장 큰 장벽은 단연코 식량 문제와 연동되는 농업 문제, 그리고 에너지 문제 따위가 될 것이다.

노리단의 공연이 없어도 우리는 살 수 있지만, 밥과 된장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오르가니제이션 요리'에서 양성된 멋진 요리사가 있어도, 먹을거리가 없으면 요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물질적 삶의 기초, 농업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 교육 담론이란 결국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전복적인 문화 담론으로서 부분적인 의의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청년에게 힘껏 노는 것만큼이나 필요한 것은 '농사짓고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배움인 것이다.

물론 김종휘가 이런 대안까지 모두 제출해야할 의무는 없다. 다만, 나는 그가 오늘날 청년 세대의 예민하고 분방한 청년 에너지를 '스티브 잡스와 마더 테레사가 결합된 창의적인 사회적 기업가 정신'으로 이끌고 싶어 하는 기색을 이 책 여러 대목에서 드러내 보이는 것에 대한 우려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 책을 대단히 흥미롭게 읽었다. 그의 사유와 경험들이 더 넓고 깊은 곳으로 향하면서 생각하면 정말 눈물 날 것 같은 암담한 청년들의 삶에 청신한 한줄기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많은 분야가 또한 그러하지만, 교육 문제에서는, 그리고 오늘날 청년들의 삶의 영역에서는 그야말로 '혁명'이 필요하다. 그의 책을 읽으며 '놀면서' 이루어질 혁명을 잠시나마 꿈꾸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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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의 문학 이론

문학 비평을 해보겠다면 1977년에 나온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마르크스주의와 문학(Marxism and Literature)>을 권한다. 필독서에 속한다. 그런데 그 레이몬드 윌리엄스에게 뛰어난 제자가 한 명 있다. 바로 테리 이글턴이다. 1988년에 나온 그의 <문학 이론 입문(Literary Theory : An Introduction)>은 문학 이론의 고전 가운데 하나다.

문학에 대한 이글턴의 인식은, 문학이 단지 소설이나 시에 집중한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분야의 글쓰기에 국한 하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내전을 겪은 영국의 18세기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철학, 역사, 논설에 이르는 모든 가치 있는 생각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 이걸 문학의 범위에 속한다고 여긴다. 그의 글쓰기 역시 바로 그런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인 그가 신에 대해 쓴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종교는 아편"이라고 질타했던 마르크스처럼 그 역시 종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종교라는 허상을 철저하게 붕괴시키고 이성적 사고의 위력을 발휘하여 혁명의 미래를 합리적으로 구상하라고 일갈할까?

만일 그렇게 여긴다면 그건 이글턴을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신을 옹호한다. 그리고 거기서 혁명의 힘을 발굴해낸다. 그에게는 이성과 신앙 그리고 혁명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그가 지은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 : 신에 대한 논쟁을 성찰하다(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가 <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강주헌 옮김, 모멘토 펴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번역본의 제목은 원작의 메시지를 압축해서 전달한다. 그에게 신은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이며 혁명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는 이걸 부인하는 것은 기존 질서의 모순을 적당히 비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 질서 속에서 안주하고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내면의식에 불과하다고 지목한다.

"디치킨스"에 대한 공격


▲ <신을 옹호하다>(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모멘토 펴냄). ⓒ모멘토
"그런 자들"이라고 테리 이글턴이 공격하는 대표 선수는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그는 "디치킨스(Ditchkins)"라고 부르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그의 책은 이들에 대한 비판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는 이성과 신앙이 서로 손을 잡고 혁명의 정신을 복원하여 자본주의의 야만을 거부하는 더 깊은 성찰의 힘을 주목하도록 한다.

테리 이글턴의 책을 오늘의 현실에서 읽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신의 정치(God's Politics)>를 쓴 짐 월리스가 갈파했듯이 "우파는 종교를 오도하고 좌파는 종교를 아예 내버리고 있다"는 의식과 일치하면서도, 신에 대한 더 진지한 논쟁이 자본주의를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 혁명적 사고와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낼 수 있다는 지점으로까지 간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다윈주의자 리처드 도킨스나 한때 좌파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 모두 자본주의적 야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종교의 비판적, 성찰적 기능을 거세해버리려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강조한다.

사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김영사 펴냄, 원제대로 번역하자면 "신에 대한 망상")이 번역되어 읽혔을 때 우리 사회가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그 열광의 저변에 깔린 기독교와 교회의 행태에 대한 반감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도킨스의 기독교 비판이 기독교의 본질이나 성서 자체의 텍스트 이해에 있어서는 상당히 저급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킨스가 그의 책에서 기독교가 현실에서 저지르는 각종 과오와 야만에 대해 공격을 가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옹호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독교가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기보다는 인간의 파멸에 힘을 싣고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논지에 대해 이글턴 역시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킨스는 기본적으로 과학으로 신을 설명하지 못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었고, 성서 텍스트 안에 담겨 있는 고대 히브리인의 고난과 투쟁의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토머스 쿤이 말했던 것처럼, 과학이란 그 사고의 기본틀이 혁명적으로 바뀌면서 발전해왔고 그것은 역으로 보면 과학적 이성은 이성의 절대 무오류라는 논리에 근거를 둘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도킨스는 과학이 찾아내지 못하면 없는 것이라는 식의 논리로 일관하면서 종교를 폐기해야 한다는 식으로 결말을 짓는다.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재조명

이런 식의 논리는 기독교/유태교의 신이 억압받은 인류의 편에서 기존 질서와의 투쟁에 함께 하는 해방자라는 고백과 이에 토대를 둔 일체의 혁명적 선택의 가치를 모두 부인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 점이 디치킨스 류의 종교 비판에 대해 테리 이글턴이 공격의 끈을 놓지 않는 대목이다.

특히 이글턴은 기독교의 출발이 인류의 삶을 보다 낫게 만들고 절망적 상황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뛰어난 정신적 능력으로 현실과 마주해 새로운 희망을 탄생시키려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이런 힘을 저버리는 것은 곧 혁명의 포기라는 인식을 갖는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나 또는 세계적 수준의 인문학자들 가운데 신을 옹호하는 이는 드물다. 그것은 자신의 이성을 접고 이미 정해진 사고와 인식의 틀 속에 종속되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내면 논리에서 인간에 대한 폭력과 희생을 중지시키는 명령을 발견하는 르네 지라르 정도를 빼놓고 종교와 관련한 적극적 논의를 전개시키는 경우를 보기 쉽지 않다.

그러나 테리 이글턴은 "종교가 인간의 역사에서 많은 불행의 원인이 되었다"고 인정하면서도 디치킨스 류의 종교 비판이 종교에 대한 신중한 성찰이 없고 특히 신약성서의 텍스트 속에서 들어 있는 인간 해방과 관련한 무수한 혁명적 가치를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며 이는 "무지와 편견"일 따름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디치킨스"는 겸손이란 털끝만치도 없고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아예 기대할 수 없다고 조롱한다.

그는 기독교란 "애초부터 무언가에 대한 설명을 하려는 시도나 체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만물을 지탱해주는 존재인 신"이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길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종교를 단지 현실 도피적인 아편으로만 여기는 생각에 대해서도 그 본질에 대한 의미를 새로 조명할 것을 요구한다. 희망이 없는 현실에서 종교가 현실 도피처를 아편처럼 마련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왜곡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생면부지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는 희생을 몸소 행한 것을 어떻게 현실 도피라고 볼 수 있느냐면서, 이는 "광기와 공포, 부조리에 대한 혁명적 투신"이며 "새 술을 헌 부대에 담는 신중한 개량주의적 프로젝트"를 넘어서서 "완전히 새로운 전위적" 대안이라고 옹호한다.

진정한 혁명이란 "죽음과 공허, 광기, 상실, 헛수고를 폭풍처럼 지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 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동체를 혈연 가족 공동체보다 위에 놓은 예수를 통해 "정의는 피보다 진하다"는 점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일깨우고 있다.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

테리 이글턴은 "좌파이면서도 기독교도인 사람들이나 지식인은 인기가 없는 시대"이지만, 기독교란 "인류 역사 최초의 진정한 세계 대중 운동"이며 "앞으로 올 하느님 나라에서 정의와 우애, 자기실현의 조건을 찾는" 혁명인데 이것은 오늘날 종교 자체와 종교에 대한 무지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 의해 변질되고 배신당했으며 "하나님과 관련해서 조잡한 논리"가 판을 치는 상황이 되었다고 개탄한다.

그래서 그는 "공격하기 좋도록 기독교를 왜곡하는 일은 이제 학자와 지식인 사이에서 지겨울 만큼 만연해 있다"면서 "기독교는 오래 전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서 부유하고 공격적인 사람들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현실을 함께 주목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은 기독교의 잘못이지 예수의 잘못은 아니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가 가까이 한 하층민과 반식민주의 비밀 투사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약속"이지 "교외에서 안락하게 사는 부유층이 주축인 신앙"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의 신앙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기독교는 "여자의 노출된 젖가슴에는 호들갑을 떨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끔찍한 불평등에 대해서는 무덤덤"하며 "낙태에 대해서는 한탄하면서도 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아이들을 불태워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동요하는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그러면서 그는 서구의 자유주의가 비서구에 저지른 야만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바로 그런 서구의 죄를 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으로 해서 그는 마르크스처럼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이며 "종교는 이성에 결코 낯설지 않은 비합리적 관심과 욕망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깨우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리처드 도킨스가 인류가 이런 종교로부터 조금도 혜택을 받은 바 없다는 식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God Is Not Great)>(김승욱 옮김, 알마 펴냄)은 종교인들이 기성 질서의 억압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현실에는 눈을 감았다고 비판했다.

바로 이런 식이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세계 자본주의의 해악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치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이성은 "사랑과 성실, 평등 공동체와 같은 것에 기반을 둘 때" 비로소 "믿음과 이성이 서로 겉돌지 않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이루어 내고 새로운 희망을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결말 부분에서 이글턴은 종교가 가르치고 있듯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바를 스스로 버리는 과정과 이를 기반으로 해서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길을 통해서만이 인류는 자신을 제대로 회복할 수 있다(only by the process of self-dispossession and radical remaking can humanity come into its own.)"고 말한다. 종교에 대한 그릇된 오해와 편견, 무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방해하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이 보다 빨리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단서로 남기고.

이글턴의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특히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정면으로 독파하게 해줌은 물론이고, 기독교의 출발인 예수 운동의 본래 모습과 그 정신, 그리고 혁명적 의지를 재조명하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부터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에게 가하는 야만과 폭력, 기만과 착취에 저항하고 새로운 희망적 대안의 실체를 만들어내는 힘을 발견하는 작업을 촉구한다. 그는 신을 옹호하면서 그와 동시에 이 신이 바라는 인류의 혁명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우파는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좌파는 기독교를 버리는 세상에서 테리 이글턴의 이러한 주장이 공감되어간다면 세상은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해가지 않을까? 쉽지 않은 번역에 충실한 역자의 노고를 주목하며,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중요한 화두가 던져진 것을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이 책의 출간을 통해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에 더하여 성서 텍스트 자체에 대한 깊이 읽기가 가능해진다면, 한국 교회의 저 진저리나는 설교와 행태도 수명을 다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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