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과격하게 하면 혁명이 빨리 될까?

한 때 모 진보 정당의 당원들 사이에는 '당원 게시판 들어가기 전에 꼭 우황청심환을 먹고 들어가라'는 농담이 유행했었다. 당 게시판에 너무 날 세운 언사가 난무해 가볍게 글을 올리기도 겁나고, 읽기도 겁났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혁명가들이 말을 과격하게 하면 세상이 빨리 바뀔까? 만약 그렇기만 하다면 이 더러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입에 걸레를 물고 다니기를 마다하지 않을 사람들이 훨씬 많아 질 것이다.


▲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제이슨 델 간디오 지음, 김상우 옮김, 동녘 펴냄). ⓒ동녘
그러나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김상우 옮김, 동녘 펴냄)의 저자 제이슨 델 간디오의 생각은 다르다. 생각나는 것을 그냥 그대로 토해내는 단순 과격한 어법보다는 오히려 소통의 기술 즉 수사(修辭·rhetoric)를 익히는 것이 변혁을 위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활동가들이 갖춰야 할 언어에 대한 책이다. 부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수사학'은 책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이 책은 활동가들의 글 쓰는 법, 말하는 법, 몸 쓰는 법에 대해 상세하고 실무적인 교훈을 주는 책이다.

저자는 어쩌다가 이런 책을 쓰게 된 것일까? 제이슨 델 간디오는 한마디로 말해 미국 운동권이다. 그는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2000년 봄, 나는 우연히 저녁 뉴스를 보다가 워싱턴 사람들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 항의하는 장면에 붙들려 버렸다. 일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고, 갑자기 깨달았다. 세상을 더 좋게 바꾸려고 노력하기 위해서는 세계 속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곧장 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나는 자유무역과 공정 무역 문제, 반전운동, 반공화당 전당 대회, 중남미계미국인연대행동에 참여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첫눈에 반했다는 얘기다. 이렇게 운동에 대한 첫사랑을 시작한 간디오는 자신의 운동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운동의 수사학에 대한 380쪽 짜리 책을 만들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어떻게 운동을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책이다.

간디오의 철학은 간단하다. 그는 수사에 주목한다. 여기서 같은 단어를 놓고 미국 운동권과 한국 운동권 사이에 용법의 차이가 발생한다. 한국에서 흔히 레토릭이라고 하면 내용 없는 단순한 말잔치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만 간디오는 이 레토릭을 매우 중요한 변혁의 무기로 생각한다.

책은 우선 활동가들에게 수사학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간디오가 보기에 소통은 노동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글쓰기를 예를 들어보자. 글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읽을 만한 글이 나온다.

일찍이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모든 초고는 다 걸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단일토지세를 주장한 '<진보와 빈곤>의 저자 헨리 조지는 "고된 글쓰기가 쉬운 글을 만든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 간디오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간디오는 훌륭한 수사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수사가 잘되어야 소통이 잘되고 소통이 잘되어야 행동도 잘 된다는 것이 간디오의 일관된 주장이다. 간디오는 '급진주의자에게 수사가 필요한 이유'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대중적 기대의 문제를 무시하고, 소통의 격차에 대해서 괜찮다고 할지도 모른다. (…) 그렇게 하다가는 잠재적인 협력자와 참가자까지 급진주의자를 외면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바로 여기에 위기의 뿌리가 있다. (…) 세계적 정의 네트워크를 창조하려면 수사적 효과가 높은 소통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 급진주의적 행동주의의 소통적 노동을 무시하는 것은 사회 변화에 반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성을 언급한 간디오는 책의 2장에서 '어떻게 실무적으로 좋은 수사를 개발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특히 대중 연설과 대중적인 글쓰기에 있어서 무엇을 중시해야 하는지 간추린다. 재미있는 것은 간디오가 "대중 연설의 핵심은 무엇보다 배짱"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태평양 건너에 있는 미국 운동권이건 한국 운동권이건 차이가 없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연단에 오르게 되면, 더듬고 멈칫하고 할 말을 잊기도 한다. 내용의 옳고 그름 혹은 참신함과 진부함에 상관없이 일단 배짱이 있어야 한다.

간디오는 연설 내용에 있어서 반드시 너무 많은 논점을 회피하라고 충고한다. 논점이 너무 많으면 청중들이 갈피를 못 잡는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런 충고를 하는 걸로 봐서는 미국 운동권도 말이 많은 것 같다. 간디오는 연설 시간에 따른 적절한 원고 분량까지 알려준다.

그럼 글쓰기를 잘하는 비법은 무엇일까? 간디오 역시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원칙을 강조한다. 송나라 시대의 문장가인 구양수가 글을 잘 쓰는 비법에 대해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의 세 가지를 기억하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같은 얘기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이건 서양이건 이 문제에 관한한 왕도가 없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간디오는 결국 말이건 글이건 대중에게 전달할 때는 크게 필요 없는 세부 사항은 제외시키라고 조언한다. "대중은 세부사항 전부를 알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핵심일 뿐이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가장 흥미로운 사항에 집중하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책의 3부로 넘어가면서 간디오는 언어의 힘에 대한 원론적인 얘기를 강조한다. 언어로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혹시 이런 질문을 해본 유물론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얼핏 보면 바보 같은 질문 같지만 유물론자에겐 심각한 질문일 수 있다. '어떻게 물질로 구성된 세상을 물질이 아닌 언어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간디오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하는 유물론자들을 걱정한 것 같다.

간디오는 언어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이유는? 언어가 바뀌면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법이 바뀌기 때문이다. 간디오는 버그만의 글을 이렇게 인용한다.

"경찰을 '짭새'라고 욕하는 것은 멍청한 짓처럼 보인다. 그 낱말을 쓰면 혁명가들이 설득하고 싶은 사람들 아니면 최소한 중립적 입장에 두고 싶은 사람들까지 적으로 돌아설게 뻔하다."

간디오는 책을 통해 차분하게 언어의 의미를 하나씩 하나씩 밝혀준다. 그가 이렇게 긴 설명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결론은 변혁을 위해서 언어의 활용을 극대화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간디오의 언어에 대한 이론은 선전·선동론으로 이어진다.

간디오는 친절하게 선전·선동의 기본 기법도 정리해 준다. 반복. 연상. 생략. 모략. 가짜 영웅. 허위 증언 등 간디오가 소개하는 선전·선동의 기법들은 매우 흥미롭다. 이 개념들은 자기가 이런 수법을 쓰건 안 쓰건 알고는 있어야 할 내용들이다. 그 수법에 자기가 당할지도 모르니까.

저자는 책의 4부에서 수사의 범위를 아예 몸 자체로까지 확대한다. 간디오는 몸말(body language) 과 비언어 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얼핏 들으면 좀 이상하다. 몸이 어떻게 메시지가 된다는 걸까? 간디오는 이런 부분에 주목한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을 생각해 보자. 그의 가면, 담뱃대, 명상에 적은 듯 느린 말투, 재치 있는 농담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런 특성으로 마르코스가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의 존재감 때문에 입장 전달이 잘된 것은 사실이다. 손짓 하나 몸짓 하나는 물론 그가 입고 있는 옷과 소품, 전반적인 외형상의 분위기도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인 것이다.

여기서 같은 단어를 놓고 미국 운동권과 한국 운동권 사이에 또 한 번 용법의 차이가 나타난다. 간디오는 시종일관 스타일(style)을 강조한다. 간디오는 글, 말, 몸 모두에 스타일이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글 스타일 말 스타일 몸 스타일이 수사(rhetoric)를 생산하고 이것이 결국 변혁을 추구하는 활동가의 대중 전달력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운동권과 달리 한국 운동권은 스타일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스타일이라는 말을 주로 외형상의 옷맵시에 국한해 사용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옷조차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 운동권들은 옷을 그냥 추위를 막는 용도로만 쓴다.

책을 번역한 김상우는 저자가 쓴 이 스타일이라는 단일 개념을 글 스타일은 문체, 말 스타일은 말씨, 몸 스타일은 맵시 혹은 매무새 등으로 바꿔서 번역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냥 스타일로 통일 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우리는 사실 스타일이라는 개념의 풍부한 의미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쓴 것 혹은 말한 것 이상으로 상대방이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정작 상대방은 자기가 쓴 것 혹은 말한 것의 절반도 잘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말과 글의 한계 때문이다. 그 자체로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활동가가 대중에게 무엇을 전달해야 할 때,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대중은 활동가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들의 몸짓과 언행 그러니까 총체적인 스타일을 통해 운동에 대해 판단한다. 이 책이 주는 핵심적인 교훈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저자 자신이 글 쓰는 법에 대해 설명해 주는 사람이라 그렇겠지만, 당연히 이 책은 읽기 쉽다. 장황한 서술도 별로 없고 쓸 만한 메시지가 중심이 된 여러 개의 짧은 단락으로 책을 구성해 넘어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질적인 변혁만 변혁이라고 생각하는 1차원적 유물론에 경도 된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보며 "뭐?! 레토릭으로 혁명을 하라고?!"라며 불만을 터트릴지 모르겠다. 그만큼 이 책은 실천 자체보다도 실천을 위한 말과 글을 비롯한 종합적인 상징의 의미에 대해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변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늘 주입식으로 떠들어 대는 말 많은 한국 운동권들에게 오랫동안 시달려본 나로서는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책의 원제는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수사학: 21세기 활동가들을 위한 안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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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 침체에 빠진 세계 경제를 구하기 위해 경제학자 케인스는 '절약의 역설'을 지적하며 정부가 유효수요 창출을 위해 적극적인 재정 지출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지갑을 닫고 은행에 저축하는 소비자들의 행동이 오히려 경제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런 때일수록 정부가 나서서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개인적 차원에서 미래를 대비하여 돈을 아끼고 저축하는 미덕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경기를 악화시키는 악덕으로 작용하는 역설을 지적한 케인스의 메시지는 경제 현상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준다.

케인스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로버트 프랭크 역시 <사치 열병>(이한 옮김, 미지북스 펴냄)에서 개인과 전체의 합리성 사이에 생기는 간극에 대해 의미 있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그는 케인스와 정반대 방향에서 같은 문제 제기를 한다. '소비의 역설'이라고 할까, 개인적 차원에서 원하는 만큼 소비를 늘리는 것은 미덕이 될 수 있으나 사회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효용 극대화를 방해하는 악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치열병>(로버트 프랭크 지음, 이한 옮김, 미지북스 펴냄). ⓒ미지북스
현대 사회의 소비 패턴은 '필요(need)'한 것이 아닌 '원하는(want)' 것을 구매하려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전체 소비에서 사치가 차지하는 부분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더욱이 사람들은 단순히 스스로 원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인 지위와 서열을 돋보이기 위한 소비에 열중한다.

이와 같은 소비 패턴은 만족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상대적인 경쟁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끝이 있을 수 없다. 이는 필요가 아닌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려는 수단으로 전락한 소비를 나타내는 개념인 소스타인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와 특정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특정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의 경향을 나타낸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파노플리 효과(effect de panoplie)'와 같은 맥락이다.

낭비적 소비는 사실상 현대 소비 시장을 점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식이나 생일날 줘야 할 선물에서부터 손목시계, 가전제품, 자동차, 주택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더욱이 사치품에 대한 소비는 그것을 향유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자뿐 아니라 중위 소득자, 심지어는 하위 소득자에게도 바이러스처럼 침투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번쩍이는 광채를 반사하는 상품이 TV 광고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가고 대중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지 않고 그것에 열광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처럼 사치재의 소비가 일상화된 것은, 고소득자의 소득을 극적으로 증가시키는 반면 못사는 사람은 더욱 못살게 만드는 시스템이 이미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시간이 갈수록 그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저자가 다른 책에서 설명한 바 있는 '승자 독식 시장(winner takes all market)'이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조그만 성취의 차이나 엄청난 경제적 보상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시장(승자 독식 시장)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이 발달하고 네트워크가 확대됨에 따라 경쟁력 있는 상품의 파괴력과 도달할 수 있는 범위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사치재를 소비할 수 있는 고소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사치재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고, 이들의 영향력도 더욱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이런 종류의 비난은 기껏해야 가난한 자의 감정적인 질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돈을 가진 사람이 자기가 번 돈으로 무엇을 사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비는 이념적인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도덕적 중립 지대에 속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근간이 아니었던가?

이런 당연한 질문에 대해 저자는 우리의 안일한 통념을 깨고 '아니오'라고 말한다. 생산성과 소득 수준은 떨어져 가는데, 사치재 소비만 계속 늘고 있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도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사치 소비에 쓰이는 자원을 다른 곳에 쓴다면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대담하게 주장한다.

사람들이 특정 복지 수준을 넘어서면 물질적 재화 소비가 늘어난다 해도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점점 줄어든다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근거로 부자들의 소비가 사회적 효용의 최적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더욱이 사회적 효용을 증진시키지 못하는 소비의 기회비용은 공공 서비스 질 악화, 환경오염, 불평등 심화 등 실로 막대하다. 개인적 차원에서도 사치는 급증하는 채무로 소비자를 파산에 처하게 할 뿐 아니라, 이를 충당하기 위한 노동시간을 과도하게 증가시켜 삶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면 이런 폐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사회 전반의 효용이 증가되는 방식의 소비 패턴을 되찾아야 하며,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현실화하는 방안으로 많이 소비하는 사람에게 세금을 더 물리고 적게 소비하는 사람에게는 덜 물리는 누진소비세를 제안한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그로 인한 폐해가 만연한 지금,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저자의 열망과 문제의식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이들에게는 도전적인 책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면도 있다.

저자는 부자들의 사치를 억제하면서도 사회적 효용을 높일 수 있는 제도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해 보인다. 부자들의 자발적인 절제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저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게끔 할 수 있는 인센티브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보해야 하는 주체와 혜택을 받는 주체가 다른 상황에서 이들의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은 경제의 영역을 넘어서 훨씬 풀기 어려운 정치의 숙제다.

또 부자가 과시적 소비를 통해 얻는 만족은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종류인 반면, 친구를 사귀거나 여가 시간을 즐기는 것과 같은 비과시적 소비는 보다 오래 지속된다는 저자의 이분법 역시 현실성이 부족해 보인다. 현실에서 과시적 소비가 주는 희열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승자 독식 시장이 확장될수록 커진다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 판단일 것이다. 과시적 소비가 가진 매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부자들이 너무나 쉽게 과시적 소비를 포기할 수 있다는 안이한 판단을 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 연장선상에서 저자가 해법으로 제시한 누진소비세 역시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과시적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 투자를 확대하자는 단순 논리 앞에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국경을 넘나드는 교역과 소비가 보편화된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특정 국가의 세제 개편만으로 사치의 소비 습관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각국이 처한 조세 및 재정 현실이 다른 상황에서 누진소비세 도입을 위한 국제 공조를 꿈꾸는 것도 너무나 요원해 보인다.

현재로서는 점점 '승자 독식 사회'로 치닫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시적 소비가 갖는 해약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 정도로 이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게 적절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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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기반 사회는 독식 사회?

우리는 불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다. 한편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 사회'의 달성을 국정 목표로 제시하였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정운찬 전 총리는 재벌계 대기업의 이익 독식을 막고 협력 중소기업들과 이익을 공유하자는 제안을 하여 뜨거운 논란을 벌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진보 진영이 '복지 국가'의 달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그 실현을 위해 부유세와 사회보장세 그리고 소득세 및 법인세의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공정 국가'의 실현이 가장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토지 소유자 및 건설족들 같은 불로소득자들에게 중과세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부와 소득의 공정한 분배는 우리 사회의 초미의 관심사이다. 그리고 미국의 진보적 연구자들인 가 알페로비츠와 루 데일리의 <독식 비판>(원용찬 옮김, 민음사 펴냄)이 다루는 주제 역시 바로 오늘날 미국 사회에-그리고 한국 사회에-만연한 부와 소득의 엄청난 불평등이 다.


▲<독식 비판>(가 알레로비츠·루 데일리 지음, 원용찬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른바 지식 기반 사회이다. 즉 우리는 다니엘 벨과 앨빈 토플러 그리고 피터 드러커가 약속한 지식 기반 사회에 살고 있다. 그들은 분명 이제는 소유(자본)와 노동이 아니라 지식이 부의 원천이며, 지식과 정보가 부의 원천이 되는 지식 기반 경제에서는 노동과 자본, 부자와 빈자 간의 대립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물론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 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에서 이미, "우리는 탈산업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세상을 더 많이 바꾸었다"는 등의 테제를 통해, 앨빈 토플러와 피터 드러커 등의 지식 기반 경제론의 비현실성을 비판한 바 있다.

아무튼, 우리가 현재 보다시피 지식 경제론자들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상이 더 지식 기반 경제에 가까워 갈수록 소득과 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세상은 더욱 더 불공정해지고 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 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 책은 바로 그와 같은 의문을 가진 독자들의 궁금증을 조금 풀어준다. 특히 한 때 '탈산업 사회'와 '신경제', '지식 기반 경제' 등등의 담론에 열광했던 독자라면, 그러면서도 소득과 부가 '공평'하고 '공정'하게 분배되는 세상을 원한다고 스스로 믿는 독자라면, 마땅히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노동과 사유 재산 : 존 로크와 데이비드 리카도

이 책의 진짜 백미는 제2부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따라서 독자들은 제1부보다는 제2부를 먼저 읽어도 무방하다.

제2부에서 저자들은 먼저 "공짜 점심은 없다"며 복지 국가를 분쇄하는데 앞장섰던 자유 시장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을 반박하기나 하듯이 "공짜 점심은 널려 있다"는 경제사학자 조엘 모커의 지적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공짜 점심(불로소득)의 문제야말로 지난 300년간 자본주의 역사에 있어 핵심적인 정치경제적 논쟁 지점이었음을 상기시킨다(106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배의 공정성, '응분의 보상'의 기준은 바로 '노력의 대가(earned)'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불로소득이란 그렇지 않은 부당한 보상(undeserved)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불공정한 소득 분배에 관한 철학 사상과 사회 비평의 역사는 길다.

먼저 기독교 성경은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 하리니"라고 썼으며, 영국 청교도 혁명의 사상가인 존 로크는, 노동에 의한 소유 및 소득(즉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원칙)을 정립하였다. 로크는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한 가치로부터 이득(소득 및 소유)을 얻는 인간의 자연권이야말로 모든 사유 재산의 근본적인 윤리적 기초라고 주장했다(110쪽).

19세기 들어 데이비드 리카도는 존 로크의 논의를 더욱 발전시킨다. 특히 리카도는 차액 지대론을 통해, 나폴레옹에 의해 선포된 대륙 봉쇄령(강제된 보호 무역주의)에 의해 발생한 영국의 곡물 가격 폭등으로 이익을 얻는 농업 지주들을 비난하면서, 지주들의 불로소득을 비난했다. 왜냐하면 농업 지주들은 곡물 가격이 올라가는데서 아무런 노력도, 투입도 하지 않았는데도 앉아서 횡재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리카도는 지주들의 불로소득 (차액 지대)을 없애기 위해서는 곡물을 자유롭게 수입하여야 한다는 자유 무역주의를 주장했다.

리카도의 지적은 우리나라의 1970~80년대를 상기시킨다. 우리나라는 당시 전자 제품 및 자동차 국내 시장을 보호하는 보호 무역 조치를 시행했고 이를 통해 당시의 신생 기업들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이 국내 시장에서 '불로소득'을 획득하도록 정부가 의도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들 회사로부터 불로소득을 환수하기 위해 법인세를 더 많이 거두는 것은 '공정 사회' 원칙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토지 소유자의 불로소득 : 헨리 조지와 한국의 진보적 '자유 시장' 이론가들

19세기 초반 영국의 리카도가 비교우위론(영국의 농업 포기 정당화 이론)과 함께 농업 지대(차액 지대) 이론을 발전시킨데 반하여, 19세기 후반 미국의 헨리 조지는 공업화 및 도시화에 따른 도시의 토지 가격 및 지대의 상승에 따른 불로소득 상승을 비판하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도시의 토지 가격 및 지대(rent)는 경제 발전과 산업화에 따른 인구 증가와 인구의 도시 집중에 따라 급격하게 상승한다. 그리고 도시의 부동산 보유자들 역시 아무런 노력 및 자기 투자도 하지 않은 채 인구 증가 및 도시 집중화에 따른 막대한 불로소득(시세 차익 및 임대 소득)을 획득한다.

자유 무역 및 자유 시장을 옹호하기 위해 농업 지주의 불로소득을 비판했던 자유시장의 이론가 리카도와 마찬가지로, 헨리 조지 역시 자유 시장(free market) 즉 사유 재산제 및 자본주의 기업 제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면 토지 소유자들의 불로소득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3쪽). 그리고 이를 위해 헨리 조지는-무역 자유화를 주장했던 영국의 리카도와는 달리-토지 소유자들의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국가의 강력한 조세 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즉 헨리 조지는 개인소득세, 법인세, 부가가치세 등과 같은 세금은 폐지하고 그 대신 단일세인 토지 보유세를 징수함으로써 토지 관련 불로소득을 환수한다면 '시장의 자유' 즉 '자유 시장'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유 시장'을 옹호하고 '토지 불로소득'은 비판하는 헨리 조지의 (그리고 리카도의) 입장과 견해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그것은 토지+자유 연구소 소장 남기업,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 선대인 그리고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김대호 등에 의해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당연히 (자유 무역을 포함한) '자유 시장' 그 자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와 직접적으로 부딪친다.

자본가의 불로소득과 누진 소득세, 복지 국가 사상

다른 한편, 19세기 후반 이래 영국과 미국, 그리고 유럽 대륙에서는 토지 소유자 계급의 불로소득만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이 획득하는 막대한 불로소득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는 가령 미국의 경우 록펠러와 카네기 가문과 같은 산업 자본가 계급이 성장하고 경제를 주도함에 따라 이들의 부와 소득, 권력이 전통적인 토지 소유자 계급의 그것을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공업화를 일찍 완료한 영국에서는 산업 자본가와 산업 노동자 간의 소득과 부를 둘러싼 갈등이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이 시기의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오늘날 현대 경제학에서 나오는 지대(rents)의 범위를 토지 소유와 무관한 영역에까지 확대시킨다. 그에 따르면 지대 불로소득은 "개인이 순전히 단독 활동으로 생산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모든 소득"이다. 따라서 그의 논리를 따르면, 산업 자본가의 소득 역시 지대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1906년에 집권한 영국의 자유당은 불로소득의 개념을 확장하여 산업 자본가들이 획득한 부와 소득도 불로소득으로 규정한다. "산업 시스템에 의해 창출된 불로소득의 크기는 토지 소유자에게서 발생한 것보다 훨씬 크다"고 당시 영국 자유당의 경제 이론가인 홉슨은 주장하였다(124쪽). 그리고 홉슨은 리카도(그리고 헨리 조지)와 존 스튜어트 밀이 발전시킨 지대의 개념을 더욱 확장하여, 토지 소유와 관련되지 않는 '산업 지대'(산업 자본가들의 불로소득)가 더욱 큰 문제라고 주장하였다(125쪽).

그리하여 총리 로이드 조지와 경제 사상가 홉슨, 레너드 홉하우스 등이 이끌었던 20세기 초반의 영국 자유당은 역사상 최초로 상위 소득자에 대한 누진 과제(누진 소득세)를 도입하였고, 또한 누진 상속세도 도입하였다(126쪽). 당시 자유당 정부의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 역시 토지 소유자 및 자본가들의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를 찬성했다. 이렇듯 20세기 초반 들어 기존의 '고전적 자유주의'(즉 '자유 시장' 만능주의)를 반성하고 '사회적 자유주의'로 방향 전환한 당시 영국 자유당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이가 바로 경제학자 케인스였다.

1920년대에 영국의 노동당을 설립한 시드니 웹 역시 개인의 노력이 아닌 외부적 기회 요인(경제학에서 말하는 '외부성')에 의해 큰 돈을 번 미국의 록펠러 등 자본가들에 대한 누진적 소득 과세와 함께 이렇게 거둔 세금을 사회 복지 정책에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1930년대에 뉴딜 정책을 펼친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역시 록펠러와 모건 등 대자본가들에 대한 누진 과세를 통해 이들의 불로소득 즉 사회적 지대(social rents)를 환수하였으며 이를 재원으로 하는 사회 보장 제도를 대폭 확충하는 복지 국가 정책을 전개하였다(129쪽).

더구나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가 레옹 부르주아가 다듬은 사회연대주의(solidarism)의 철학은 부르주아 계급의 소득과 재산에 대해 누진세를 부과하여 조성된 재원으로 복지 국가 정책을 펴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이후 미국의 뉴딜 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기술 발전의 집단적, 사회적 성격과 불로소득

이제 이 책의 앞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책의 앞부분인 제1부는 두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첫째 주제는 로버트 솔로와 에드워드 데니슨 등이 발전시킨 성장 회계(growth accounting)를 중심으로, 경제 성장에 있어 노동 또는 자본의 투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나머지(잔차) 부분이 주로 기술 발전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경제학자들의 발견이다.

성장 회계 및 나머지(잔차 즉 총요소 생산성)에 관한 저자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우리에게도 이미 낯익다. 노무현 정부는 한 때 우리나라가 1998년 이래의 '자유 시장' 개혁 덕택에 '혁신 주도형 경제 구조'(지식 기반 경제 구조)로 전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 경제의 성장 패턴은 자본 및 노동의 추가 투입과 같은 전통적인 '요소 투입형 성장'이 아니라 기술 혁신과 같은 '총요소 생산성 증가' 형으로 전환하였다고 자화자찬하곤 했었다. (총요소 생산성 위주 성장론에 대한 나의 비판은 <쾌도난마 한국 경제 >(부키 펴냄)를 읽어 보시기 바란다.)

그런데 저자들이 제1부에서 정말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술 발전이 경제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로버트 솔로의 경제 성장 회계 모델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이처럼 중요한 기술 발전이 영웅적인 개인적 발명가 또는 발명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영역에서 무수한 개인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기술 발전이 집단적 또는 '사회적'(협력적)이라는 점이야말로 저자들이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점이다.

저자들이 이렇듯 경제 성장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술 발전이 영웅적 개인들의 발명 및 발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사회적, 공공적으로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유별나게 강조하는 까닭은 바로 이것이 '분배적 정의'의 문제 즉 무엇이 공정한 분배인가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만약 부와 소득 증대의 원천인 기술 발전이 빌 게이츠와 스티븐 잡스와 같은 영웅적 개인의 활동보다는 사회 전체의 집단적 활동의 기여에 의해 이룩된 것이라면, 빌 게이츠 또는 스티븐 잡스보다는 사회 공동체 전체야말로 그렇게 창출된 부와 소득의 가장 큰 몫을 분배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부의 압도적 원천인 지식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하나도 거치지 않은 채 우리에게 그냥 다가온 것들이다. 이들은 과거의 너그럽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불로 선물이다. 모커의 말대로 '공짜 점심'이다."

오늘날 미국의 상위 1%가 미국 전체의 하위 1억2000만 명보다 더 많은 소득을 얻는다. 최고 부자 가구 1%는 모든 가계 투자 자산(주식, 채 권, 펀드, 부주거용 부동산)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 저자들은 묻는다. 만약 미국의 거대한 부가 대체로 과거가 선사한 '공동의 선물'이라면 과연 이러한 불균형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과연 이것이 공정한가?

불로소득의 환수와 공정한 분배를 위한 '철학 노트'

이 책에는 "추가적 논의를 위한 철학 노트"(165쪽 이하)를 부록으로 담고 있다. 이 철학 노트의 목적은 '분배적 정의'에 관한 기존의 여러 이론들과 저자들이 전개하는 '기술 지식 공동 재산 이론'과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밝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 롭다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기존의 분배적 정의 이론으로 네 가지를 든다. 첫째는 존 로크, 데이비드 리카도, 헨리 조지 등에 의거하는 '노동에 따른 소유 및 분배'의 이론이다. 그리고 이 이론이 영국 자유당 및 노동당, 그리고 미국 뉴딜 정책의 정치경제학 사상으로 이어진다는 저자들 의 지적은 흥미롭다. 사실 저자들 역시 이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이론은 로버트 노직으로 대표되는 '자유(자유 시장) 지상주의'와 그리고 이와 긴밀하게 결합된 '한계 생산성 이론'이다. 저자들은 이들 이론들에 내포된 자가당착과 순진성("순진한 생산성 윤리학")을 비판한다(182쪽). 참고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이승훈은 한계 생산성 이론의 관점에서 현재 복지 국가론 및 부자 증세론을 비판하고 있다.

네 번째 이론은 롤스의 정의론인데, 저자들은 롤스의 사회계약론을 비판한 마이클 샌델의 공동체론을 지지하면서, 개인주의적 관점에 선 롤스와는 달리 마이클 샌델은 "어째서 공동체가 개인들의 특수한 재능을 발휘하여 얻게 되는 이익(소득과 부)에 대해 적극적 권리를 할 수 있는지"를 밝혔다고 주장한다(187쪽). 즉 현대의 지식 경제(즉 기술 문명)를 인류 공동의 공동체적 유산으로 보는 저자들의 관점에 롤스의 정의론보다는 마이클 샌델의 공정론이 더욱 부합한다는 것이다.

현대 경제학의 한계와 소득 분배의 공정성

1970년대 이래 케인즈 경제학을 비판하며 등장 한 시카고 학파의 경제학은 소득 분배의 불평등과 그로 인한 수요 부족 같은 문제들보다는 장기적 경제 성장 및 그에 있어 기술 혁신의 역할과 같은 공급 측면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로버트 루커스 같은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폴 로머와 리처드 넬슨, 네이선 로젠버그 등이 발전시킨 '기술경제학'과 결합되어 지식 기반 경제의 경제학을 발전시켰다. 그렇지만 이들 경제학은 과학, 기술, 문화 등의 지식을 '공동의 유산'이라는 입장에서 제기하여 '평등'(특히 소득 및 부의 평등)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로버트 솔로와 케네스 애로, 조지 에컬로프, 조지 스티글러 등 많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을 등장 시키면서 이들의 견해를 저자들의 논의 속에 녹아내 결합시킨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과연 저자들의 논의가 성공했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설령 경제 성장과 부의 원천인 기술 발전이 인류 공동의 유산(재산)인 과거의 기술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러한 인류 공동의 기술 문명이 오늘날 '공짜 점심'으로 획득되어 빌 게이츠와 스티븐 잡스, 이건희와 같은 산업 자본가들이 독식하는 '불로소득'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그들의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를 정당화시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저자들의 논리는 과거의 기술적 성과(인류 공동의 유산)를 공짜로 이용하는 것을 막고 유료로 사용하게 하여야 한다는 주장 즉 '지식 소유권(사유 재산권) 강화'의 논리로서 '자유 시장'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곧바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날의 경제가 지식 기반 경제로 바뀌었다는 저자들의 견해 역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들 역시 지난 100년에 걸친 미국 경제 성장의 80%를 노동 및 자본의 투입보다는 기술 발전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는 기존 연구를 인용하는데, 이것은 곧 미국 경제가 (1990년대부터가 아닌) 이미 100년 전부터 지식 기반 경제였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많은 경제학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인 '분배의 정의'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는 잊혀진 고전적 견해들, 즉 존 로크와 데이비드 리카도, 프루동과 존 스튜어트 밀, 그리고 헨리 조지와 홉슨, 시드니 웹 등의 견해들을 되살려 놓았다는 점에 서 매우 중요하다.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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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 게임'이란 게 있다. 둘러앉은 사람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너무 유명해서 다들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자신은 읽지 않은 책 제목을 댄다. 좌중 가운데 그 책을 읽은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점수가 높다. 더 큰 굴욕을 당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과학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게임을 한다면 <이기적 유전자>나 <코스모스>를 부르짖는 사람이 승산이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로 고백하건대, 나는 리처드 리키의 <오리진>을 읽지 않았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도 읽지 않았다. 북극에서 물고기 화석을 발굴하는 생물학자의 책을 번역한 일도 있으면서 어째서 우리 종의 과거에는 흥미가 없었을까. 구차한 변명을 꼽아보자면, 수십만 년 이전의 무슨 세(世)니 기(紀)니 하는 지질학적 시대 구분을 통 외우질 못하겠다는 것, 내 눈엔 고만고만해 보이는 돌멩이들로 어떻게 선사시대의 가족 구성까지 읽어내는지 알쏭달쏭하다는 것, 진화를 기정사실로 믿고 있으니 어떤 화석을 보든 놀랄 일은 없으리라 지레짐작했다는 것, 대충 그 때문이었다.

그런 내가 <인류의 위대한 여행>을 소개해도 괜찮을까? 역자 서문을 읽으면서 걱정은 깊어졌다. 이 책은 2009년에 씌어졌는데, 이후 불과 두어 해 만에 책의 주장과 어긋나는 발견이 이루어져 고인류학계가 뜨겁게 달궈졌다는 것이다. 비판적 독서를 할 만한 소양이 안 되어도 재미있게 읽힐까? 결론인즉 괜찮았다.


▲ <인류의 위대한 여행>(앨리스 로버츠 지음, 진주현 옮김, 책과함께 펴냄). ⓒ책과함께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 읽으라고 쓰인 책이었다. 하기야 원래 영국 BBC 방송의 5부작 다큐멘터리였던 것을 글로 풀어낸 책이라니까. 고고학적 시대 구분과 유전학 기법이 설명된 첫 50여 쪽을 꼼꼼히 읽어낼 약간의 인내, 다섯 대륙을 누비는 550여 쪽의 여정을 느긋하게 따라갈 충분한 시간, 그리고 (더 좋기로는) 커다란 지구본. 이것만 있으면 누구든 이 여행에 동참할 수 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책으로 충족된 호기심보다도 더 많은 의문과 관심을 새로 갖게 될 것이다. 또한 화석을 떠낼 모종삽이나 DNA를 채취할 면봉을 들고 세상에서 가장 더운 곳과 추운 곳, 사막과 우림, 동굴과 바다에서 인생을 헌신하는 과학자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

<인류의 위대한 여행>은 아프리카에서 생겨나 온 세계로 퍼진 인류가 그 과정에 남긴 자취를 의사이자 해부학자인 저자가 1년 동안 뒤쫓아 본 기록이다. 여기에서 인류란 호모 사피엔스다.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네안데르탈인)나 호모 에렉투스 같은 다른 호미닌들도 언급되지만, 관심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우리 종의 직계 선조다.

오늘날 우리들이 갖고 있는 미토콘드리아 DNA나 Y 염색체의 특정 유전자를 거의 그대로 물려주었던 최초의 사람. 호미닌 최초로 말을 할 줄 알았고 문화를 전승할 줄 알았던 사람들. 결국 다른 호미닌들이 모두 사라진 땅에 홀로 남은, 호모 속의 유일한 종.

당연히 출발지는 아프리카다. 저자는 약 20만 년 전에 고대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등장했던 아프리카로 날아간다. 그곳에서 부시먼 족과 함께 사냥을 해보고, 장식 구슬을 만들어본다. 현재의 수렵·채집인을 연구하는 민족지학이 반드시 고인류학에 도움이 되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원시에 가까운 환경에서 당시의 기술로 생활해 보면 책상물림으로는 몰랐을 실질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기왕 아프리카에 갔으니, 가장 오래된 사피엔스 머리뼈가 발견된 에티오피아의 발굴지도 안 가볼 수 없다. 인류학자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성지순례일 테니까.

다음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 다른 대륙으로 진출할 차례다. 호모 사피엔스는 동아프리카에서 홍해 남쪽을 지나 아라비아 반도를 건넌 뒤, 인도로 진출했다. 이어 인도네시아를 거쳤고, 지금보다 해수면이 훨씬 낮았기에 그다지 멀지 않았을 바닷길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로 들어갔다. 저자는 아프리카 밖에서 발굴된 현대 호모 사피엔스의 머리뼈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 있었던 보르네오 섬의 니아 동굴로 가본다. 그러고는 인도네시아의 롬복 섬에서 숨바와 섬까지 장장 10시간 동안 대나무 뗏목을 저어 가 본다. 우리 선조가 바닷길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남아시아에서 들르지 않으면 섭섭한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호모 사피엔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듯한 이른바 '호빗' 족, 체구가 난쟁이만 한 호모 플로렌시스의 머리뼈가 발견되었던 플로레스 섬이다.

이쯤 되면 독자는 어렵기만 했던 연대 구분에도 제법 익숙해져, 여행을 따라가는 발걸음이 한결 흥이 난다. 게다가 다음 목적지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바로 우리가 사는 곳이다. 고인류학의 정설은 남아시아로 내려갔던 호모 사피엔스가 북향하여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지만, 중앙아시아에서 못지않게 오래된 유물들이 발견되는 것을 볼 때 히말라야 북쪽 길도 유효했으리라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흥미롭다기보다 놀라운 것은 중국의 이야기다. 중국은 중국인이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게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호모 에렉투스로부터 독자적으로 진화했다는 가설을 국가적으로 장려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다지역 기원설'이 각광 받는 현장이다. 저자는 그 주장의 근거가 되는 머리뼈를 보고도 설득되지 않는다. 머리뼈의 형태도 형태려니와, 유전학적 증거는 동아시아인이 모두 예외 없이 아프리카 조상에서 비롯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다음은 유럽. 아프리카와 가까우면서도 오스트레일리아보다 늦게 호모 사피엔스의 발이 닿았던 대륙이다. 뭐니 뭐니 해도 유럽에서 가장 궁금한 점은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관계다. 이미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던 네안데르탈인을 우리 선조가 멸종시켰을까? 두 종은 교류가 있었을까? 혹시 현생 인류의 DNA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섞여 있을까? 아니면, 네안데르탈인은 우리 선조와의 교류와는 무관하게 그저 환경 변화로 인해 멸종한 것뿐일까? 화석이나 유적의 형태학에 의존했던 탐구가 오늘날은 네안데르탈인의 뼈에서 직접 얻은 DNA를 분석하는 유전학적 탐구로 이어지면서, 이런 의문들은 갈수록 흥미진진한 것이 되고 있다.

마지막은 아메리카다. 우리 선조가 최후로 발을 들여놓은 땅. 현재는 유럽 이민자들의 사회가 되었지만, 베링 해협이 연결되어 있었던 과거에는 아시아인이 건너가서 살았던 땅. 이곳에서도 고고학은 나날이 새롭게 쓰이고 있다. 한때 최후 빙하기 이후에 북아메리카 대륙의 빙하가 녹으면서 비로소 인류가 남아메리카까지 퍼져 나갔다는 게 정설이었으나, 최근 그보다 이전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남아메리카의 유전적 다양성이 큰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아메리카 대륙을 가로질러서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인류는 빙하의 가장자리 해안가를 따라서 진즉에 남하했을지도 모른다. 그 증거가 되어주는 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 칠레의 유적지에서 저자의 긴 여행은 막을 내린다. 이제 수렵·채집인마냥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1년의 여정을 끝내고 정착 생활로 돌아갈 때다. 먼 옛날에 우리 선조가 그랬듯이.

책을 덮고, 저자가 직접 그린 (재주가 많기도 하지!) 아름다운 스케치들로 구성된 표지 그림을 새삼스럽게 뜯어본다. 그 정경들에 숨은 오래된 이야기를 끌어내어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는 과학자들의 열정을 생각해본다. 비단 화석을 다루는 고인류학과 유물을 다루는 고고학만 있는 게 아니다. 아마도 그 어떤 요인보다 중요한 요소였을 과거의 기후를 연구하는 고기후학, 고고학의 총아로 떠오른 유전학, 진화 계통 이해의 실마리가 되어주는 언어학도 있다.

저자는 해부학자인지라 석기의 미묘한 형태 변화와 연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보면서 '석기 연구를 안 하길 정말 잘했다'며 혀를 내두르지만, 우리가 보기엔 손바닥만 한 머리뼈에서 언어 능력의 유무까지 추리해내는 사람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우리의 기원을 찾아가는 과거로의 그 여행은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가 했던 여행만큼이나 도전적이고 근사하다. 어쩌면 그 여행은 이제 겨우 첫 발을 뗀 정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졌던 선입견들은 몽땅 사라졌다. 고고학은 이렇게 생생하고, 엄밀하고, 새로운 학문이었다.

P.S.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유전자 교류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는 2010년에 나왔는데, 역자도 지적해둔 그 내용에 대해서 더 알려면 <과학동아> 2011년 3월호의 네안데르탈인 특집을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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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져라"

2007년 미국 예일 대학 학력을 위조하고 성곡미술관 공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재판장에 섰던 여인은 재판 중에 그의 변호사로부터 이런 메모를 건네받았다. 여인은 말한다. "날보고 재판 중에 쓰러지는 쇼를 하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책 <4001>(사월의책 펴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당시 변호사가 주문한 쇼는 할 수 없었지만, 이 여인은 4년 뒤 더 크고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위의 재판 과정들을 포함해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은밀한 연애담, 자신에게 지분댄 유력자들에 대한 비난, 베일에 가려진 외할머니와의 추억 등 솔깃한 내용들로 채워진 400여 쪽의 기록과 함께다.

신정아. 그는 의도 했든 안 했든 이 책을 둘러싼 스펙터클 속에서 '비련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오랜 시간 재판을 해오면서 진실과 거짓이란 법의 잣대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부풀린 이야기를 바로잡고 싶었다"며 "한번쯤은 신정아의 이야기도 들어달라고 조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이들은 '환호' 혹은 '저주'로 답하고 있다.

흥행의 증거, '말'

이 쇼는 현재 절찬 흥행중이다. 1일 한국출판인회의가 교보문과와 예스24 등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 9곳에서 조사한 3월 다섯째 주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 따르면 <4001>은 8주 연속 1위를 지켰던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 펴냄)를 밀어내고 1위 자리에 올랐다. 출판계에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1쇄를 5만 부나 찍었으며 출간 열흘 만에 10만 부 이상이 시장에 깔렸다.


▲ <4001>(신정아 지음, 사월의책 펴냄). ⓒ사월의책

그러나 '책이 잘 팔린다'는 것은 흥행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신정아 쇼의 파급력은 책을 둘러싼 격렬한 반응에 있다. 언론과 코멘테이터들, 인터넷 댓글이 신정아 쇼를 부추기는 진짜 원동력이다. 문화평론가 진중권, 작가 공지영 등 명사들은 물론이고 각 언론사 논설위원들이 신정아에 대해 한 번 씩 얘기했으며, 이와 관련한 기사들은 수백 건에 이른다.

이러한 가운데 '프레시안 books'가 <4001>을 둘러 싼 논란의 '막차'에 올라 탄 이유는 신정아에 대한 평가를 '종결'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어느 한 쪽 편에 서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신정아가 이미 검찰이 조사를 끝내 놓은 사건을 '신정아 버전'으로 다시 썼듯, 저마다 다른 입장에서 신정아란 인물과 <4001>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문제적 인물의 폭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몇 가지 시선들을 추적해 보았다. 출간 열흘, 사람들은 신정아를 어떻게 말했나.

시선 1 : '뻔뻔한' 작태 뒤에 '음모'가 있다!

대부분의 언론 보도에선 신정아에 대한 적대감이 드러난다. 이미 4년 전 학력 위조 건으로 세간을 속인 경력이 있는 만큼, 이제 와 무슨 말을 하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정운찬 전 총리와 전 <조선일보> C 기자 등을 자신에게 치근댄 남성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은, 당사자들과 가족들에게 명예 훼손이라는 지적도 잇따랐다.

무엇보다 명백한 잘못으로 드러난 학력 위조 건에 대해 반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됐다. 이 부분에 대해 <4001>에서 신 씨는 "박사 학위 논문을 대필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지만, 자신은 진짜 예일 대학의 학위인 줄 알았다"며 "자신 역시 피해자"라는 입장으로 일관한다. 이렇듯 떳떳하지 못한 입장에 서 있는 그가 사건을 다시 들고 나오자 '뻔뻔하다'는 평가와 함께, 정치적 음모설도 제기됐다.

한 언론의 정치부는 신정아 씨가 정운찬 전 총리를 비롯해 정치권 안팎의 인사들을 실명·이니셜로 등장시킨 것을 놓고 배후에 정치적인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바탕으로 취재를 한 모양이다. <4001>을 낸 출판사 대표가 이광재 전 강원도 지사 등 야권 인사와 친분이 있으며, 4·27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야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책을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사월의책 안희곤 대표는 "이광재 전 지사와는 사적으로 알지 못한다"며 황당해 했다. 이 언론의 시나리오는 굳이 그의 해명을 곁들이지 않더라도 다소 '황당해' 보인다. 사실 야권이나 전 정권의 유력 인사는 오히려 '신정아'와 엮이지 않으려는 몸짓을 보였다.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23일 자신의 블로그에서 신 씨가 책 속에서 소개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부인했다. 신 씨는 노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기자회견 때마다 의견을 물었으며, "대변인을 해 봐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썼다. 이에 양 전 비서관은 "터무니없는 얘기", "소설 같은 얘기"라 일침을 놨다.

이런 정치적 음모론은 한국 사회의 대부분의 사안에 대한 의견이 '보수/진보나 '여/야'로 뚜렷이 갈리는 관행의 틀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다. 그러나 최근의 지난 열흘간의 신정아의 '폭로'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성향이나 당적과는 무관한 듯 보인다. 오히려 정치권, 언론 전체가 신 씨에 대해서는 드물게 합심했다.

이것은 <4001>이 한 개인의 사생활을 폭로하고 있지만, 더 큰 효과는 그들이 속한 세계 즉 '엘리트 집단'을 묘사하는 데서 오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출판사 대표는 "공직자, 기자, 큐레이터 등 잘 나가는 사람들, 말 깨나 한다는 사람들의 세계도 '아랫도리는 똑같다'고 드러내는 데 이 책의 대중적 활력이 있다"고 평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시선 2 : 근엄한 세태 비평, '너희들의' 관음증

지난 열흘 간 언론의 사설, 칼럼 란은 <4001>을 단골 메뉴로 다뤘다. 물론 우호적이지 않다. 특히 <4001> 속에 자사 기자가 거론된 언론이라면 적대감이 더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다수의 논설위원은 '실명을 거론한 신정아의 비난이 사회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고, 단지 개인적인 보복일 따름'이라고 근엄하게 판정했다.

언론이 주로 우려하는 행위는 매력 있는 여성이 사회적 명사들에게 접근해 성적 관계를 가진 뒤 배신을 때리고 황색 신문에 폭로하거나 책으로 출판해 수익금을 챙기는 행태인 '키스 앤드 텔'(<동아일보>)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신 씨의 행태가 부도덕하며, 이것이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도 "신정아 사건의 최대 피해자일 젊은 20~30대들이 지금 보복용 일기 쓰는 법과 신정아 마케팅을 학습하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과연 <4001>의 히트가 우리 사회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미칠까. 익명의 대중들은 그의 '폭로 수법'을 학습할까. 언론의 비평 속에서 도덕적 평가가 두드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 교수는 "이러한 논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신정아의 책이 사회에 끼칠 악영향은 크지만, '나'는 그 영향권 바깥에 있다'고 전제하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들의 논설 속에서 <4001>은 그것에 대해 쓰는 사람 본인(기자·논설위원)을 제외한 모든 이를 바보로 만든다"고 덧붙였다. 언론 지면에 실린 근심 어린 칼럼 속에서, 이미 그 책에 대해서 평가할 자격이 있는 필자(기자·논설위원)를 제외한 '잠재 독자'들은 책에서 드러난 명사들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어 하는 '가련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압축하는 열쇳말은 '관음증'이다. <중앙일보>의 칼럼은 "화제의 책은 할 수 없이 봐야 하는 게 기자의 숙명이다"라고 자신을 일반적인 독자와 구분시키고 나서, "신 씨의 책을 통해 우리 사회의 잠재적 관음증은 충분히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 속에서는 신 씨나 이 책의 잠재 독자들은 은밀한 부분을 '내걸고', '낚이는' 짝패다.

이렇게 신정아 현상을 규정하는 순간 언론은 '어떤 사태에서 초월해 있는 위치'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저술가 김영종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선민의식'이라는 말로 이를 설명했다. (☞관련 기사 : 신정아='고급 창녀'…<조선일보>가 그런 말할 자격 있나?)

그러나 신정아와 공직자·기자들이 얽힌 이야기를 엿보고 싶은 욕망을 생산한 것은 바로 4년 전 언론의 과열 보도였다는 점에서 이 '관음증' 지적의 역설이 있다. 신 씨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어 하는 대중의 욕구를 부추기는 데 가장 공이 큰 쪽은, 예컨대 '신정아가 병실로 새우깡과 짱구를 갖다 달라고 했다'는 내용을 한 면 전체에 실을 정도로 그를 '정치적 셀러브리티'로 띄웠던 언론(<중앙일보>)일 터이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언론은 신정아 현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 이름이 포털 사이트에서 가져다주는 짭짤한 수익을 외면하지 못하고 있다. <4001>에 지면을 할애할 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기자·논설위원이 신정아를 소재로 칼럼을 쓰면서, 신정아의 책에 끌리는 대중을 비판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신정아 역시 마찬가지로 4년 전 당시 자신을 "꽃뱀", "명품 중독녀"로 묘사했던 '적수' 언론에 또 한 번 기대고 있다. 책을 홍보하기 위해 여러 언론사를 불러 모아 놓고 기자 간담회를 열었고, "(언론 보도가) 내 진심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곤혹스럽다"면서 다시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가졌다.

신정아와 언론의 공생 관계에 대해 한 언론계 인사는 "신정아 논란의 핵심은 인정 투쟁이다"라고 설명했다. 4년 전 검찰은 조서 상으로 신정아의 죄와 형량을 판단했고, 언론은 거기에 불륜을 저지른 사실과 평소 행실에 대한 평가 등 도덕적인 판단을 덧붙여 '신정아 사건'과 '개인 신정아'를 규정했다.

그런데 4년 뒤, 출판이라는 독자적인 언로를 획득한 신정아가 사건을 자신의 위치에서 재규정하려는 시도를 벌였고, 이에 화살을 맞은 신문사들이 다시 말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4001>을 띄워주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을 문제 삼기 위해 반드시 언급해야만 하는 중요한 딜레마가 여기서 발생한다.

시선 3 : 폭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의도와는 달리 <4001>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해, 가장 곤혹을 치른 이는 작가 공지영일 것이다. 그는 24일 자신의 트위터에 "난 취재 대신 비문학인의 수필을 거의 다 읽는다"며 "신정아의 책을 읽는데 생각보다 지루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기자들이 호들갑 떨며 전해주는 이슈들만 찾아보는 것이 더 나을 듯"이라면서 대필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책은 물론이고 이러한 공지영의 반응까지 연예 뉴스 면에 연일 도배됐다. 신정아와 공지영이 나란히 연관 검색어에 올랐다. 공지영은 불쾌감을 토로했고, 그마저도 기사감이 됐다. 첫 날은 정운찬과 전 <조선일보> C 기자의 스캔들에 관심이 쏠리고, 다음 날은 공지영의 코멘트가 검색어 상위에 올랐다. 명사의 영락없는 '엔터테인먼트 쇼'였다.

무엇보다 <4001> 자체를 진위 여부보다 '재미'로 소비하는 독자들이 늘었다. 지난 27일 책을 읽었다는 30대 여성 심지연(가명) 씨는 "이 책의 흥행 요소는 100% 믿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즉 오히려 '부담 없는' 자세에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신 씨를 평가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다른 소설을 읽는 것처럼 일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구입했다"고 덧붙였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 관계자에 따르면 <4001>을 가장 많이 구입하는 독자층은 30~40대 여성이다. 이들이 무려 43%를 차지한다. 출간 초기 일시적으로 40~50대 남성의 구매 비율이 높았으나 서서히 '30~40대 여성'이 주 구매층으로 굳어지고 있다. 이들은 사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여성지에 익숙한 독자들이다.

이 독자는 "<4001>이 여성지처럼 읽히는 이유는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해당 사건의 '신정아 버전'으로 받아들일 뿐 그 이상의 무게를 두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앞서 문화평론가 진중권도 트위터에 "그 책에 실린 내용들이 실체적 부분에서는 대체로 '사실'일 거라고 믿는다. 다만, 거기엔 신정아 자신의 '해석'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 같은 일을 다르게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라쇼몽 효과'를 지적한 것이다.

시사평론가 민동기 역시 이 점에 주목했다. "신 씨의 주장은 100% 검증되지는 않은 것이겠지만, 4년 전 신정아 파문이 발생하고 나서 우리가 지금까지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사건의 일부분으로서 그의 수필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다. 민동기는 "다만 이런 관점은 '신 씨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동정표와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경희대학교 교수 이택광은 이러한 경향 때문에 신정아의 폭로 행위가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26일 <경향신문> 칼럼에서 "이제 신정아 씨의 '고백'은 진실의 문제를 떠나서 엔터테인먼트 차원으로 넘어갔다"면서 "그 퍼포먼스를 목도하는 대중들은 일시적으로 재미있을 수 있겠지만, 그 행위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은 원천적으로 봉쇄당한다"고 말했다.

<4001>이 신정아가 파워엘리트의 세계를 '내부 고발'하는 형식을 띄지만, "미지의 '파워엘리트 집단'이 대다수 '국민'을 억압하고 있다는 가설"만을 충족시킬 뿐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는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정아의 폭로가 결국 저자에게는 명예가 아닌 '멍에'로 남는다는 지적도 있다. <4001>이 아무리 많은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선정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 것은 저자이기 때문이다. <한겨레21>에 '오마이섹스'를 연재했던 칼럼니스트 김소희는 "저자 본인이 세간에 비판받은 생존 방식을 파괴하는 방식이 아니라, 또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분명 더 많은 내용이 있었을 텐데 왜 정운찬 전 총리나 현직 의원 등 유력자를 가장 크게 언급했겠나"라면서 "'이 정도의 급이 되는 남자들이 내게 치근댔다'는 것으로 제 몸값을 환기시키려는 시도로 보여 연민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큐레이터 시절 화장실에 못 갈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던데, 정말 그런 여성이었다면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전의 프레임을 걷어버리고 폭로에 나설 수 있지 않았겠느냐"라고 덧붙였다.

시선 4 : 폭로의 효과, 분명히 있다

이와는 반대로 <4001>이 정치적인 의미와 활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앞서 언급한 출판사 대표는 <4001>이 소위 '엘리트 계층'의 결코 근엄하지 않은 사생활을 까발리면서, 폭로보다는 '풍자'와 '야유'라는 효과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진지하고 무게 있는 책이 아니라, 지배 계급을 야유하는 책이 대중에게 활력을 주지 않았는가.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무명의 여성이 자신이 겪은 남자들과 그들이 속한 세계를 얘기했다면 책이 팔리지 않았겠지만, 소위 고소득층·지식인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색다른 포르노그래피 같은 전복적인 쾌감을 주는 것 같다"고 <4001>의 소비 행태를 분석했다.

온라인 <이프> 편집위원 정박미경은 언론에 부정적으로만 평가됐던 '여성'이 적극적으로 자기변호를 한다는 데 방점을 찍고 신정아의 <4001>을 옹호했다. 그는 "지금까지 언론에 '마녀사냥' 당하고 낙인찍히고 사라졌던 여성이 돌아와서 지도층 인사에 치명타를 가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사회의) 대단한 변화"라고 말했다.

한편, 시사평론가 민동기는 폭로라는 형태 자체에 주목했다. "(저급으로 여겨졌던) 폭로 수기가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이 다른 출판인을 힘 빠지게 만들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필요한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폭로라는 형식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부각됐지만, 공적인 측면이 담보되었다면 그렇게 나쁘게 바라볼 문제만은 아니며, 나아가 진실에 다가가는 통로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작년 이맘때 출판가의 화제였던 변호사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 역시 일종의 폭로라는 형식을 빌린 사회 고발서 아니었던가?

서구, 특히 미국 출판계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폭로 수기'가 터져 나온다. 따라서 독자들도 이런 형태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다. 정치권이든 연예계든 유명세를 타면 책을 내는 풍경은 흔하다. 대표적인 예가 백악관 스캔들의 주인공 모니카 르윈스키다. 그는 <모니카의 이야기>로 수십 만 달러 수익을 올린 바 있다.

신정아의 폭로로 인해 미국 사회의 선정성을 닮아 갈 것이라고 우려하는 시선이 위에서 언급한 세태비평가·언론의 입장이라면, 일부는 이 책을 공적인 울림을 가진 내부고발인 <삼성을 생각한다>와 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4001> 폭로의 질이 르윈스키에 가깝냐 김용철에 가깝냐 하는 문제라기보다, <4001>이 결국 어떤 방향으로 언론·출판계에 물팔매 효과를 남길지, 어떤 무늬를 남길지와 더 깊은 연관을 갖는다.

신정아의 기록을 '쓰레기'나 질 낮은 무엇으로 보고, 그의 등장을 '노이즈 마케팅'으로 보는 사람에게 이번 신드롬은 출판 질 저하의 신호탄이지만,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 가치가 있다고 보는 사람에게는 '틈새 시장'의 발견이다. 이것은 <4001>에 대한 코멘트를 요청받은 이들의 즉각적인 반응에서도 드러난다.

한 출판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는 "그런 쓰레기 같은 것에 대해 말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 지면 낭비하지 말라"고 꾸짖었지만, 성공회대학교 교수 김민웅은 "파워엘리트들이 어떻게 만나고 연결되는지 알 수 있는 자료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두 관점의 대비를 정확히 보여주는 풍경이다.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감상을 들려주는 책은 흔치 않다. 게다가 그 시선들은 저마다 달라 하나의 다발로 묶어내기 어렵다. 인터뷰이 가운데서는 이 책을 들춰보지 않고도 이야기를 보탤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이 책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시선이 고백됐기 때문이다.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조르고 싶었다"는 <4001>의 서문은 저자 자신이 다시 스펙터클의 중심에 놓여도 좋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이제 그에게도 400여 쪽에 이르는 말의 통로 속에서 사건을 규정한 '권력'이 생긴 만큼, 또 다른 시선들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다만 시선을 던지는 이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 시선을 말로 포착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책임은 특히 더 무거울 것이다.

"나는 시선이다. 나는 교차하는 시선이며, 시선의 교차점이다. 나는 나의 시선이다. 내 시선은 나를 대상에 투사한다. 시선의 투사는 어떤 정도로든 대상에 대한 폭력이다. 시선은 그것이 가 닿는 부분을 분리하여 해석하고 전유함으로써 대상/타자의 꿈틀거림을 누르고 온전함을 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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