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 침체에 빠진 세계 경제를 구하기 위해 경제학자 케인스는 '절약의 역설'을 지적하며 정부가 유효수요 창출을 위해 적극적인 재정 지출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지갑을 닫고 은행에 저축하는 소비자들의 행동이 오히려 경제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런 때일수록 정부가 나서서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개인적 차원에서 미래를 대비하여 돈을 아끼고 저축하는 미덕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경기를 악화시키는 악덕으로 작용하는 역설을 지적한 케인스의 메시지는 경제 현상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준다.
케인스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로버트 프랭크 역시 <사치 열병>(이한 옮김, 미지북스 펴냄)에서 개인과 전체의 합리성 사이에 생기는 간극에 대해 의미 있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그는 케인스와 정반대 방향에서 같은 문제 제기를 한다. '소비의 역설'이라고 할까, 개인적 차원에서 원하는 만큼 소비를 늘리는 것은 미덕이 될 수 있으나 사회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효용 극대화를 방해하는 악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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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치열병>(로버트 프랭크 지음, 이한 옮김, 미지북스 펴냄). ⓒ미지북스 |
현대 사회의 소비 패턴은 '필요(need)'한 것이 아닌 '원하는(want)' 것을 구매하려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전체 소비에서 사치가 차지하는 부분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더욱이 사람들은 단순히 스스로 원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인 지위와 서열을 돋보이기 위한 소비에 열중한다.
이와 같은 소비 패턴은 만족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상대적인 경쟁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끝이 있을 수 없다. 이는 필요가 아닌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려는 수단으로 전락한 소비를 나타내는 개념인 소스타인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와 특정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특정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의 경향을 나타낸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파노플리 효과(effect de panoplie)'와 같은 맥락이다.
낭비적 소비는 사실상 현대 소비 시장을 점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식이나 생일날 줘야 할 선물에서부터 손목시계, 가전제품, 자동차, 주택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더욱이 사치품에 대한 소비는 그것을 향유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자뿐 아니라 중위 소득자, 심지어는 하위 소득자에게도 바이러스처럼 침투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번쩍이는 광채를 반사하는 상품이 TV 광고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가고 대중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지 않고 그것에 열광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처럼 사치재의 소비가 일상화된 것은, 고소득자의 소득을 극적으로 증가시키는 반면 못사는 사람은 더욱 못살게 만드는 시스템이 이미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시간이 갈수록 그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저자가 다른 책에서 설명한 바 있는 '승자 독식 시장(winner takes all market)'이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조그만 성취의 차이나 엄청난 경제적 보상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시장(승자 독식 시장)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이 발달하고 네트워크가 확대됨에 따라 경쟁력 있는 상품의 파괴력과 도달할 수 있는 범위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사치재를 소비할 수 있는 고소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사치재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고, 이들의 영향력도 더욱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이런 종류의 비난은 기껏해야 가난한 자의 감정적인 질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돈을 가진 사람이 자기가 번 돈으로 무엇을 사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비는 이념적인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도덕적 중립 지대에 속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근간이 아니었던가?
이런 당연한 질문에 대해 저자는 우리의 안일한 통념을 깨고 '아니오'라고 말한다. 생산성과 소득 수준은 떨어져 가는데, 사치재 소비만 계속 늘고 있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도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사치 소비에 쓰이는 자원을 다른 곳에 쓴다면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대담하게 주장한다.
사람들이 특정 복지 수준을 넘어서면 물질적 재화 소비가 늘어난다 해도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점점 줄어든다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근거로 부자들의 소비가 사회적 효용의 최적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더욱이 사회적 효용을 증진시키지 못하는 소비의 기회비용은 공공 서비스 질 악화, 환경오염, 불평등 심화 등 실로 막대하다. 개인적 차원에서도 사치는 급증하는 채무로 소비자를 파산에 처하게 할 뿐 아니라, 이를 충당하기 위한 노동시간을 과도하게 증가시켜 삶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면 이런 폐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사회 전반의 효용이 증가되는 방식의 소비 패턴을 되찾아야 하며,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현실화하는 방안으로 많이 소비하는 사람에게 세금을 더 물리고 적게 소비하는 사람에게는 덜 물리는 누진소비세를 제안한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그로 인한 폐해가 만연한 지금,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저자의 열망과 문제의식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이들에게는 도전적인 책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면도 있다.
저자는 부자들의 사치를 억제하면서도 사회적 효용을 높일 수 있는 제도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해 보인다. 부자들의 자발적인 절제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저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게끔 할 수 있는 인센티브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보해야 하는 주체와 혜택을 받는 주체가 다른 상황에서 이들의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은 경제의 영역을 넘어서 훨씬 풀기 어려운 정치의 숙제다.
또 부자가 과시적 소비를 통해 얻는 만족은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종류인 반면, 친구를 사귀거나 여가 시간을 즐기는 것과 같은 비과시적 소비는 보다 오래 지속된다는 저자의 이분법 역시 현실성이 부족해 보인다. 현실에서 과시적 소비가 주는 희열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승자 독식 시장이 확장될수록 커진다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 판단일 것이다. 과시적 소비가 가진 매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부자들이 너무나 쉽게 과시적 소비를 포기할 수 있다는 안이한 판단을 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 연장선상에서 저자가 해법으로 제시한 누진소비세 역시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과시적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 투자를 확대하자는 단순 논리 앞에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국경을 넘나드는 교역과 소비가 보편화된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특정 국가의 세제 개편만으로 사치의 소비 습관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각국이 처한 조세 및 재정 현실이 다른 상황에서 누진소비세 도입을 위한 국제 공조를 꿈꾸는 것도 너무나 요원해 보인다.
현재로서는 점점 '승자 독식 사회'로 치닫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시적 소비가 갖는 해약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 정도로 이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게 적절할 듯하다.